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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태어난 곳이 부산 직할시였다. 어촌 풍경이 곳곳에 남아 있는 마을이긴 해도,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아빠는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고, 일자리를 찾으러 부산에 왔다. 부산에서 엄마를 만났고 누나와 나를 낳았으며 정착했다. 명절에는 농촌으로 갔다. 농촌에는 아직 어르신들이 몇 남아 계셨다. 아빠의 사촌들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시는 휘황찬란해졌고 도시의 친척들은 세뱃돈을 후하게 주셨다. 반면 농촌은 그대로였고, 시골 친척들은 화폐 대신 어린이 입맛에 맞지 않는 농촌 음식을 주셨다. 나이를 먹을수록 명절에 시골 가기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전원 생활을 향한 환상(?)이라는 게 있어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인생 명작으로 삼고, 김종광 소설가의 농촌 소설도 나올 때마다 사 모으고 있다. 대학 교양 때 선택한 과목도 농대 수업이었다. 인류와 식량, 이라는 제목의 강의였던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세계 주요 곡식과 산지, 기타 등등을 열심히 외웠다. # 1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는 제목은 서정적이다. 부제인 '백남기 농민 투쟁 기록'을 빼고 보면 시집일 것 같기도 하다. 저자가 『대한민국 치킨전』을 쓴 정은정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나에게 이 책은 그저 스쳐 지나갔을 수많은 책 중 한 권이었을 테다. 백남기 농민이 쓰러지고, 돌아가시기까지 나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변명이라면 변명인데, 아이 둘 키우느라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느라 다른 곳을 바라볼 틈이 없었다. 집회 중 시위대 중 한 명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는데 노인이었고 농민이었다, 정도를 들었을 뿐이다. 후속 보도 중에는 그 분을 전문 시위꾼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강한 기사와, 경찰의 시위 진압 과정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는 그런 소식도 들었던 듯하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었다. # 2 이 책이 나왔다. 부제를 보면 고 백남기 분께서 이 책의 주인공일 듯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여럿이다. 고인의 유족, 국가 폭력 진상 규명을 위해 함께한 사람들, 경찰의 시신 탈취에 맞선 시민들 등 보다 우아한 사회를 위해 동참한 많은 이가 주역이다. 정은정 저자는 이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백남기 농민이 왜 집회에 참석하고자 서울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 쓰러진 다음에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연대했는지를 드러낸다. 이 책은 크게 세 가지를 다룬다. 국가폭력, 농촌ㆍ농민ㆍ농업, 그리고 연대. 여전히 국가폭력으로 사람이 죽을 수 있는 나라다. 농촌을 버린 공동체에게 미래는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함께 해야 한다. 고 이 책을 읽었다. # 3 정은정 선생님은 이 책을 마냥 슬프게만 쓰지 않았다고 하셨다. 맞다. 그럼에도 읽으면서 여러 번 울었다. --- 만나자마자 고문당하고 징역살이한 과거, 대학 졸업장도 따지 못한 이야기를 먼저 털어놓은 까닭은 백남기의 양심선언이었을 것이다. 출세도 풍요도 없을 것이 뻔한 농민의 삶을 살아갈 것임을 먼저 밝힌 것이다. 박경숙은 맞선 자리에서 고문당한 이야기를 덤덤하게 털어놓는 백남기를 보며 처음에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 고초를 겪고도 저렇게 온화한 말투와 인상을 가진 것에 끌렸다고 했다. "한 명은 바보고 한 명은 모자라서 함께 살았지." (68쪽) 막걸리 몇 병, 외출용 흰 고무신 한 켤레, 집에서 신는 검정 고무신 한 켤레, 약간의 책. 이것 빼고는 욕심 없던 사람이 열심히 살았어도 쌓인 빚이라 원망할 수도 없었다. (74쪽) 그 노동자들이 저곡가를 견디지 못하고 농촌에서 올라온 농민들의 자식이었으니, 자신의 고향과 부모를 등지고 밥을 번 셈이다. 이것이 한국 산업화의 근본적인 고통이다. 농민의 자식들이 농촌을 버려야만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농촌의 처절한 희생 속에서 만들어진 나라다.(78쪽) 백남기는 우리밀을 살리는 것이 생명운동의 핵심이라 믿었다. 제 2의 주식으로 자리 잡은 밀의 주권이 다국적 곡물기업에 완전히 넘어가는 것은 식량주권의 완전한 포기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비록 밀 자급률이 1% 남짓일 뿐이라 해도 100%를 다 내줄 수는 없다는 몸부림이 우리밀 살리기 운동에 담긴 정신이다. (78쪽) 농민운동이 가장 격렬한 곳이 전라도일 수밖에 없던 이유도 악랄한 약탈의 역사 때문이고 여전히 그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95쪽) 논에 물을 '준다'고 하지 않고 '댄다'고 하는 이유가 있다. 식물 위에 바로 뿌리는 것이 아니라 논둑에 물길을 끌어다 대 논바닥에 물이 찰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날 박근혜의 물 뿌리기 퍼포먼스는 내내 웃음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평생 모내기를 구경조차 해본 적이 없는 도시 사람에게 논에 물을 잘못 대었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저 잘못된 줄 알고도 권위에 눌려 그런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만들어낸 관료들의 무능함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 장면은 강력한 데자뷔였다. 몇 달 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공권력이 시민들을 향해 직사 살수를 했따. 박근혜의 물줄기에 논바닥이 패이고 모가 쓰러지는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농촌은 물이 부족해 애를 태웠던 그해에, 한 농민이 최대 용량을 쏟아 부은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해매다 생명을 잃었다.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형사재판에서의 쟁점은 누가 명령을 내리고 누가 그것을 따랐는가였다. 경찰총장 강신명부터 가장 말단의 살수 요원들까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룼지만, 최고ㆍ최후의 책임자는 박근혜다. (109쪽) 백도라지는 이렇게 말했다. "해결된 것은 없습니다. 무엇보다 물대포 퇴출 약속이 나오지 않았잖아요. 물대포는 그 누구도, 설사 박근혜라 하더라도 맞아서는 안 됩니다." (121쪽) 백남기 농민 투쟁은 곧 박경숙 농민의 투쟁이었다. 박경숙은 백남기 농민의 아내이자 동지였고 그의 심중을 가장 잘 헤아리는 사람이었다. 춥고 더운 날 아스팔트 위에서 고생하는 손주는 안쓰럽기 짝이 없고, 각자의 가정과 생활이 있는데도 이 싸움에 매달려야 하는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이 싸움의 끝을 봐야 했다. 물대포에 쓰러진 것은 백남기 한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이 이 나라가 농민들을 그토록 멸시해온 결과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163쪽)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한 가족과 손을 맞잡았다. 보성 집 안방 문고리에는 세월호 열쇠고리가 달려 있다. 일부러 기억하지 않아도,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바람이 불고 멈출 때마다 함께 잡았던 손을 떠올릴 것이다. 백남기와 세월호의 아이들은 이제 영원히 함께 있다. (210쪽) 이 사회가 절차적인 민주화를 이루기는 했지만 권력을 쥔 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야만성은 변하지 않았다. 농민이라는 이유로, 하청업체의 노동자라는 이유로 당하는 폭력의 성격은 같았다. 백남기는 국가로부터의 폭력을, 이한빛은 자본으로부터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냈고,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은 이 죽음을 백남기 개인과 이한빛 개인의 죽음으로 가두길 거부했다. (214쪽) 사람 목숨 값이 가장 만만하고 싸게 매겨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가장 참혹할 수밖에 없고, 그곳이 바로 한국사회다. 그러니 공동의 목표를 세워 싸워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노동문제와 농민문제 모두 신자유주의에 함께 갇혀 있기에 노동문제만 해결된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행복해질 리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254쪽) '우리가 백남기다'라는 구호는, 오늘은 백남기 농민이 국가폭력에 희생되었지만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누구나 국가폭력에 짓밟힐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265쪽) 쌀값이 보장되지 않으면, 농민들은 돈이 되는 작물을 찾아 시설 재배에 논을 돌릴 수밖에 없다. 너도나도 돈을 들여 온실을 짓고 비닐하우스를 지어 특용작물 재배에 진입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농산물 값의 동반하락이다. (26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