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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대하여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읽고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아도 보인다. 어느 광고 음악의 노랫말과 베스트셀러의 기치(旗幟)를 이어 붙여 연역(演繹)하면 이번에 북클러버들과 함께 읽은 책의 첫 문장이 만들어진다. 미술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7쪽)"라고 쓰면서 독자와 더불어 보수적 성향의 미술계를 향하여 포문(砲門)을 연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에 제작된 동명의 BBC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여태껏 몰라서 혹은 알고도 모른 체하며 미술 작품을 '하나의 방식'으로만 보고 있었음을 꼬집는다. 학창 시절에 미술 수업 시간을 돌이켜보니 오로지 시험을 위해 시대별 화풍과 대표적인 화가 그리고 작품을 암기하기에만 급급했던 기억이 씁쓸하게 남아 있다. 어른을 위한 최소한의 미술 지식마저도 흘러가는 세월과 같이 휘발되어 미술은 여전히 발을 들이기가 쉽지 않은 영역이다. 다행히 최근 몇 년간 다양한 주제와 서술방식으로 쓰여진 미술 에세이가 그 문턱을 낮춰주고 있는데, 저자들이 존 버거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존 버거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단지 그 대상만 보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또는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 파악하여 '물건과 우리 사이의 관계(9쪽)'를 살펴본다. 사람들이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방식은 앞서 언급한 내 경험과 마찬가지로 미술과 관련하여 받은 교육을 바탕으로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것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다. 여기까지가 '기존의 보는 방식(a way of seeing)'이었다면, 그는 계급, 인종, 젠더, 정치, 경제 등 그동안 덜 중요시했던 문제들과 연결지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글자와 그림으로 구성된 네 편의 에세이와 그림만으로 이뤄진 세 편의 에세이로 엮은 책은, 크게 '유화(油畵)', '누드화', '광고'를 주제어로 미술 작품에 대하여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를 제안한다. 이는 저자가 한평생 추구한 '질문을 새롭게 하는 것(6쪽)'의 일환(一環)이기도 하다. 그 고리를 조금 더 좁힌다면 유화의, 유화에 의한, 유화를 위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누드화는 회화 양식의 하나로 기법은 물론 누드화에 숨겨진 의미가 유화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며, 광고 역시 시대를 달리할 뿐 유화의 속성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미술관에 걸린 '그림'이나, 어떤 자연현상 또는 사물을 "'그림' 같다"라고 비유할 때 '그림'이 어떤 형식의 것인지 상상해보자. 기름에 물감을 섞어서 그리는 유화(oil painting)가 떠오르지 않는가. 유화는 미술사적으로도 수백 년간 풍경, 정물, 인물 등 거의 모든 주제를 표현해냈기에 그림을 그리는 법 못지않게 보는 방식도 '표준적'으로 굳어져 왔다고 짐작할 수 있다. 사진술과 현대의 복제 기술이 미술의 대중화를 이끌며 한편에서는 예술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목소리도 들리지만, 어떤 이해관계에 따라 봉사 혹은 부역이라는 평가 사이에서도 예술은 나름대로 현실을 반영해 온 것은 사실이다. 이 점을 주의 깊게 본 저자는 당시 사회의 주류이자 지배 계층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미(美)와 부(富)를 과시하기 위해 미술계의 대세인 유화를 활용한 정황을 포착한다. 이를테면,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 애써 숨기려 하진 않았지만 일반인에게는 잘 드러나지 않은 것들 -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투입된 사람과 재료, 그것을 얻는 여정에서 자행된 불편한 역사적 진실 등등 - 을 들춰내거나, 토머스 게인즈버러의 「앤드루스 부부」가 자신들의 땅을 보며 자연과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도 했겠으나 자신들이 소유한 땅을 실제처럼 보이게 한 유화의 능력 때문에 지주로서 자신들의 모습을 재확인하는 즐거움이 더욱 커졌으리라고 지적한다. 그는 유화를 한 마디로 "유화는 세상을 향해 난 창(窓)이라기보다는 벽 안에 소중하게 박아 높은 금고에 더 가깝다(33쪽)"고 비틀어 말한다. 벌거벗은 몸(naked)이 된다는 것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드(nude)로서 보여진다는 것은 자신의 피부 표면과 몸에 난 털들이 하나의 가장(假裝)이 되고, 그런 상황에서 절대로 떨쳐낼 수 없는 무엇이 된다는 것이다. 누드는 절대로 벌거벗은 몸이 될 수 없는 운명이다. 누드는 복장의 한 형식이다.(64쪽) 다음으로 낯'익은' 누드화를 '낯설게'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여성과 남성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시선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림의 안팎에 숨겨진 '젠더' 문제를 재발견한다. 젠더 사이에 발생하는 권력의 비대칭을 고스란히 담은 누드화가 얼마나 불평등하며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고 비판한다. 사회의 오랜 인습으로 인해 여성은 자신을 보는 남성과 그 남성이 보는 자신을 동시에 감시하고 또 감시당하면서 스스로를 대상화시켜왔다고 덧붙인다. 누드 모델은 그냥 벌거벗은 게 아니라 화가를 포함한 미지의 관객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로 벌거벗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벌거벗은 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벌거벗은(naked) 개인이 누드(nude) 그림의 대상이 되면, 다시 거칠게 말하자면 남성 화가와 관객 앞에 선 여성 모델은 벌거벗어도 벌거벗지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오롯한 나 자신이 아니라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눈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구속적이고 굴욕적일까, 이것은 그야말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광고를 스쳐 지나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모를 정도로 우리 일상과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광고를 알아보자. 저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산되고 노출되는 광고를 멈춰서 바라보길 권하며 이렇게 말한다. 광고는 결코 현재에 관해 얘기하지 않고 항상 미래를 얘기하고 있다고. 현대 자본주의 경제에서 '현재에 자신의 결핍된 상태와 미래에 더 나은 자기가 되기를 희망하는 상태의 모순 속에 살고 있음'을 기억하고 또 망각하게 만드는 게 바로 광고라고. 이어서 광고와 카메라가 발명되기 전까지 지난 시간 동안 서구적인 시각 방식을 지배해 왔던 유화(油畵)의 관계를 짚어낸 대목이 퍽 흥미롭다. 미술은 정신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표현하는 장치이거니와, 특히 유화는 사유재산에 대한 찬양의 도구로서 '당신이 소유한 것들이 곧 당신(161쪽)'이라는 원리에서 나온 미술 형식임을 미루어 짐작할 때 유화와 광고는 일맥상통한다는 설명이다. 그의 해석을 곱씹다 보면 물질과 정신에 대한 인간의 소유욕이 투영된 유화가 광고라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시대의 뒤안길이 아닌 앞뜰로 나와 예전과 다름없이 노니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존 버거의 어깨 위에 앉아 미술 세계의 이면을 다른 방식으로 보면서 미술이 다양한 맥락 속에서 보는 사람과 타자의 상호작용이 이뤄지는 과정이자 결과임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이러한 발상과 논증이 무뎌지기는커녕 여전히 날이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면 나만의 지나친 감상일까. 비록 비전문가의 입장이지만 저자가 글을 펼쳐 나가는 과정에서 때로 여지(餘地)가 없이 단언(斷言)하는 듯한 주장들과 서양 미술에 한정하여 서술한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이 책이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를 모르지 않기에 앞으로 나 역시 미술을 마주할 때면 그처럼 비틀어 보기, 낯설게 보기, 멈춰서 보기 등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 같다. 나아가 미술을 포함한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과 이들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도 적지 않은 영감을 전해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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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John Berger)는 케네스 클라크(Sir. Kenneth Clark)와 마찬가지로 BBC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사 담론을 대중화시켰다. 하지만 클라크가 예술과 문명의 관계에 관한 아카데미즘을 대중의 눈 높이로 매끈하게 고쳐 놓았던 것과 달리, 존 버거는 아예 미술을 이해하는 틀 자체를 전면 수정할 것을 촉구했다. 그 비장한 선언서가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 of Seeing, 1972)」이다.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이 위대한 선언문은 시대를 초월하는 진리이며, 얼핏 곰브리치(E. H. Gombrich)의 시지각 심리학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정치, 경제, 권력의 담론이 부가될 때, 우리가 잊고 있던, 혹은 애써 묵살하고 있던 불편한 입장들이 표면화된다. 존 버거는 그러한 담론의 중심에서 독자들이 ‘단순한 수용자’가 아닌 ‘적극적 해석자’로 개입하기를 소망한다. 아니, 위대한 선배 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원했던대로, 우리 모두가 시각 문화를 전복하는 혁명적 주체가 되어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책은 소제목 없는 7개의 장으로 구성되었고, 그 중 3개의 장은 글 없이 도판만 나열되었다. 이 도판들은 주장을 담은 4개의 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저자는 애써 관계가 없을 수도 있다며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책의 구성 자체가 친숙한 틀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요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첫 장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게서 아이디어를 빌어온 이미지의 복제와 해석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든 이미지는 지식과 의도의 결과물이다. 가치중립적인 것을 가장하는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아카데미 전통에 입각한 이미지 해석은 부당한 신비화를 낳고, 그러한 신비화가 응집된 결과물이 오늘날의 미술사학이다. 이러한 주류 미술계의 권력은 위계질서를 정당화한다. 이제, 기술복제가 가능해진 시대에는 복제된 이미지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용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두번째 장은 젠더의 문제를 다룬다. 전통적으로 남자는 자신이 타자에 행하는 영향력으로 평가 받았다. 반면, 여자는 타자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로 평가되었다. 서구 미술 전통은 그러한 부당한 젠더 관계의 반영이며, 그 관계를 적극적으로 재생산해왔다. ‘보는 남자’와 ‘보여지는 여자’는 변치않은 성적 욕망과 소유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관계는 이미지로 재생산되며 다시 개별 주체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오늘날 매체가 변했어도 이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세번째로는 유화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유화가 도입되기 시작한 15세기부터 인상주의에 의해 그 본질이 파괴된 19세기까지, 유화는 주문자(소유자)의 재산을 나열해 과시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정물화, 풍경화, 자화상 등 주제가 달라져도 그 역할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손에 잡힐 것 같은 실제의 감각은 거기 그려진 대상과 그 그림 자체를 하나의 고귀한 사유재산으로 포장해낸다. 이 사유재산의 현존감이 유화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애써 감추기 위해 신화를 덧입고 고귀한 성역으로 포장시켜온 것이다. 가끔 그 본질을 거부한 대가들이 있지만, 미술사가는 그 대가의 표현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사상적 도전은 애써 묵살한다. 그래서 표현의 계승자는 있지만 사상적 대는 끊긴다. 램브란트의 노년기 자화상은 유화의 부당한 기능을 떨쳐버리고, 자신만의 정신을 회복한 대가의 당찬 선언이자 증거이다. 끝으로, 네번째 이야기는 현대사회의 광고에 대한 것이다. 광고는 오지 않을 미래를 보여주며, 소비를 통해 존중받는 자가 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이야기한다. 유화가 사유재산을 전시한 것처럼, 광고는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신기루를 전시한다. 광고는 선망의 판타지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며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다른 방식으로 보기」로 번역된 것은 존 버거의 입장에 역자(출판사)가 과도하게 개입한 결과로 보인다. 역자는 저자가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볼 것을 종용하고 있다고 합리화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고 제목 자체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라고 명시(명령)해버리면, 이미 이 책은 이데올로기적 선언이 되어버린다. 버거는 미술비평사를 통털어서도 매우 직설적인 인물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그저 ‘보는 방식들’이라는 제목으로 한 걸음 물러난 것은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그가 우리에게 어떤 행동으로 나아가라고 종용한 것은 첫장뿐이며, 그마저도 분명하지는 않다. 나머지 장들은 그저 자신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고 있다. 우리는 그의 관점을 읽으며 대체로 동조하지만, 때로는 나 혼자 힘으로 이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좌절하기도 한다. 심지어 가끔은 그가 이 체제를 너무나 억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연민을 품기도 한다. 사유재산을 전시하는 유화의 본질, 그리고 신기루만을 끝없이 생산하는 광고의 역할 속에서 우리가 품는 무력감을 어떤 실질적인 행동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지만 우리는 그저 비판적으로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숨겨진 권력의 의도를 애써 식별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상을 버리고 독자적으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로 용감하거나 유능하지 않기에, 존 버거처럼 산 속으로 들어가 농사 지으며 살 수 없다. 우리에게는 생과 업이 있다. 저항할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회피할 것인가. 이 세 가지 선택지만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고 믿는 사람은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멍청할 가능성이 높다. 부당하게도 우리는 애초에 원한적이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부과된 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어쨋든 태어난 이상, 우리 모두에게는 행복해질 권리와 의무가 있다. 세상을 계도하고 변화시켜 더 높은 사회적/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을 말릴 생각은 없다. 그들의 헌신이 인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은 지키고 싶기에, 결국 그들에게 이렇게 조언할 수 밖에 없다. 모든 이미지에는 하나 이상의 즐길 이유와, 동시에 하나 이상의 비판할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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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도 매끄러운 편이고 미술에 관심 있으면 꼭 봐야 할 책으로 추천합니다! 빌려 읽다가 결국은 사게 되더라고요. 얇지만 내용이 풍부해요! 꼭꼭꼭 추천드립니다~~ 예술. 미술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책 제목처럼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만듭니다^^ 원서로 읽는 것도 추천합니다. 원서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볼 수 있더라고요 오래된 책이라서 그럴 거예요. 검색해보시면 금방 찾으시지 않을까 싶네요. 이 책으로 같이 스터디하는 것도 추천드리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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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YS OF SEEING 다른 방식으로 보기; 의심하고 맞서지 않는다면, 지배당하고 종속되는 수밖에 1. '명작'에서 '이미지'로 복제 기술의 탄생은 예술로서 미술이 가진 권위를 무너뜨렸다. 예전에는 명작을 보기 위해 박물관, 왕궁, 전시실 등에 직접 가서 보아야하는 시공간적인 제한이 있었고 바로 그곳에서만 그 아름다움을 관찰할 수 있는 희소성이 있었다. 현대에 와서는 시공간 제약없이 언제 어디서나 작품의 아름다움을 관찰할 수 있다. 현재 미술 작품들이 가진 가치는 '복제품의 원본'이라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현대에 미술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명작으로서의 가치보다는 의미 전달을 위한 이미지,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그 가치가 있다. 그것들이 어떠한 다른 가치가 있다는 신비화, 권위는 점점 부서질 것이다. 2. 누드화가 의미하는 것은 예전에 유럽 여행간 미술관에 방문하여 전시되어 있는 누드화를 보며, '참 보드랍게 잘 그렸다. 사실적으로 그렸다.' 정도로 생각했었다. 글을 읽으며 누드화라는 것이 참 본능적이고 세속적인 작품들임을 알게 되었다. 남성은 능력, 정신, 권력, 부 등을 통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에 집중하는 한편 여성은 여성의 매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이느냐, 자신에게 어떻게 매혹시키느냐가 주된 관심사였다. 누드화는 그 관심사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재산이 많은 권력가 남편이 부인의 누드화 혹은 아름다운 여성의 누드화를 전시함으로서 자신의 남성성과 부인의 여성성을 강조하는 것. 그 당시 수많은 누드화가 양산된 것을 고려하면 대세나 시류에 대해 의심하고 맞서는 것이 어려운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것들이 형태나 형식만 바뀔뿐이지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의 삶에, 내 삶에서 누드화같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누드화처럼 의식하지 못했지만 의심해볼만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3. 유화의 세속성 유화의 형식이 주는 가장 큰 장점은 가장 사실적이라는 것에 있다.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부흥한 유화는 주로 부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권력자, 재력가들이 자신이 소유한 물건, 건물, 자연환경, 여자 등을 미술 작품으로 만들어냄으로서 '소유'한 것들을 과시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유화에서 느껴지는 인물들의 딱딱한 표정은 주인공과 관찰자간의 거리감을 형성시킨다. '나는 상위 계층이다. 나는 잘 산다.' 등을 표출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을 내용으로 그려내고, 사고 파는 매개물이 된 유화는 예술이라기 보다는 상품이라고 생각된다. 예술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저버린 것이다. 4. 광고에게 선택당하는 삶에 대하여 누드화와 유화의 현대 버전이 광고이다. 광고는 사람들로 하여금 욕망을 자극하고 쾌락을 채워'줄 것'처럼 보인다. 저기에 나오는 애플워치를 차면, 제네시스를 몰면 내가 저 사람처럼 멋있는 사람이 될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애플워치를 찬다고, 제네시스를 탄다고 내가 저기 나오는 배우처럼 멋있어 지지 않는다. 물건을 가짐으로서 얻는 만족감도 영원하지 않다. 광고가 우리에게 제공하거나 채워주는 것은 없다. 단지 우리의 시궁창 같은 현실과 멋져 보이는 미래간의 간극을 지속적으로 자극할 뿐이다. '노동'이라는 피동성에서 벗어나 '소비'라는 능동성이 주는 쾌감은 또 다시 '노동'으로 돌아가야만 충족될 수 있는 쳇바퀴일 뿐이다. 정치인, 기업인, 권력자가 선택적으로 광고하는 가치에 우리가 생각할 '선택' 기회는 사라지고 그들에게 지배되고 종속되어 버린다. 의심하지 않는다면, 맞서지 않는다면 예속당하는 수밖에 없다. ; 영원회귀의 긍정과 자기 파괴와 창조라는 열정으로 무장한 나에게 참 의미있는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는 '위버맨쉬'가 되려면 내 앞에 주어진, 내 머리 속에 채워진 관념, 생각, 행동, 규율 등에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맞서 싸우고 무너뜨리고 새로 만들어내야한다. 심각한 것은 책에도 나오듯 우리는 광고를 선택한다고 하지만 광고가 범람하는 시대에 우리는 광고에 선택될 뿐이다. 의식하려고 노력해도 그것들이 내뿜는 향수에 이미 취해있다. 엄마가 사기 시작하면 그 주식은 고점이라는 말처럼 주변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의심없이 따라가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에 멈춰서서 의심하고 다르게 보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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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예술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확장시킨다. 미술 작품들을 볼 때, 불편한 지점들이 있는데 말로 표현을 못 할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아 이래서 그렇구나.’ 하게 되었다. 더 다양한 방식과 시선으로 보기 권하는 책이며 전혀 불편하지 않고 생각의 확장으로 번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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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지 않고 글이 명확해 제법 술술 읽힌다. 중세 유화로부터 이어지는 그림을 보는 방식과 이를 다르게 보기가 왜 필요한지를 일깨워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특히 그림 속 여성의 시선과 그림을 그리는 방식,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것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그림 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물질성과 실제성은 해당 사회의 인식과 시대상을 담고 있다. 작가는 벌거벗은 몸(naked)과 여성 중심의 누드화(nude)의 차이점을 밝히고, 누드화가 결코 예술적인 것만이 아님을 지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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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전 책이라 순위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존재를 알 수 조차 없는 책이었다. (BTS 추천 도서로 순위에 오른것으로 알고 있다.) 평소에 미술작품에 관심이 많은 편이고 세계 어느곳을 여행가던 그 지역의 유명한 미술관은 꼭 가는 편이라 미술 작품 관련된 책들도 많이 보는 편이다. 그런 책들은 대부분 저자의 일생 그림 그릴때의 저자의 환경 , 그 시대의 대세의 기법들 이런것들 위주로 알려준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솔직히 누드화의 주인공이 앞을 쳐다보는 것이 그런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고 보니까 정말 그런것 같았다.계급이나 재산(정원 소유) 등 다양한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그 생각이 나에게는 없었던것 같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 긴 책은 아니지만) 너무 단편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책 내용은 너무 좋았지만 흑백인 책에서 챕터까지 나눠가며 조그마한 그림들을 아무 설명없이 배치해 놓은것은 너무 무책임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원작이 너무 옛날 책이다 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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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나서, 그동안 내가 사회적 & 관습적으로 male gazed (남성적인 시선)에 얼마나 익숙해 졌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여성 퀴어적인 영화 중 '캐롤'보다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가 먼저 떠올랐는데 이는 그 영화가 보여준 사랑의 모습이 당시에도 너무 폭력적으로 내 머리 속에 남아 있어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여성의 누드와 벌거벗은 몸에 대한 단상을 읽을 때에, 학습된 고정적인 시각이 미술 감상에 있어서 얼마나 시대를 역행하는 것인지, 또한 기존의 감상을 답습하는 수준 밖에 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시각과 어떤 기준으로 사물을 바라보는가에 대한 고찰과 논의. 이러한 담론이 1970년대에 이미 시작 되었지만 그 이상의 큰 진보는 아직 없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함께 느꼈다. 주로 유화를 가지고 복제 기술이라는 시대의 흐름이 만들어낸 유화의 가치 변화, 벌거벗은 몸과 누드로 비교해서 바라본 여성의 몸, 유화라는 그림의 의미 변화, 그리고 유화와 광고의 유의미한 관계와 차이점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미지와 함께 전시된다. 나에게 학습된 것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도록 노력하는 것. 왜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함께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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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보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제공해준 책.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도판이 같이 실려있어서 보는 즐거움과 바로 확인해볼 수 있는 편리성이 있었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도판이 전부 흑백이었다는 점. 전자책단말기에서 봐서 그런가 했는데 pc로도 확인해본 결과 원래 그런 것으로... 컬러랑 흑백 인쇄 단가가 다른 종이책도 아니고 전자책인데 도판은 컬러로 실어줬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전체적으로 좋은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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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다른 방식으로 보기이다. 존버거의 책은 두번째 접하는 것인데 나와는 잘 맞지 않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읽는다. 제목이 다른 방식으로 보기라 나와 보는 방식 다른가보다 하고 생각을 하며 읽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고. 전 책과 마찬가지의 이유로 작가의 성격이 보이고 그 부분이 좋은 책으로 남지 못한것 같아서 아쉽지만 나중에 다시 읽었을 때 다른 시선으로 다가오리라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