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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반도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남북 간의 화해 무드 속에 평화의 정착에 대한 기대감이 급상승하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그런 평화가 가시적인 결과물로 나타난 성과는 거의 없기에 성급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평화를 위한 제반 여건들이 예전보다 훨씬 더 무르익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여기서 문재인 정부가 늘 강조하는 평화의 진정한 의미와 전제 조건들을 면밀히 따지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필요는 명약관화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그와 같은 평화의 진정한 의미와 전제 조건들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 김근수 교수가 쓴 『평화의 예수』다.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2천 년 전에 반목과 불화가 만연한 이 땅에서 오셔서 하나님의 평화와 화해를 자신의 활동과 사역으로 증언하셨던 하나님의 사신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는 기독교 경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이 땅에서 수행하신 행적들을 가장 논리적인 언어로 서술하는 요한복음을 꼼꼼히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현재 우리가 당면한 평화라는 문제를 이해하는 기독교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물론 종교를 대하는 다양한 관점 탓에 특정 종교의 경전과 그 경전에 대한 해설서를 읽는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단순히 특정 종교의 경전 중 일부인 책이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교리적 측면에 치우치기보다, 오히려 직면한 현안들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보편적 원리를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저자는 거의 2천 년 전에 기록된 아득한 과거의 책인 요한복음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현안에 대해서 제공했던 혜안이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원리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이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의외로(아니면 일반적으로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그리 호락호락한 작품이 아니다. 독서하는 데 여러 가지 면에서 주의가 필요하다. 우선, 이 책은 기독교 신학자가 기독교 경전을 풀어서 쓴 해설서이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가톨릭교(천주교)의 입장에서 그렇게 한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기독교로 통칭하는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표현이나 교리와 다소 상이한 경우가 많이 존재한다. 이 점은 천주교에 익숙하지 않거나 천주교 교리를 전혀 접해보지 않았거나 개신교의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의 경우라면 이 책을 읽기가 수월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다음으로 이 책은 그와 같은 가톨릭교의 입장 중에서도 흔히 ‘해방신학’이라는 더욱 구체적이고 특수한 관점에서 요한복음을 분석하고 해설하는 태도를 취한다(물론 ‘해방신학’이 단순히 가톨릭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 신학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해방신학’이 태동하게 된 기본적인 배경, 곧 정치적 압제와 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근본 사상에 초점을 맞춰서 요한복음을 해석한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 바로 해석의 문제, 곧 해석학(hermeneutics)의 문제다. 모든 해석은 아무런 전제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전제 없는 해석은 불가능하다”는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주장대로, 특정한 책에 대한 분석이나 설명은 일정한 전제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렇게 볼 때, 이 책은 앞서 말한 대로 해방신학의 모든 전제 위에서 기독교 경전인 요한복음을 해석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해방신학이 현실적으로 기독교 해석학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요한복음에 대한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기독교 해석의 함의를 충실히 반영하거나 거기에 완전히 부합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가령, 이 책이 핵심 화두로 상정하는 ‘평화’의 경우도 헬라어 신약성경에 사용된 에이레네[eivrh,nh]나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사용된 동의어인 샬롬[~Alv']은 단순히 정치적 맥락만을 염두에 두기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는 개념이다). 여기서 지적해야 하는 것은 해석(interpretation)과 적용(application) 간의 관계 설정이다. 해석(학)이 특정 문헌이 생성된 배경을 포함하여 그 문헌과 관련된 제반 요소들을 충분히 고려해서 가장 근본적이고 본원적인 의미를 밝히기 위한 노력이라면, 적용은 그런 노력의 과정을 통해서 밝혀낸 의미와 진실과 가치를 더욱 다양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구현하거나 그러한 환경과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 활용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렇게 보면 해석학은 적용의 기초 또는 전제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저자는 이 책의 많은 부분에서 양자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모호하게 혼합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가 현재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려해야 하는 평화와 관련해서 우리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기독교 경전의 한 부분인 요한복음에 대한 해방신학적 관점의 해석을 통하여 기독교적인 지혜를 제공하기 위해 시도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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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예수 - 평화를 선포하는 <요한복음> 해방신학연구소 김근수 소장이 바라본 요한복음 어떤 내용일까. 사실 이 책을 읽기전까지 해방신학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지금도 제대로 안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으면서 대략적으로 해방신학자들이 바라보는 하느님과 말씀이 어떤 방향인지는 알 것 같다.
<요한>을 1부 예수 증언의 책, 2부 예수 영광의 책으로 나누고, 다시 각 부는 1막에서 4막 A, 4막 B에서 7막으로 나뉜다. 1부가 예수 증언의 책인 것은 <요한>1장의 도입부가 창세기와 연결되어 있고,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증언하러 오신 예수의 증언과 관련되어 있었다. 저자는 말한다. 세례자라는 표현보다는 오히려 증언자 요한이라 부르고 싶다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요한.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증언하는 우리 사람들은 그렇기에 누가 누군가를 업신여길 수 없다고도 말한다. 2막은 <요한>2장,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포도주 기적에 대해 이야기 한다. <요한>에서는 7가지의 표징이 등장하는데 첫 기적은 포도주가 바로 그 첫 표징에 해당된다. 4막 A에 해당되는 8장의 내용을 들려준다.
해방신학으로서 분석한 <요한>이라서라고 단언할 순 없지만 '저항'이란 단어에 생각이 깊어졌다. 하느님의 아들로, 인간을 위해 '희생' 혹은 '사랑'을 실천하고자 죽음을 선택하신 분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다. 내게있어 저항은 의지의 표출이라기 보다는 순종의 반대개념으로 먼저 다가와서 그런 것 같다. 2부는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시고 부활하시는 20장까지의 내용이 담겨있다.
한국의 가톨릭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들을 때 마다 자부심을 갖게 된다. 저자의 말처럼 200여년 전 한국 천주교 초기와 지금은 다르다. '평화'를 기대하는 것과 구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것이 공동체, 민족 혹은 그 이상의 광대한 전 지구인이 아니라 가족, 심지어 개인 한 사람을 위한 평화에 머물러 있다. 저자가 발췌해온 것처럼 가난한 사람 편에 서서 가난 한 사람을 보호하는 이들만 박해를 받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왕의 권리를 무시하고 계급을 허물려는 평등의식이 박해를 불러왔다는 것만 떠올려봐도 알 수 있다. 그동안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지극히 사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성서를 공부하는 나의 자세도, 또 그 진행속도도 느릴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왜, 무엇을 위해 성서를 공부하는가.'라며 서문에서 물었는데 그에 대한 답변부터가 그동안의 나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자인 저자는 말한다. '가난한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역사의 희생자를 편들기 위해 성서를 공부한다. 불의로 가득한 세상을 뒤집어엎고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성서를 공부한다.'(12쪽) 덕분에<요한>을 풀이한 본문에 진입하기 전에 프롤로그, 그리고 요한 서문을 해설한 몇 페이지 안되는 적은 분량을 오래도록 읽고 노트에 빼곡하게, 때로는 책에 직접대고 나름의 변명과 답, 혹은 깨달은 바를 적어가며 읽었다. 해방신학자인 저자의 의견에 모두 공감했던 것은 물론아니다. 크게 정리하자면 <요한>을 포함한 성서는 환난시절에 쓰였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시절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렸다. 로마에 압제에 시달리던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금의 한반도도 마찬가지다. 현재 한반도는 분단국이며 휴전국이다. 그런 한반도에 마치 유다인들이 그러했듯 우리를 구원해줄 혹은 그럴 수 있도록 한마음으로 바라는 '절실함'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의 한반도에는 평화가, 그리고 평화의 내용을 담은 <요한>을 저자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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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예수’를 기리는 이유 - 김근수, 『평화의 예수』 천주교나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를 이야기한다. 어떤 예수일까?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는 예수다. 간음한 여자에게 사형에 처하라는 사람들을 보며 죄 없는 자 이 여자를 치라고 외치는 예수이다. 원죄를 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진 예수이다.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예수를 나는 좋아한다. 종교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이다. 나는 예수를 좋아하고, 부처를 좋아한다. 부처를 좋아하는 만큼 예수를 좋아한다. 자비를 말한 부처와 사랑을 말한 예수를 같은 맥락에서 좋아한다. 그들은 말로만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 실천을 했다. 부처는 깨달음을 수많은 이들에게 전파했고, 예수 또한 사랑으로 많은 이들을 맞이했다. 지은이는 이런 예수의 모습에서 평화를 보고, 사랑을 본다. 분단된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을 평화로 이끌고, 사랑으로 이끈다. ‘해방신학’이란 다른 게 아니다. 평화와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교회는 돈과 권력이 없어야 권위가 생긴다. 돈과 권력을 자랑하는 종교인에게 참된 권위는 없다. 사회에도 교회에도 지배층이 있고 지도층이 있다. 돈과 권력을 자랑하는 종교 지배층이 있고, 실천으로 존중 받는 종교 지도층이 있다. 종교 지배층이 곧 종교 지도층은 아니다. (68쪽) 사마리아 여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에게 종교적-사회적으로 차별받으며 유다인 지역에 포위되어 살았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 남자에게도 억눌렸다. 사마리아 여인은 정치, 종교, 문화에서 희생자가 되어 말을 잃었다. 예수가 그런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예수는 가장 큰 희생자에게 먼저 다가간다. 제주 4․3 사건 때도 여인의 고통은 말할 수가 없었다. 전쟁과 학살의 첫 번째 피해자는 언제나 여성이었다. 종교에서도 여성은 희생자 신세였다. 가난한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여인이다. 해방신학에 여성신학이 포함된다. (111~112쪽) 한국 교회는 돈과 권력이 지배한다. 돈과 권력은 대물림된다. 돈이 많은 교회는 그래서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준다. 이런 종교인들에게 그 누가 권위를 부여할까? 종교인들은 늘 믿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엇을 믿으라는 것일까? 돈과 권력을 믿으라는 것일까? 아니면 돈과 권력을 지닌 종교인들을 믿으라는 것일까? “종교 지배층이 곧 종교 지도층은 아니다.”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문제는 종교 지배층이 종교 지도층을 압도하는 현실이다. 종교 지배층은 남성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 사마리아 여인 입장에서 생각을 한 예수와는 다른 길을 걷는 셈이다. 지은이는 가난한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여인’이라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장 큰 희생을 당하는 사람들은 여자들이다. 여자들 중에서도 가난한 여자들이 가장 큰 고통을 당한다. 이런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종교가 어떻게 사랑을 베푼다고 할 수 있는가? 윤리적 처신이 심판 기준이다. 이 말은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바오로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믿음으로 구원을 내세운 바오로도 선한 일을 하고 윤리적 처신을 올바로 하라고 끊임없이 권면했다. 윤리적 처신과 관계없이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생각은 바오로나 성서를 한참 잘못 이해한 것이다. 선한 일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은혜를 무시하거나 인간 혼자 힘으로 구원을 쟁취한다는 말이 아니다. 구원을 선포하신 하느님이 심판하는 말하는 것이 모순이 아니듯,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생각이 선한 일을 행하고 윤리적 처신을 올바로 하는 일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구원을 선포하는 하느님과 일치하는 예수는 29절에서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단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146쪽) 윤리적으로 행동한 사람만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생명의 나라로 들어간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예수가 이 세상에 와서 무슨 일을 했는지 생각해 보라. 기적을 일으키는 과정에서도 예수는 하느님의 뜻을 이야기했다. 하느님이 왜 기적을 행한 것일까? 믿으라고? 무엇을 믿으라는 말인가? 하느님만 믿으면 윤리적으로 처신하지 않아도 된다고 누가 말했는가? 지은이는 하느님을 믿으면서 윤리적으로 처신하는 사람만이 생명의 나라로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럼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종교인들은 이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지은이 논리대로 보면 악한 일을 한 그들은 단죄를 받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는 마음껏 돈을 쓰고 권력을 휘두르며 떵떵거리며 살지 몰라도 죽어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단죄를 받아야 한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는 사랑을 강조했다. 사랑은 마음껏 베푸는 마음이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는 어떻게 오천이 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었을까? 기적은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오천이 넘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와 같은 절대자라고 해도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 예수는 오로지 사랑만으로 기적을 일구었다. 돈과 권력으로 기적을 이룬 게 아니다. 하느님의 힘이라고? 하느님의 힘이란 게 어디 돈과 권력에서 나오던가? 하느님이 예수에게 부여한 힘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성령을 부른다. 온몸에 성령이 깃든 사람들은 사랑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온몸으로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는가? 예수는 죽음으로 사랑을 실천했다. 십자가에 온몸이 박히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예수는 사랑을 실천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절대자로 기리는 이유이다. 라자로의 부활 이야기는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죽음을 극복하고 세상에 생명을 주며 제자들의 두려움을 이기는 예수를 알아채라는 뜻이다. 예수의 기적은 기적에서 머물지 않고 십자가로 향한다. 예수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한다. 예수는 다른 사람이 십자가에 올라가지 않도록 자신이 십자가에 올라간다. 예수의 영광과 십자가는 서로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보완한다. 라자로를 살리는 기적이 예수를 십자가로 이끌었지만, 예수는 결국 영광에 이를 것이다. (297쪽)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상황만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어디에 있을까? 예수는 나흘 전에 죽은 라자로를 살린다. 지은이는 이런 예수의 기적에서 십자가로 향하는 예수를 본다.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기적을 행하며 예수는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죽은 이들을 살린 예수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한다.” 자기 목숨을 희생하기 위해 예수의 기적을 보는 지은이의 생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은이는 십자가에서 예수의 영광을 본다.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써 예수는 하느님의 뜻을 온 세상에 전파한다. 하느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통해 도대체 어떤 뜻을 전달한 것일까? 희생이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희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자기 목숨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예수는 생명을 부여받은 자라면 지니는 본능을 넘어선다. 본능을 넘어선 곳에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예수의 윤리가 뻗어 나온다. 십자가 신학은 어떤 십자가를 말하는가. 인내와 복종의 신학?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십자가에서 저항을 보지 않고 인내와 죽음만 보는 경우를 멀리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구원을 가져다준다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다. 예수의 어떤 말과 행동이 로마 군대와 유다교 지배층에게 위협이 되었는지, 예수가 누구에게 왜 저항하여 정치범으로 체포되고 십자가 처형을 당했는지, 누구 무엇을 위해 예수를 죽였는지 아무 관심이 없는 태도다. 예수를 이해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이용해 먹으려는 심보다. 로메로 대주교가 살해된 사실만 보고 왜 살해당했는지, 누가 죽였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 안 된다. (342~343쪽) 지은이 말마따나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고 방해하는 사람과 세력에 저항했다. 그는 정치적 억압, 경제적 가난과 불평등, 종교적 차별, 사회적 소외, 여성 차별 등 나쁜 제도와 관행에 저항했다. 이런 저항이 없었다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지은이는 성서를 “투사의, 투사에 의한, 투사를 위한 책”(344쪽)이라고 말한다. 수많은 기적을 행했는데도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들조차 예수를 의심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릴 때도 군중들은 죽어가는 예수를 조롱했다. 사람들을 위해 기적을 베풀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예수로부터 멀리 달아나려 했다. 그들은 왜 그런 것일까? 미래를 위해 현실을 단념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기가 사는 현실을 버리고 생명의 세상을 기대하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예수는 지배층의 허위와 싸우면서, 믿음 없는 군중들과도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예수가 투사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투사가 될 수 있을까?
과월절을 하루 앞둔 날 예수는 열두 제자의 발을 하나하나 씻어 주었다. 발을 씻는 의식을 마친 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스승이 한 일을 본받으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종이 주인보다 더 나을 수 없고 파견된 사람이 파견한 사람보다 더 나을 수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자신이 한 말을 실천하는 예수를 기린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는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인간에게 실천했다. 열두 제자의 발을 씻기는 마음으로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본다. 제자들 능력이 뛰어나서 예수가 발을 씻어준 것은 아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었다. 스승이 겸손함을 보이는데 어떻게 제자들이 오만한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여성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지은이는 해방신학이 여성신학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아픔을 모르는 종교를 제대로 된 종교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는 모습은 그리스도교 윤리뿐만 아니라 교회론에서도 핵심 주제다. 어떤 교회를 만들어야 할까. 가난한 교회, 평등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가난한 교회와 평등한 교회를 요청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가난한 교회를 제시해야 하고, 불평등한 세상에서 평등한 교회를 실천해야 한다. 돈의 위력에 굴복하지 않는 교회, 불평등에 맞서 싸우는 교회를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대안이 되기에 부족하다 해도, 세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작은 빛이지만 빛이다. 오늘날 가난한 교회는 많이 이야기되지만, 평등한 교회를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왜 그럴까. 그리스도교는 가부장주의는 좋지만 평등은 싫은가. (358~359쪽) 예수는 제자들에게 서로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예수처럼 사랑을 하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덧붙여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습니다.”라고 강조한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이유는 무엇일까? 절대자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다. 예수는 스스로 사랑을 실천했다.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짊어졌다. 예수가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란 얘기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정언명령’과 같다. 예수를 믿는 종교인들은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가? 가난한 이들에게 윤리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한국의 기독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돈과 권력에 물든 종교인들이 어떻게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를 실천하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느님을 안다는 말은 사랑을 안다는 말이다. 사랑을 아는 사람은 하느님을 안다. 안다는 말은 실천을 포함한다. 하느님과 예수의 이름을 모르고 어떤 분인지 몰랐다 해도, 사랑을 아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을 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른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하느님과 예수의 이름을 알고 어떤 분인지 안다 해도 아직 하느님을 모른다. (444쪽) 교회는 성례전에서 빵과 포도주를 생각하기 전에 가난한 사람의 식량을 생각해야 한다. 종교인이 자기 먹을 것만 생각하고 신자나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는가. 가난한 사람이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 세상에서, 신부나 목사가 먹을 것이 없으면 왜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가. 가난한 사람은 수없이 굶어 죽었지만, 신부나 목사가 굶어 죽는 일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신부나 목사가 가난하지 않다는 현실이 그리스교의 큰 스캔들 중의 하나다. (528쪽)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말로 지은이는 책을 마무리한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면 예수 또한 사랑이다. 누구를 향한 사랑일까? 가난한 이를 향한 사랑이다. 하느님과 예수의 이름을 알아도 사랑을 모르면 그는 아직 하느님은 모르는 거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사랑을 모르는 신부나 목사는 가난한 자가 굶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가난한 자를 위해 교회를 짓는 게 아니라, 돈과 권력을 위해 그들은 동양 최대, 세계 최대의 교회를 지으려고 한다. 겉만 번지르르한 한국 교회의 현실을 지은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을 실천한 예수와 비교한다. 우리는 왜 예수를 믿는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인가? 예수는 천국에 가려면 먼저 가난한 이를 사랑하라고 했다. 가난한 이를 사랑하는 대신 돈과 권력을 사랑하는 종교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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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인 저자가 고찰한 해방신학적 관점의 요한복음 시선인 "평화의 예수"가 말하고자하는 이면에는 "시대의 아품과 희망을 안고 요한을 보자"고 말하고 있다. 모두 아다시피 요한복음은 현실적인 예수님의 사건들은 보여지지 않지만 직접 경험한 요한의 시선을 통한 권면과 교훈들을 들어내 현실을 바로보고자하는 시각, 당시의 이단인 영지주의에 현혹되지말고 현실적인 공감과 아품에 동참하며 느낄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저자인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품고있는 대주제의 이면엔 아마도 기존의 시각과 다른 시선을 안고있는 저자만이 봤고 혹은 보고자했던 것일듯 싶다. 그것은 저자도 말했다시피 우리만이 안고있는 남북분단의 사상적 현실과 평화적 통일을 요망하는 특수한 상황도 있는듯 하다. 그런의미에서 저자가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 세상속에 있는 요한은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 뜬구름만 잡는 사람, 저자가 말한 가현설속에 존재하는 믿음을 경계하라는 것이라리라. 또한 진취적이고 정신차려 살라고했던 요한과 해방신학자인 저자가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이웃의 힘겨운 삶, 억압과 불평등, 평화적 남북통일, 현실적 본질 직시하는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한가지는 요한복음에 평화라는 단어가 나오는지는 잘 모르겠다. 평화라는 단어가 나온다면 놀랍기도 한 반면에 저자가 보고자한 진리, 지극히 2018년 마지막을 관통하고 있는 대한민국에게 하고싶은 언어들이 2천년전의 예수 입에서 나온 진리들과 무엇이 다른지 확인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응원하고 싶다. "멈추지말고 앞으로 나가시오, 두려워하지 마시오"라는 이면엔 아마도 언제까지나 가시밭길을 걷는 정의는 아스팔트를 달리는 불의 앞에 고난의 길이란 영원하다는 생각은 아닐지 생각해봤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요한복음서, 3장 16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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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예수 (김근수, 동녘, 2018.11.5) 신학은 말을 가르치지 않고 실천을 가르친다. (Facere docet Theologia, non dicere.) 『평화의 예수』를 읽으면서 다각적으로 공부가 되었고 예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이 책은 성경을 해석적 차원에서 (이해로) 평가하듯 읽은 것이 아니라 배우듯이 읽혔기 때문에 못 봤던 면과 보았던 면에 대한 깨달음과 공감이 유익이 되어 종교나 가르침에 대해 얻은 바가 크다. 특히나 추상적 예수가 아니라 아브라함 종교로부터 시작된 예수가 자란 삶 안에서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에 대해 모세의 율법을 통한 은혜가 아니라 예수로부터 받은 일상과 평화를 (명사가 아니라) 동사, 행한 것을 말한 것 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보다 큰 종교적 은사로 재생再生 전해오는 바가 있다. 『왜 무엇을 위해 성서를 공부하는가? 가난한 사람을 먼저 사랑하고 역사의 희생자를 편들기 위해 성서를 공부한다. p.12』 『나는 이 책을 해방신학 관점에서 썼다. <요한>을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보려고 애썼다. 우리 시대의 징표인 여성의 목소리도 담아내려고 애썼다. 성서학계의 연구 성과를 두루 참조하고, 한반도의 역사와 운명을 의식했다. 급변하는 한반도 상황을 몸으로 느끼며 책 제목을 《평화의 예수》라고 기쁘게 지었다. p.13』 남미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한 신학자 저자는 요한복음에서 강조한 ‘생명’과 ‘평화’의 의미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또한 국내 최초로 4복음서 주석서를 모두 쓴 저자는 평화의 예수를 통해 사람들이 예수를 더욱 가까이 이해할 수 있기를 책에서 직,간접적으로 거듭 표현하고 있다. 사실 복음서 해석은 여러 면에서 쉬운 일은 아니며, 내외적으로 반가운 일 또는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인데 그의 주석은 성서신학과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글을 써내려 온 것 같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상태뿐 아니라 정의 실현을 뜻한다. 한반도에 전쟁이 없어야 하고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한반도에 드디어 평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선물이요, 조상의 피땀 어린 희생 덕택이다. 평화는 하느님의 선물이자, 우리 노력의 열매다. 평화를 기다리지 말고 평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P.13』 저자의 저서에서 언급하길, 바오로 사도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강조했지만 『마르코』, 『마태오』, 『루카』는 ‘하느님 나라’라는 단어를 강조한 반면 『요한복음』은 ‘생명’을 강조했다. ‘생명’이라는 단어는 매우 추상적이지만, 가난한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 전쟁의 억압 속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이야기, 불의에 시달리는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 (동사, 행동하는 이야기)는 우리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자가 표현한 요한복음은 21세기 한반도에 ‘평화’라는 단어를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 보는 예수와 부자가 보는 예수는 같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보는 복음과 부자가 보는 복음은 같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보는 그리스도교와 부자가 보는 그리스도교는 같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와 부자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절실함이 크게 다르다.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좋겠다.’』 ? 저자의 인터뷰 중에서 (가톨릭프레스 18-11-13) 세상에는 ‘생명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는’ 『에로스』와 ‘죽음의 욕구’인 『타나토스』가 공존한다 (프로이트)는 말에서 공감하는 생명과 죽음에 관한 욕구가 세상 안에 존재하듯 이것은 같은 목적아래 두 가지 욕구의 방법으로 들어날 때도 있다. 또는 지배계층이나 시대의 기득권자의 방향성에 따라 역사의 운명은 좌우되며 그의 기록이 남아지고 후에 평가되어 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최대의 희생과 최소의 희생이 되는 계층은 너무나 판이하게 달라지지 않는 것도 실상적이 역사일까? 역사의 역사는 반복된다. 이것은 언제쯤이나 해갈 될까? 이 즘에서 『종교의 목적』과 『하나님의 나라』는『생명과 사랑』으로 귀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땅의 하나님나라 안착을 말이다. 기적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가현이 아니라 역사 실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해방신학은 말한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이 생명을 빼앗기지 않고 누리며, 가난한 사람이 억압받고 굶주리는 어둠이 아니라 빛인 삶이 곧 하느님이 바라시는 삶이다. 나는 창조, 생명, 빛 같은 단어가 아름답고 추상적인 단어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구체적인 단어임을 밝히려 한다. p.37』 『<요한>이 예수가 하느님을 해석한 분이라고 강조한다면,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이 예수를 해석한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요한>이 예수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말한다면, 해방신학은 가난한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을 말한다… <요한>을 해방신학 관점에서 해설하려 한다. p.37』 『<요한>서문을 종교사적 모델부터 설명하는 방법도 좋다. 그러나 <요한> 저자는 왜 서문을 지금 상태로 썼을까. <요한>은 예수의 역사를 설명하고 싶었는데, 왜 서문을 천지창조 때 하느님이 하신 말씀으로 시작했을까. 두 가지 궁금증을 품고 예수의 역사에 본격적으로 다가서자. 말씀은 역사가 되었다. <요한>의 핵심은 역사다. p.37』 *여기서<요한> 저자는 <요한>과 같은 뜻으로 이해 말씀은 존재를 낳았고, 존재는 생명을 얻었다. 종교를 믿던 안 믿던 간에, 또는 종파가 어떠하던 간에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사람 중에서 예수라는 분에 대해 어떠한 면에서 메시아(‘세상의 구원자’,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 불리 우는지 알아볼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 인류에 대표적 성인 중 예수 그를 통한 역사는 가히 대단한 일이다. 인격, 생각, 삶을 알아가고 기원전B.C(before Christ)가 예수님력으로 내려올 만큼 세계사에 영향을 끼친 분 그냥 아는것 보다 좀더 가까이 볼수 있으면 좋겠다. 좋은 것, 훌륭한 것, 아름다운 것과 함께하는 동안에 존재 또는 존재자(존재로 인한, 존재자로 인한 믿음) 하나님의 역사(역사의 영향력)는 파괴보다는 평화와 일상과 가난한 자를 보살 피는 것, 아픈 자리를 채워가는 것, 그 빈자리에 평화의 꽃이 피워나게 하는 것으로 승화 시켜야 할 몫이 예수의 사랑이자 하나님나라의 실현, 실천, 우리 인류가 배출한 뛰어난 생명의 구원자가 되지 않겠는가. (그럴려면 예수를 잘 알고 이해해야겠다. 이건 어찌 설명해야 할지 ~ 각자의 생각의 장으로 던져 두고 싶다. 자~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역사하고 임하시지 않겠는가. 역사가 보여주는 예수는 은총 그-자체 라고 이 책을 읽는 이순간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러나 역사이고 실천이다. 그리고 그 어떠한 것으로도 평화와 사랑으로 해방해 나가야 한다. 긴 창조의 역사로부터 하나님의 복음(또는 복이 오는 기쁜 소리)자리까지. 예수님의 희생으로 해방된 자리가 평화와 복음의자리 그리고 생명(과정, 창조)의 전파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은 왜 메시아를 기다렸을까.. 선포가 먼저일까. 해방이 먼저일까. 샬롬! 그리고 예수님을 좀더 가까이 하지 않을까. 살롬 예수!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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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예수 - 김근수 어릴때부터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미천한 인간의 몸으로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낮아지셨다. 그리고 해방신학은 그 부분을 보고 따르는 삶을 살고자 한다. "<요한>을 희생자의 눈으로 보자. 예수, 가난한 사람, 역사에서 무수히 학살당한 희생자의 눈으로 <요한>을 보자. 희생자의 입장에 서지 않는 사람은 성서도, 그리스도교도, 하느님도 올바로 이해하기 어렵다" - p.94 "예수는 가장 가난한 사람인 여인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자신을 낮췄다. <마르><마태><루가>도 변방의 소외된 사람에게 먼저 다가서는 예수를 소개한다. <요한>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병들고 가난한 사람을 먼저 찾았다. 오늘 그리스도교는 예수처럼 하는가. 우리도 그렇게 사는가." - p.124 저자는 요한복음을 설명하면서 계속 가난한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친히 낮아지심으로 자신을 본받으라 하시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 우리는 계속 낮아져야 한다. 희생당한 자와 함께하고 가난한자를 먼저 찾아야 한다. 교회가 그렇게 해야하고 개개인이 그렇게 해야 한다. "7절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은 심각하다..... 예수는 세상의 악을 모른 체하고 침묵하는 사람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고 그저 침묵하는 사람이 아니다." - p.185 세상의 악에 저항해야 한다. 침묵하지 않고 저항해야 한다. 믿음으로 나아가는것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저항하셨다. 우리도 저항해야 한다. 삶 가운데 저항하며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낮은자, 희생당한 자, 소외받는 자들과 함께 소리를 높여야 한다. "유다인이 예수에게 시비를 건 근거는 학력, 인신공격, 출신 지역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악의 세력이 써먹는 수법은 비슷하다." - p.188 분명히 많은 저항이 있을것이다. 심지어 기성 기독교에서도 저항이 있을 것이다. 다양한 무기로 공격해 올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세력에 저항함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도 거짓을 물리치고 진리를 드러내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의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한다. 한편, 우리도 그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공격하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그들마저도 사랑으로 안아주셨다. "거룩한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는 가장 비난받는 유다에게도 빵을 나눠주셨다. 제자는 스승을 배신할지 몰라도 스승은 제자를 버리지 않는다." - p.37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가 따르지 못할지라도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다시 주님을 따르고자 결단할 수 있다. "자기 종교의 부패에 침묵하는 착한 종교인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뿌리까지 썩어가는지도 모른다." - p.383 기독교는 다시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 주님의 뒤를 따를때, 기독교 내부의 잘못도 솔직히 고백하고 변화를 위해 노력할때, 부패에 침묵하지 않을때 기독교에 다시 주님의 사랑이, 평화가, 생명이 함께 한다. "인간의 노력이 거절되고 하느님 혼자 누리는 잔치는 없다... 하느님은 인간의 노력을 존중하며 기특하게 보신다." - p.528 주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력을 덤으로 생각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노력을 통해 이루어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은자들과 함께 노력해야 한다. 교회의 부패에 대해 소리를 높여야 한다. 변화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 "팽목항에서 목 놓아 우는 여인이 성당에서 경건하게 미사 봉헌하는 신부 못지않게 거룩하다. 경찰과 몸싸움하며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새벽기도에서 두 손 모은 성도 못지않게 예수와 가까이 있다." - p.293 말씀은 그 시대와 함께한다. 시대를 잃은 말씀은 생명을 잃는다. 시대의 아픔과 함께할때 그 안에서 말씀은 생명을 얻는다. 아픈 이들과 함께할때 거룩해진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다. 책을 읽으며 정말 많은 생각이 머리속에 스쳐지나갔다. 낮은자와 함께하는 하나님, 실천하는 삶, 시대에 맞는 말씀, 교회의 부패와 사회로부터의 외면, 악으로부터의 저항, 인간의 노력 등...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 그러나 우리 교회는 낮아지고 있을까. 나는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가.. 높은 자리에서 낮고 어려운 이들을 멀리서 편하게 돕는다고 핑계대고 있자는 않은가.. 아니 그들이 정말 낮은 이들인가.. 오히려 그들이 더 주님과 가까이 있는 이들이지 않은가.. 잘 생각해보면, 기독교 책을 볼때 몇몇 저자를 제외하고는 국내 저자보다는 외국 저자를 선호했다. 국내 저자는 객관적이기보다 국내 기독교를 옹호하거나 외면할것 같다는 막연한 의심도 있었던것 같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저자들에 대한 동경도 있었던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그런 선입관이 확 깨진것 같다. 저자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사복음서 해설을 마무리지었다는데, 다른 복음서 해설서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일단 카트에 넣어두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기독교 #요한복음 #독서 #독서감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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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어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람이 되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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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해방신학자가 새롭게 해석한 <4대 복음> 해설서의 완결판이다.
초대교회는 예수가 주님이요 구세주요 하느님과 일치하는 분임을 소개하는 것이 선교 활동에 거의 전부였다. 그리스도론만 해설하면 예수에 대한 믿음을 초개하기에 충분했다.
"예수가 하는 말은 힘이 있다.
예수는 내부 고발자다. 침묵이 종교에서 의미 있다고 칭송되기도 하지만, 침묵만 하는 사람처럼 가벼운 사람도 없다. 침묵은 악이요 아편이다. 침묵은 힘이 있으나, 침묵만 하는 사람은 아무 힘이 없다.
요즘 시대에 진정한 종교인이 어디 있을까?
여러 이름 있는 교회에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는 기독교인들이 많다.
"목사나 신부로 평생 산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아니다.
부활한 예수는 꼭 제자들에게 나타났다고 한다.
한반도에 지금 화두는 '평화적 통일'인 것 같다. <요한>에서 평화의 예수를 배우고 따라야 한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 그 길 끝에 예수가 있을 것이다.
조만간 교황이 평양을 방문하게 된다. 그 시간이 종교적, 역사적, 정치적인 시각을 떠나 고통과 분단의 기나긴 시간을 감싸주고 치유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