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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충동이 먼저일까 예술적 충동이 먼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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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호퍼를 그만 읽어도 될 것 같다. '도시와 자연, 시대정신에 관한 단상'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시작과 변화를 바라보며First Things, Last Things》(동녁, 2012)는 내게 실망을 안겨준 작품이다. 전작 《우리 시대를 살아가며》(동녁, 2012)에 비하면 예리한 통찰보다 시대착오적인 내용이나 그저그런 밋밋한 내용들이 눈에 밟힌다. 이 책은 1960년대 호퍼가 잡지에 기고한 글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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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호퍼를 그만 읽어도 될 것 같다. '도시와 자연, 시대정신에 관한 단상'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시작과 변화를 바라보며First Things, Last Things》(동녁, 2012)는 내게 실망을 안겨준 작품이다. 전작 《우리 시대를 살아가며》(동녁, 2012)에 비하면 예리한 통찰보다 시대착오적인 내용이나 그저그런 밋밋한 내용들이 눈에 밟힌다. 이 책은 1960년대 호퍼가 잡지에 기고한 글 아홉 편을 모아놓은 것인데, 호퍼 사상의 한계점을 여실히 드러낸 작품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종교적 충동이 먼저일까 아니면 예술적 충동이 먼저일까? 이는 마치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를 연상시키는 난문인데, 호퍼는 예술적 충동이 종교적 충동보다 앞선다고 강조한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이야기감으로 삼아 호퍼는 놀이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중요한 발명품이 탄생했다는, 이른바 호모 루덴스의 주장을 들려준다.

 

"인간은 단순히 살고 죽는 문제와 관련 없는 대사에 에너지를 쏟고 심지어 인생을 걸 때 인간 고유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창의적인 역량을 한껏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인간화는 자연 환경이 풍부하고 여가가 보장되며 뭔가 만지작거리고 노는 활동에 재미를 느낄 때 실현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인간의 승격은 황량한 전쟁터보다는 에덴동산 같은 놀이터에서 이루어졌다."(21쪽)

 

흔히 종교에서 예술이 나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지만, 호퍼는 외려 주술과 종교는 예술가를 낳지 못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실용적인 도구는 거의 다 실용성과 관계가 없는 놀이에서 탄생했다는 견해를 강조한다. 적자지심, 즉 어른 속에 있는 아이의 마음이 바로 인간의 고유성과 창의성의 원천이라는 인문학적 입장에 충실한 그의 견해를 엿볼 수 있었다.

 

호퍼는 자연을 경외하는 사회와 지식인들에게 경고를 발하고 있다. 자연을 경외하는 사회가 진정 자유로운 사회인지 의문시한다. 왜냐면 자유는 기본적으로 자연으로부터, 변하지 않는 숙명으로부터, 자연을 지배하는 무자비한 결정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경외하는 사회는 권력과 자연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자연재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처럼 독재권력에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효과적인 자연정복 기술을 개발하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자연을 찬양하는 태도가 오히려 역사의 퇴보를 부른다는 비판은 내가 보기엔 호퍼의 선입견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억측에 불과하다. 북한이 자연을 경외하던가?

 

z***a 2013.02.15.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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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희망을 말해도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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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길 위에서 일하며 사색한 미국의 사회철학자.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가 기적적으로 회복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에릭 호퍼의 책을 읽었다. <시작과 변화를 바라보며>는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유럽을 목도한 이의 책이라고 말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도 희망적이었다. 글들이 씌어진 시기는 1960년대라고 하였다. 직접적인 파괴를 경험치는 않았으나 대공황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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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길 위에서 일하며 사색한 미국의 사회철학자.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가 기적적으로 회복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에릭 호퍼의 책을 읽었다. <시작과 변화를 바라보며>는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유럽을 목도한 이의 책이라고 말하기에는 그 내용이 너무도 희망적이었다. 글들이 씌어진 시기는 1960년대라고 하였다. 직접적인 파괴를 경험치는 않았으나 대공황으로 시름시름 앓던 미국은 1950년대부터 슬슬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소비문화가 본격적으로 싹 텄다. TV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기존 사회에 반기를 든 히피들이 나타난 것도 아마 이 무렵이지 않나 싶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흐름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새로운 움직임이 일 때마다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과연 내가 구세대로 전락하지는 않을지, 변화가 너무도 지독한 나머지 지금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무너지진 않을지 등에 대한 우려가 생겨나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자본주의를 표방해왔다고는 하지만 자본주의의 성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1960년대의 사람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흐름이 바람직한지 여부부터가 판단이 힘들었던, 그 시점에서 에릭 호퍼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사회를 이끄는 것은 보수주의가 아니라 창의성이다. 그리고 태초의 인류가 창의성을 발휘해 만들어낸 것은 도시였다. 사람들이 과거를 언급할 때면 떠올리곤 하는 촌락은 오히려 도시가 부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과거에 그러했듯이 현재의 도시가 바로 앞으로 미국의 발전을 이끌 원동력이다. 많은 사람들은 도시와 자연을 대립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도시가 자연을 파괴하고 만들어낸 것이라는 사고는 결국 도시를 부정하는 태도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남미나 아프리카의 지식인들이 보이곤 하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일컬어 ‘괴이하다’고 표현하였다. 한때 번성했을 잉카 제국이 보유했던 계단식 농경지와 수로 등도 그와 같은 시선에 의하면 자연 파괴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며, 그는 이분법적인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렇다하여 그가 전 국토를 삽질로 파헤쳐 놓는 형태의 개발을 옹호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자유’라는 질서였다. 그에게 있어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란 자연으로부터의 자유로 포함한 개념이었다. ‘자연을 경외’에서 ‘자연’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였을 경우, 권력을 경외, 독재자를 경외 등의 표현도 성립할 수 있다고 그는 보았다. 물론 우려할 만한 부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사회는 효과적으로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야 된다는 시선을 가진 듯했다. 그가 주장한 바는 개발과 파괴의 경계선을 어디에 설정하느냐에 따라 파괴 옹호와 동일선상에 놓일 수도 있는 약점을 분명 가지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시 미국이 겪고 있는 변화는 거의 ‘지각변동’ 수준이었다. 세계대전이 세상을 뒤흔들기 전까지, 세계는 극소수의 힘에 의해 굴러가는 공간이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했는데 그 전까지 건실했던 귀족 집단도 파괴했다. 더디기는 했지만 미국 역시 전쟁을 겪으며 흑백 논쟁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움을 획득해가기 시작했다. 시대정신은 소수의 지배를 허용치 않을 터였다. 앞으로의 세상은 어떠한 엘리트 의식도 갖추지 않은 다수의 중산층에 의하여 지배될 터였다. 다만, 그와 같은 지배가 자동적으로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무기력하게 제 삶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결코 중산층의 대열에 합류할 수 없다.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신념과 철학을 지녀야 한다. 중산층 스스로가 엘리트로 거듭나는 변증법을 실현해야만 다수의 지배를 이룩할 수 있다.

여느 사회보다도 미국 사회는 변화에의 적응이 빨랐다. 마치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 위를 아무렇지 않게 걷는 사람마냥 굴어온 미국으로서는 닥친 변화를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단, 변화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현재와의 관계 설정을 잘 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그는 제시한다. 독일과 일본은 경제 발전과는 별개로 봉건적인 정치 제도를 가졌으며, 러시아의 경우 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한 나머지 오히려 현대화의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그는 보았다. 미국의 변화는 ‘연속성’을 무시하지 않은 것이어야만 한다는 그의 주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렇다면 여전히 우린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살아간 세상은 오늘날에 비해 좀더 낙후된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강한 확신이 가능했다. 오늘날은 더 이상의 발전이 힘들겠다 싶을 정도의 상황에 대다수의 국가가 직면해 있다. 미국이 끊임없이 세계 평화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자생적인 발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심심찮게 대두되고 있다. 생성이 불가능하기에 남의 것을 빼앗아와야만 하는 시대라는 의견이 말이다. 어쩌면 이는 또 다른 형태의 시작이요, 변화일 수 있다. 어렵지만, 그래도 한 번 더 희망을 지금의 흐름으로부터 읽어내고 싶다. 극한 상황에 도달했을 때마다 인류는 길을 발견해왔다. 한 번 더 그와 같은 기적(!)을 우리 자신이 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달의 사락 q*****2 2012.07.2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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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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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글쓴이 소개에 따르면 그는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하느라 정신없었던 그에게 정규교육은 사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닥치는대로 틈만나면 독서에 열중했다. 그것은 어릴적부터 15살 때까지 눈이 멀었던 경험 ??문이다. 언제 다시 볼 수 없게될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그의 광적인 독서를 이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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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글쓴이 소개에 따르면 그는 제대로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하느라 정신없었던 그에게 정규교육은 사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닥치는대로 틈만나면 독서에 열중했다. 그것은 어릴적부터 15살 때까지 눈이 멀었던 경험 ??문이다. 언제 다시 볼 수 없게될지 모른다는 공포심이 그의 광적인 독서를 이끌었다.


 그의 독서량은 그에게 순수한 시선을 선물했다. 그는 기존의 지식인들이 보여주지 못하던 독특하고 넓은 시야에서 주장을 펼치고 글을 써냈다. 교수들은 때때로 학계의 통념과 권위에 거스르는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호퍼는 그것과 관계없이 순수한 시선을 유지한다 이 책은 그러한 그의 사유들 중 일부를 모아놓은 것이다.


 그러한 그의 도발적 주장중 하나는 도시가 촌락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저명한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의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오늘날 불고 있는 친자연적 삶의 맹종에 대하여도 회의를 가진다.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자연으로부터의 투쟁이었고 그 결과 우리는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인데, 어째서 그러한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 하는지에 대해 그는 의문을 표한다.


 이처럼 그는 독서를 바탕으로 가진 독자적이고 순수한 시점에서 사유하고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즐거웠다. 그가 죽으며 남긴 수천 장의 메모 카드를 보면서는 경이감도 품었다. 죽는 날까지 읽고 사유했던 남자의 단편을 만나기 원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게 어떨까?


사족 :  로이 H. 월리엄스는 Pendulum이라는 저서에서 역사의 80년주기 반복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 40년의 차이가 있다는 주장도 폈다. 이에 따르면 이 책이 처음출간된 1971년의 미국사회는 2012년의 우리사회와 비슷한 문제를 품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청소년 문제, 중산층의 위기, 지식층의 비겁함, 변화에 의한 혼란 등을 볼 때 그러하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를 연구하면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지는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YES마니아 : 플래티넘 a**l 2012.05.3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