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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 『선禪, 빈 거울에 담긴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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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오쇼 라즈니쉬, 『선禪, 빈 거울에 담긴 노래』       라즈니쉬는 불성(佛性)은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불성은 이미 그대의 본성이라는 게 그 이유이다. 견성(見性)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 본성을 본다는 말이다. 견성한 사람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견성은 밖에 있는 것을 얻는 게 아니다. 견성은 제 마음에 있는 것을 그저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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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 오쇼 라즈니쉬, 『, 빈 거울에 담긴 노래』

 

 

 

라즈니쉬는 불성(佛性)은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불성은 이미 그대의 본성이라는 게 그 이유이다. 견성(見性)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 본성을 본다는 말이다. 견성한 사람만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견성은 밖에 있는 것을 얻는 게 아니다. 견성은 제 마음에 있는 것을 그저 깨닫는 것이다. 불성은 얻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기억하는 것과 같다.”(22)는 말에 나타나는 대로, 우리 안에 있는 불성을 떠올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 라즈니쉬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철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스승은 제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는 게 아니다. 가르침이 있으면 이해가 따라야 한다. 이해는 지식과 이어져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지식이 개입하는 순간 깨달음은 저 멀리로 날아가 버린다.

 

나이를 먹으면 우리 마음에는 오래된 신념이 자리 잡게 된다. 딱딱하게 굳어진 신념은 그만큼 바꾸기가 어렵다. 라즈니쉬는 우리 마음에 내재된 잠재성을 성장시키는 가장 좋은 시기를 유년 시절로 본다. 하지만 유년 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을 어른들이 어디 그냥 놔두던가. 유년 시절을 보내는 아이들의 백지 같은 마음에 어른들은 온갖 사회 통념을 집어넣는다. 한국사회만 해도 다르지 않다. 아이들은 사는 장소와 집 평수로 등급을 매긴다. 집 평수가 넓어도 사는 곳이 별로면 친구로 인정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이런 통념을 지니고 태어났을 리는 없다. 어른들이 삶을 보는 방식대로 아이들은 삶을 보려고 한다. 어른들이 주입한 생각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아이들은 성장한다.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어른들이 도리어 요즘 아이들은 예의가 없다고 비난한다. 아이들을 비난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라. 지금 아이들이 하는 행동은 우리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그대로 닮았다.

 

라즈니쉬는 그래서 진정한 종교는 청년기에 의존해야 한다. 왜냐하면 청년기에는 혁명적인 기질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43)라고 주장한다. 젊은 사람은 아무 죄책감 없이 과거 전체에 반기를 들 수 있다. 기성세대가 세운 과거에 반기를 듦으로써 청년들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 미지의 세계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온갖 사물들이 널려 있다. 인간의 해석이 덧붙지 않은 사물들이다. 그곳에서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만든 세계에는 없는 낯선 것들을 만난다. 낯선 것들은 사회 통념으로는 의미화할 수 없는 것들이다. 기성세대와 청년 세대는 왜 대립할 수밖에 없느냐고?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지키려고 하고, 아무것도 없는 청년들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바꾸려고 한다. 지키고 바꾸려고 하는 두 세대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이 싸움의 결과는 언제나 청년 세대로 기운다. 사회는 언제나 변화를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승들 간에는 라이벌 의식이 없다. 그들은 똑같은 목적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르치는 방법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은 한 가지 점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탐구가 무엇보다도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수행자는 알맞은 장소, 알맞은 스승에게 보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를 보내는 스승은 스승의 자격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스승의 방편이 어떤 제자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다. 설령 호적수인 다른 스승에게 제자를 보내야 한다 해도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 나는 깊은 관심을 갖고 말한다. 왜냐하면 현대에는 진리에 대한 절박한 풍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에는 수천 명의 사이비 스승이 있다. 그들의 모든 노력은 얼마나 많은 추종자를 긁어모으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 또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144~145)

 

()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특별하다. 스승은 기성세대와 생각을 달리 한다. 그러므로 억지로 지켜야 할 게 없다. 제자는 깨달은 스승과 어떻게든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한다. 홀로 깨닫는 길도 가능하지만, 홀로 가는 길은 멀기도 하고, 언제 샛길로 빠질지 모른다. 그래서 깨달으려는 제자는 스승을 찾는다. 라즈니쉬는 스승들 간에는 라이벌 의식이 없다고 주장한다. 라이벌 의식은 분별심을 가리킨다. 더 많은 제자를 받아 더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그런 스승은 깨달은 스승이 아니다. 분별심에 매인 스승을 어떻게 깨달은 이로 대접할 수 있겠는가. 마조가 활동하던 시기에 석두(石頭)라는 또 다른 스승이 있었다. 석두는 자신과 인연이 없는 제자들을 마조에게로 보냈다. 마조가 석두보다 뛰어난 스승이어서가 아니다. 석두와 마조는 둘 다 뛰어난 스승이다. 뛰어난 스승만이 제자들 수에 집착하지 않는다. 돌려 말하면 마조 또한 자신과 인연이 없는 제자를 석두에게 보냈을 것이다. 깨달은 사람들은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별심은 인간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상대성은 나와 상대를 비교하는 데서 비롯된다. 라즈니쉬는 인간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파악한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발상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것과도 비교하지 마라. 그대 자신이 되라. 그때는 열등감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우월감도 없다.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만족한다. 무엇을 하든 그대는 즐거운 마음을 최선을 다한다.”(182)라고 말한다.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우리는 쉽게 열등감에 빠진다.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우리는 쉽게 우월감에 빠진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같은 마음이다. 상대와 나를 오지게도 분별하려는 마음. 라즈니쉬가 이 강의의 제목을 빈 거울이라고 붙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마조는 반응하지 마라, 그저 비추라는 말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구름은 늘 하늘을 오고 가지만 하늘이 구름으로 채워지는 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는 무한한 하늘이 있다고 라즈니쉬는 이야기한다. 특히나 내적인 무한함은 우주의 무한함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우리는 그래서 더욱 풍요로운 삶을 느낄 수 있다.

 

라즈니쉬는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거울처럼 모든 것을 비추는 무심(無心)을 발견할 거라고 말한다. 무심의 거울은 온갖 것을 비추지만, 아무것도 거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그저 사물을 주시(注視)한다. 사물에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무심은 깨져버린다. 사물을 주시하는 존재는 마음속으로 들어온 사물을 다만 거울에 비출 뿐이다. 거울에는 이런저런 이미지들이 수없이 드나들지만, 거울에 비친 이미지들 때문에 주시하는 존재가 흔들리는 경우는 아예 없다. 흔들리면 사물을 주시하는 게 아니다. 범인(凡人)들은 도달하기 힘든 이런 얘기를 왜 우리는 하는 것일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특정 종교를 통해 이런 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면 된다. 돈을 많이 벌어, 명예를 높여 이런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된다. 다만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마조는 수수께끼 같은 방식으로 급소를 찌르는 데 결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는 임종을 앞두고 중병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도 근황을 묻는 제자에게 유명한 대답을 남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이것은 선에서 유명한 구절이다. 삶을 의미하는 태양을 마주 보고 있든, 또는 죽음을 상징하는 달을 마주 보고 있든 그대의 불성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그대가 어둠 속에 있든, 밝은 빛 속에 있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대의 불성은 항상 변함이 없다.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마조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이 짧은 말로 제자를 가르친다. (240)

 

마조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을 노래했다. 일면불은 삶을 의미하는 태양을 마주 보는 것이고, 월면불은 죽음을 상징하는 달을 마주 보는 것이다. 일면불이든, 월면불이든 마음속에 무심이 들어있으면 아무 차이가 없다. 빛을 통해 깨달음으로 갈 수도 있고, 어둠을 통해 깨달음으로 갈 수도 있다. 빛을 통해 깨닫는 건 좋고, 어둠을 통해 깨닫는 건 나쁜 거라는 발상 자체가 깨달음에 미달하는 것이다. 라즈니쉬는 어둠 속에 있든, 밝은 빛 속에 있든 우리네 불성은 항상 변함이 없다고 강조한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죽어가면서도 마조는 제자들에게 일면불, 월면불을 노래한다. 태양과 달을 구분하는 분별심에 빠지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멀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다.

 

태양이 뜨면 빛과 더불어 마음을 보고, 달이 뜨면 어둠과 더불어 마음을 보면 된다. 아무 변화도 없을 것이다. 다만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뿐이다. 나는 영원하다. 하늘에 해가 떠 있건, 달이 떠 있건 하늘은 변함이 없다. 그렇듯 나는 항상 여기에 있다.”(241)고 라즈니쉬는 말한다. 여기에 있는 이 마음을 주시하고 있으면 태양이 뜨든, 달이 뜨든 나는 항상 여기에 있다.” 라즈니쉬의 글은 명쾌하다. 이리 꼬고 저리 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곧바로 한다. 그가 사용하는 비유 역시 적절하다. 라즈니쉬는 어려운 내용을 참으로 쉽게 풀이한다는 말이다. 라즈니쉬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나 역시 한동안 라즈니쉬를 읽지 않았다. 하지만 라즈니쉬의 책을 읽으면 마음속에서 무언가 꿈틀대는 걸 느낀다. 자기를 좀 알아달라고 외치는 이 마음을 외면하기가 참 힘들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읽고 또 읽는다. 읽는 일 자체가 허상에 빠지는 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o*****s 2019.03.09.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