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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하면 떠오르는 것은 유니세프 광고에서 본 굶주리는 아이들과 내전등의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었다. 흑인, 인종차별, 내전과 굶주림. 그리고 이집트 문명등. 큰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서 더 말할 것이 없다니 부끄럽기도 하다.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보는 이미지의 아프리카와 내가 보는 아프리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그에 길들여진 나머지 아프리카를 그런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우리만의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어설픈 이미지만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같다. 피부는 다르지만 나와 똑같은 눈과 코와 입이 달린, 피부를 가지고 두뇌를 가진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이고 그들만의 문화와 그들만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뻔하며 유치하게 글을 시작하고 있지만 그것이 다인것을 어찌할 것인가. 같은 나라 사람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론 가족도 이해못하지만 그냥 그들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프리카 작가의 소설을 접해보고 싶었다. 이 소설은 아프리카 케냐의 독립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우리나라도 많은 사람들이 힘들다고들 난리지만, 케냐도 참 아프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사는 곳은 왜 이리들 아픈 일들이 일어나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와 케냐의 공통점이라면 정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과 그 집단은 어려운 생활을 한다는 것이 아닐까?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그 후손들은 땅을 찾아달라고 지랄을 하고, 나라를 대표한다는 새끼들은 친일파의 땅을 되찾아 주고 친일파 재산 환수 법안을 반대하며, 자위대 기념식에 참석이나 하고 앉아있다. 또 자위대 참석한 인간을 지지하고 표를 던지는 우민들도 득실거린다. 이것이 아직도 현재 이땅에 벌어지고 있는 작태다. 케냐도 우리나라의 독립운동단체나 마찬가지인 단체 마우마우의 사람들을 핍박했다. 우리나라처럼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 세력을 형성하고 인기를 얻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속 케냐의 모습은 그렇다. 적어도 우리처럼 일본인 육사출신이 대통령이 되고, 국민들이 그를 사랑하고 그 딸이 여전히 대단한 지지를 받고 있지는 않을것 같지만. 먼나라의 생소한 이야기지만 카란자나 기코뇨등의 모습등을 통해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간다. 인간의 모습은 인종과 국가를 떠나 비슷한 모습을 많이 보이는 것 같다. 대세라고 생각한 일본에 자발적으로 합류하기로 한 이광수등의 지식인들과 많은 친일파들처럼 카란자등 케냐인들의 모습도 그러했다. 생각해보면 유행처럼 앞다투어 외국에 침략해 식민지로 삼았던 서양인들의 제국주의는 참 전세계에 많은 악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서로 더 많이 점령하고 이득을 차지하겠다고 덤비지 않았던가. 그 끝은 처참한 세계전쟁으로 연결되지만 더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역시 점령당한 나라들이다. 일본도 서양의 제국주의를 부러워한 나머지 열심히 흉내내서 우리를 강점하지 않았던가. 이책을 읽었다고 해서 아프리카에 대한 무지가 그다지 해소되진 않은것 같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역시 비슷비슷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종차별인데, 인종차별 하면 백인들과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떠오르곤 하지만 우리도 그들 못지 않게 인종차별을 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유치한 조건으로 차별을 한다. 백인은 잘사는 나라 사람일 경우가 많으니 친절하고, 흑인이나 동남아시아인에게는 막대한다. 방송에 일반인들을 대상으로한 실험에도 이를 증명한바 있고, 굳이 증명이 없더라도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혼혈아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무식한 백인우월주의자와 우리가 다를것이 무엇인가. 오히려 미국에는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의식이 많아져서 차별을 덜 받고 있다. 오바마의 당선만 봐도 미국의 의식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전히 흑인반 백인반인 오바마를 그냥 흑인으로 구별하는 것은 같지만.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의식조차 없고, 정말 착하고 별 문제 없는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인종차별적인 발언과 행동을 하는 것이 우리나라다. 인종의식이 많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한류의 대중문화가 가요를 중심으로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데 얼마전 그런 아무생각없는 인종차별적 희화가 세계의 방송을 타고들어가서 항의를 받은 적도 있지 않던가. 이제 우리도 더이상 단일민족이라고 할 수 없고 더욱 심해질 것이다. 부모들이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과 자신의 아이들을 같이 놀지말라며 무식하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모르고 그들을 차별하거나 놀리면 혼을 내야 하는 것이다. 가수 박진영이 케이팝스타에서 이미쉘에게 한 발언은 정말로 필요한 이야기다. 가수 박진영이라는 사람에게 별 관심도 없었고 오히려 좋지 않게 보는 쪽이었는데 그 발언은 정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종차별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면 간혹가다가 주위나 집안에 혼혈아가 있느냐며 묻기도 하는데 정말 유치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가족이나 친척중에 혼혈인이나 외국인과 결혼을 한사람은 전혀 없다. 옳고 그름이 기준이 아닌, 내가 겪어야 문제를 제기한다는 발상 자체가 유치한것이 아닐 수 없다. 혈연학연지연이 뿌리깊은 우리들에겐 무의식적으로 나올 수 있는 말과 행동이겠지만 사람이고 어른이기에 그것을 의지로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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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반전(反轉)이다. <한 톨의 밀알>은 케냐의 키쿠유 족에 대한 영국의 식민 지배와 투사 키히카의 희생과 배신자를 처단하려는 키쿠유 인들의 단합과 해방이라는 뜻을 가진 우후루(Uhuru)의 결말이 예상했던 어떤 결말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요한복음 12장 24절 (키히카의 성경에 검은 줄이 그어져 있는 부분) -352p-
혁명가 키히카는 단합된 아프리카인들의 희생으로 케냐의 독립을 이루리라 결심했다. 미국의 링컨과 인도의 간디가 했던 것처럼 그도 케냐를 백인의 지배 하에서 구출해내고 싶었다. 하나님의 소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의 생각은 말 그대로 급진적이었다. 주위의 다른 케냐인은 혼탁한 세상에서 그저 ‘잘’ 살기를 원할 따름이었다.
별탈 없이, 불의에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돈을 벌어, 예쁜 아내를 만나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오손도손 잘 살고 싶은 소망.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한다. 아마도 예상보다 엄청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키히카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른 일반 소시민들이 원하는 삶이었다. 이 삶을 그리워했던 상징적인 인물이 무고였다.
응구기 와 시옹오의 <한 톨의 밀알>은 투쟁하지 않는, 그렇다고 배신을 하지도 않는 ‘니힐리스트’ 무고에 대한 이야기와 키히카의 사망 이후, 무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고를 키히카의 뒤를 이을 투쟁의 지도자로 만들려는 대중의 아둔하면서도 맹목적인 시선을 비판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무고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한 노력에는 그들의 증언이 큰 몫을 하는데, 대표적으로 기코뇨와 기투아의 증언을 들 수 있겠다. 기투아는 적의 총알 때문에 다리 하나를 잃은 것이 아니라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자기를 속이고 있었던 기투아는 무고를 높이면서 자신까지 높아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홀로 남겨둔 아내에 대한 그리움. 가족의 그리움이라는 유혹으로 고문하는 백인에게 자백하고 석방된 기코뇨. 그는 수용소에서 생활을 아무런 내색 없이 견뎌내는 무고의 저항을 보면서 숭고한 의미로 해석했고, 무고를 엄청난 정신력의 소유자로 포장했다.
백인과 흑인 간의 갈등은 일반적으로 격렬한 싸움을 불러오게 마련인데, 이 소설은 백인과 흑인 간의 갈등 사이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을 보수적인 이기심을 마치 덫을 놓아두듯이 숨겨둔다. 그리고 안락함에 따른 행위들. 즉, 덫에 걸린 인물들의 속내가 드러난다.
어쩔 수 없는 행위는 그들로 하여금 정당성을 논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토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은 선과 악의 대비를 통해 투쟁을 벌이는 이야기에 비해 훨씬 더 사실적이다. 이 정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선악의 개념을 희석한다. 따라서 <한 톨의 밀알>에서 드러나는 흑인에 대한 백인의 시각은 아주 양호하다.
‘아프리카의 프로스페로’를 계획하는 백인들. 할례를 제거하고 아프리카인을 바르게 키워내겠다는 톰슨 식의 선민사상은 키히카의 독립적을 위한 투쟁만큼이나 이기적이며 급진적이기도 하다. 결국, 이 소설은 백인의 급진성과 흑인의 급진성 사이에 놓인 소시민의 고뇌를 다룬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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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 관한 책은 많이 읽어봤다. 기아와 빈곤, 내전과 폭동, 인종차별, 에이즈와 같은 질병, 난민... 온갖 안좋은 것들로만 점철되어진 아프리카의 이야기안에 진정 아프리카인 자신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인종차별이나 내전의 배경에 대한 소설들에는 간혹 그들을 이해하는 이야기가 담겨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우리보다 한단계 아래에 있는 듯이 묘사하는 글들이 많았다. 그들이 주체로 서는 것이 아니라 문맹이고 호전적이고 노예근성이 있는 그들을 선진문화를 살아가고 있는 백인들이 도움을 줘야한다는 시선이 더 강했던 것도 사실일것이다. 이 소설의 내용은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케냐가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케냐인들의 해방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인간관계와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탁월하고 여성의 심리묘사와 그 역할에 대한 묘사는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민중의 저항의 전통 위에 세워진 케냐를 원합니다. 우리는 영웅들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고우리를 배반하고 적과 내통한 자들을 처벌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한 영웅을 기념하기 위해 여기에 모였습니다. 키히카는 불과 몇 년 전, 여기 있는 나무에서 밧줄로 목이 매어 죽었습니다. 우리는 진리와 정의를 위해 죽은 그를 기억하기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그의 친구들인 우리는 그의 죽음에 관한 모든 진실을 밝혀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387)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성경말씀이 있다. 한 톨의 밀알이라는 것은 아마 그 말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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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작가이고, 노벨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이며, "형식이나 내용 등 모든 면에서" 이 작가의 최고작으로 평가받는 소설이라는 설명을 미리 듣지 않았다면, 아마도 관심 갖지 않았을 듯하다. 제국주의의 무게에 억눌리고 강탈당하는 식민지 국민의 울분과 잔혹한 삶의 이야기는 이미 우리에게는 '낡은' 주제이기 때문이다.
<한 톨의 밀알>은 백인 정권 아래 억눌리며 살아야 했던 세 차원의 흑인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한다. 밭과 곡식을 돌보며 살아가는 무고는 가진 것이 없었지만 미래가 있었다. 케냐의 독립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믿었던 키히카는 '단결'을 호소하며 백인 정권에 피의 저항을 감행한다. 여기에 그녀의 여동생 뭄비와 기코뇨의 사랑, 그리고 뭄비를 사랑했던 또 한 남자 카란자가 이야기의 큰 틀을 이룬다. 운명으로 얽혀진 이들의 이야기가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내기까지, 초반부는 다소 지루하다. 이야기가 갑자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곳에 도달하기 전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사전 정보'가 다소 필요할 듯하다. 무고를 읽을 때는 그의 내면에 숨겨진 '죄의식'의 정체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기코뇨와 뭄비를 읽을 때는, 오직 가족과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 조직까지 배반하고 수용소에서 돌아온 기코뇨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아내 뭄비를 왜 그처럼 차갑게 대하는지, 그리고 그들은 결국 어떻게 화해에 이르게 되는지를 지켜보며 그 '과정'을 탐구하듯 즐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카란자를 읽을 때는, 키하카의 친구였던 그가 어떻게 백인 정권에 기생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그에게 실연의 상처는 조국을 잃은 식민의 상처만큼이나 치명적인 좌절이었다는 것을 감지하면 좋을 듯하다. 이들의 운명의 실타래는 그들의 독립기념일 축제에서 비로소 풀어지기 시작하는데, 작가가 그려내는 서정적 결말이 압권이다.
역사 이래 힘 있는 자는 천하 통일의 꿈을 꾸었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밟아며 권력의 짜릿함을 만끽하며, 바닥이 없는 그들의 탐욕을 채웠다. 그들에게도 고상한 명분이 있었겠지만 영국은 그렇게 케냐를 짓이겼고, '국가'나 '애국심'이라는 단어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케냐'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다시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운명의 수레바퀴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들은 우리를 도로나 채석장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 말입니다. 우리를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훔쳤거나 누군가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조상대대로 우리 것이었던 것들을 되돌려달라고 요구했을 뿐이었습니다"(115).
<한 톨의 밀알>이 보여주는 젊은이들의 삶이 더 가슴을 시리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피로 목욕을 하면서까지 지켜내고 얻어내려 했던 것이 '일상성'이라는 데 있다. "우리가 갖고 있던 명분이 좋아 그때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다면 누가 죽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집을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여자들이 웃고, 아이들이 싸우고 우는 것을 볼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116). 노예로 살아야 했던 그들에게는 '삶'이란 게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유롭게 춤추고 싶었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기타를 쳐주며, 그들의 땅에서 땅을 일구고, 가정을 일구며 살고 싶었을 뿐이다. 대단하고 특별한 그 무엇이 아니라, 그 평범한 일상을 얻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은 깨닫는다. 힘 없는 사람들이 힘 있는 사람들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단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는 강력한 조직이 필요하오. 백인들은 이것을 알고 두려워하고 있소. (...) 그들은 우리의 유일한 힘인 민중들로부터 우리를 차단시키고 싶어하오"(337).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케냐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는 죽음이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희생이 필요한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죽고, 당신은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169-170).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땅에 떨어져 썩어져야 할 그 한 톨의 밀알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수가 죽으면 다수가 사는 것이오. 바로 그것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의 의미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백인을 위해 영원히 물이나 긷고 장작이나 패는 저주받은 노예가 되어야 마땅하오."(337)
그들의 유일한 힘은 '단결'이었던 까닭에, 그들은 '배반'과 '죄의식'이라는 새로운 굴레를 짊어져야 했다. '단결'은 강요되었고, 무자비한 칼 앞에 '자신의 삶'을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은 배신의 쓴 잔을 받아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칼이 들어와도 도망가지 않을 사람"(158)이 필요했고, 그들의 가슴이 식어지지 않도록 불을 질러줄 영웅이 필요했다. 그러나 민중은 영웅을 노래하고, 한 사람은 영웅으로 부름을 받지만, 그 영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약한 자아와 두려움 가운데 씨름하고 있다. 민중은 캄캄한 밤하늘에 별처럼 빛나는 영웅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그를 떠받들고 있지만, 사실 '영웅'으로 기대를 모았던 많은 인물들이 얼마나 많이 자신의 연약함과 두려움과 개인적인 욕망과 싸워야 했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떤 영웅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한 톨의 밀알"이 되도록 강요받고, 그 벼랑 끝으로 내몰리기도 했으리라.
<한 톨의 밀알>이 가진 힘은 케냐의 이야기이지만, 특정한 시대적 배경 속에 담긴 이 이야기가 어느 삶의 자리에서도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라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그들의 이야기이지만, 또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짓밟는 권력과 피의 저항이 충돌하는 속에서도 그들이 빚어내는 열정과 고뇌와 사랑이 그래서 더 아름답다. 기코뇨가 뭄비와 화해하며 결혼선물로 조각할 걸상에 "임신을 해서 배가 불룩해진 여인을 새겨야겠어"라고 말하는 마지막 한 마디가 오래도록 시리게 가슴에 남아 있다.
"나도 따뜻한 나롯불 맛을 알고, 난로 옆에서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이 좋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오"(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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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우리에게 가난과 고통, 내전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우리가 아프리카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고전영화 속에서 보이는 노예의 이미지거나 팔다리가 앙상하고 배만 불룩 튀어나온 아이의 모습뿐―그나마 가장 나은 경우는 스포츠 선수일 것이다―인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의 이런 상황은 지형이나 기후와 같은 대륙의 근본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주의 때문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대륙을 입맛대로 나누어 경제적인 수탈을 가했고 간신히 독립한 후에는 냉전의 영향으로 생긴 정치적인 갈등은 아직까지도 이어져 여전히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국가들이 적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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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네이버 초기화면의 로고에는 '윤봉길 의사 의거 80주년'이라는 글귀가 떠 있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 기념 축하식에서 윤봉길 의사는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졌고, 체포되어 일본으로 호송된 후 1932년 12월 19일 총살되어 24년의 짧고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그 후로 벌써 80년이 흘렀단다. 그사이 우리나라는 독립을 했고 남과 북으로 나뉘었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고 지금도 여전히 남과 북으로 나뉜 상태로 살고 있다. 독립 후 설치되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은 외압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강제 종료되었고, 이후 친일파 명단 공개 정도뿐 그들의 행위에 대한 공개적인 단죄는 없었다. 친일을 했다고 지탄 받은 한 시인은, 우리나라가 그렇게 빨리 독립할 줄 몰랐다고 했다던가.
케냐의 독립투쟁과 독립 후의 이야기를 다룬 <한 톨의 밀알> (2012, 응구기 와 시옹오 지음, 들녘 펴냄)을 읽으면서 내내 식민지 생활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한 우리나라를 떠올린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영국은 1902년에 케냐를 보호령으로 선언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식민지를 반환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주권을 찾고자 무장 투쟁을 전개한 단체가 '마우마우'였고, 마침내 1963년 12월 12일 케냐는 영국으로부터 주권을 되찾았으며, 마우마우의 지도자였던 조모 케냐타가 케냐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런 그도 14년간 독재를 함으로써 민주화에 역행하기도 했지만, 지금 케냐의 정치는 많이 안정된 상태인 듯하다.
<한 톨의 밀알>이 쓰인 시기는 1967년이니, 1963년에 독립한 케냐로서는 식민지의 상처가 여전히 생생한 때다. 마우마우의 일원이라는 구실로 재판도 없이 강제수용소에 끌려가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절을 살아남았으나, 여전히 경제는 어렵고 전범 처리가 완료되지 않았다. <한 톨의 밀알>에서는 독립기념일 우후루를 맞아 마우마우 활동을 하다가 백인에게 잡혀 교수형 당한 뭄비의 오빠 키히카를 추모하는 행사를 갖는 것을 둘러싸고 그와 연관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준다.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기쿠유족 기코뇨와 뭄비, 카란자의 삶은 백인들의 권력이 개입하면서 서로 갈린다. 기코뇨는 수용소에 수용되고, 기코뇨의 아내 뭄비는 남편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고, 카란자는 짝사랑하는 뭄비를 지키기 위해 백인의 편에 서서 자치대원이 되는 것이다. 6년간의 모진 수용소 생활을 끝내고 기코뇨가 마침내 돌아왔지만, 집에서 그를 맞은 것은 카란자의 아이를 낳아 업고 있는 뭄비의 모습이었다. 키히카와 엮인 또 한 명의 인물은 무고이다. 무고는 오랜 수용소 생활에서 지조와 용기의 상징으로 높이 평가받지만, 그에게는 남들에게 알리지 못한 상처와 마음의 짐이 있었던 것이 밝혀진다.
<한 톨의 밀알>은 역사책이 아닌 소설이기 때문에, 케냐의 근대사에 대한 설명 없이 대뜸 우리를 그 현장으로 끌고 들어간다. 같은 시기를 살아간 많은 사람들의 서로 다른 삶을 보여 줌으로써 입체적인 경험이 가능하도록 한다. 지금 별다른 위협에 처하지 않은 우리는 친일파, 권력의 편에 선 자들을 비난하지만, 만약 그런 상황에 놓인다면 과연 신념을 선택할 수 있을까 하는 해묵은 의문이 내 안에서 끓는다. 살고는 봐야 할 것 아니냐면서 체제에 순응하지 않았을까? 마침내 독립을 쟁취한 나라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상처와 이제 겨우 싹트기 시작하는 희망을 <한 톨의 밀알>에서 만날 수 있다. 그들의 상처는 아물었을까? 우리의 상처는?
1950년대 케냐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나는 한번이라도 뜨거웠을까?>(2011, 베벌리 나이두 지음, 내인생의책 펴냄)도 읽어 볼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