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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대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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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   몇 단어 되지 않는 이 문장을 들으면,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본을 떠올릴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일본과 친숙하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일본과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길고 긴 관계를 맺어왔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아픔과 상처가 바탕이 되는 관계라 할지라도 그 길고 긴 역사의 시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우리 한일 양국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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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나라

 

몇 단어 되지 않는 이 문장을 들으면,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본을 떠올릴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일본과 친숙하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일본과 우리는 떨어질 수 없는 길고 긴 관계를 맺어왔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아픔과 상처가 바탕이 되는 관계라 할지라도 그 길고 긴 역사의 시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우리 한일 양국의 관계이다.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근대사의 의미를 돌아보지 않고 먼 과거의 어느 한 시대만을 떼어내 그 속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것은 솔직히 힘든 일이다. 우리는 여전히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피해의식과 함께 근대 이전까지 우리가 일본에 지녔던 문화적 우월감을 강조하며 일본을 바라보려 한다. 일본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근대의 사라진 영광을 추억하며 한일 양국의 관계를 승자였던 그들의 입장에서 계속해서 조망하며 위치지으려 한다. 자국의 우수성, 자국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며 서로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다.

 

문헌사료의 존재가 미약한 고대사를 바라보는 입장 역시 이러한 자국민 중심의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고 못하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한일 양국의 역사학자들과 역사교육의 현장에 있는 이들이 함께 하는 자리가 마련되고, 객관적으로 정립된 그들의 성과물이나 의견이 알려졌다 하더라도 일반인들의의 시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해마다 몇몇 정치적 인사의 잘못된 역사발언이 터져나온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오로지 우리의 우수성과 지배력만을 강조하며 고대 일본에 대한 우리의 우위를 주장하는 의견 역시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책, 일본고대사의 여행은 새롭다.

제목 자체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역사 여행이니까. 하지만 부제는 다르다. 동아시아인.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도 아닌, 동아시아인이다. 근대 이후 형성된 민족의 개념을 떠나, 순수하게 이 동아시아 대륙에 존재했던 인류의 여행으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다루고자 하는 의도가 짙게 드러나 있는 소제목이라 할 수 있다. 민족의 우수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의 관점에서 존재하는 이야기를 다루겠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편견을 떨치고, 순수하게 과거 우리 조상이었던 이들의 삶을 올곧게 바라볼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는 새로운 이정표가 아닐까 싶다.

s*******a 2012.04.03.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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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선생님들이 쓴 흥미진진한 '일본 고대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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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일본 고대사의 전개 과정, 일본 고대 문화의 특성을 한국인의 시각에서 균형감 있게 파악한다’는 공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나온 성과물이다.     전반적으로 학술적인 내용이 많고, 분량도 적은 편이 아니라서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동생이 책장 한 번 넘기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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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일본 고대사의 전개 과정, 일본 고대 문화의 특성을 한국인의 시각에서 균형감 있게 파악한다’는 공부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나온 성과물이다.

 

  전반적으로 학술적인 내용이 많고, 분량도 적은 편이 아니라서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동생이 책장 한 번 넘기지 않고 “이거 어려워서 어떻게 다 읽어?” 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고정관념 잠시 내려두고 드르륵 책장 한 번 넘겨보시라! 우리가 그동안 궁금해하던 일본 고대사를 유적, 유물들의 사진과 함께 흥미롭게 써 내려가고 있으니..이 책을 다 읽은 독자로서 감히 말하건대, 일본 고대사를 다룬 책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흥미로운 책이다. 특히 오사카ㆍ나라ㆍ교토를 여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에는 고대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과 일본에 살던 사람들이 교류했던 흔적들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이런 흔적들을 한일 사이의 교류가 아닌 정복과 지배의 관점으로 보고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은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며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한반도의 선진적인 문화를 일본해 전파해주었다며 우월 의식을 갖는다. 한일 역사학자들은 저마다 자국 중심의 역사 해석을 내 놓고, 그런 인식을 교과서에 반영하기도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런 자국 중심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역사 해석에서 벗어나 당대인들의 시각에서 고대사를 바라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의 곳곳에서 그런 노력이 반영된 글귀들을 찾을 수 있다.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2부 고대 왕국을 찾아, 난바와 아스카’였다. 한국사에서는 쇼토쿠 태자보다 그의 스승이었던 혜자, 그리고 쇼토쿠 태자가 세운 호류 사에 벽화를 그린 담징을 더 강조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백제 도래인에게 영향을 받은 쇼토쿠 태자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6세기 말에서 7세기를 동북아시아의 질서가 큰 폭으로 진동한 격변기로 보고 그 속에서 중국, 한국, 일본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동아시아라는 큰 틀 속에서 3국의 역사를 보는 것이 흥미진진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책을 덮었다.

 

k*****6 2012.04.18.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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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의 눈으로 본 일본 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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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건국 신화에서 신의 아들인 환웅은 하늘의 징표인 천부인 3개를 가지고 태백산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인간 세상을 다스렸다. 일본 건국 신화에서 신의 손자인 니니기는 곡옥, 거울, 검 등 3종의 신기를 가지고 다카치호 봉에 내렸다. 신이 인간을 찾아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18쪽   우리의 단군 신화가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듯이, 일본의 건국 신화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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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건국 신화에서 신의 아들인 환웅은 하늘의 징표인 천부인 3개를 가지고 태백산에 내려와 나라를 세우고 인간 세상을 다스렸다. 일본 건국 신화에서 신의 손자인 니니기는 곡옥, 거울, 검 등 3종의 신기를 가지고 다카치호 봉에 내렸다. 신이 인간을 찾아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 18쪽

 

우리의 단군 신화가 환인-환웅-단군으로 이어지듯이, 일본의 건국 신화는 아마테라스-니니기-진무 천황으로 이어진다. 또한 환웅이 환인에게 천부인 3개를 받듯이, 니니기도 아마테라스로부터 3종의 보물을 받는다. 22쪽

 

진무천황릉은 가시하라 시 우네비 산에 있다. 중세 이래 소재 불명이던 것을 막부 말 1863년에 막부와 조정에서 세 후보지 가운데 오쿠보 촌의 무덤을 진무천황릉으로 정했다. 진무천황릉을 조성할 당시 기록에 의하면, 이 무덤은 장방형의 토단으로 옛 절의 기단으로 추측된다. 지금은 직경 약 35m, 높이 2.5m의 원분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성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천황제 국가를 수립하면서 신화의 역사화가 정교하게 진행되었다.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면서 진무 천황을 계승하였음을 천명했다. 그리고 1870년부터 천손강림식의 일본 왕실 제사를 매년 정례화했고, 천황 황위 계승의 상징으로 3종의 신기를 앞세웠다. 진무 천황 즉위일(1월 29일, 나중에 2월 11일)을 국경일로 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24쪽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던 사회, 이른바 원시 사회의 사유는 오늘날의 과학적 사유에 비해 미개, 열등하기보다는 오히려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사고로 보아야 한다.” 프랑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말이다. 문자가 없던 시기의 사람들은 강렬한 감정과 상상을 바탕으로, 자신들을 둘러싼 주변 세계를 이해하려는 욕구와 욕망에 따라 움직였다. 가능한 한 빠른 방법으로 전반적이고 총체적으로 우주를 이해하고자 했고, 주변 환경과 자연에 대해 엄청나게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오히려 과학에 의존하면서 감각적인 지각력이 퇴화하거나 그 능력을 상당히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25쪽

 

일본의 신화가 정리되어 있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는 대략 다카마하라계, 이즈모계, 휴가계 세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 지신 계통의 이즈모계 신화 역시 일본 열도의 원주민 계통 신화가 아니라 한반도 계통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다카마가하라계 신화는 한국의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가락국을 거쳐 일본의 규슈 지반으로 들어간 집단과 관계가 있으며, 이즈모계 신화는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서 신라를 거쳐 이즈모 지방으로 들어간 집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27-29쪽

 

이타즈케 유적지에서는 실제로 2천 년 전의 탄화된 벼 낱알이 발견되었는데 길이와 너비의 비례가 1.6-1.9로 비교적 짧고 둥근 자포니카형이었다. 일본의 벼농사 기술이 한반도와 관련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타즈케 유적지에서는 조몬 시대 최후의 토기인 유스식 토기와 야요이 시대 최초의 토기인 아타즈케식 토기가 함께 출토되었다. 말없는 토기들이 아타즈케에서 조민 시대의 종말과 야요이 시대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이타즈케식 토기는 그 이전의 토기와 다른 여러 특징을 갖고 있었다. 조몬 시대의 토기는 번거로우리만치 복잡하고 다양한 무늬를 갖고 있는 데 반해 야요이 시대의 이 토기는 그릇 형태가 단순하고 무늬가 없거나 간략한 직선 무늬 정도인 것이 특징이다. 또한 야요이 토기는 1,000℃정도에서 구워져 500℃정도에서 구운 조몬 토기보다 얇으면서도 훨씬 단단하다. 색깔은 적갈색을 띤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토기인 민무늬 토기와 아주 유사하다. 한꺼번에 여러 개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는지 한군데서 비슷한 모양의 야요이 토기들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한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본다면 야요이 토기는 조몬시대 토기의 전통을 계승한 측면보다는 외부에서 유입된 새로운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새로운 토기의 주인은 누구일까? 35-36쪽

 

대체로 일본 고고학계는 한국 경로설을 인정하고 있다. 충남 논산의 마전리 유적과 울산광역시의 옥현 유적이 이타즈케 유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도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39쪽

 

후쿠오카에서 남쪽으로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너른 곡창 지대를 만난다. 누가 봐도 농사짓기 좋은 이 땅에 요시노가리 유적이 있다. … 요시노가리 북쪽에 가면 역대 왕으로 추정되는 세력들이 묻힌 북분구묘가 있다. 북분구묘는 직경 40m의 흙을 쌓아 네모난 봉분의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와으이 시신을 넣은 옹관들을 묻었다. 북분구묘를 지나면 일반 사람들의 묘지로 추정되는 옹관묘 행렬이 500m쯤 북으로 쭉 이어져 있다. 옹관 안에는 중국제 청동 거울이 출토되었다. 청동 거울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하더라도 긴 세월 동안 서로 잊지 않기를…(久不相見 長毋相忘…)”이란 로맨틱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사랑의 징표가 아니라 통치자의 권위를 드러내는 위세품이었다. 아마테라스가 손자 나니기를 지상에 내려 보내면서 준 3종의 神器 중에도 거울이 있었다. 아마테라스를 모시는 신궁에 가면 神體로서 거울을 모시고 있는데, 그것은 거울이 여신의 얼굴이아로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히미코는 중국에서 가져온 청동거울을 주변의 소국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여제사장의 지위를 지켜나갔을 것이다. 이렇듯 고대에 청동거울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옹관에서 출토된 청동 거울은 중국 한나라의 것이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부터 청동거울이 유행했는데, 한나라 때 절정을 맞이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청동거울에 집안의 부귀와 즐거움이 오래하기를 바라는 글을 새기는 게 유행이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의자소수대경(宜子孫獸帶鏡)’도 중국의 청동거울을 본뜬 것으로 추정되는데, 의, 자, 손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자손을 널리 번창시키라는 덕담이 담긴 거울이다. 중국에서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청동거울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웬만한 세력가의 무덤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청동 거울이 출토된다. 요시노가리 북반구묘 전시관에 가면 사람들을 매장하고 제사 지내던 모습을 재현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무덤이 있고, 여성인 듯한 제사관들이 청동거울을 가슴에 걸고 춤추고 노래하고 있다.

야요이 시대에 한반도 사람들의 일본 열도 이주는 크게 두 차례에 거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조몬 말기에서 야요이 초기에 벼농사 기술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가져온 생산 활동의 혁명은 인구 증가, 마을의 형성, 마을 보다 더 큰 촌락(村)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야요이 전기 말에서 중기로, 다뉴세문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이동으로 일본 열도에는 촌락보다 더 큰 소규모 국가(國)가 만들어졌고, 쿠니의 지배자들은 신의 얼굴, 즉 청동거울을 치켜들며 사람들을 다스렸다. 한반도와 중국에서 온 거울들은 신의 얼굴을 비춰주는 신기였던 것이다. 50-80쪽

 

사카이 시 부근에는 스에키 가마터가 있다. 스에키는 제사용으로 4세기말에서 5세기에 걸쳐 일본에서 생산되는 한반도식 질그릇인데, 두드리면 쇳소리(스에, 쇠)가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스에키는 높은 기술이 요구되는 것으로 일본의 전통 토기인 적갈색의 무른 하지끼 토기와는 뚜렷이 구별되는데, 스에키의 제작은 1200℃이상의 열을 올릴 수 있어야만 가능하며 이는 제철 기술의 발달과도 직접 관련되어 있다. 구로히메야마고분 등에서 무구류인 많은 양의 철제 판갑옷이 나온 것이 증명해 주고 있다. 88-89쪽

 

하니하라 교수는 일본인을 장두형과 단두형으로 나누었는데 주목되는 지역은 오사카, 교토, 아스카, 나라 등의 도시가 있는 긴키 지역이다 이 지역 주민의 두상은 일본의 다른 지역 주민보다 한반도 주민과 훨씬 가까운 단두형이다. 100쪽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대대적인 인구 이동은 대략 서너 차례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이동은 야요이 시대이다. 두 번째 이동은 5세기 전후로 일본의 고분 시대에 이루어진다. 당시 한반도는 백제의 마한 정벌, 고구려의 신라, 가야 지역에 대한 압박이 있던 시기로, 한반도 남부 주민들이 복잡한 한반도 상황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제철 기술이나 철제 농구, 관개 기술 등을 일본 열도에 전했고, 이들의 도래로 생산 방법이나 노동 형태 등 일본 사회가 다시 한번 크게 변화했다. 이때 말이나 마구, 철제 무기, 기마술 등이 전래된 것으로 보이며, 이른바 기마민족 정복설과 관련된 이동이라고 할 수 있다. 103쪽

 

세 번째 이동은 7세기에 이루어졌다. 7세기 동북아시아 대전 과정에서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고, 두 나라의 유민 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 역시 야마토 정권에 최신 기술이나 문화 등을 전했고, 야마도 정권이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갖추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105쪽

 

일본인들은 한반도에서 시작된 인구 유입이나 문화 전파의 의미를 인정하는데 여전히 인색하다. 개별 유적지의 유물을 설명할 때는 한반도와 일본의 관련성 혹은 영향을 밝히고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설명할 때는 대륙의 문화가 반도를 거쳐 유입되었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107쪽

 

도래인을 한국인으로 볼 것인가, 일본인으로 볼 것인가를 묻는 것은 몰역사적인 난센스일 뿐이다 도래인은 대륙과 한반도의 정치 변동이나 기타 이러저러한 요인 때문에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지역으로 기약 없는 불안한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 양상은 아마도 프런티어보다는 디아스포라에 가까웠을 것이다. 혹은 그 두 야상이 뒤엉켜 있었을 수도 있다. 정착민들 특히 농경 정착민들이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대단히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의미다. 지금 살고 있는 땅의 불안과 고통, 바다 건너 미지의 땅에 대한 두려움과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 도래인의 이러한 처지를 생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편안한 쉼터라는 의미인 아스카라는 지명이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108-109쪽

t****b 2013.02.1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