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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검은 표지에 하얀 제목.. 확실히 눈에 확 띈다. 표지의 느낌도 그냥 종이같지 않다. 두껍지 않은 두께에 쉽게 읽을 수 있을것 같지만, 검은 표지는 그 내용의 심오함을 경고하는 듯하다. 저자는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라 인정받는 칼 바르트의 지인으로 칼 바르트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신학의 방향을 제시한다. 한 사람의 문학작품 속에서 신학을 찾아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근원과 하나님에 대한 열망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숭배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가능하지도 않고 표현도 불가능하다. 우리가 이해하고 표현하는 하나님은 이미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고 우리의 교만이고 기만이다. 그런 교만과 기만을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만의 중심에 교회가 있는게 아닐까. 그것을 깨닫고 하나님에 대해 알수 없음을 고백할때 진정한 믿음이 시작된다. 그것이 부활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승리하신다. 도스토엡스키의 작품을 읽은 기억이 너무 오래되어서 아쉬웠다. 죄와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정도는 꼭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톨스토이나 헤르만 헤세에 비해 도스토옙스키는 많이 어려웠다. 분명히 명작인데,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기는게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20여년전에 읽어보려고 했지만 마무리 짓지 못했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또한 칼 바르트에 대한 책을 이제 읽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해본다. #독서 #독서감상 #기독교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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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또예프스키의 책을 다 읽어낼 역량은 되지 않지만, 읽고 있자면, 늘 심연의 인간성과 그 인간들이 살아야만 하는 처절한 삶과 환경을 바라보게 한다. 톨스토이의 글이 그렇게까지 희생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게 한다면, 도스또예프스키는 살 수 있을까,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게 하는 사람들이 처절함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를 처절하게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은 처절함과 절망, 앞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돌아보도록 만든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더 깊이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
| 오.. 양장인 줄 몰랐는데 양장이네요. 가격이 너무 싼 것 같아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에 녹아 있는 신학을 알려 주는 책입니다. 근데 도스토예프스키 읽은 지가 오래돼서 인물이나 구절들이 잘 생각이 안 나서 잘 몰입을 못 했어요. 다음에 다시 읽고 시도하려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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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는 신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을 읽노라면 어떤 신학 책보다 인간의 실존을 신학적으로 탁월하게 묘사했음을 경험한다. 그의 글은 그 자체로 신학적 완성도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신학자들이 그의 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소설은 신학적 영감과 통찰을 자극했다. 하지만 방대한 그의 소설에서 명료하게 그의 신학을 제시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에두아르드 투르나이젠(Eduard Thurneysen, 1888 ~1974)은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을 신학적으로 탁월하게 해석해냈다. 그는 스위스의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다. 아마 투르나이젠은 칼 바르트(Karl Barth, 1886 ~ 1968)의 친구로 더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투르나이젠의 이 작품이 없었다면, 바르트의 위대한 작품(자유주의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폭탄)이었던 《로마서》2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차 세계대전은 당시 유럽의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신학적으로도 매우 큰 파급을 가져왔다. 당시 신학을 주도했던 자유주의는 인간의 종교심과 문화, 역사와 윤리로 세계의 역사는 계속적으로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세계대전의 여파와 자유주의자 스승들의 실망스러운 행동과 선택(이들은 적극적으로 히틀러를 옹호하며 지지했고 힘을 보태었다)은 새로운 언어와 논리가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투르나이젠은 바르트와 함께 인간으로부터의 신학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의 신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신학을 전개하기에 이르었다. 그러한 변증법적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 결정적 통찰을 준 것이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다. 투르나이젠과 바르트는 이 시기에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넓고 깊은 문학 세계를 통해 '타락 가운데 빠져들어가는 인간'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신학적 해석은 그의 강연을 다듬어서 나온 단행본이다. 이 책은 그렇기에 강연에서의 열정이 느껴진다. 짧지만 강력한 이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을 다층적으로 이해하고 깊이 연구하여 나온 결과물이다. 이 얇은 책에 담겨 있는 저자의 통찰과 이해는 도스토옙스키의 문학만큼이나 예리하고 신선하며, 풍성하다. 총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인간의 실존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질문과 해답을 적극적으로 모색한다. 또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가운데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기묘한 인간들의 다양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실존에서 시작하여 결국 도스토옙스키가 그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와 신학적 해석까지 나아간다. 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가장 유명한 대심문관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대심문관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인간의 종교와 교회 안에 숨어 있는 깊은 불신앙을,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실체를 폭로한다. 그런데 이러한 폭로의 목적은 그 반역을 옹호하고 합리화하고 긍정하는 것이다(115).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읽어야 한다. 물론 이 책만 읽더라도 날카롭고 명료한 신학의 정수를 맛볼 수 있지만, 더욱 풍성하게 이 글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이 책의 인용빈도와 중요도를 생각했을 때, 최소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읽고 이 책을 읽으면 많은 부분이 더욱 풍성하게 이해된다. 더불어 『죄와 벌』을 함께 읽었다면 더 좋고, 『백치』를 곁들인다면 금상첨화다. 이 세 소설을 중심으로 하여 논리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은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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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인간의 고통에 대하여 직시하며 그 고통 너머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반면 후자는 그 고통과 비극에 대해서 직설적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의 이런 면은 수도자 조시마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한 내용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이 땅을 사랑하라, 사랑의 감격을 추구하라,이 땅을 네 기쁨의 눈물로 촉촉이 적시고 너의 감격을 높이 치켜들라. 사랑의 감격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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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바르트의 친구인 투르나이젠이 도스토옙스키에 감명을 받아 쓴 젊은 날의 저작이다. 이 책은 제목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구매했다. 지옥으로 추락하는 자들이라는 워딩 자체가 도스토옙스키스러웠다. 혹자가 말하길 그의 소설은 어둠 속 깜빡이는 작은 불빛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것을 이 책이 가리키는 듯 보여서 구매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에 대해서 가톨릭적 해석도, 정교회적 해석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개신교 입장에서 도스토옙스키를 바라보면 어떨지가 궁금했다. 개신교의 신학은 오직믿음이라는 구호에서 요약되는 칭의를 강조하는데 인간에 앞서 신의 개입과 구원이 강조된다. 이 책은 신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세상의 악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인간과 신 그 경계를 드나드는 은총의 역설을 보여주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대심문관과 백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야기 중 가장 종교적 색채가 진한데, 이 책은 그에 대한 최고의 해설서이다. 이 책의 압권은 왜 도스토옙스키가 톨스토이보다 띄어난 작가인지에 대한 투르나이젠의 의견이 담겼는데 나 역시 도스토옙스키를 더 좋아하는 독자로서 공감하면서 읽었다. 다만 신학적으로 재미있는 소재가 많을 것 같은 악령을 잘 안다루는 점은 아쉬웠다. 그리고 분량탓인지 의외로 깊지 않다. 한병철의 철학책처럼 한문장 한문장 음미해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역작은 아닌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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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와 관련한 소설도 읽어 보았고 그의 관한 책들도 몇 권 읽어 보았다. 그의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만 머리에 있었지 무언가 확 와닿는 그래도 관심을 가지고 이래저래 읽는데 시간을 보낸 만큼의 결과물을 갖지 못하고 잇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 책을 만났다. 투루나이젠 이는 칼바르트와 관련하여 익히 알고 있었던 인물이기도 하고 칼바르트와 함께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고민을 나와 같이 많이 했었던 인물이었던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알고 싶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면모를 많이 알려주고 잇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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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유신론자인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작중 인물인 무신론자 이반을 완전히 극복한 것인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반이 쓴 소설 속 소설 「대심문관의 전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도전한다. 이는 자유와 빵의 문제로 주제화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긴요한 건 빵의 문제이지 자유의지에 관한 감당할 수 없는 선택적 문제가 아니라는 걸 무신론자 이반은 짧은 액자소설을 통해 강하게 웅변한다.
「대심문관의 전설」편이 기독교에 대한 역설적인 패러디라는 세간의 일반된 평가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수용하고 이해함에 있어 내 속에서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찝찝함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기독교를 옹호하는 입장과 비판하는 입장 모두 도스토옙스키를 애정 있게 차용하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톨스토이보다 정통 기독교 교리(및 신학)에 더 가깝게 읽히기 때문에 목회자와 신학생 사이에서 탐독이 권장되는 작가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 더 찬양받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니체, 마르크스와 함께 기독교를 가장 고약하게 기각하려고 한 프로이트는 도스토옙스키를 셰익스피어에 견주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장엄한 소설이고 대심문관의 이야기는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다"라는 아이로니컬한 찬사를 남겼다. 기독교를 허구와 망상으로 조롱한 프로이트가 도스토옙스키를 찬양했다는 점은 나에게 아이러니다. 사르트르의 선언 이후 독자의 해석권이 작가의 창작권을 압도하는 세계가 되었지만 작품의 핵심에 관한 이 다양한 해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처하기만 했다.
현대 신학자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은 앞서 말한 나의 고민을 충족시키기 충분한 책이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가 쓰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작품'이라는 소개가 눈에 띄었다. 그전까지 저자를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 강렬한 소개 문구에 혹했고 더불어 출판사 '포이에마'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또한 평소에 좋아하고 신뢰하는 석영중 교수의 추천사도 한몫했다.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석 교수의 여러 저작과 강의를 통해 러시아 문학의 조예를 넓히고 강한 도전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책의 두께는 상당히 얇다. 순수 분량만 따지면 한두 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완독하는데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기본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을 사전에 읽어두어야 진도가 나갈 수밖에 없고 저자의 문체가 문학과 신학을 동시에 담아내는 독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대한 유려한 주석으로 읽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은혜로운 기독교 철학 에세이로 읽히기도 한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주옥같고 아름답다. 명언의 나열이며 아포리즘의 향연이다. 이런 책을 이제서야 만났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다.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들, 가령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수시로 인용하며 자신의 신학론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말년의 역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이다'라는 웅대한 주제를 관통하는 작품이라고 해설한다. 저자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소설 속 소설 「대심문관의 전설」에 대한 주석이라 할 수 있는 「이반 카라마조프, 대심문관, 그리고 악마」라는 편을 아예 별도의 장으로 꺼내 32페이지에 걸쳐 구체적으로 해설한다.
나는 기존까지 「대심문관의 전설」을 '기독교 제도권 내의 오류와 모순을 은유한 작품'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즉 이반을 발칙한 무신론자로 인정한 뒤에 그가 쓴 패러디 안에서 기독교의 허실이 무엇인가를 탐색했다. 소설 속에서 이반이 상징하는 바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명확히 해설한다. 이반은 하나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음이다. 그 어떤 인생도 피해 갈 수 없는 절박한 질문, 즉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애써 외면함이다. 바로 이것이 악마의 장난이요, 인생을 지옥으로 만드는 힘이다." 그리고 저자는 정리한다. 자기의 인생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속이는 인생이 곧 지옥이라는 것을.
「대심문관의 전설」에서 이반은 자신의 모든 지식과 사상을 총망라하여 기존 종교와 교회를 겨냥한 가장 무시무시한 공격을 감행한다. 문제는 하나님이란 존재를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현실 속으로 구속시키려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반이 단순한 무신론자가 아님에 주목한다. 소설 속에서 이반은 절대악을 대표한다. 이반은 『죄와 벌』의 스비드리가일로프, 『악령』의 스타보르긴과 키릴로프, 『백치』의 로고진과 같이 지옥을 은유하는 인물이되 이들의 정신 파괴와 자기모순을 대표하고 집대성하는 악의 화신이다. 이에 배치되는 인물로 동생 알료사가 있지만 그는 이반의 도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가 소설의 2부를 알료사의 이야기로 채우려 했다는 건 이 공백의 의미를 독자에게 이해시켜준다. 요컨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미완이기에 여러 다양한 해설(결론)이 난무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완벽한' 작품이 되었을지 모른다.
사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 잘 읽히지 않는다. 전지적 작가의 완벽한 묘사로 독자를 자신의 작품 속으로 자상하게 끌어들이는 톨스토이와는 달리 등장인물 간의 장황한 대화에 거의 대부분의 묘사를 할애하는 도스토옙스키 식의 소설 전개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3년 전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을 때도 그러했는데 무언가 교정이 되지 않는 문장, 인물의 과한 표현과 언행, 어색한 상황 설정 등에 '이거 대문호가 쓴 위대한 역작이 맞아?'라고 의문을 가졌던 기억을 떠올린다. 저자는 나의 이러한 감상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의 소설이 터무니없다 싶을 정도로 무질서한데도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그의 소설이 표방하는 과격한 부정(否定)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부정에서 나온 훨씬 위대한 긍정 때문이다."라고 강변한다. 계속된 서술에서 저자는 도스토옙스키의 월등한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질문을 소개하고 해설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어떤 관점으로 읽어야 하는지 도전받은 건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톨스토이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조만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을 것이다. 3년 전 허리 수술을 앞두고 병상에 누워 인간에 대한 환멸과 삶의 녹록함에 지쳐있을 때 읽었던 소설이다. 감정을 절제하고 객관적으로 읽기 어려운 시기였다. 차분히 다시 읽어보려 한다. 이 고된 도전의 동기로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이라는 보물 같은 책이 존재한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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