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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 삶을 긍정하는 유일한 종교 - 오쇼 라즈니쉬, 『오직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을 뿐』
라즈니쉬는 외부 감각에 얽매이지 말고 내면의 중심으로 곧장 들어가라고 말한다. 혼신을 다해 중심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중심 스스로가 우리를 잡아당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중심으로 가는 게 아니다. 중심이 우리를 끌어당긴다. “그대는 쉬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 그 정열이 문제이다. 사람들은 얼마나 부분적이고 단편적인지, 내가 전체성과 절박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대는 ‘나는 이 순간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군가가 바로 그대일 수도 있다! 그대가 어느 순간 죽기로 되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죽지 말라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그대가 언제 죽을지 누가 아는가? (22쪽) 지금 당장 중심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내일 해야지 하는 순간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은 한없이 멀어진다. 내일이 올지 오지 않을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선(禪)에서는 오로지 현재가 중요하다. 지나간 과거나 다가올 미래는 의미가 없다. 오로지 현재에 집중하는 사람만이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라즈니쉬는 그래서 선은 철학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선은 이성적인 이치로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선은 그저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면을 들여다볼 때 전혀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린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은 쓸모가 없다. 언어도 쓸모가 없다. 깨달은 선사들이 왜 침묵을 말하겠는가? 깨달은 사람들은 할 말이 없다.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채 깨달음을 가장한 사람들만이 엄청난 말을 쏟아낸다. “새로운 것은 낡은 것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어떤 언어나 몸짓으로도 새로운 것을 기존 체제가 허용하는 형태로 조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38쪽)라고 라즈니쉬는 말한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사람은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며 고요한 집에 거주한다. 고유한 언어라고 했지만 사실은 침묵이다. 침묵의 언어, 침묵의 집.
유명한 하이쿠(haiku) 하나.
조용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마라. 봄이 오면 새싹은 저절로 돋는 법. 오래된 연못에 뛰어드는 개구리 한 마리 퐁 ― 당.
그 다음에는 고요한 침묵. 그대는 그저 나무 밑에 기대어 앉아 있다. 선은 영적인 탐구를 매우 심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먼저 외부 세계를 통해 주시를 배워라. 꽃, 일출, 석양을 지켜보라. 대상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 간섭도 없이, 아무 판단 없이 지켜보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거울처럼 아무 판단 없이 주시하는 것……… 외부 세계를 통해 주시를 배우면 그 기술을 갖고 내면으로 들어가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99~100쪽)
익숙한 하이쿠 한 편이 제시되어 있다. 조용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삶에 지친 사람을 생각하면 안 된다. 조용히 앉아 주변 사물을 관조한다고 봐야 한다. 봄이 오면 새싹이 저절로 돋는 것처럼. 오래된 연못에 개구리 한 마리가 뛰어든다. 퐁-당. 오래된 연못은 마음의 중심이다. 마음의 중심으로 개구리 한 마리가 뛰어들면 어떻게 될까? 라즈니쉬는 “그 다음에는 고요한 침묵.”이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 일어난 듯한데,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침묵에 빠진 사람은 그저 일어나는 일을 주시(注視)하고 있을 뿐이다. 주시자만 남는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무 간섭도 없이, 아무 판단 없이 지켜보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거울은 사물을 비추기만 할 뿐 해석하지 않는다. 주시자 또한 해석하지 않는다. 외부 세계를 해석하는 순간 우리는 주시자가 될 수 없다.
거울처럼 사물을 주시하는 사람은 모든 존재계가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동물을 사냥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와 동물은 형제이기 때문이다. 동물은 인간보다 조금 뒤쳐져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곧 미래의 붓다를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인간만이 붓다가 아니라 모든 생명이 붓다다. 모든 무생물 또한 붓다다.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잘라서는 안 된다. 나무는 살아 있다. 나무는 다른 종류의 의식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나무를 해치거나 상처 내지 마라. 왜냐하면 그 행위는 곧 그대 자신의 상처가 될 것이며, 그대의 진화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123쪽) 나무 한 그루를 쓸데없이 자르면 그만큼 정신의 진화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붓다가 탄생하면 온 우주가 기뻐한다. 붓다가 될 가능성이 있는 생명이 죽으면 당연히 온 우주가 슬퍼한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다.
인간은 자유, 민주주의,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말하면서도, 그 단어들에 내재된 삶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문명과 문화를 들먹이며 자연을 정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인간들은 그러나 자주적인 독립성을 전혀 갖추지 못하고 산다. 라즈니쉬는 “내가 아는 유일한 자유는 깨어나는 자유뿐이다. 그대 자신과 그대의 뿌리를 아는 것이 유일한 자유이다. 그 외에는 모두 정치적인 약속일 뿐이다. 그 약속들은 결코 지켜지지 않을 것이다.”(147쪽)라고 주장한다. 이런저런 정치인들이 이런저런 자유들을 들먹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 자유는 바로 깨어나는 자유이다. 어떻게 하면 깨어날 수 있을까? 마음의 중심으로 찾아 들어가면 된다. 앞서 얘기했듯, 굳세게 마음을 먹으면 마음의 중심이 우리를 강하게 안으로 끌어들인다. 지금도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내면에서 보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일상에 매인 우리는 늘 그 소리를 외면한다. 그 소리를 들으면 일상의 안정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선은 유일한 삶의 종교이다. 그 밖의 다른 종교는 죽음을 숭배한다. 삶에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의식의 가장 신성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삶의 종교인 선은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다. 선은 모든 것을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한 디딤돌로 변형시킨다. 선은 지금까지 발생한 종교들 중에서 유일하게 삶을 긍정하는 종교이다 선의 긍정은 전체적이다. 그 밖의 다른 종교는 부정의 종교이다. 그들은 장애물로 보이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러나 선은 그것을 장애물에서 도움의 수단으로 변형시킨다. 그리고 선은 그런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성공은 새로운 인간의 도래에 큰 도움이 된다. 새로운 인간은 기독교, 힌두교, 모하메드교 등의 여타 종교를 종교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종교들은 죽은 과거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오래 전에 그 종교들로부터 도망쳤다. 그들은 수십 세기 동안 웃은 적이 없다. 그들은 우주의 음악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들은 춤의 언어를 잊었다. (155쪽)
라즈니쉬는 선을 유일하게 삶을 긍정하는 종교로 이야기한다. 기독교, 힌두교, 모하메드교 등은 부정의 종교이다. 현재의 삶을 부정하고 미래의 삶에서 희망을 찾는다는 얘기다. 기독교의 천년왕국설을 생각해 보라. 종말론을 외치며 새로운 천국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봐도 좋다. 선은 그렇지 않다. 선은 모든 것을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한 디딤돌로 변형시킨다. 현재와 대립하며 현재를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현재 속에서 마음의 중심으로 들어갈 길을 모색한다. 선사들이 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고 말하겠는가. 과거와 미래는 없다. 다만 현재만 있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자신을 주시해야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삶을 긍정하는 선사들은 그래서 유머를 많이 사용한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계율을 강조하는 다른 종교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형성할 수밖에 없다. 라즈니쉬는 지금 우리가 믿는 종교들은 우주의 음악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우주가 추던 춤의 언어를 잊었다고 비판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 세상에 사는 우리는 자연에 어긋나는 어떤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풍족하게 살면서도 우리는 더 많은 돈을 원한다. 만족을 모른다. 오로지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만이 목적이 된다.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면 어떻게 살아왔든 다 용납이 된다. 돈이 그 사람을 대변하고, 그 사람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마음의 중심을 찾으라고? 쓸데없는 짓이다.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왜 볼 수도 없는 것에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가? 무한 경쟁 사회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능력을 길러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서야 한다. 그것만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서 태어난 이유가 될 수 있다. 과연 그런가? 이 모든 것은 죽으면 금방 사라지는 것들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저승으로 가져갈 수는 없다. “단 하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대의 중심이다.”(171쪽)라고 라즈니쉬는 말한다. 마음의 중심에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명예가 아무리 높아도, 결국에는 잃을 수밖에 없다. “다만 한 가지, 그대의 근원적인 실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대는 안전하다. 다른 보장책은 필요 없다.”(171쪽)
라즈니쉬는 우리 안에 감춰진 이 마음의 중심을 ‘붓다’라고 부른다. 모든 사람이 내면에 붓다를 지니고 있다. 내면의 붓다를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방편이 필요하다. 라즈니쉬는 이것만이 유일한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기존의 교육은 일방적인 가르침에 머무른다. 세뇌다. 어릴 때부터 교육받은 내용은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마음에 새겨진다. 내면의 붓다를 가두는 거대한 창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가르침은 결코 혁명적일 수 없다. 선생은 기득권층의 하수인이다. 오직 구도자만이 혁명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구도자는 기득권층이 아니며, 기득권층에 대한 의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관계와 지배 세력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는 홀로 산다. 그는 사자처럼 포효한다. 세상에서 가장 혁명적인 사람은 오직 극소수의 구도자들뿐이다. 조주는 위대한 혁명가이다.”(189쪽) 라즈니쉬가 추구하는 정신 혁명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마음의 중심에 자리한 붓다를 발견하는 데로 모인다.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길이다. 끝이 없는 고통이 기다리는 길이다. 극소수의 구도자들만이 끝까지 그 길을 걸었다. 조주 선사가 바로 그런 구도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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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불교는 간화선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사실 부처님의 진짜 가르침은 말과 글로써는 전달될수 없는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이치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런 가르침에 바로 들어갈수있는 가장 빠르고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 간화선인것이다. 그런 간화선의 전통은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고 나서 육조혜능 스님이 출현한 이후에 비로소 꽃피웠다고 할수있다. 육조스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교가 활짝 꽃피웠고 그꽃은 간화선인것이다.
그러한 간화선의 황금기를 누빈 중국의 선사들을 오쇼가 설명해주는 책이 이 시리즈를 이루고 있다. 조주스님은 무(無)자 화두로 유명하다 . 흔히 알고있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無)! 부처님께서 모든 유정무정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왜 없다고 했을까?하는 이 화두 말이다. 오쇼의 이 시리즈는 사실 우리의 상식적인 마음의 생각을 깨버리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흔히 이야기하는 조주스님의 일대기와 유명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일화에서 어떤 깨침을 얻도록 유도하는것이다. 그의 다른 책들도 그렇듯이 이책도 어느정도 다른책을 통한 예습이 있어야 할것같다. 한글로 잘풀어쓰서인지 불서를 조금이라도 읽은 이라면 약간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불교를 이책을 통해 처음 접한다면 불교에 대한 이해가 더 어려워질것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쇼의 책은 기존의 종교들 특히 서양의 기독교 그리고 유일신 종교들에 대한 풍자와 통렬한 비판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국내에서 발간된 불서들과는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하지만 그런 독특한 시각과 허를 찌르는 풍자와 유머가 책에 더 몰입할수 있게한는 장점이 있다. 마지막 문장에 요점이 들어있었다. "친구여, 나는 끊임없이 찾아 헤메었다.
그런데 발견은 커녕 나자신마저 잃어버렸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