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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뜸하던 마음의 우울이 봄의 진행과 함께 새싹이라도 돋는 양 움찔거리는 중이다. 황사비가 내리던 날 새벽 낯선 곳에서 잠이 깨어 미성숙한 영혼을 질책할 사이도 없이 무선으로 조종되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도 비어져나온 우울의 한 방향일 터이다. 그렇게 무단으로 건너는 횡단보도처럼 봄을 건너 뛰고 지나쳐온 간이역을 추억하지 못하는 종착역과도 같은 여름을 맞이하겠지...
함정임을 읽다가 불현듯 감상에 사로잡힌다. 함정임의 글에 드리워진 그늘을 발견하고 속상해 하던 나는, 이제 함정임의 글을 읽다말고 내게 드리워진 그늘을 발견하고 속상해한다. 함정임을 미치게 하는 많은 것들을 주섬주섬 읽으며, 미치게 하는 것들 가지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활자나 뒤적거리고 있는 나의 일상을 향해 퉤퉤, 우울한 침뱉기나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여하튼...
산문집은 모두 네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챕터 <브라보, 노마드 라이프!>는 일종의 여행 산문이다. 비틀즈의 도시 리버풀, 기네스를 추억하게 하는 더블린을 비롯해 뉴욕과 암스테르담 등 스스로를 노마드라고 지칭하는 작가가 떠돌았던 여행지들에 대한 추억이 실려 있다.
“... 나는 한곳에 정착하기보다는 변화를 꾀하는 노마드(유목민)적 인간,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21세기형 노마드라기보다, 그보다 한 템포, 아니 반 발짝 뒤에 선, 이방인의 시조 보들레르의 19세기와 디지털 첨단 통신 기기로 무장한 21세기의 중간에 놓인 ‘로맨틱 노마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챕터 <뜨거움에 관하여>는 각종 예술품들을 향한 작가의 딜레탕트적인 관심을 뽐내는 예술 산문이다. 작가는 미술과 사진, 연극과 영화를 가리지 않는 자신의 전방위적인 관심을 글로 풀어내는가 하면 덧붙여 예술 작품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기도 한다.
“감탄하는 것도 능력이다. 반응하고, 표현하는 것도 능력이다... 우리는 반응하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대를 향해, 아니 세상을 향해, 브라보! 외치는 일이 어쩌면 그동안의 삶을 뒤집는 일만큼이나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일상보다 강력한 것은 없다. 일과 옷과 가구와 마누라, 전쟁의 공포까지도 한 입에 꿀꺽 삼키는 것이 일상, 습관의 힘이라고 했다. 예술은 그 막강한 일상, 습관의 벽에 반하는 유일한 힘이다. 불어오는 봄바람 속에 내 눈의 예술, 내 삶의 미학을 돌아볼 일이다...”
세 번째 챕터인 <내 공간 속 미지 여행>은 서평에 가까운 단상들의 모음이다. 스스로를 노마드적 인간이라 칭하며 밖으로 밖으로 향하던 작가는, 바깥을 향한 여행만큼이나 자신의 안으로 안으로 향하는 여행의 중요성도 있음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부를 향한 여행을 추동하고 그 여행에 동반하는 반려자처럼 좋은 글들과 좋은 작가와 좋은 책이 있음을 우리에게 말한다.
“문학의 본질은 뒤돌아보는 것, 그러니까 반성과 그 울림에 있다. 아들은 새벽 눈길 아들을 버스에 태워 떠나보내고 어머니 홀로 걸어와야 했던 눈길, 그 처연한 심정은 차마 몰랐던 것. 그러나 작품은, 아니 삶은 위대해서 저절로 나머지 이야기를 잇고야 마는 것. 그 끝에 느낀 아들의 부끄러움, 거기에 문학이 깃들어 있다...”
네 번째 챕터인 <인생은 아름다워!>는 생활 단상이다. 스스로 자신의 일상을 들추어 보이면서 작가는 살아볼만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챕터에서 느껴지던 기름기가 보이지 않고, 깔끔한 샐러드처럼 사각사각 씹히는 맛이 있는 글들이 실려 있어 가장 마음에 드는 챕터이다.
“... 진정한 소설 수업은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강의는 자극을 위한 만남일 뿐이다. 진정한 소설은 강의실을 떠나 골방에서 이루어지고 써지는 것이다. 세상을 통과한 골방으로의 인도, 소설가 선생의 역할은 바로 거기에 있다...”
글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내게, 세상을 살아가는 일보다 몇 수 아래의 일이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더디면 당연히 글을 읽거나 글을 쓰는 일도 더디게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스스로를 추동하는 힘은 언제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그러니 지금의 더딘 속도를, 작동 불능의 마음을, 감언이설로 가득한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또한 내가 만들어내야 하는 것일 터... 봄을 맞이하여 씨 뿌리는 농부들의 마음으로, 일상 안에서도 노마드적인 생활 양태를 추구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꾸준히 전진하는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