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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과 서펑]이순원의 소설집 <첫눈>
첫눈이 내렸다. 모처럼 내 마음밭에 내리는 푸근한 첫눈을 맞았다. 이순원의 소설집 <첫눈>에는 표제작인 첫눈을 포함하여 총7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이순원은 이 소설집을 통해 사랑이 메말라가고 사랑을 빼앗기고 사는 우리들에게 바로 저 첫눈 같은 사랑, 첫눈 같은 인연, 첫눈 같은 설렘과 운명을 이야기 한다. 소설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늦가을 강릉 가다 보면 진부에서부터 대관령까지 ‘첫눈조심’이라고 쓴 임시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잖아……. 첫눈이라는 게 그렇잖아. 그냥 봐선 온 지도 안 온 지도 잘 모르고, 그렇지만 사람 마음 들뜨게 하고, 길은 미끄럽고……. 그런 뜻이라고 말하면, 정말 그런 표지판이 있다면 그건 시(詩)지 교통 표지판이 아니라는 거야.” 그래, 찍으면 발자국 자리도 안 나게 내렸는지 안 내렸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는 것, 혹은 그렇게 왔다 가는 사람, 그 모든 것이 첫눈인 것이었다.』 언제 왔는지 혹은 온 것조차 모르면서 또는 온 것을 잊고 산 각박한 세상의 인심에게 작가는 조용한 음성으로 그 인연과 사랑의 소중함을 들려준다. 각기 다른 이야기들처럼 보이는 일곱 편의 소설은,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같은 맥락으로 흐른다. 그것은 인간 존엄에 대한 성찰이요, 그 인간들 사이를 비로소 인간답게 이어주는 인연과 사랑의 소중함이다. 또한 소설들 속에는 ‘첫눈’이 상징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의 상징과 은유가 숨어 있다. 필자가 주목하는 중요한 낱말 열쇠는 바로 ‘거북이’와 ‘고래’다. 같은 맥락으로 흐르기 혹은 같은 범주로 묶기 맨 앞의 자리를 차지한 <멀리 있는 사람>과 여섯 번째의 소설 <거미의 집>은 둘 다 가족 간의 사랑에 대한 되새김질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닮았다. 그것이 핏줄로 엮인 가족이든, 어떤 현실적인 목적에 의해 이루어진 인위적인 혈연관계이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모티브는 어미가 새끼를 위해 바치는 지성이며 희생적인 사랑이다. 앞 소설의 화자에게는 낳아준 어미 말고 ‘명(命) 어머니’라는 또 한 분의 어머니가 있다. 낳자마자 죽어가는 목숨이 흔하던 시절에 손자의 명을 걱정한 할머니가 맺어준 인연이다. 화자는 그 명 어머니의 임종을 맞아 자신의 삶 중에 고비와 간난(艱難)이 있을 때마다 정작 그를 지켜준 것은 바로 그 명 어머니의 지성이었음을 깨닫는다. 명 어머니에게 그는 그의 할머니가 동짓날이면 보내주던 쌀가마니가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세상을 떠난 큰아들의 분신이었고 살아 있는 작은 아들보다도 더 귀한 아들이었다. 그가 허리 수술을 받으러 수술실에 들어가던 날, 명 어머니는 그에게 말한다. “이제 저 안에 가면 누가 너한테 새 허리를 내줄 거다. 이제 니 거니까 단단히 잘 받아서 오너라.” 그에 대한 사랑이 오죽 했으면 명 어머니의 딸은 그 어미를 향해 다음과 같이 대들며 따진다. “…… 제 속으로 낳은 새끼 운도 다 남의 집 새끼 퍼줬던 거 아니냐고. 영수가 왜 하는 일마다 안 풀리고 저러는데? 한 집에 들어오는 복이라는 것도 그래. 남의 배 속에 든 거우새끼처럼 위에서 먼저 먹을 거 다 받아먹어 버리니 그게 아래로 내려갈 게 있겠냐고.” 명 어머니의 사랑은 어쩌면 그를 낳아준 어머니의 사랑보다 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자식들은 잘나거나 못나거나 성장해간다. <멀리 있는 사람>의 화자가 어미의 희생과 사랑을 깨달으며 긍정적 세계로 나아간다면, <거미의 집>의 자식들은 그들을 길러주고 여태껏 자신들을 위해 살아온 어미를 내버리기 불편한 가구쯤으로 생각한다. 얼른 죽어주면 고마운 존재일 따름이다. 어미는 그런 자식들을 원망하기보다는 스스로 거미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한이 없을 수는 없다. 그녀의 일생은 참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누가 뭐래도 얼룩진 삶의 부정성이다. “…… 그 거미 몸에 새끼들이 바글바글할 거다. 새끼들이 제 어미 몸을 그래 껍질만 남기고 파먹고 살거든. 그때 어머니는 말했다. 거미는 젖이 없으니까. 엄마도 젖이 없다고 했잖아” <라인 강가에서>와 <카프카의 여인>은 시대의 한복판에서 이데올로기라는 껍데기가 어떻게 존재의 삶을 규정하고 농단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자의 주인공은 화자의 당숙인 선구 아저씨다. 그는 짧은 공무원 시절을 뒤로 하고 자원하여 독일로 떠난 파독광부다. 그런데 그는 큰집인 자신들의 아버지는 물론 그의 누이에게까지 연락을 끊고 산다. 제 어머니의 장례에도 오지 않은 불효막심 배은망덕한 인간이다. 형들은 그런 아저씨를 욕하며 분을 참지 못하지만 정작 아버지는 무심할 뿐이다. 아니 오히려 그 부모의 봉분을 제 부모의 것보다 더욱 정성을 들여 손질해주고 화자에게 독일 출장길에 그 아저씨를 찾았으면 바란다. 핏줄의 자연스런 이끌림인 것인가. 화자는 그 비밀을 알고 있다. 그 아저씨에게는 동란 당시 의용군에 입대하여 실종된 형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도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이념의 광기가 미친 듯 춤추는 세상에서 사상범의 가족이란 죽은 듯이 숨 쉬며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저쪽에서는 싼 값에 팔려온 광부요 미개한 동양인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쪽에서는 북으로 간 사상범을 형으로 둔 불온분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독일인도 온전한 한국인도 될 수 없는, 그렇다고 북조선의 인민도 될 수 없는 운명의 자식이었다. 그에게 허락된 삶이란 ‘경계인’으로서의 그것뿐이었다. “여기 와서도 사람들과 잘 안 어울리고, 얘길 들으니 한때 서울에서 경계인이니 뭐니 하는 말을 많이 썼던 것 같은 데, 아무튼 그 때 한국에 대해서도 그렇고 여기 안에 같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이선구 씨야 말로 그런 이념의 경계인이 아니라,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이다, 뭘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는 경계도 없는 경계인 같았어요.” 그가 알게 모르게 겪은 이념의 광기와 그것이 가둔 정신의 감옥, 현실의 성벽이 얼마나 강고했으면 자유로워진 그 땅에서조차 무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렇게 겉돌며 ‘경계도 없는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을까. 아직까지도 그 운명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이국의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인생으로 살고 있는 것인지? <카프카의 여인>의 화자와 그 여인은 바로 선구 아저씨가 겪은 이념대립의 연장선상에 서있다. 화자는 우리가 ‘찌라시’라 흉보는 신문 같지 않은 신문사에서 칼럼을 쓰는 글 장사꾼이다. 물론 자신이 본래부터 그런 삶을 살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어찌 신문사의 밥을 먹다보니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이 어느 날 ‘벌레’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벌레’가 된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한 여자의 메일을 받고 나서다. ‘카프카의 여인 도라 디아만트 혹은 그레테’라는 그 여자는 그의 칼럼에 대하여, 그의 글에서 보이는 정파성과 권력에 봉사하는 이념의 경직성을 에둘러 비판한다. 그야말로 “벌레 같은 인간들의 벌레 같은” 악성 메일이겠거니 했던 그는 그녀의 벌레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는다. 정작 벌레인 것은 자신이었던 것이다. 화자는 앞 소설의 선구 아저씨가 처한 상황보다도 더 견고한 이념의 틀 속에 갇혀 산 것이 지금까지의 인생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모인 자리가, 또 모인 사람 개개인의 자리가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시월유신(十月維新)’을 ‘十月有信’이라 세뇌시키며 자신의 무지를 인정치 않던 중학시절의 공민 선생부터 마침 내일의 리더십으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어느 후보자에게 이르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그는 자신이 벌레가 된 것처럼 섬뜩해지고 그 벌레로 산 세월이 그저 부끄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더구나 그녀는 어느 일방을 편드는 기사와 논조가 불안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을 세상 구석으로 밀어내는 듯한 어떤 분위기의 완강함이 불안하다”고 했다. 그 말은 논조에 동화될 것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그 안의 폭력성이 무서운 불안을 야기시키는 원인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님들의 주장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이쪽에서 그쪽으로 바꾸어놓을까 봐 불안한 것이 아니라 그런 님들의 완강함이 때로는 우리의 생각과 판단이 상식에 기초할 때조차도 세상 구석으로 밀려나 있지 않으면 안 될 벌레들의 생각처럼 한없이 작아 보이게 한다는 것이지요.” 운명과 인연의 경계에서-거북이와 고래 <멀리 있는 사람>에서 화자의 친구는 해남 미황사의 거북이와 게 주춧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절의 주춧돌은 보통 연꽃무늬를 새긴 다른 절의 주춧돌과는 달리, 게와 거북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게와 그냥 거북이 아니라 자기의 운명을 바꿔보려고 이제 막 바다에서 뭍으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게와 거북”이다. 그것들은 바로 경계의 지점에 있는 것이다. 마치 이 소설들 속의 주인공들이 운명과 인연의 경계에 서있는 것처럼. “게와 거북이가 바다에서 뭍으로 막 빠져나오려고 할 때, 그래서 몸은 간신히 뻘 밖으로 나오고 다리는 아직 수렁 같은 뻘 속에 있어 그것을 빼내 이제 막 다른 한 세상의 삶을 시작해보려고 하는 찰나에, 쿵, 하고 절집의 기둥이 올려진 거야.” 막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는 순간에, 혹은 사랑과 이별의 갈림길에서, 또는 이쪽과 저쪽의 중간지점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저앉은 것이 어찌 게와 거북뿐이겠는가. 인간의 삶이란 바로 그 경계의 지점에서 늘 서성이고 선택의 기로에서 망설이다, 결국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아직은 뻘 속의 발을 빼지 못해 여전히 운명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고 거친 파도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선구 아저씨는 지금도 뭍과 물의 경계에서 정신의 무국적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고, <첫눈>의 남자와 여자는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사랑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 인연으로 끝나고 말아야 한다. 때문에 거북이가 또 등장하는 <푸른 모래의 시간> 속의 화자는 인연과 운명의 경계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길의 도처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 도처에” 그 답이 있다고 일러준다. 결국 운명이란 파고와 인연의 바람 속에서 그 키를 쥐고 나아가야할 몫은 고스란히 자신의 수고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자명하다. “누구에게나 그렇게 그의 인생 속에 푸른 모래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시간이 있는 법이다.” <첫눈>의 남자와 여자를 만나게 한 계기는 고래다. 그물에 걸려 죽은 고래를 보기 위해 남자는 출장길에 부둣가를 찾았고 그를 안내한 선생은 동료 교사인 여자를 소개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고래를 보지 못했다. 보지 못한 것,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오히려 더욱 큰 법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고래’를 이야기 했다. 남자는 자기만이 아니라 여자도 다른 남선생도 고래에 대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거북이가 뭍과 바다의 경계에 서있는 우리의 인생이라면, 고래는 뭍에서나 바다에서나 꼭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삶의 희망이자 꿈같은 것이다. 그것은 경이이며 곧 신화다. 그림책이며 TV며 숱하게 보아온 다른 동물들은 그저 짐승일 뿐이나 왜 그런지 몰라도 고래는 단순한 짐승이 아니다. 소설 <백경>의 애꾸눈 선장에게 고래는 그가 살아야 할 이유이듯이, 그들에게도 고래는 언젠가 만나야할 운명의 인연 같은 것이다. 여자는 남편과 신혼여행 길의 배 위에서 보았던 고래를 잊지 못한다. 남편은 말했다. “그래 그것은 우리 고래야……. 잘 지켜” 그러나 그 남편은 여자의 곁을 떠났다. <푸른 모래의 시간>의 주인공 아내가 다른 남자의 차에 동승하여 교통사고로 죽었듯, 여자의 남편은 먼 이국땅에서 다른 여자를 태우고 교통사고로 죽었다. 때문에 여자의 고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가 꿈을 버리지 않는 한에서만 신화 속의 고래로 살아 있을 뿐이다. 맨 처음 우리가 만난 첫눈처럼 인연은 왔다 갔지만 그것이 사랑인 것이지 고래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사랑인 것인지 여자는 모른다. 마찬가지로 14시간의 시차를 두고 살아야 하는 아내가 사랑인 것이지 고래 때문에 만난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지 남자 또한 모른다. 다만 고래를 그리워하는 마음밭에 첫눈이 내리고 있는 중이다. 내 마음의 들판에도 첫눈이 내리고 나는 그 첫눈 내리는 길을 떠난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 그 가는 길에서 우리는 또 다른 인연을 만날 것이고 늘 그랬듯이 언제 그 운명과 인연이 왔다 갔는지를 모른 채, 더 멀리 가고 나서야 <미안해요, 호 아저씨>의 화자처럼 중얼거릴 것이다. “미안하다, 베트남 처녀여. 정말 미안하고 미안합니다, 바레. 그리고 미안해요, 호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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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으로
맨 처음의 <멀리 있는 사람>은 우리에게 생소한 ‘명 어머니’의 존재와 그 관계를 통해 가족 간의 사랑, 핏줄을 넘어서는 깊은 애착을 되새김질 한다. (아프리카의 생명들이 피지도 못하고 쉽게 죽어가듯) 우리에게도 태어난 생명이 자주 명줄을 놓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의 화자는 그 시대에 태어났고 “홍역도 치러보지 못하고 죽는 목숨”이 염려된 그의 할머니는 화자에게 또 한 명의 ‘명 어머니’를 정해준다. 한 어미가 지키는 목숨보다 두 어미가 지키는 목숨이 더 질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 ‘명 어머니’가 유명을 달리하면서 화자는 그 어머니의 존재감과 비록 핏줄은 아니었을지언정 제 자식의 안위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한 사랑과 정성으로 자신을 지켜주었던 명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새삼 깨닫는다. 성장하면서 화자에게 닥친 여러 위기들을 지나 생각하면, 모두가 명 어머니의 자신에 대한 지성이 지키고 살펴준 인생인 것이다. 어쩌면 그를 낳아준 어미보다 더 큰 사랑과 깊은 애착으로 돌봐준 어미의 임종을 보러가는 길 위에서, 왜 친구가 미황사의 ‘거북이’와 ‘게’주춧돌을 말했는지 그 깊은 의미를 깨닫는다. <라인 강가에서>는 굴곡진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지금까지도 ‘경계인’으로 살아야 하는 화자의 당숙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사촌인 선구 아저씨는 화자의 어린 시절 공무원을 그만 두고 파독 광부를 자원하여 낯설고 물 설은 독일로 떠났다. 그 선구 아저씨는 제 어미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고, 그 후로 다녀갈 때도 화자의 집인 큰집에 들르지 않았다. 그 배은망덕한 처사에 화자의 형들은 분개하지만 정작 사촌형인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선구 아저씨의 누이는 왜 그런지 화자를 상주로 삼아 장례까지 대신 치러준 아버지에게 늘 적대적이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다. 형들은 그런 그녀가 밉기만 하고 아무리 독일에 있다지만 찾아오지도 서신왕래도 끊고 사는 그 아저씨가 야속하기만 하다. 단지 사촌형인 아버지만이 그런 배은망덕과 사람구실 못하는 당숙에게 무심하다. 비밀은 화자의 기억 속에 있다. 그 아저씨에게는 동란 당시 의용군에 입대해 실종된 형이 있었고, 그 때문에 불온한 사상범의 가족으로 숨죽여 살아야 했으며 광부가 되어 이 땅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 후로도, 그러나 그 아저씨는 아직까지도 경계인으로 살 수밖에 없는 세월을 겪는 중이다. <미안해요 호 아저씨>의 화자는 자유로 길가에서 이상스럽게 편치 않은 현수막 하나를 보게 된다. ‘초혼*재혼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초록과 빨간 글씨로 된 그 현수막을 보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의 동문 모임에 가게 된 화자는 실제 베트남 처녀와 결혼 수속을 밟는 중인 후배를 만나게 된다. 그날의 자리에서 그는 왜 그 현수막이 그리 편치 않은 심정으로 다가왔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저지르고 있는 일종의 인간 존엄에 대한 폭력 같은 것이다. 산업화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농촌은 피폐해지고, 그들의 초등학교가 폐교될 걱정을 해야 할 만큼 젊은이들은 농촌을 떠났다. 그러니 아이들이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농촌에 시집을 오려는 처자들이 없는 것도 젊은이들이 농촌을 떠난 중요한 원인이기도 한다. 그래서 결혼적령기를 놓친 늙다리 총각들은 연변에서, 그 부작용이 심해진 지금에는 베트남에서 그 나라의 처녀를 사 들여와야 한다. 마치 상품을 고르고 주문하고 수입해오듯이……. 베트남 인민의 저력과 그를 이끈 한 지도자 등을 아는 화자는 우연한 계기를 통해 우리들의 천민자본주의와 그 안에서 무심코 지내온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여인>은 신문사에서 칼럼을 쓰는 화자에게 답지한 한 독자의 메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된다. ‘카프카의 여인 도라 디아만트, 혹은 그레테’라는 닉네임의 독자는 메일 속에서 카프카의 ‘벌레’를 빌어 정권의 나팔수 노릇을 하는 화자를 에둘러 꾸짖는다. 화자의 생각에 “벌레 같은 인간들의 벌레 같은 글들일 것”이라 여겼던 그 글에는 자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신문답지 않은 신문사의 논조에 대한 엄한 꾸지람이 살아 꿈틀거린다. 반박하기에는 너무도 확연한 제 글의 정파성과, 같은 논조의 다른 두 신문사의 연합작전에도 흔들림 없이 시대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내일의 리더십을 보면서 화자는 스스로 부끄럽다. ‘벌레’의 그레고르 잠자의 누이인 그레테는 알겠는데, 대체 도라 디아만트는 누구일까? 다시 온 그녀의 메일에 의하면, 그녀는 불우한 카프카의 말년을 함께 한 결핵요양소의 간병인이었던 것이다. 박통의 ‘시월유신’을 ‘十月有信’이라 우기다 ‘十月維新’이라 정정해주는 화자를 개 패듯 팼던 중학시절의 공민선생이 생각나고, 권력의 나팔수로 살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그래서 창밖을 보던 화자는 자신의 신문사 앞에서 촛불을 들고 있을 ‘도라 디아만트’가 걱정스럽다. <푸른 모래의 시간>은 또 다시 거북이가 등장한다. 갑자기 닥친 아내의 죽음은 화자의 삶을 그 전과 후로 확연히 구분시키는 일대 사건이었다. 차도 없고 운전도 하지 못했던 아내는 집과는 전혀 반대 방향인 일산에서 파주 가는 길 위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더구나 그 사고는 가해자가 있는 사고가 아니었다. 아내는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남자의 옆에 동승해 있었고, 그 차의 운전자는 커브길을 돌면서 스스로의 실수에 의해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 아내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 혼란스러움의 와중에서 화자는 지금의 직업을 갖게 했던 경주의 옛 사진관이며 아내와의 추억을 더듬으며 경주를 여행한다. 석굴암을 내려오는 길에 그 거북이를 보았고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그는 그것을 사들고 와 자신의 작업실 벽에 걸어두었다. 푸른 칠이 칠해진 벽을 일 때문에 찾아왔던 어떤 여자는 다른 이들처럼 바다 같다고 하지 않고 푸른 모래 같다고 말했고, 저 거북이는 어디로 가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거북이는 요즘 들어 만진 적도, 건든 적도 없는데 비스듬히 자세를 바꾸고 있다. 누구의 질문처럼 거북이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르지만 화자는 생각한다. 누구나 어딘가를 가야할 때가 있는 것이라고. <거미의 집>은 핵가족사회, 노령인구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아” 내버리기 불편한 가구처럼 되어버린 한 어머니와 그 가족의 이야기다. 어머니는 슬하에 딸 둘 아들 셋을 두었다. 현재는 큰아들의 집에서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막내와 함께 살았었다. 그 막내는 “나오지 않는 빈 젓을 물 듯 꿈같은 삶에 대한 이상을 물고 늘어진” 덕에 지금 감옥에 가 있다. 보다 못한 막내며느리의 친정에서는 며느리를 데려갔고 함께 살던 단칸방 보증금은 밀린 월세를 제하고 옥바라지나 하는데 쓰라고 건네준 상태다. 하는 수없이 큰 아들의 집에 오게 된 그 어머니의 삶은 그저 지옥이랄 수밖에 없다. 물론 큰며느리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지옥이다. 둘째 놈은 아들 없는 집으로 장가를 들어 그 집 아들이 다됐다. 큰 딸은 제 시어미를 모시고 사는 중이고, 둘째 딸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그런 상황에서 큰며느리는 혼자 모시지 못하겠다고 나서고 딸들은 자식 아니냐며 몇 달씩 분담하여 모시자고 생떼를 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키워낸 어머니는 이제 죽어주면 고마운 존재가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방문에 기대어 무너지며 거미를 생각한다. 젖이 없는 거미는 새끼를 위해 제 몸을 준다. 새끼들은 어미 몸을 파먹고 어미는 껍질만을 남긴 채 죽는다. 마지막 소설<첫눈>은 서두에서 말했듯이 첫눈처럼 언제 내리고 녹는지도 모르게 왔다가 사라지는 사랑과 인연에 대해 말한다. 화자는 드라마를 연출하는 프리랜서 PD다. 문화재단의 주선으로 강연 차 내려간 울산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화자는 ‘고래’가 그물에 걸렸으니 고래 구경을 하고 가시라는 한 선생의 제안으로 울산의 부둣가를 찾는다. 그곳에서 그 선생의 동료인 음악선생을 만나게 되고, 그 우연한 첫 만남에서 전혀 예기치 않았던 감정의 이끌림을 느낀다. 남편을 잃은 여자의 과거가 말해지고 14시간의 시차를 두고 떨어져 살아야 하는 기러기 아빠의 쓸쓸함과 외로움이 전해진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아직 뜨겁지 못했고 서로의 감정을 덥히기도 전에 각자는 자신의 일상에 파묻혀 살아야 했다. 몇 번의 만남은 있었으나 남자는 새로 촬영에 들어간 드라마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새로운 삶의 선택으로 고민하던 여자는 그 바쁜 남자에게 물어볼 기회를 갖지 못했음으로 자신의 결단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사촌오빠의 주선으로 키르기스스탄으로 떠난다. 우연한 만남과 또 우연한 이별 아닌 이별이 있고 나서야 남자는 사랑이 왔다 갔음을, 억겁의 세월을 다시 지나야 맺어질 인연의 옷깃이 스쳐 지나갔음을 깨닫는다. 아내와 함께 맞았던 진부령의 첫눈처럼, 그러나 그 아내와의 사랑 또한 이미 녹아버린 첫눈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막 내리기 시작하다 어느새 흔적도 없이 그쳐버린 첫눈 같은 그녀와의 인연이 사무치게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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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일게 하는 책이다. 보다 더 자극적이고 놀라운 이야기를 찾는 시대에 너무도 평범한 이야기 아니 사람들에게 잊혀진 지난 이야기를 조근조근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가정마다 엄연히 품고 있는 지금 이야기이다. 굳건히 버티고 있는 흙속의 뿌리 같은 얘기, 물길을 새로이 트면서도 흐르는 원천에서 바다로 가는 물줄기 같은 얘기, 폭풍에도 휘어졋다 제치고 일어서는 올곧은 나무 같은 얘기, 그리고 이른 아침 서리 같은 아리고 시린 가슴 앓이가 있는 소설책이다. 책을 읽은 후에 잔잔한 맑은 물결의 여운이 오래간다. 그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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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표지 색감이 너무 예뻐서 눈에 띄었는데,
이순원 작가님의 글이라니 더욱 반가웠습니다.^^
'첫눈'이라는 느낌만큼이나
선생님 문장 하나하나에 따뜻함과 맛(?)이 배어 있었어요.
첫눈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보게 됐구요.^^
다들 어떤 정의를 내리실지는 모르겠네요.
"그래, 찍으면 발자국 자리도 안 나게 내렸는지 안 내렸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는 것, 혹은 그렇게 왔다가는 사람, 그 모든 것이 첫눈인 것이었다." (pp. 291~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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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첫눈'엔 [멀리 있는 사람],[라인 강가에서],[미안해요, 호 아저씨],[카프카의 여인],[푸른 모래의 시간],[거미의 집], 그리고 표제작[첫눈] 이렇게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내렸는지 안내렸는지 모르게 왔다 가는 것, 혹은 그렇게 왔다 가는 사람, 그 모든 것이 첫눈인 것이었다.' - 첫눈
만나고 헤어지는 수많은 인연들 속에서 작가가 이야기하는 첫눈과 비견되는 인연을 예측하기란 힘들것이다. 불현듯 찾아온 만남, 몇몇의 단편적인 사건과 생각들, 그리고 헤어짐이 전부인 인연. 훗날 그와의 인연이 내린듯, 또는 내리지 않은 듯한 첫눈처럼 느껴질 때 아련함은 마음에 잔잔히 고여 있으리라.
첫눈은 어찌보면 그리움이다. 채울수 없는,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 채워진듯 그러나 이내 녹아 버리는 그리움.
붙잡아 두고 싶은 인연이 있는가 하면, 떨쳐내고 싶은 인연도 있으리라.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 붙잡을 수도 떨쳐버릴 수도 없음을 경험할 때 흔히들 운명이란 단어로 모든걸 덮어 두기도 한다. 사랑의 소중함을 그리움으로 간직한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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