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게임 중 몇몇은 그게 각별히 잘 고안되어서가 아니라 놀 거리가 없던 시절 그거라도 몰입해서 놀아야 했던 추억을 자극할 뿐이다. 책(만화책 포함)은, 그 자질이 삼류든 팔류든 명색이 작가의 주관과 철학이 개입해 다양한 세계를 만들어낼 여지가 있기에 그 다양한 풀 중 뭐 하나에 꽂힌다는 게 나만의 추억 그 정당성의 기반이 마련될 만도 하지만, 갤러그, 팩맨, 테트리스 등이라면 그건 유희의 획일화, 줄세우기에 오히려 가깝지 않았는지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영화는 게임 원작(물론 <둠>)을 갖고 출발했다. 이번 <원더우먼>도 유명한 원작, 또 지난시절 TV시리즈(코믹스 원작과는 거리가 꽤 있어도 독자 논리로 고전이 된)의 성공 때문에 몇 번이나 엎어졌다가, DC의 다른 기획에 추동력을 얻어 훌륭한 감독을 만나 자립한 경우인데, 여튼 광범위한 팬층(과거든 현재든)을 가진 '원작'에 업혀(약하든 강하든) 시작하는 기획은 엄청난 부담을 안는 게 당연하다. 지금은 고전 중 하나로 평가되지만 팀 버튼 판 <배트맨>도 저 사람한테 메가폰 맡기지 말라며 팬덤의 반대가 극심했었다. 이제 두 번의 리부트를 겪는 셈인 저 프랜차이즈는 여튼 팬들의 극성과 진정성 있는 바람 덕분에 생명력을 잃지 않고, 어쩌면 바람직한 이상형을 향해 성장해 나간다고도 할 수 있다.
게임 원작을 둔 영화화는 여태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왔지만, 나는 2007년 당시 영등포 롯데시네마에 <사일런트 힐>을 보러갔을 때 게임 유저들(로 짐작되는 관객들)이 뒷좌석에 앉아 몇몇 장면에 실소(라고밖에는 안 받아들여지는 반응)를 터뜨리며 보곤 하던 체험을 잊을 수 없다. 이는 연출자의 '해석'에 대한 경멸과 실망일 수도 있고, 반대로 통념을 배반한 기발한 재치랄까 의도된 '비틀기 유머'에 대한 작은 동의와 감탄일 수도 있다(아깐 실소라면서?). 하긴 어린 시절 주입된 최초 해석에 대해, 성장을 거부하는 죽은 정신(이미 이런 시절부터, 죽은 정신은 싹이 보이며, 그 재수없고 불길한 질병을 남한테 퍼뜨리지 못해 안달인 좀비와도 같은 행태를 늙어서까지 보임)이 광신적으로 집착하는 어떤 왜곡된 원형만큼 꼴사나운 게 없기에, 게임 팬들은 내심 사소한 일탈을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허나 대체 원작 게임이 왜 인기를 끌었는지, 이 게임의 정체성이라 부를 만한 핵심 개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좀 생각이 있어야 하는데, 내 생각에 <둠>은 그 지옥에서 기어올라온 몬스터들을 빼놓고는 또 존립이 불가능한 컨텐츠이다. 이 영화판에서는 이걸 일종의 전염성 있는(물리면 옮겨지는) 질환처럼 다뤘는데, 이러면 또 흔한 좀비 트렌드에 필요 없이 기댄(아니, 이걸 피하려고 다들 원작을 찾아다니는 것 아닌가?), 눈살 찌푸려지는 진부한 행태가 또 재연되는 느낌이다. 원작까지 힘들게 확보하고선 왜 그만의 어트랙션을 살리지 못하고, 또 충분히 기대지 못하는가?
드웨인 존슨이 등장하기에 이 '스콜피온 킹(지금은 그냥 다들 드웨인 존슨으로만 받아들이지만, 이 영화 찍을 때는 아직 배우로서 평판이 설익었을 단계였겠으므로)'이 신나게 괴물(여튼)들을 무찌르고 다니겠다 하는 선입견이, 게임 팬 아니거나 아무데도 관심 없는 그냥 그런 관객에게는 생겼겠지만(게임 유저라고 해도 별로 다를 것 같지는 않은), 영화는 이걸 일종의 개그라고 해야할지(묘사는 또 엄청 잔인하거나 혐오스러움) 전혀 엉뚱한 쪽으로 스토리를 튼다. '우리는 우리 안의 괴물을 만들어내어 그것과 싸운다'는, 원전을 이상하게 뒤튼 <아이언맨 3>의 대사처럼, 어쩌면 감독은 쓸데없는 진영 논리에 매몰되다 자가당착에 빠졌는지 명백한 객관적 현실을 부인하고 기괴한 자학(엄밀히 말해 '자'학도 아닌 종래의 그냥 남탓)을 위선적으로 뿜어대는지도 모르겠다. 백 마디를 하면 백 마디가 다 똑같은 예전 레퍼토리 케케묵은 헛소리인데, 당사자라고 해서 안 지칠 리가 없다(어쩌면 안 지칠 수도. 그 안이 제일 편안하겠으니).
만화 원작을 영화로 옮긴 <테르마이 로마이>라는 2012년작이 있는데, 여기서 머나먼 시공간을 건너온 루시우스(해당 역을 맡은 아베 히로시는 일본 토종인데 그냥 잘생겨서 착각을 부르는 외모)가 현대 일본인들을 두고 '평안족'이라 부르는 설정이 있다. 얼굴이 평평하다는 뜻인데, 이 영화에 나오는 어떤 분도 그 평평한 얼굴이 뭐가 좋은지 자꾸 스크린에 부각되어서 안 그래도 짜증나는 영화가 더 피곤하게 다가왔다. 동양인이 '공부를 잘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동양인도 아니면서)얼굴만 평평하면 다 공부를 잘한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걸까? 몇 주 전에 쓴 어떤 리뷰에서도 이 말을 하려다 참았는데, 이제 나도 임계점을 좀 넘은 감정이라서 앞으로 참지 말고 그냥 내뱉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