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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 단식 당시 읽은 책? 이 책을 읽었다면 이러지는 않았을게 아닌가?
이제는 전 대통령이 됐지만,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기 전 “세월호 재난”을 보면서 가슴을 치고, 어이없어했다. 내가 대통령이 된다면 꼭 세월호 문제는 해결하겠다는 각오와 일념으로 단식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집권 5년 과연 촛불의 힘으로 또 그 여세를 몰아 정권의 안정과 국정농단을 흙탕물과 진흙밭 속에서 제 자리를,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최저임금 1만 원 시대를 열고, 세월호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그의 공약은 헛된 약속이 되고 말았다.
이 책의 핵심을 놓치고 간 건 아닌지...."마음" "인간성의 본연"을...
그는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단식을 하면서 이 책을 읽고 뭘 느꼈을까, 궁금하다. 파카 J 파마가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보낸 찬사, “부패의 시기를 지나온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재건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이 위대한 인물의 여정에 내 책이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했다면 정말 영광”이라고…. 위대한 대통령은 위대하지 않았다. 집권 말기까지 레임덕에 빠지지 않고, 상당한 지지율을 유지했다. 바로 그 지지율에 감춰진 팬덤현상…. 위대한 대통령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위만 늘린 위가 큰 대통령이었다. 물론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혼자서는 국정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도 실천행에 이르는 길 가운데 과연 어떤 구덩이가, 또 어떤 장벽이 있었던 것일까
이 책<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그렇다. 앙(꼬) 없는 찐빵이다. 앙이 바로 마음이다. 이 책은 눈으로 읽는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마음” 비통한 자들을 향한 마음, 바로 측은지심이요. 역지사지다. 조강지처란 거친 조밥을 함께 나눠 먹고 고생했던 시절의 아내요 동지를 말한다. 배가 부르고 삭신이 편해지면 옛 고생은 잊게 마련인가?,
이 대목에서 지은이는 내면과 외면을 일체를 말하고 있다. 표리부동하고 겉과 속이 같아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 정치와 민주주의를 왜곡시키는 뿌리가 된다고.….
우리가 자아와 세계라고 이해하는 모든 것이 마음이라 부르는 중심부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자신이 아는 바에 따라 인간적으로 행동할 용기를 찾을 수 있다.
정치하는 이들, 강준만 선생이 왜 사람들은 권력만 잡으면 180도 바뀌는 것일까, 권력을 잡으면 사고방식이 바뀐다. 뇌가 바뀌는 것이다. 여의도의 우주선처럼 생긴 곳에 들어가면 제아무리 현자라도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 외계인들에게 세뇌당한 걸까? 아니면 재선, 삼선이라는 정치 권력 지향…. 딱 한 번만 모든 것을 걸고 정치를 하지 못할 이유가 뭘까, 인간의 본능인 욕구, 즉 허영기 때문일까…. 오만 생각이 다 든다.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나, 미국의 민주주의(저자 알렉시스 드 토크빌)에서는 민주주의 신선한 역동성을 재현한다. 민주주의는 본디 갈등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다.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란, 갈등 넘어 또 다른 갈등, 연속적인 갈등의 해결 과정에서 지혜를 짜내고, 이런 지혜의 결집을 통해 갈등 줄이고, 또…. 갈등과 갈등의 해결 과정이 민주주의라면 형식을 떠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음”을, 곧 정신이다. 이 책은 8장 체제이며, 1장에서 민주주의 생태계를, 정치와 마음 그리고 낯선 자들과 함께하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공공의 삶”을 말한다. 이는 또 무엇인가, 우리가 아는 공동체 속에서 이웃 간에 상부상조하는 삶의 실천이다. 또, 미디어가 현실을 규정할 때를 생각하면서 근원적 민주주의를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절차는….
이 책은 아주 여러모로 사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사유의 힘을 길러주는 발판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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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말의 희망이나 기대를 갖고 이 책을 찾게 되었을 것이다. 현실의 정치 상황으로 인해 ‘비통한 자들’인 본인들을 위한 ‘정치학’이 존재할 수 있다는, 현재의 해법을 찾고자 하는 마음에서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책의 원제는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이다.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라는 한국어 번역본 표지의 부제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이 원서를 접했다면 아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 제목을 ‘민주주의의 핵심을 치료하기’ 정도로 해석했을 것이다. Heart를 ‘본질’로, Healing를 ‘회복하기’ 정도로 달리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대의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이 ‘정치학’ 용어로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현재의 한국 정치는 치료나 회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의 원제는 ‘민주주의의 마음을 치유하기’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책의 내용에 부합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정치’에서 ‘마음’과 ‘치유’를 이야기하는 것이 타당한가? 이 낯선 조합은 매우 당황스럽거나 혹은 (사이비)종교처럼 일종의 사기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 파커 J. 파머는 왜 ‘마음’에 주목한 것일까? 저자는 왜 하필이면 ‘마음’이 민주주의에서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당혹스럽거나 어이없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보자. 우선 저자는 테리 템페스트 윌리엄스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의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이라는 것이다. 그 집에서 윌리엄스는 질문한다 ‘살아 있는 민주주의를 추구하기 위해 용기 있게, 끊임없이,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동료 시민을 신뢰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가?’ 이것은 파커 J. 파머의 화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하여 저자가 오랜 세월 동안 해답을 찾아간 지난한 과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저자가 말하는 ‘비통한 자들’이란 말 그대로 ‘마음이 부서진(brokenhearted) 자들’이다. 이것은 정치학의 분석 용어이거나 전략적인 수사학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아니지만, 정치라는 것을 인간의 일상생활을 잘 다듬어가려는 핵심적이고 영원한 인간적인 노력이라고 정의한다면, 인간의 상한 마음을 열고, 공공선으로 향해가는 것이야 말로 정치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마음’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고, 마음의 언어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전제이다. 이를 위해 그동안 무시되어온 민주주의의 인프라를 수리하고 유지하는 과정을 동반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인프라이자, 이 책의 주된 관심사는 인간의 마음이 지닌 보이지 않는 역동과 그 역동이 형성되는 가시적인 삶의 현장이다.
이 책의 저자 파커 J. 파머는 조슈아 솅크의 『링컨의 멜랑콜리』를 인용하면서 자살 충동과 우울증을 겪던 링컨이 어떻게 미국 연방의 대통령이 되었는지 밝히면서, 링컨은 결코 남북을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나누지 않았을 뿐더러, 국민 전체에게도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 것”과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호소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링컨의 우울증이 어떤 연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현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서 우울해하거나 분노한다. 얼핏 상반된 감정처럼 보이는 이 두 감정은 기실 정치적인 비통함을 경험한 자들이 공히 보이는 반응일텐데, 현실의 정치를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파커 J. 파머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더라도,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갈등들을 어떻게 해결하면서 우리 자신과 대한민국이 건강한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모색하며 해법을 찾아과는 과정이 될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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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지사항 - 서명 :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 - 저자 : 파커 J. 파머 / 미국의 교육지도자, 사회운동가 - 역자 : 김찬호 /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 - 출판사 : 글항아리 / 경기도 파주 - 출판일(E-book) : 2018년 3월 21일 2. 리뷰 나는 정치학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의 정치가 엉망인데 정치학 책을 읽으면 무엇 하나. 공허한 헛소리요, 현실의 비참함을 더 깨닫게 될 뿐이라.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우연히 인터넷 서점 메인 화면에 이 책이 떡하니 올라와 있었고, ‘비통한 자들을 위한’이라는 문장이 마음에 들어 장바구니에 넣어둔 지가 벌써 근 일 년. 간신히 구매를 하고도 한 달이나 지나서야 표지를 넘겨보았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말한다. ‘가치의 차이’라고. 본 서는 이 문장을 뒤집어 이렇게 말한다. ‘차이의 가치’라고. ‘가치의 차이’는 말 그대로 서로의 차이, 다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후에 그 차이를 존중할 것인지, 무시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선을 그을 뿐이다. ‘차이의 가치’란 무엇일까? “나는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를 줄이자고 요청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을 권리를 부여하고, 창조적 갈등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사회 변화의 힘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당파주의는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것이 문제다.” - 본문 중에서 ‘차이’는 그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그 이유를, 차이가 있음으로 인해 갈등이 생겨나고,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변화의 에너지가 창출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차이가 있고, 갈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민하고, 발전한다. 실로 ‘고난의 유익’이라 할 만 하다. 갈등이 어찌 정치판에만 존재하겠는가. 우리 삶의 모든 관계에서, 심지어는 우리 스스로의 내면에도 존재하는 것이 갈등이다. 우리가 정치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내적, 외적 갈등을 어떻게 창조적 에너지로 변환시킬 것인가? 그 모두가 넓게는 ‘정치’이다. 괜히 동양의 정치학이 수신(修身)에서 시작하여 평천하(平天下)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문제는 ‘How’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갈등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하는가? 저자는 퀘이커 교도 ‘존 울만(John Wolman)’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존 울만(1720~1772)은 식민지 시기 뉴저지에서 살았던 퀘이커 교도였다. 그는 함께 어울렸던 상인과 농부들로 구성된 프렌드 교파(퀘이커 교파의 정식 명칭)의 회원이었는데, 거기에서는 노예를 얼마나 많이 거느리고 있느냐에 따라 영향력이 좌우되었다. ... 울만은 인간의 평등함에 대한 퀘이커 교도적 신념과, 많은 퀘이커 교도의 상류층이 노예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 사이의 적나라한 모순으로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한 모순을 무시하거나 기술적인 속임수를 쓰거나 그 갈등을 폭력으로 분출하는 것으로써 긴장을 해소할 수도 있지만, 울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 퀘이커 교도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 다수결 대신 합의를 통해 결정하는데, 울만의 지역 회합에서는 그의 제안에 관한 의견을 통일시킬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만이 그 문제에 절대적인 성심(誠心)으로 임하는 모습에 설득당한 이들은 그를 지지하기로 동의했다. ... 그는 언제나 자신의 믿음에 진실했다. 그는 염색하지 않은 흰 옷만 입고 다녔는데, 염료가 노예 노동의 산물이기 때문이었다. ... 울만과 그의 가족은 진실의 명령에 대한 일관된 증언과 깊게 느껴지는 비통함 때문에 많은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그는 그 긴장을 마다하지 않고 무려 20년 동안 끌어안았다. 결국 퀘이커교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노예를 해방시킨 종교 공동체가 되었는데, 이는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80여 년 전의 일이다.” - 본문 중에서 해답은 단순하다. 모순을 무시하거나 내버리지 않고, 그것을 끌어안은 채로 보편적 가치에 합당한 상태에 다다르기까지, 계속해서 설득하는 것이다. 이 일의 원동력이 바로 제목에 등장하는 ‘비통함’이다. 울만은 진리와 현실의 모순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모순에 깊이 공감하고 비통해했던 것이다. 그는 진리의 편에 서기를 선택했고, 그 신념을 성심을 다해 지켜가며, 다른 사람 또한 그 신념에 동참하도록 사람들을 설득했다. 아, 얼마나 단순한 해답인가, 얼마나 답답한 해답인가. 그러나 저자는 이것이 올바른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자의 생각은 너무나 낙관적이다. 마치 애덤 스미스의 주장처럼, 인간은 합리적 선택을 하고, 그 결과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는 올바르게 돌아간다는 것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장애 아이들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겨우 학교 하나 세우자고 그 부모들이 무릎까지 꿇는 현실에서, 그들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무릎을 꿇으란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과연 이것이 올바른 민주주의의 참 모습이라는 말인가. 저자는 이후의 장에서 희망적인 인간의 가능성도 보지만, 그 안의 본질적인 악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공동체에 함께하며 서로 담론하는 것으로 민주주의는 지켜지고, 사회는 후퇴와 진보를 거듭하며 점차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 앞에서, 왜 나는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의 끝없는 평행선이 떠오르는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결국 나쁜 사람은 벌을 받고 착한 사람은 상을 받는답니다.’와 같은 권선징악의 결말을 주장하는 것이 낫겠다. 민주주의의 원리와 원칙을 배우기에는 아주 좋은 교과서일지 모르나, 지금의 정치판을 보며 논하기에는 너무나 이상적이다. 물론, 이 책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누군가가 정치판에 뛰어들어 정치를 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전적으로 지지할 것이다. 그런 정치인이 부디 많아지면 좋겠다. 그럼 이 사회는 좀 더 살만해질 것이다. 다만, 그들이 꿈을 향해 미처 몇 발자국 내디뎌 보기도 전에 이 정치판에서 아웃되고 말 것 같아, 그것이 우려될 뿐이다. 그러나 또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이 책은 반드시 읽어보고 새겨야 할 내용이다. 풀뿌리 민주주의,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해야할 생각, 행동을 이 책은 아주 충실히 담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모순을 품고 끈질기게 나아가는 우리의 행동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의문이 들지만, 그래도 비통함을 품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민주사회 시민으로서의 마땅한 책무이다. 우리 사회가 퀘이커교와 같이 모순을 버리거나 무시하지 않고 포용해 주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함께 모순을 품고 나아가 주기를 설득하고 또 설득해야 한다. 버려지고, 무시되더라도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때, 언젠가는 아주 작은 것일지언정 변화는 일어날 것이고, 작은 변화는 시간이 흘러 이내 큰 변화가 될 것을 기대하고 내다 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미 그러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밟아본 역사가 있지 않은가. 실패도 있었지만 성공도 있었기에, 우리는 저자와 같은 낙관론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소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소망을 놓지 않는 그 마음이 우리 사회의, 우리 자신의 동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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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혐오하는 국가는 민주주의로서 오래 번성할 수 없을 것이다. - E. J. 디온 Jr.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이란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맨 처음 떠오른 것은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헨리 나우웬의 책이었다. 참고로 두 책의 원제는 각각 다음과 같다. ‘Healing the Heart of Democracy’와 ‘The Wounded Healer’. 비기독교인이거나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이 책의 제목을 대할 때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기독교인인 나는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제목이 상당히 종교적(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독교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정치학 서적, 좀더 폭넓게 보더라도 사회비평서라고 할 수 있을텐데, 가장 학술적이고 객관적인 용어를 써야 하는 사회과학 서적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매우 종교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비통한 자the brokenhearted’란 ‘마음이 상한 자’인데, 이 표현 역시 성경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이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민주주의의 위기는 누구나 다 그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바인데, 앞장서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가장 큰 세력이 극우 기독교인이라는 것 역시 두 나라에서 공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성경으로,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말한다는 것이 현 시점에서 과연 유효할까? 혹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책을 읽기 전 내가 가진 의문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내가 하는 고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인이기도 하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회 참여적인 시민이기도 한데, 이 두 가지 정체성은 분리되어 있다. 진보적 정치의식을 가진 나와 기독교인인 나는 어떤 면에서 때때로 갈등한다. 그런데 이 둘을 화합하거나 하나의 정체성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인 파커 J. 파머는 퀘이커 교도이고, 퀘이커 교도들이 남북 전쟁 이전에 미국에서 이미 노예 해방을 위해 노력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데, 이 부분에서 진보적 정치 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선례를 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미국 초기의 링컨을 비롯한 대부분의 정치인들을 비롯해 20세기의 마틴 루터 킹 등도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어찌 보면 미국 민주주의라는 것이 성경을 바탕으로 해서, 기독교적 전통 하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정치인이라는 정체성은 어떤 괴리감도 없었을 것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연민과 정의의 직물을 짜는 것’이다. 그것을 잊어버릴 때 어린이, 노인, 정신질환자, 가난한 사람, 그리고 노숙인 등 이 사회의 가장 취약한 자들이 맨 먼저 고통을 받게 된다. 이것이 파커 J. 파머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인데, 이 기저를 관통하는 중요한 정신이 바로 ‘비통한 마음’, ‘환대하는 마음’이다.
이 책에서는 전혀 학술 용어라고 할 수 없는 ‘마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저자에 의하면 ‘heart’는 라틴어 ‘cor’에서 왔는데, 이것은 자아의 핵심을 의미할 뿐 아니라, ‘courage’의 라틴어 어원이기도 하다. 즉, 우리가 자아와 세계라고 이해하는 모든 것이 마음이라고 불리는 중심부에서 하나가 될 때 자신이 아는 바에 따라 인간적으로 행동할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비통한 마음’이 ‘환대하는 마음’으로 전환되는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차이에서 오는 긴장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관여하려고 하는 열린 마음은 ‘용기’에서 시작된다.
파커 J. 파머는 이를 위해 ‘부서져 흩어지는broken apart’ 마음이 아니라 ‘부서져 열리는broken open’ 마음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우리의 마음이 깨어지고 상처입었을 때 대부분의 개인과 집단들은 산산히 흩어지고 깨어진다. 그러나 같은 경험을 통해 누군가는 마음을 연다. 결국 그 차이가 크나큰 결과를 만드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선악의 이분법에 갇혀 누구가를 비난하는 것으로 졸속으로 서둘러 손쉬운 결론을 맺을 것이 아니라 끊임업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단체의 마음을 열고 사회적 연대와 공공적 책임을 시도하고 애쓸 때 민주주의의 신선한 역동성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초기에 종교 공동체들은 자발적 결사체로서 민주주의의 주체이자 옹호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렇다면 현재의 기독교인들도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우리 안의 차이를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끌어안는 식으로, 민주주의의 엔진으로 도약할 가능성이 현존하지 않을까? 그리고 시민들의 힘으로 어렵게 성취한 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고 공유할 뿐 아니라 우리의 뒷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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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 단식 때 읽었다고 해서 언젠가는 읽어봐야겠다고 기억해놨죠.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읽었는데 좋습니다. 정치에는 마음과 다양성을 포옹하는게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네요. 민주주의가 다수결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구요. 모든 사람을 최대한 포용하는 사회를 위한 정치인들이 많이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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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비통함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며, 공감하며, 나아가 그들의 처지를 보다 낫도록 만들기 위해 정치 활동을 하고자 하는 움직임과 시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순한 동정심의 차원을 넘어서, 비통한 자들을 어루만지고 외면하지 않으며 같이 움직인다는 것이 정치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분석하고, 그 이후에 대해 말한다 |
| 어...대충 전 대통령의 도서목록을 손민수해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샀고요 생각보다 종교적인 얘기가 좀 있었다는 느낌이 들고요...이것도 공백미포함 150자 써야하는지 모르곘네요 아 100자로 줄었군 좀 살맛납니다...작가가 링컨을 되게 좋아하시네요 정도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