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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책은 더 이상 우리가 쉽사리 붙들려고 하는 이상이 아니다. 책 아니고도 우리의 자신을 유혹하는 매체들은 얼마나 기세등등한가. 책을 붙들려고 하기엔 너무나 많은 훼방꾼들이 도처에서 눈과 귀를 앗아가고 있지 않은가. 잠시라도 혹! 하려는 순간 눈과 귀를 잠그고 그윽한 보고 들음의 오솔길로 안내하는 한 순간에 한번 붙잡혀 보자’ 책이나 읽으며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과 책도 읽지 않으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책의 책머리에서 발견한 글이다.
인간이나 사물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다. 모든 것을 간단명료하게 주장할 수 있는 편가름이기에 논쟁을 유발할 때 아주 효과적이다. ‘책의 유혹’ 이 책이 편가름을 사용하기에 장작이 빠개지는 것과 같은 후련함이 있다. ‘책이나 읽으며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과 책도 읽지 않으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 사이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여주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놀러갔다. 그 해 겨울은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으로 인해 어른들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다.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보며 절대로 바깥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셨다. 그러나 아이들이 경험한 전쟁은 그 당시 가장 인기가 좋았던 외화 Combat(전투) 이었기에 무장간첩이 두렵지 않았다. 자신을 이 시리즈의 주인공이었던 빅 모로(제이슨 중사)와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무서운 것은 야밤에 나타나 닭을 사냥해 간다는 승냥이였기에 밤에는 옴짝달싹 못하고 이불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그럴 때일수록 잠은 멀리 달아나고 두 눈은 더욱 초롱초롱해진다. 이 때 사촌형의 책상에서 발견한 것이 이광수의 '사랑'이다. 호롱불을 켜놓고 엎드려 이 책을 읽으며 안빈과 석순옥의 순수한 사랑 때문에 어린 나이에 흘렸던 눈물은 이때부터 나의 눈물샘을 길들였는지 아직도 뻑하면 흘러내린다. 학교 다닐 때는 교회의 반주자였던 아이를 좋아해서 자신도 이해 못하는 어려운 책을 선물하며 관심을 끌려고 했고, 청년 시절에는 청계천이나 서대문의 헌책방을 돌며 구입했던 중고책이 내 인생에서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이런 기억들 때문에 난 그래도 책이나 읽으며 인생을 낭비했다는 생각을 한다. 비록 그것이 책도 읽지 않고 인생을 낭비한 사람보다 열등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이 시대에 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한 개인의 인생 속에서 빛나는 몇 개의 장면은 될 수 있다.
이 책은 오직 독서만으로 자신의 인생을 증명한 55인의 글쟁이들이 살아가며 사랑하며 깊어가며 꿈을 꾸며 읽은 책들에 관한 이야기다. 대중적인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성석제, 하성란, 조경란, 김연수, 장석주, 송재학, 김기택, 안도현, 나희덕과 같은 작가들을 통해 책이 자신의 인생에 미친 영향과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 를 자신의 체험을 근거로 소개하기에 독자들은 “책을 어떻게 읽으며 그 감동을 어떻게 가슴에 새길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한편으로 막연히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는 완전한 “오메!, 기죽어” 라며 자신을 학살할 수 있는 위험한 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걸어간 길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55명의 글쟁이들은 대부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을 했고 대학원을 거쳐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지금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이나 읽으며 인생을 낭비한 그들을 통해 얻는 도전과 인생의 가치에 대한 소중한 깨달음이 더 클 것이란 생각을 한다.
우리는 ‘명작'을 시대를 초월한 책으로 인정하며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특별대접을 한다. 요즘 인문학(humanitas)은 비상하는 새처럼 우리 시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인간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통찰이 깊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속에도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그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을 친숙한 고전들이 언급되어 있다. 20대 시절 좋아했던 전혜린과 헤르만 헷세,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들, 왠지 좋은 느낌인 장 그르니에와 알베르 까뮈 등을 소개한 글을 읽을 때면 “역시 전문가의 식견은 다르다”라는 쿨한 인정이 있다. 그런데 그중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백석이다. 그에 대한 그리움이 큰 것을 보면 아직 발굴되지 않는 작가란 생각이 든다. 그에 관한 몇 가지 일화 가운데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야기가 있다. 당대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기생이었던 자야(김영한)와 사랑에 빠진 백석은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게 된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같이 도피하자고 설득하지만 자야는 자신이 정리할 것이 있다며 조금 후에 가겠다고 했지만 남북이 분단되어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그 후 백석은 북한체제에 이용당하며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자야는 밀실정치의 산실이었던 대원각을 경영하다가 법정 스님에게 조건 없이 시주한다. 법정 스님은 그 요정을 길상사로 바꾸었는데 그 당시 재산 가치가 1000억을 넘었다고 한다. 이 때 기자들이 아깝지 않냐? 고 물었을 때 그 돈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고 했단다.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전설 때문일까? 이 책의 저자들은 백석을 그리워하고 그의 작품을 인정한다. ‘백석 시선집’을 읽어보고 싶은 이유도 애잔한 사랑 때문이다.
문학은 감성이기에 이성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성이 돈이나 명예, 권력 같은 세속적인 가치를 추구하기에 ‘책도 읽지 않으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의 성공을 찬양할 것이다. 한 달에 책 한 권 읽지 않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 가끔은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감동이 있다. 그들은 가난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가슴이 예쁜 사람들이다. 아직도 불가능한 사랑을 믿고 영혼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책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여인의 목덜미처럼 책의 유혹은 강렬하다. 그러나 그 유혹에 빠진다고 경멸하거나 속물이라고 욕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책의 유혹에 빠지는 사람이 늘수록 사회는 저녁노을처럼 아름답게 물들어 간다.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기에 책이나 읽으며 인생을 낭비하는 삶은 죽음이 찾아오기 전까지 자신의 영원한 소망으로 남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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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증,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가지고 있을 법한 증상 중의 하나. 책을 좋아하는 우리들은 지하철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흘끔거리거나 새로 이사 오는 집에 들어가는 서가의 짐들을 갸웃거리곤 한다. 때로는 홍대 앞 사거리에 서 있는 청초한 여대생 대신 그녀가 품에 안은, (그녀보다 더 청초하게 느껴지는) 책을 흘끔거리기도 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책의 유혹’을 뿌리치는 일이다. 『책의 유혹』은 성석제, 김연수, 정끝별 등 55인의 소설가, 시인, 국문과 교수 등 내로라 하는 책벌레들이 이기지 못한 유혹의 산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첫 사랑을 얘기하듯, 숨겨둔 비밀을 말하듯 55인의 책벌레들은 조심스럽게 자신들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편할 수 없다! 그들이 자신 있게 말하는 책의 제목을 받아 적기면 하면 되니까. (이보다 더 검증된 것이 또 있을까?) ‘컴퓨터와 모니터만으로 세상을 읽고 재단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오늘날, 책을 읽는 수고는 비단 능률의 저하만이 아니라 상당한 인내가 요구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교과서적인 강변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 한 권의 책 속에서, 혹은 책 속의 어떤 구절들에서, 아주 잠깐일지라도 인간의 삶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 질문을 접한 적이 있다면, 우리는 그 소중하고 경이로운 경험을 깊이 간직할 필요가 있다.’ (강연호-길의 지도) 명저에 대한 작가 개개인의 글도 훌륭하지만 이 책의 백미는 ‘책머리를 대신하여’가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지은이들’이 썼다는 책머리의 문장들은 밑줄 긋는 것도 모자라 당장 필사하고픈 충동을 참기 어려울 만큼 훌륭하다. 화려하진 않아도 충분히 대중적이고, 대중적이지만 깊이가 있는 문장이다. ‘한 권의 책 속에서 혹은 책 속의 어떤 구절들에서, 아주 잠깐일지라도 인간의 삶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 질문’을 접하길 원한다면, 그런 책들을 찾길 원한다면 『책의 유혹』을 읽어보길 권한다. 55인의 책쟁이들이 권하는 책들에서 나만의 only one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