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고, 책도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을 읽고 얻은 결론이라면 결론이다. 맨 앞의 두 챕터를 읽고 나서, 첫 번째 챕터에서는 오타 하나, 두 번째 챕터에서는 오타를 둘 발견했다. 책 처음부터 오타를 발견하면 끝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기분이 별로다. 책을 만들면서 신경을 어디다 썼는지 초반부부터 오타를 내나 싶은 생각이 드니까. (물론 각 단편들을 정렬하는 순서가 마지막에서 완성됐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고.) 그런데다 이사벨 아옌데의 첫 번째 단편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하마터면 책이 읽기 싫어질 뻔했으나, 다행히 세 번째 챕터부터는 오타를 발견할 수 없었고, 내용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단편이 총 13편이 실려 있는데,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라틴 아메리카의 복잡한 정치 상황이 빚어낸 상황 속 사람들과 재산상의 계급 갈등, 여성의 삶 등을 다루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는 식민지로 전락했던 시대를 거쳐 군부의 쿠테타로 인한 불안정하고 살벌한 정치를 견뎌내야 했다. 마치 우리나라의 20세기 모습과 닮아 있는데, 군부 독재시절을 배경으로 하는 우리나라 소설들이 그렇듯이 이를 소재로 하는 <라틴여성작가 대표 소설선>의 단편들은 담담하면서도 슬픈 뉘앙스를 풍긴다.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 뒤에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리고 어떤 무시무시한 일에 대해서는 단체로 아예 없었던 일인 것처럼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렇게 하면 한때 존재했었고 여전히 존재하는 진실이 투명하게 사라지는 것처럼. 삶은 부조리하고 고단하다. 안정되지 못한 나라에서는 모두가 그렇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들조차 그 공식에 대입되는 숫자들일 뿐이다. 꿈은 꿈에서 그치고 부모의 계급은 그대로 아이의 계급이 된다. 아이에서 여성으로 변화하며 겪어야 하는 일은 피곤하고, 강요된 모성애는 오싹하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독이 있는 이야기', '타인의 축제', '훌륭한 어머니처럼'의 3편이다. '독이 있는 이야기'는 <아라비안나이트>의 독이 묻은 책장을 손가락으로 침을 묻혀가며 넘기다가 죽은 왕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전지적 시점과 돋움체로 표시된 부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여인 로사의 의견이 대립되어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타인의 축제'는 엄마가 파출부로 일하는 부잣집 딸의 생일파티에 초대된 여자아이의 이야기이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혹은 아예 계급이라고 생각되는 시스템 자체가 몸에 밴 부잣집 아주머니는 순식간에 아이가 딛고 있는 땅을 무너뜨리고 만다. '훌륭한 어머니처럼'은 여기저기서 주입된 모성애, 훌륭한 어머니상에 쫓기는 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다. 과장된 측면은 있지만 제 엄마를 몰아대는 아이들은 무시무시하다. 마치 악마의 자식이 연상될 정도. 지난해 11월에 도서정가제 대비한다며 싼맛에 구입했던 책인데 뜻밖의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다. 오래 전엔 단편을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어슐러 르귄의 <바람의 열두 방향> 이후 단편도 점점 좋아지고 있다. |
|
라틴 여성작가 대표 소설선/이사벨 아옌데 등저/송병선/더스타일/2012 소설을 읽으면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는데요, 아마 판의 미로 탓인 것 같습니다. 매우 아름답은 동화같은 이야기 속에 사실 괴로운 역사적 현실이 녹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스페인 문학도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여기에 실린 단편 작가들은 스페인어를 쓰긴 하지만 라틴계열 작가들인데요 여러 상황으로 인해 자국을 떠나 작품 활동을 하는 망명 작가들의 약력들을 읽으면서 여러 상념들이 스쳐지나가더군요.
우리 나라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어쩌면 정서에도 좀 덜 맞을 지도 모르지만 놀랍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야말로 신선하다고나 할까요. 일독을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