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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 이동옥 현암사/2018.10.12. sanbaram 요즘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이 전례 없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로 페미니즘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페미니즘을 설명하거나 그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책은 많지 않다.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에 대한 전반적인 실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여성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학교 초빙교수로 여성학 과목을 강의 하고 있다. 저서로는 <탈/근대 아시아와 여성: 공간을 만들다>(공저),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여성학적 성찰>, <왜 노인 보살핌을 두려워하는가> 등이 있다.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는 격월간 <공동선>에 게재한 글을 기반으로 엮은 책이며, 종교가 있으면서 여성성이나 모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진정한 자아와 대면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한 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젊은 여성뿐만 아니라 노년의 여성과 성소수자 및 장애를 가진 여성까지를 망라하여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와 경쟁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태와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사회 전반적인 문제점을 폭넓게 지적하고 개선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내용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당신은 누구의 하느님입니까/ 2장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3장 평등하지 않은 사랑, 희생의 굴레/4장 희생했지만 존중받지 못하는/ 5장 돌봄의 재발견/ 6장 호주제에서 히잡까지 “종교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통념을 그대로 반영하거나 남성중심적인 전통과 교리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성차별을 정당화하고 여성을 억압할 수 있다. 한편 종교는 가부장제에서 고통 받는 여성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폭력과 불의에 대한 통찰을 제시함으로써 제도적, 문화적 차원에서 성차별에 저항하게 하고 변화를 주도하기도 한다.(p.15)” 가톨릭을 비롯해 남성중심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종교는 어디에도 없다. 어느 종교가 얼마나 더 성차별적인가를 논하기보다 모든 종교 안의 성차별을 인식하고 시정해나가야 한다고 가톨릭 신자인 저자는 강조한다. “<마리아 막달레나 복음>은 1896년에 발견되었고 1955년 출간되었다. 지금까지 여성의 복음서가 없었기 때문에 의미가 더 컸다. 이 복음서는 고대에는 인기 있는 문서였지만, 남성중심의 신학계에서 발표 이후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마리아 막달레나 복음>은 여성인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의 후계자로 제시한다.(p.94)” 이 복음서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남성 제자의 대립은 2세기 영지주의와 정통 교회의 대립을 상징한다. 마리아 복음서는 총 10장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루가, 마르코 복음과 다르게, 마태오 복음에서는 부활소식을 전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용기 있고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 부활을 알게 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매시지를 전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두렵지만 기쁨으로 부활을 알리는 여성들의 모습은 사도의 징표로 해석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여성은 월경, 임신, 출산, 수유를 하는 변화하는 몸, 통제할 수 없는 몸으로 해석된다. 여성의 몸은 동물성, 유한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여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남성이 오염된다고 여김으로써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아왔다.(p.111)” 여성혐오란 여성을 정신과 대비되는 물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여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성적 욕망을 관철시키면서도 여성의 몸을 유혹하는 몸이거나 더러운 몸, 역겨운 몸으로 폄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보호와 의존의 대상으로서 여겨졌던 여성은 이제 독립적인 주체로서 교육과 취업에서 남성과 경쟁하고 있다. 여성과의 경쟁에서 졌을 때 남성들은 인정하지 못하고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상대방의 감정과 의사를 배려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다. 내가 어떤 사람과 교제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소유할 수는 없다. 그 사람과 교감하고 행복했던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에 기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122)” 데이트 폭력이나 성희롱은 피해자에게 고통과 수치심을 안긴다. 가해자 중심의 언설은 피해자를 혼란스럽게 하고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문제를 제기하는 피해자에게 오히려 조직 구성원들은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피해자가 용기 있게 나서도 사회적으로 지지받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이 정서적인 어려움을 초래해 최악의 경우에는 ‘자살’로 귀결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에서도 성소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가족, 종교에 의해 폭력적으로 이성애자로 전환하려는 치료가 행해져왔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는 성소수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전환 치료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한국 역시 이제 전환 치료는 금지되었고 법적으로 처벌받는다.(p.136)” 레즈비언은 이성애 여성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위티그는 가부장제뿐 아니라 가모장제도 거부한다고 말한다. 가모장제 또한 이성애에 기초한 제도이고 여성의 역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은 이성애 제도에 기반한 출산, 모성 등의 재생산에서 해방된 여성이다. 레즈비언은 남성에게 의존해서 살아왔던 여성들에게 독립적인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성주의자에게 레즈비언은 여성 연대와 독립이 가능한 상상적 공동체로 해석된다. “호모포비아란 이성애의 권력과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p.139)” 성소수자 차별은 정상가족의 보호와 성도덕의 강화라는 명분으로 행해진다. 성소수자를 성적으로 난잡하고 성병을 유발하는 사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 성 폭력의 가해자로 다루는 것 모두가 호모포비아의 한 형태다. “가톨릭교회는 성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 논하고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줘야 한다. 또한 가톨릭계 대학들은 여성,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소통해야 한다. 가톨릭교회와 대학이 성적 타자인 여성과 성소수자들을 존중함으로써 희망과 구원의 상징인 종교적 상상력이 발현되기를 기대한다.(p.148)” 가톨릭교회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참여해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성 문제는 가려진 영역이기 때문에 가장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현임 교황의 진보적인 사상이 좀 더 진일보 하여 성평등을 이룰 수 있도록 종용해주길 기대해본다. “그동안 여성운동은 젊은 여성, 중년 여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에 노인 문제에는 소홀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노인 여성의 문제는 노인운동이나 노인복지에서 다뤄져야 할 부차적인 것으로 해석되었다.(p.227)” 여성운동은 연령차별을 극복하지 못했고, 나이를 먹으며 심화되는 의존의 구조화된 맥락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세대 간의 갈등이 깊어졌고 나이 듦에 대한 공포와 젊음에 대한 선망 또한 심화되었다. 노인 돌봄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기초할 때 사회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편안하게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나이 들어 죽어가는 과정에 인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사회문화와 제도의 구축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말한다. “생채여성주의자들은 권리 담론에 기초해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동물의 권리를 확보하려고 한다. 하지만 동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거나 방임하는 것만으로 책임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세핀 도너번과 캐럴 애덤스는 인간이 동물의 상황에 기초해서 생명 보존과 보호, 성장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305)” 인간이 동물의 고통을 인식하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그들의 고통을 구제하고 적합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동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종교와 페미니즘의 동행은 쉽지 않다. 마녀, 이단이라는 낙인을 받으면서도 저항해왔던 메리 데일리와 같은 선배 여성주의자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p.357)” 그들에 비해 용기가 없고 사람들과 싸울 만큼 에너지가 넘쳐나지도 않아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여성의 고통, 말할 수 없는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가톨릭교회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지 않지만, 주일 미사에 나가고 때때로 평일 미사에도 참여하고 묵주기도도 하고 고해성사도 보고 피정도 간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모임에도 소속되어 있지는 않다고 한다. 저자처럼 신앙을 갖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이들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이들이 한번 쯤 읽어봐야 할 책이라 생각한다. (이 리뷰는 예스 24를 통해 현암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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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 이동옥 현암사/2018.10.12.
요즘 페미니즘에 대한 책들이 전례 없이 많이 출간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뜨거운 이슈로 페미니즘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반적인 페미니즘을 설명하거나 그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책은 많지 않다.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에 대한 전반적인 실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여성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학교 초빙교수로 여성학 과목을 강의 하고 있다. 저서로는 <탈/근대 아시아와 여성: 공간을 만들다>(공저),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여성학적 성찰>, <왜 노인 보살핌을 두려워하는가> 등이 있다.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는 격월간 <공동선>에 게재한 글을 기반으로 엮은 책이며, 종교가 있으면서 여성성이나 모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진정한 자아와 대면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한 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젊은 여성뿐만 아니라 노년의 여성과 성소수자 및 장애를 가진 여성까지를 망라하여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와 경쟁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태와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사회 전반적인 문제점을 폭넓게 지적하고 개선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내용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당신은 누구의 하느님입니까/ 2장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3장 평등하지 않은 사랑, 희생의 굴레/4장 희생했지만 존중받지 못하는/ 5장 돌봄의 재발견/ 6장 호주제에서 히잡까지
“종교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통념을 그대로 반영하거나 남성중심적인 전통과 교리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성차별을 정당화하고 여성을 억압할 수 있다. 한편 종교는 가부장제에서 고통 받는 여성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폭력과 불의에 대한 통찰을 제시함으로써 제도적, 문화적 차원에서 성차별에 저항하게 하고 변화를 주도하기도 한다.(p.15)” 가톨릭을 비롯해 남성중심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종교는 어디에도 없다. 어느 종교가 얼마나 더 성차별적인가를 논하기보다 모든 종교 안의 성차별을 인식하고 시정해나가야 한다고 가톨릭 신자인 저자는 강조한다.
“<마리아 막달레나 복음>은 1896년에 발견되었고 1955년 출간되었다. 지금까지 여성의 복음서가 없었기 때문에 의미가 더 컸다. 이 복음서는 고대에는 인기 있는 문서였지만, 남성중심의 신학계에서 발표 이후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마리아 막달레나 복음>은 여성인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의 후계자로 제시한다.(p.94)” 이 복음서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와 남성 제자의 대립은 2세기 영지주의와 정통 교회의 대립을 상징한다. 마리아 복음서는 총 10장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루가, 마르코 복음과 다르게, 마태오 복음에서는 부활소식을 전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용기 있고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 부활을 알게 된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매시지를 전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두렵지만 기쁨으로 부활을 알리는 여성들의 모습은 사도의 징표로 해석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여성은 월경, 임신, 출산, 수유를 하는 변화하는 몸, 통제할 수 없는 몸으로 해석된다. 여성의 몸은 동물성, 유한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여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남성이 오염된다고 여김으로써 여성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아왔다.(p.111)” 여성혐오란 여성을 정신과 대비되는 물적인 존재로 간주하고, 여성과의 성관계를 통해 성적 욕망을 관철시키면서도 여성의 몸을 유혹하는 몸이거나 더러운 몸, 역겨운 몸으로 폄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성차별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보호와 의존의 대상으로서 여겨졌던 여성은 이제 독립적인 주체로서 교육과 취업에서 남성과 경쟁하고 있다. 여성과의 경쟁에서 졌을 때 남성들은 인정하지 못하고 여성혐오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상대방의 감정과 의사를 배려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다. 내가 어떤 사람과 교제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소유할 수는 없다. 그 사람과 교감하고 행복했던 시간이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에 기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122)” 데이트 폭력이나 성희롱은 피해자에게 고통과 수치심을 안긴다. 가해자 중심의 언설은 피해자를 혼란스럽게 하고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부정하게 만든다. 그리고 문제를 제기하는 피해자에게 오히려 조직 구성원들은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피해자가 용기 있게 나서도 사회적으로 지지받지 못한다. 이러한 상황이 정서적인 어려움을 초래해 최악의 경우에는 ‘자살’로 귀결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에서도 성소수자를 치료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가족, 종교에 의해 폭력적으로 이성애자로 전환하려는 치료가 행해져왔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는 성소수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전환 치료를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한국 역시 이제 전환 치료는 금지되었고 법적으로 처벌받는다.(p.136)” 레즈비언은 이성애 여성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위티그는 가부장제뿐 아니라 가모장제도 거부한다고 말한다. 가모장제 또한 이성애에 기초한 제도이고 여성의 역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은 이성애 제도에 기반한 출산, 모성 등의 재생산에서 해방된 여성이다. 레즈비언은 남성에게 의존해서 살아왔던 여성들에게 독립적인 가능성을 제공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성주의자에게 레즈비언은 여성 연대와 독립이 가능한 상상적 공동체로 해석된다.
“호모포비아란 이성애의 권력과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을 의미한다.(p.139)” 성소수자 차별은 정상가족의 보호와 성도덕의 강화라는 명분으로 행해진다. 성소수자를 성적으로 난잡하고 성병을 유발하는 사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 성 폭력의 가해자로 다루는 것 모두가 호모포비아의 한 형태다.
“가톨릭교회는 성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 논하고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보여줘야 한다. 또한 가톨릭계 대학들은 여성,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소통해야 한다. 가톨릭교회와 대학이 성적 타자인 여성과 성소수자들을 존중함으로써 희망과 구원의 상징인 종교적 상상력이 발현되기를 기대한다.(p.148)” 가톨릭교회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참여해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성 문제는 가려진 영역이기 때문에 가장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다. 현임 교황의 진보적인 사상이 좀 더 진일보 하여 성평등을 이룰 수 있도록 종용해주길 기대해본다.
“그동안 여성운동은 젊은 여성, 중년 여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기에 노인 문제에는 소홀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노인 여성의 문제는 노인운동이나 노인복지에서 다뤄져야 할 부차적인 것으로 해석되었다.(p.227)” 여성운동은 연령차별을 극복하지 못했고, 나이를 먹으며 심화되는 의존의 구조화된 맥락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세대 간의 갈등이 깊어졌고 나이 듦에 대한 공포와 젊음에 대한 선망 또한 심화되었다. 노인 돌봄은 타자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기초할 때 사회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편안하게 돌봄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나이 들어 죽어가는 과정에 인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사회문화와 제도의 구축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말한다.
“생채여성주의자들은 권리 담론에 기초해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동물의 권리를 확보하려고 한다. 하지만 동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거나 방임하는 것만으로 책임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세핀 도너번과 캐럴 애덤스는 인간이 동물의 상황에 기초해서 생명 보존과 보호, 성장을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p.305)” 인간이 동물의 고통을 인식하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그들의 고통을 구제하고 적합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동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종교와 페미니즘의 동행은 쉽지 않다. 마녀, 이단이라는 낙인을 받으면서도 저항해왔던 메리 데일리와 같은 선배 여성주의자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p.357)” 그들에 비해 용기가 없고 사람들과 싸울 만큼 에너지가 넘쳐나지도 않아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여성의 고통, 말할 수 없는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가톨릭교회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지 않지만, 주일 미사에 나가고 때때로 평일 미사에도 참여하고 묵주기도도 하고 고해성사도 보고 피정도 간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모임에도 소속되어 있지는 않다고 한다. 저자처럼 신앙을 갖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진 이들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이들이 한번 쯤 읽어봐야 할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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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언론의 기사를 접하면서, 나는 두 개의 뉴스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미국 애플사의 최고경영자인 팀 쿡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커밍아웃을 하면서, ‘동성애자인 것이 자랑스럽고, 그것은 신이 준 선물’이라고 언급했다는 것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밝힌 사람들은 적지 않았지만, 그것을 ‘신이 준 선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 이전의 사람들과 다르다고 여겨졌다. 아마도 기독교에서는 이를 ‘신성 모독’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까 싶은데, 그렇지만 이성애가 그렇듯이 동성애도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사실에 팀 쿡의 이 발언이 논쟁을 축발시키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또 다른 하나는 엄마를 죽인 아빠를 사형에 처해달라는 청원을 올린 세 자매에 관한 기사이다. 이들은 살인을 저지른 아빠가 지속적으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왔으며, 엄마를 죽인 아빠가 ‘심신미약’으로 풀려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청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근 잔혹한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그 때마다 그들은 우울증과 같은 병력을 내세우며 심신미약을 주장하곤 한다. 예전에는 이러한 자녀들의 청원에 대해서 유가적 이념을 앞세운 ‘천륜’이라는 덕목을 들어 비난하였지만, 이제는 오죽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을 비난하는 기류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라는 책을 읽다 보니, 앞의 두 기사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해보았던 것 같다. 이 책은 ‘종교와 페미니즘의 동행’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종교와 페미니즘의 동행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들이 교리를 확립하던 시기는 이미 남성중심적인 사회 구조가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그러한 상황에서 출발한 종교는 남성중심적인 체계를 굳건히 세우고 그것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와 페미니즘이 양립하기 힘들다는 것은 대부분의 종교가 지닌 태생적인 성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믿는 신자로서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책속의 글들을 통해 솔직하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는 ‘닫는 글’에서 이제는 ‘가톨릭교회에서 열정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히고, ‘종교 생활을 하면서 겪는 불편함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여성의 고통, 말할 수 없는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며, 왜냐하면 ‘그것이 진정으로 나 자신을 찾는 길이고 구원과 해방의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때로는 종교인들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배려하는 모습에서 나름의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배려’는 수직적 질서의 위에 선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내리는 은혜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근본적으로 종교의 교리가 여성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페미니즘과 동행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모두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 당신은 누구의 하느님입니까’에서는 다양한 종교의 경전과 의식에서 드러나는 여성차별적인 면모에 주목하여, 그것이 지닌 문제점들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분석하여 서술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종교 사이에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인식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저자는 ‘어떤 종교가 더 여성친화적이고 어떤 종교가 더 남성중심적인가 하는 논의는 무의미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여성을 차별’한다고 주장하는 종교는 없으며, 단지 종교의 교리에 의해서 결과적으로 성 차별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실제 과거 한동안 가톨릭에서 ‘내 탓이오!’라는 주장을 들고 나온 적이 있었다. 일종의 자기반성을 통하여 사회의 분위기를 개선해보겠다는 긍정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을 초래하는 집단들에게 일종의 면죄부 역할을 한다는 비판이 당시에도 제기되었다. 결국 그러한 거대한 구호 속에서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통은 은폐될 수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종교적인 측면이 작용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의 처지와 실천적인 페미니즘을 통해서 극복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에서 점검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2장,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에서는 얼마 전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촉발된 ‘남혐/여혐’이라는 인식들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른바 ‘미투’운동으로 시작된 우리 사회의 남성중심적인 사고와 행태들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그동안 지속적인 문제 제기로 인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군대나 학교, 그리고 직장의 문화는 여전히 여성들에게 차별적인 요소가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이나 스토킹과 같은 행위들은 범죄라는 것을 인식하고, 관행적으로 용인되어 왔던 ‘성희롱’도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대체로 저자 자신이 가톨릭이라는 종교 신자의 입장에서 그동안 겪었던 교리와 현실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대체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특정 종교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문제들이기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음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남성중심적 사고와 현실이 그만큼 강고하다는 것을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고 파악된다. 과거에는 특정 종교의 신자였지만, 나는 지금은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다. 그동안 만나본 성직자나 신심이 깊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상대의 신념은 존중하지만, 나에게는 강요하지 말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곤 했다. 모든 사람의 신념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땐 ‘사회적 폭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문제점을 지적한 ‘3장, 평등하지 않은 사랑, 희생의 굴레’에서는 가정의 본질과 그 인식에 내재된 문제점에 대해서 다양한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내 기억으로는 1980년대에 활동했던 국회의원 중에 남장을 한 여성 의원이 있었다. 그녀가 남장을 한 것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랬다고 한다. 또한 10여 년 전에 유시민이 국회의원으로 처음 국회에 선서를 하려고 캐주얼한 복장으로 나섰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사실도 기억이 난다. 지금은 많이 변화했지만, 복장에서부터 정장을 고집했던 당시의 국회의 풍속도 역시 남성중심적 사고에서 머물고 있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전 사회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나던 때에도,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국회의 모습은 겉으로는 변화했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고 이해된다.
최근 모 정당에서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해 포용해야 한다고 밝히자, 그에 대해 날선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목도한 바 있다. 대체로 언론의 분석에 의하면, 열성적으로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노년층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그들의 심리에 대해서 다양한 분석과 해석이 제기되었지만, 아마도 이 책의 ‘4장. 희생했지만 존중받지 못하는’이라는 표현이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젊은 시절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헌신했지만, 변화된 사회의식과 분위기로 인해 소외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특히 ‘노인 여성은 노인이자 여성으로서 중층적으로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단지 노인 여성에게만 국한된다고 할 수 없지만, 저자는 여성들에게 가족들과 떨어져 여행을 즐기고 주체적인 활동에 나설 것을 그 대안으로 권유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지길 원하지만, 무엇인 행복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답을 하지 못한다. 저자는 ‘많은 사람이 행복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는 질문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가족을 돌보고,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나의 고통에 기반해서 타자가 행복한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타자를 변화시켜야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어느 누구의 일방적인 희생에 근거한 돌봄이 아니라, 돌붐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5장, 돌봄의 재발견’의 요지라고 이해된다. 장애 여성의 삶과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돌봄’이라는 인식의 문제를 보다 확장시키고 있다고 여겨진다.
‘6장, 호주제에서 히잡까지’에서는 다양한 종교에서 비롯되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문화를 제시하고, 그러한 문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담겨있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 남성중심적인 사고와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이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양하게 개최되고 있는 축제에서 여성들이 주변인에 머물고 있는 현상을 진단하고, 축제의 주인공으로 여성인물들을 개발할 필요가 잇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지 축제의 주인공만이 아니라, 축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함께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고 여겨졌다.
저자는 특정 종교의 신자 입장에서 페미니즘과 종교의 동행이라는 문제에 착안하여 글을 쓰게 되었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단지 그것이 종교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정 종교의 신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종교계에조차 깊이 뿌리박힌 성차별적인 요소가 산재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성경>을 비롯한 다양한 종교의 경전들, 수많은 언론의 기사들, 나로서는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이 많은 영화들, 그리고 저자가 인용한 많은 책 등 논의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저자의 논거를 마련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결국 페미니즘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겠다.(차니)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것이다.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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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는 격월간 <공동선>에 게재한 글을 기반으로 엮은 책이며, 종교가 있으면서 여성성이나 모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진정한 자아와 대면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한 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젊은 여성뿐만 아니라 노년의 여성과 성소수자 및 장애를 가진 여성까지를 망라하여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와 경쟁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태와 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사회 전반적인 문제점을 폭넓게 지적하고 개선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내용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당신은 누구의 하느님입니까/ 2장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3장 평등하지 않은 사랑, 희생의 굴레/4장 희생했지만 존중받지 못하는/ 5장 돌봄의 재발견/ 6장 호주제에서 히잡까지
“종교는 여성에 대한 사회의 통념을 그대로 반영하거나 남성중심적인 전통과 교리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성차별을 정당화하고 여성을 억압할 수 있다. 한편 종교는 가부장제에서 고통 받는 여성을 위로하고 치유하며, 폭력과 불의에 대한 통찰을 제시함으로써 제도적, 문화적 차원에서 성차별에 저항하게 하고 변화를 주도하기도 한다.(p.15)” 가톨릭을 비롯해 남성중심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종교는 어디에도 없다. 어느 종교가 얼마나 더 성차별적인가를 논하기보다 모든 종교 안의 성차별을 인식하고 시정해나가야 한다고 가톨릭 신자인 저자는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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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태어나서 나이 들고 죽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노인복지 공간이 요양원으로... 죽음의 공감이 병원으로 이동하면서 죽음은 특정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삶에서 분리되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잊고 사는 것이 행복이고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원천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하고 불편하게 생각할까... 미처 경험하지 못한 두려운 세계이기 때문일까... ![]() 죽음은 아름답지만 슬픈 이별이다. 더 이상 그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살아남은 자에게 아픔이다. 그럼에도 죽음을 앞둔 사람과 가족 지인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죽은 이후에도 그의 삶을 기억하는 것은 죽음으로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삶의 과정으로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의존과 보살핌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 한국 문화는 유교에 기초하고 있고 유교는 전통과 관련된다. 어느 누구도 이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서구의 개인주의와 구별되는 유교의 특성 때문에 외국인들은 유교문화에 호기심을 갖는다. 유교 문화에서 인간은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정의되는 존재다. 즉 인간은 가족 친족 이웃과의 관계에 고정되어 있고 이를 넘어서서 존재할 수 없다. 유교 문화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중시한다. 유교에서 효는 인간이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이자 덕목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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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이 책을 만난 것은 나에게 엄청난 행운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내 가슴에 파고들어 그동안 잠들어 있던 나의 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태어난 지 3일만에 가톨릭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여러 가지 문제로 내면의 갈등을 겪고 있었지만, 그저 순종이 미덕인 줄 알고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무조건적으로 종교가 제시하는 가치를 수용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었다. 그러던 참에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라는 책이 출간되어 서평단 모집을 한다는 것을 알고 눈이 번쩍 뜨여 신청했다가 서평단에 선정되어 책을 받게 되었는데,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내용이 신선하고 유익하여 책 읽는 즐거움에 빠져들게 되었다. 읽는 동안 내내 행복했었고, 나를 자유와 해방의 길로 이끌어 주어 감사한 마음이 뭉클뭉클 솟아 올랐다.
이 책은 종교가 있으면서 여성성이나 모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진정한 자아와 대면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위한 글이라고 저자가 밝히고 있는데, 정말 나에게 꼭 필요한 맞춤형 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종교가 여성 억압에서 눈을 흐리는 아편과 같은 역할을 했다면, 이 책을 읽음으로써 나는 저자로부터 진정한 자유와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세상이 제시하지 않는 통찰력을 나누어 받았다.
내 주위에 낙태가 죄인 줄도 모르고 젊은 시절에 낙태를 했다가, 시간이 흘러 종교를 갖게 되고 그제서야 낙태가 죄임을 깨닫고 수치심과 죄의식으로 늘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낙태가 자신의 미래와 자녀의 양육 환경을 위해 내린 주체적인 선택"이라는 글을 이 책에서 접하면서 "아, 그렇구나!"라고 수긍하면서 죄의식에 시달리던 그들에게 이 책을 꼭 소개해주고 싶었고, 이제는 억눌린 마음에서 벗어나 보다 평화롭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싶었다.
모든 종교 안의 성차별을 인식하고 시정해나가, 여성의 삶이 남편의 회개를 위한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되고,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깊이 인식하며,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인간다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내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함을 배울 수 있었다.
성요셉은 마리아의 동반자로서 혈연을 넘어서서 사랑을 실천한 아버지라고 제시한 점이 매우 새로웠다. 성요셉을 통하여 다시 한번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부모와 자녀 등의 혈연에 한정된 사랑이 아니라 이웃과 원수에게까지 확장되는 사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녀와 마녀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여성이 열정과 재능, 에너지를 마음껏 펼칠 것을 권고하면서 새로운 역할 모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희생을 자처하고 인내하며 피학적이어서 치유가 필요한 여성인 '마리아'가 아니라, 가부장제의 불의에 저항하는 '마녀'이다. 또한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처녀 '하와'를 역할 모델로 제안한다. 하와는 아담의 동반자로서 낙원을 자유롭게 뛰어다녔고 지혜롭고 열정적이며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독립과 자유를 추구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는 생명력 있는 존재, 가부장제 규범을 넘어서고 도전하는 하와의 '처녀'의 모습은 여성들에게 진정한 자신을 만나게 한다.
이제는 여성들이 교회 안팎에서 억압적인 규범에 도전하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자신들의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 가부장제 교회와 상징체계, 언어 속에서는 진정한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가부장제의 편견에 맞서 싸우고 자신을 성찰하는 자유로운 삶을 통해서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전통이 폭력, 불의를 내포한다면, 여성은 인간으로서 기본적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전통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전통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과 저항으로 변화해 온 것이다. 이제는 여성들끼리 서로 배려하고 치유하면서 힘과 용기를 얻어야 한다. 여성들이 스스로의 욕망과 열정에 충실하도록 서로를 격려할 때만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나의 눈이 열리고 키가 한 뼘쯤 자란 것같고, 마음이 커지고 넓어진 것같다. 새로운 인식틀을 제공해 주신 이동옥 교수님과 좋은 책을 발간해 주신 현암사, 그리고 이 책과의 만남을 허락해 주신 예스24 리뷰어클럽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제까지 갈등 상황을 외면하고 눈감아 버렸던 악습에서 벗어나 부당한 관계를 단절하고 새롭게 관계를 변화시키며 "나의 하느님"을 만나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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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를 차이를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아직까지 활발하며, 각기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기를, 다양한 분야에서 차별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얼마전까지 '미투'운동이 세계적으로 거세게(?) 불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 각계 각층에서 미투운동이 일어나고, 발생했고, 우리는 고개를 떨구었다. 우리가 한꺼풀 두껍을 씌우고 바라보았던 세상은 그저 그런 세상일뿐이었다. 더도 덜도 없는 그저 그런 세상!
국내 미투 운동의 바람이 스쳐지나가는 곳은 전반적인 사회이었고, 종교계에서도 미투운동이 고개를 들고 말하고자 하고, 세상에나! 탄식하며, 더이상 기댈곳이없는 듯하다.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란 책 제목은 글자 그대로 상당히 존립 상반적인 이야기로 들렸다. 강하게 호기심이 생기는 주제였다. 요즘 종교계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목소리가 뜨거워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누구도 딱히 드러내고 말하기에는 머뭇거리게되는, 그런 이야기들이다. 누리고 받아왔던 입장에서도, 당하고 눌리던 입장에서도 쉽사리 꺼내기 불편 했던 이야기들.
언젠가는 바로잡혀야 할 일들, 그러나 시급한 일들이었던 이야기들을 책<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의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전반에 깔린 남녀 차별과 불평등을 지나 아직도 억압과 고통을 호소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직도 그런 일이 있나요? 대부분의 의식 속에 자리잡은 말일 것이나, 자신의 일이 아니다보니 무관심해져 가거나 방관하고 싶은 그런, 그러나 이것은 누구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일이다. 피해자이건 가해자이건 어느쪽이든, 어느 순간 자신이 한쪽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확률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거의 모든 이들에게 가능하고, 확률이 높은 일이다. 말 한마디와 주위의 시선 하나로 어느 순간 죄인이 되어 있는 일은 이제 이 사회에는 흔해터진 일이다. 종교를 갖고 있는, 특히나 카톨릭이나 기독교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자유로울 수 없는 그런 주제이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억눌려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더욱 집고 넘어가야하고 수정되어져야 할 것이다.
책은 카톨릭 신자인 저자가 페미니스트인 자신을 대입시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을 구체화 하였다. 무수한 피햬(?) 사례들을 예시하고 있으며 우리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에 새삼 놀라게된다. 책에서 제시하는 성폭력, 성희롱, 성차별, 성 비하 등등 과 사회적 관심으로서의 낙태, 동성애 등등, 뭇한 사례들이 현재 발생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기억을 되새기게 되었던 기회였다. 여성은 남성의 반대인 둘중하나인 당연한 존재인데, 남성중심의, 남성위주의, 거기에 가부장적인 사회의 영향 아래 계획된 오래된 체제와 교육 하에서는 바른 판단과 기준을 찾기 힘들다. 그리고 오래시간 젖어든 사람들은 그 모든 것들을 당연시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간혹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다하더라도 암묵적 묵인과 동의로 함께 하게된다.
우리는 오래동안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진 사회를 살았다. 그러다보니 불합리를 모르게된다. 설령 안다해도 별로 변화되는 것이 그렇게나 반갑진 않다. 그러나 점점더 양성 평등의 세상에서 불합리가 어느 한쪽만이 일이 아니란걸 느끼며 살아간다. 남녀 차이에서, 강자 사이에서, 약자들 사이에서, 나이의 많고 적음에서, 등등 점점 버텨내기가 힘들어지는 사회를 살고 있다. 그래서 다들 알고 있다. 변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기득권의 조그마한 조각이라도 쥐고 있는 이들은 이것이 놓기가, 놓고 싶지가 않다. 포기해야 할 것들이 있기에. 그러나 그 이도 어느 틈새에선가는 차별을 받고 있다. 결국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변화되어질 수 없음을 말한다.
카톨릭과 기독교는 누구를 위한 종교인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인간이 없으면 신도 없다는 것을 잊지말자. 자신들의 기준으로 외면 했던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 호소하고, 어떤 이들은 옳지않은 방법들을 선택하기도하는 것이 정말 선한 일이고 합한 일인지를... 모두가 합하여 선함을 이루려한다면 모두의 뜻에 신의 뜻이 합쳐져야 함에 인간이 욕심이 훼방을 놓아선 안되겠다. 카톨릭과 기독교의 절대자이자 조물주인 신이 준 율법은, 인간을 올바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율법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을, 인간이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요구하지않았다. 좋은 아버지라면 자기 자식들에도 모순되는 명령을 하지 않는 법이다. 문득, 과거 모계중심사회에서 부계중심 사회로의 전환은 폭력만이 기억되는 듯하다. 그러나 다시 모계중심사회로 돌아선다하더라도 여전히 폭력은 그 자리를 지키려 들 것만 같다.
* 이 리뷰는 출판사 현암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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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에 대한 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다. 여성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고통에 대해서 용기있는 많은 여성들이 침묵을 깨고 세상에 대해 소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묵주반지를 낀 페미니스트』(현암사 펴냄)는 페미니스트이자 제도 종교의 신자인 저자 이동옥이 혼란을 겪으면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저자는 자신에 대해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페미니스트의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했고, 진보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또다른 용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를 전면에 내세우고 집필하는 과정이 힘들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상처받은 대중을 치유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하지만 종교는 오히려 남성중심의 교리와 전통에 얽매여 여성에게 묵묵히 고통을 인내하도록 요구해왔다는 말한다. 역사적인 사건들에서 보여왔던 모습과 더불어 현대사에서 여성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 첨예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모성의 가치에 중심을 둔 시각은 희생만을 강요받는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한편 여성은 임신, 출산, 낙태 등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생명존중을 중요시하는 종교사상과는 대립하게 되고, 사회적으로 여성의 권익을 주장하는 제도개선 요구사항에 대해서 그들은 반대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여성을 대변하지 못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성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종교지도자에 있어서도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성차별에 대해 비판한다. 카톨릭만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에서 이루어져 온 사례들을 통해 역사적으로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지배문화를 형성한 종교는 달랐지만 성평등이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어느 종교가 얼마나 성차별적인가를 말하는 것보다는 앞으로 성차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시정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종교내에서의 문제를 뛰어넘어 우리 사회전반에 내재되어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 말한다. 어쩌면 우리는 그 동안 외면해왔던 문제점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과 개선의 의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느낀 내 감정은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후회하게 된다. 결혼과 이혼의 의미, 사랑과 희생의 관계, 데이트폭력과 은폐되는 성희롱, 성소수자차별, 노인여성과 장애 여성의 문제, 여성들의 여행과 축제, 외모중심주의 사회 등 당연한 것 처럼 묵인되어 왔던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해서 저자는 말한다. 대학생 자녀를 두고 있는 나로서도 어느날 무심코 던지 말한마디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을 따올리게 되고, 변화는 큰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작은, 내 주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사회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변화의 모습은 포착되고 있지만 이는 제도적인, 법률적인 문제의 틀이며, 사회 전반적인 퐁토를 개선하는 것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여성들의 축제, 모든이의 축제를 희망한다. 지역적으로 다양하게 치러지는 축제에는 여성은 또다른 모습으로 고통과 함께 외면당하고 있음을 깨우치면서 이 책이 우리 안의 마리아 막달레나와 하와를 발견하기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한마당에는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이 초대 받았다. 이 사람들은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일 것이도 마음껏 축제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축제를 만들 것인가. 역사적 예수는 술마시고 취하고 놀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약자에게 눈길을 보냈고 본인의 모든 능력을 아낌없이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다. - 김흥열『축제의 사회사』-
해당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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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절반 이상이 종교적인 관점에서 쓰인 책이다. 그러면서 중간중간에 여성이 차별받으면서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각종 사건사고를 언급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우선 저자가 생각하는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모두 동의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균형적인 생각을 할 필요성은 있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종교의 창시자는 모두 남자였다. 그렇다면 남자가 창시한 종교에서 굳이 어느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고 머물러야 할까? 필자의 경우 어느 조직에 있든 간에 그 조직이 바르지 못하고 차별적이라면 그냥 떠나버렸다. 굳이 그곳에 연연해하며 나의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것은 필자의 생각이고 저자는 천주교, 불교, 이슬람, 유교를 가리지 않고 여성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여자와 남자를 떠나 사회적으로 불편과 차별적인 시선을 감내하면서도 머무는 이유는 미움받을 용기 혹은 사회적 시선에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 얼마 전 지인과의 대화에서 벌초에 대한 대화가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집안은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벌초에 동원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일은 하고 제사에는 절도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다. 이 책에서도 제사문화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 개인적으로는 벌초는 관련된 형제자매끼리 돈을 모아 벌초대행을 시키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유교를 언급하면서 정성을 말하기도 했지만 유교문화에서 벌초는 양반들 집안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양반들은 자신이 직접 벌초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하인을 시켜서 했다. 그럼 벌초를 직접 하는 집안은 하인 집안이라는 소리인가? 책을 읽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역할론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산다는 것을 보게 된다. 지금도 여러 곳을 가서 남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자기 프레임에 갇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필자가 요리를 하는 이유는 본인도 그렇지만 먹는 사람이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회복되는 것이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젊은 여성분들도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 참 많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 요리는 하는 사람과 먹는 사람의 소통이다. 그 소통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시사프로 등이나 뉴스에서 많이 등장해서 알겠지만 종교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이나 성폭력이 난무함을 알 수 있다. 책에서도 그 부분을 지적하는데 많은 할애를 했다. 종교라는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큰 울타리에 들어가려고 하는 동물은 초식동물들이다. 강한 동물은 울타리에 갇혀 무리 지어 지내지 않는다. 혼자서도 충분히 이겨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약하다고 해서 초식동물이 착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자궁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여성에게 있다는 것에는 동의를 한다. 그렇지만 생물학적으로 여성의 지위를 부여받은 이상 어쩔 수 없이 남성보다는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조금 바뀌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은 결혼과 출산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사회와 가족에게 강요받고 있는 것도 맞다. 자궁에 대한 자기 결정권도 존중하되 여성들도 왜곡된 결혼이라는 관점이나 사회적 시선에서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책에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유교문화는 생각만큼 갇힌 문화는 아니었다. 조선 말기 기득권들에 의해 왜곡되고 일제 강점기에 이해받지 못하면서 어설프게 그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종갓집 같은 문화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구분이 되어 있었을 뿐이지 불평등의 문화가 아니었다. 성향의 차이였고 역할이 달랐을 뿐이다. 성향적으로 남성의 성향이 강한 여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봉건시대에 있어서 삶의 한 방식이었을 뿐이다. 유교의 가부장적인 것을 주장하는 남자 중에 유교나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냥 우기는 것에 불과할 때가 많다. 변화와 소통을 통해 균형적인 시각을 가질 때가 온 것은 사실이다. 필자의 경우 여성에게 손에 닿을 거리에 있어서 도움을 요청하면 움직여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보지는 않는다. 남자들 상당수는 적극적인 보호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 이면에는 책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여자를 약한 존재이며 남자보다는 못한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당수의 여자들 역시 그것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주장은 양측의 입장을 모두 들어봐야 한다. 자신의 생각 방향과 달라도 접해보는 것이 생각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