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기억하는 가장 아늑한 공간은 엄마의 자궁 속이라고 한다. 또한 사람들은 물가에 가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게 되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자신을 감싸던 양수의 느낌을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본능 속에 각인되어 있는 안정감은 사람이 불안이나 두려움을 느끼는 상황에서 되살아나 더 이상 성장을 포기하거나 심하면 어머니의 뱃속과 같은 편안한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은 이러한 심리로 성장을 멈춰버린 한 사람의 시각을 통해 현실을 보여준다. 자궁 속에서부터 엄마를 동시에 사랑하는 두 남자 중 어떤 이가 자신의 아버지인지로 혼란스러워 하던 주인공 오스카는 세 살이 되던 해 그의 생일날, 의도적으로 계단에서 떨어진다. 어머니와 얀을 비롯한 어른들의 부정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싫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성장을 멈추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오스카는 자라지 않는 난쟁이로 살아간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것이 있다. 오스카가 두드리는 양철북 소리, 그리고 그의 끔찍한 괴성. 오스카는 자신에게서 양철북을 가져가려고 하거나, 어머니의 부정을 목격했을 때 신경질적인 고음의 비명을 지른다. 그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시계나 창문의 유리는 모두 산산조각이 나고, 놀란 어른들이 행위를 멈추게 되는 것. 심지어는 성대에 이상이 있는지를 검사하기 위해 들른 병원에서조차 오스카는 괴성을 지른다. 소설 속 이야기를 영화화한 화면 속에서는 오스카의 괴성과 그 힘에 대해 더욱 더 실감나게 보여주기도 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귄터그라스의 대표작이라고 하기에 망설임없이 선택하게 된 책, 양철북.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주인공 오스카를 '올리버 트위스트' 정도의 인물로 예상하고 있었다. 격동하는 역사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의 일대기나 성장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내게 세상의 모든 것들을 깨어버리는 오스카의 괴성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신기한 것은 오스카의 양철북이 두 가지 의미가 맞닿아 있는 상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스카가 늘 가지고 다니며 시끄럽게 두드리던 양철북은 그 스스로가 선택한 세상에서 떨어지는 방법이었지만, 가끔 그가 세상에 개입하게 되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어른들은 그의 양철북 소리를 시끄러워 하지만, 그의 괴성으로 인해 오스카에게서 양철북을 빼앗지는 못한다. 오스카는 소리로 세상의 부조리한, 참을 수 없는 것들을 향해 공격하고(공격이라기 보다는 최소한의 방어이다) 그 소리의 힘으로 세상은 멈추기도 한다. 오스카와 유일하게 의사소통, 감정교류가 가능했던 사람들은 서커스단의 난장이들이었다. 어머니와 얀이 죽고, 자신이 사랑한 마리아가 아버지의 정부가 된 후 집을 나선 오스카는 서커스단에서 자신의 무기였던 괴성과 양철북을 웃음으로 되판다. "우리는 결국 다시 만나게 되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라던 서커스단 노인의 말처럼 오스카가 드물게 웃고, 희열을 느꼈던 시간이 그 서커스단 속의 시절이었다. 사랑하던 여자가 죽고, 전쟁 속의 대세가 바뀌고, 집으로 돌아온 오스카는 마리아가 낳은 자신의 동생(혹은 자식일 지도 모르는)에게 세 번째 생일 선물로 양철북을 선물한다. 그것을 선물하는 오스카의 표정은 진지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이야기의 마지막이었다. 영원히 난쟁이로, 세 살 때의 모습 그대로 자랄 것이라 생각했던 오스카는 아버지의 무덤 속으로 자신의 양철북을 던져버린다. 그물 하나가 된 그는 이제 성장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 때 동생이 우연히 던진 물체에 머리를 맞은 오스카는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은 놀란다. 그는 더 이상 세 살 박이 오스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건장한 스물 하나의 청년으로 자라있었다. 어머니와 얀, 아버지 등 자신의 세계에서 볼 수 있었던 어른들이 모두 죽고, 전쟁이 종식된 후에야 그는 성장을 하게 된다. 그동안 자라지 못하고 멈춰있던 그의 몸이 커지면서 이제 그는 더 이상 양철북과 괴성이 아니라 온전한 모습으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것이다. <양철북>은 마치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는 신문고 같은 책이다. 그리고 그 북채는 세상에서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미숙아, 오스카에게 쥐어져 있다. 책장을 다 넘긴 후에도 양철북과 오스카의 눈에 비친 이중적인 세상의 모습은 쉬이 잊혀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지금도 양철북을 쥐고 성장을 스스로 멈춘 아이들이 움직이지는 않을까, 가끔 나를 향해, 세상을 향해 들리지 않는 괴성을 지르고 있지는 않을까, 많은 생각이 남았다. 20세기를 대표할 만한 걸작이란 말은 결코 과언이 아니었음을 느끼게 만든 잊지 못할 영화였다. 독일의 격동적인 시대를 담고 있지만, 세월이 많이 지나도 이 소설의 메시지는 바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양철북>양철북> |
|
이 소설은 오스카르가 살인혐의를 받고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순결한 종이'에 서술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다보면 오스카르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종이에 '쓰는' 것이 아니라 그만의 독특한 언어인 양철북을 '치면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소설에서 오스카르가 가진 특징 중 하나는 그의 성장이 세 살 짜리 아이의 몸에서 정지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오스카르에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백발이 될 때까지 발육이라는 말 등의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미완의 존재이다. 하지만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른의 지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세 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안팎 모두 완전하게 완성된' 존재이다. 즉 오스카르에게 "성장"이란 미완의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로 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존재인 자신은 '성장'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오스카르의 또 하나의 특징은 '모두가 진짜라고 말하는 유리'를 목소리로 깨뜨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오스카르는 쇼윈도 유리에 자신의 목소리로 구멍을 뚫어서 사람들을 시험에 본다거나 예수 석상이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다거나 불량소년 집단인 '먼지떨이'들에게 자신이 예수라고 우기면서 유리를 깨 보이는 행동을 한다던가 해서 자신이 인간이 아닌 신적인 존재임을 내세운다. 하지만 반면에 그는 악마적인 성향도 가지고 있다. 우선 소설의 앞부분에서 오스카르는 자신이 세례를 받을 당시 오스카르라는 이름이 이교(異敎)의 이름을 상징한다고 해서 여러 가지 곤란을 겪었다고 말하고 있다. 특히 세례를 받으며 사제가 "악마를 단념하겠는가?"라고 물었을 때 오스카르는 "단념할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라고 하면서 그의 악마적인 성향을 그대로 드러낸다. 유리 깨기라는 행동을 통해서 오스카르의 악마적인 느낌(두 아버지를 간접적으로 살해하는 행동을 할 때의 느낌)을 한 층 짙게 느끼게 한다.
오스카르의 항상 '양철북'을 가지고 다닌다. 그는 자신의 성장 정지에 관해서 어른들에게 '이유'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 계단에서 떨어질 때에도 그의 양철북만큼은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애쓸 정도로 자신의 양철북을 아낀다. 그에게 양철북은 '갈수록 더욱더 소중하고 또 간절한 욕망의 대상'이 된다. 오스카르는 태어나자마자 나방이 '발광체와 대화'하는 장면을 보게된다. 오스카르는 나방과 전구 사이에서 생기는 큰 소음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소음은 양철북과 연결되어 이 세상에 남을 것을 결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즉 양철북의 소리가 "전구와 나방의 대화"소리와 닮았다는 것은 양철북의 소리는 오스카르와 세상이 대화하게되는 "언어"의 기능을 가졌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나는 지금 당장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두겠다. 나는 태어났을 때 이미 정신 발육이 완성되어 있어 나중에는 닩 그것을 확인할 뿐인 총명한 갓난애 중 하나였다. 태아였을 때에는 외부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고, 양수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제는 전구 밑에서 자연스럽게 양친의 입으로부터 새어나오는 그 최초의 말에 비찬적인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