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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가 엄격하게 유지되던 조선시대의 지방관은 ‘목민관(牧民官)’으로 지칭되었다. ‘목민’이란 소를 키우듯이 백성들을 돌봐야 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단어로, 여기에는 관리들이 백성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다. 때문에 국민이 국가의 주인인 현대의 정치체제 아래에서 관리들을 ‘목민관’이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지방관들은 왕의 명령을 받고 ‘백성들을 사랑하는(애민)’ 자세로 정책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이 임명한 관리들은 오히려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유배지에서 이를 지켜보던 정약용은 지방관의 엄격한 임무 수행의 자세를 촉구하며, <목민심서>라는 방대한 저술을 지어 완성하였다. 특히 19세기에는 몇몇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어 이른바 세도정치가 실시되었고, 지방관들 역시 권력에 빌붙어 관리로서의 역할보다는 사사로운 이익을 얻기에 혈안이 되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목민심서>라는 책은 당시 지방관들에 의해 저질러졌던 백성들에 대한 악질적인 수탈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저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주 목민심서>의 3권은 ‘제6부 호전(戶典)’의 제3조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3조의 내용은 ‘환곡(還穀) 장부 상 하’로 구성되어 있는데, 환곡이란 곡식이 떨어지는 봄철에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었다가 빌린 이들이 가을철에 수확하여 되갚는 제도를 일컫는다. 일종의 유상의 구휼정책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지방관들은 오히려 적게 빌려주고 많이 받는 방법으로, 환곡 제도를 농민들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정약용은 이러한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엄격하고 정당하게 제도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서 기술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호적’(제4조)의 관리 역시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 지방관으로서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제5조에서는 국가적인 공사가 있을 때 집집마다 장정들을 징집하는 부역이 공평하게 운영되어야 함을 역설하기도 했다. 농업이 산업의 근본이던 시절 농사를 권장하는 ‘권농(勸農)’(제6조) 역시 관리가 심혈을 기울여야 할 정책이었다.
이와 함께 3권에서는 ‘제7부 예조(禮曹)’의 사무에 관한 내용도 함께 번역하여 수록하고 있다. 전체 6부로 이뤄진 예조의 항목 가운데, 3권에서는 ‘제1부 제사’와 ‘제2부 손님 접대’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대부 집안에서도 제사와 손님 접대는 매우 중요하여, 당대 여성들의 역할 가운데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을 첫손으로 꼽기도 했다. 지방의 관청 역시 해마다 지내는 국가적인 제사와 오가는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 가장 번거롭고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였다. 정약용은 이러한 의식들을 행할 때, 아주 소소한 절차까지도 기록하여 두었던 것이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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