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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 『텅 빈 가슴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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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바깥으로 뻗는 진리와 사랑의 길- 오쇼 라즈니쉬, 『텅 빈 가슴을 넘어서』       이 책에서 라즈니쉬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선사(禪師)인 남전(南泉)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남전은 제자들이 도를 질문하면 주장자로 때리는 과격한 선법을 선보였다. 도를 질문한 제자는 스승에게 맞는 순간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 선법(禪法)에는 하나를 아우르는 법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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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바깥으로 뻗는 진리와 사랑의 길

- 오쇼 라즈니쉬, 『텅 빈 가슴을 넘어서』

 

 

 

이 책에서 라즈니쉬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선사(禪師)인 남전(南泉)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남전은 제자들이 도를 질문하면 주장자로 때리는 과격한 선법을 선보였다. 도를 질문한 제자는 스승에게 맞는 순간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 선법(禪法)에는 하나를 아우르는 법칙이 없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선법 또한 다양하다. 중요한 것은 선법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묵묵히 주시하는 것이라고 라즈니쉬는 강조한다. 스승에게 호되게 맞은 제자는 마음을 일깨우는 아픔과 일순간 마주한다. 일상에 매인 평범한 사람들이 선사들의 기이한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선사들은 일상에 매이지 않는다. 일상을 사는 사람들은 수많은 통념들에 얽매여 있다. 이 일은 이래서 안 되고, 저 일은 저래서 안 된다. 이곳에서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이곳 너머를 생각할 수 있느냐고 그들은 외친다. 깨달음에 이른 선사들은 진리는 언제나 마음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마음에 있는 진리에 누구는 이르고, 누구는 이르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진리를 평범한 우리는 왜 이르기가 힘든 것일까? 진리에 이르려면 진리를 가로막는 에고를 먼저 떨쳐내야 한다. 에고는 진리에 이르는 길은 고통의 길이라는 점을 애써 부각시킨다. 진리를 몰라도 일상을 사는 데 큰 불편함이 없는데,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진리의 길로 들어설 필요가 있는가? 고통에 빠지는 게 두려워 우리는 하루하루 진리로 가는 길을 미룬다. 진리를 향한 두려움을 에고는 돈이나 명예와 같은 욕망들로 대체한다. 돈과 명예가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걸 우리는 숱하게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에고는 진리의 반대편에 욕망의 성채를 세운다. 욕망으로 세워진 성채에서 마음껏 즐기며 에고는 진리로 가는 길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를 재삼 강조한다. 현실을 모르는 바보만이 진리니 뭐니 하며 현실이 주는 즐거움을 외면한다. 어차피 한 번 태어난 인생인데, 무엇하러 고통스런 선택을 한단 말인가. 에고에 매인 사람은 무엇보다 고통을 싫어한다.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그들은 즐거운 노예가 되는 길을 선택한다.

 

진리로 가는 길에 들어서려면 에고를 벗겨내는 엄청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에고를 부수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은 쓴소리를 싫어한다. 자기를 조금이라도 무시하는 말이 들릴라치면 사람들은 자존심을 앞세워 싸움을 벌이려 한다. 마음속에 그득 찬 분별심으로 사람들은 자기와 남을 자꾸만 나눈다. ‘는 남을 욕할 수 있지만, 남은 를 욕할 수 없다. ‘를 중심에 세우고 남을 주변에 세우는 위상학은 분별심이 지배하는 이 사회의 구조를 정확히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에 둔 채 시비(是非)를 가리려고 한다. 누가 중심(권력이라고 말해도 좋다)을 잡느냐에 따라 시비도 달라진다. 원래부터 옳고 그름이 있는 게 아니라 권력을 잡은 사람이 옳고 그름을 나눈다. 에고를 내려놓는다는 건 바로 이러한 시비에 빠지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시비에 빠진 사람은 두꺼운 에고에 갇혀 진리가 아닌 것을 자꾸만 진리로 주장하는 고집을 부린다.

 

남전에게는 추종자가 없었다. 다만 길벗이 있었을 뿐이다. 그는 길벗(fellow traveler)’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인물이다. 길벗은 똑같은 삶의 근원을 향해 움직인다. 거기엔 스승이 되거나 제자가 되는 문제가 없다.

이것은 제자들이 남전을 존경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남전을 극진히 존경했다. 남전은 결코 존경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하면 얻지 못할 것이요, 구하지 않으면 그것이 비처럼 그대 위에 쏟아질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남전은 결코 감사나 존경을 바라지 않았다. 남전의 이런 면은 전혀 다른 종류의 공동체를 만들어 냈다. 그는 세상의 어떤 스승들보다도 더 극진히 존경받았다. 그 간단한 이유는, 그가 너무나 겸손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빈 가슴을 너무나 많이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112~113)

 

남전은 스승으로서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길벗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제자가 스승과 위계관계를 형성한다면, 길벗은 스승과 제자가 맺는 위계관계를 수평관계로 만든다. 위계관계가 서면 분별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스승은 옳고, 제자는 그르다. 스승은 가르치고, 제자는 다만 배울 뿐이다. 하지만 길벗은 다르다. 길벗은 말 그대로 같은 길을 걷는 존재들을 의미한다. 이 길 위에서 보면 스승은 먼저 깨달은 사람이고, 제자는 나중에 깨달을 사람이다. 먼저 깨달은 스승이 나중에 깨달을 제자를 진리의 길로 인도한다. 라즈니쉬는 길벗을 인격(personality)이 아니라 개체성(the individuality)과 연결시킨다. 인격이 사회적 관계를 밑바탕에 품고 있다면, 개체성은 오직 진정하고 자연적인 것,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것(139)을 가리킨다. 스승의 불길 속으로 뛰어든 제자는 그래서 스승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부활한다.

 

이리 보면 선()의 세계에서 아무나 스승이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스승은 머릿속에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스승은 에고의 껍질을 벗고 깨달음에 이른 사람이다.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에고에 갇혀 자기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지식의 힘으로 그들은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허상에 불과하다. 라즈니쉬는 허상에 빠진 사람들을 모래성에 집착하는 아이들에 비유한다. 강가에서 모래성 쌓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있다. 돌멩이 하나만 던져도 쉽게 허물어지는 모래성을 지키기 위해 아이들은 서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다. 해가 뉘엿뉘엿 지자 엄마들이 아이들을 부른다. 아이들은 공들여 쌓은 모래성을 마구 밟으며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간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허물어버릴 모래성에 아이들은 좀 전까지도 집착을 했다. 라즈니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의 모든 심각함은 모래성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엔가 그대는 모래성을 버려두고 떠날 것이다. 모래성을 마구 짓밟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것이다. 삶을 심각하게 대하는 사람들은 유희성(playfulness)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것이다.”(152~153)

 

사람들은 어차피 허물어질 모래성에 왜 이리 집착하는 것일까? 내면으로 들어가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내면으로 들어가려면 사회가 부여한 가면, 곧 인격(personality)을 버려야 한다. 인격을 버리고 이 사회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결국 가면을 쓰고 인격을 지키려고 한다. 인격을 버리고 개체성을 지키려는 사람은 앞서 얘기한 대로 바보로 불린다. 인격을 버리면 왜 바보가 되는 것일까? 가면은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비결로 인식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밖에서는 직장인으로서 가면을 써야 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가족이라는 가면을 써야 한다. ()에서도 밖에서도 홀로 존재하는 순간은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재를 불안해한다. 미래에 잘 살려면 지금 이 순간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가면을 벗으라고? 가면을 벗으면 일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가면을 벗는가?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참으로 어두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않는 사람들은 그래서 바보로 불린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보는 자본의 논리에 편입되지 않은 사람이다. 자본의 논리는 모든 것을 해석하는 원리이다. 자본은 증식을 목표로 한다. 자본가는 이익을 얻기 위해 자본을 투자한다는 말이다. 이익이 되지 않는 곳에 자본을 투자하는 사람은 없다. 자본이 냉혹한 속성을 지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자본은 이익이 되는 존재만 받아들인다. 이익이 되지 않는 생명들을 자본은 냉혹하게 제거한다. 조류독감에 걸린 동물들이 생매장되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자본은 이익이 되지 않는 사물들을 제거해야 할 바이러스로 취급한다. 살기 아니면 죽기. 바이러스를 죽여야 자본이 사는 논리. 자본의 논리는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 적용되고,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된다. 인간은 이제 이익을 얻기 위해 자연과 인간을 무엇을 해도 상관없는 대상으로 대한다. 이익이 되지 않는 존재들은 자연물이든, 인간이든 가차 없이 제거된다. 자본이 중심에 서는 디스토피아는 이렇게 도래하는 셈이다.

 

지금 우리가 선()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라즈니쉬의 말마따나 이 시대는 권력을 쥔 사람들이 세운 기준으로 움직인다. 권력은 자본의 논리를 중시한다. 자본이 많은 사람들이 곧 권력을 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진리로 가는 길을 공허한 망상으로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리는 자본에 있다. 돈을 벌려면 자본의 논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적이 된다. 적을 배려하며 경쟁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을 짓밟고 일어나야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어떻게 배려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라즈니쉬는 선()에서 자본의 논리를 벗어나는 길을 발견한다. 남전은 깨달음의 길로 들어선 모든 사람들을 길벗이라고 말한다. 우정과 사랑으로 배려해야 할 존재들. 진리로 가는 길 위에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길벗이 되고 연인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래서 선()과 진리를 싫어한다. 자본의 증식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바깥을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가? 그러면 마음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진리=사랑을 세심히 들여다보자. 그것만이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이 세상을 바꿀 유일한 길이다.

    

 

o*****s 2019.05.06. 신고 공감 3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오쇼의 아름다운 남전선사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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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쇼의 책을 만나게 된것은 우연히 tv에서본 옛날 개그맨 장두석씨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채 7080카페와 비슷한 뮤직카페를 운영중이고 또 한번씩 노래를 부르고 있엇다. 놀라운것은 그가  황금꽃이란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주로 오쇼의 책을 다루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로 오쇼의 책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유명한 시인이자 번역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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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쇼의 책을 만나게 된것은 우연히 tv에서본 옛날 개그맨 장두석씨 때문이었다.

그는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채 7080카페와 비슷한 뮤직카페를 운영중이고 또 한번씩 노래를 부르고 있엇다. 놀라운것은 그가  황금꽃이란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는데 주로 오쇼의 책을 다루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들로 오쇼의 책을 만나게 되었고 이후 유명한 시인이자 번역가인

류시화씨의 번역으로 많은 오쇼의 저작을 만났다.

 

지금 소개하는 남전스님에 관한책은 오쇼의 제자인 손민규씨가 번역한것이고 태일출판사의 오쇼시리즈를 그가 맡아서 번역하는 듯하다.

책자체는 깔끔하게 잘나왔고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으로 번역도 깔끔하다.

아직 오쇼의 진면목을 알수는 없지만 이 책에서 그는 남전선사의 훌륭한점을 찬탄하고 또한편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가차없이 비판한다.

살불살조라는 불가의 말처럼 자신의 깨달음 즉 자신의 살림살이가 없다면 알수없는경지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책의 구성은 짧은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거기에 대한 오쇼의 해설이 있다.

오쇼는 하루에 10~20권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인류역사상 깨달음에 가까이 접근한 이들의 일화는 물론이고 깨달은척 했거나 깨달았다고 잘못 알려진 인물들의 일화를 통해 많은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에피소드의 해설에서 우리는 매우 과학적이면서 한편 논리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안내하는 친절함을 알수 있다.

 

현대의 유일신 종교들이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없이 막무가내로 믿으라고 하는데 반해 그의 가르침은 누가 들어도 명쾌함을 알수 있다.

생시에 그는 많은 가르침을 남기고 또 많은 제자를 길러냈지만 각국의 정부와 타종교는 끊임없이 그를 탄압하고 심지어 살해하려고 하였다 .

그는 사실 살해당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지금도 그의 제자들과 관련기관등을 통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유려한 번역으로 오쇼의 가르침에 다가갈수 있는 태일출판사의 시리즈는 진정한 자신을 알고 싶어하는 우리들 모두 읽어보아야 할 듯하다.

c******3 2015.03.18.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