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의 삶과 앎이 합일되어야 한다는 것은, 특히 지식인의 경우에는 이런 이상의 실현이 그들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지덕일체와 지행합일은 동양이나 서양에 마찬가지로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덕목이다. 『벌거벗은 지식인들』은 서양 역사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지식인들, 특히 철학자, 정치 사상가, 문학가, 학자들 중에서 이런 이상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선택하여 그들의 사적인 삶을 폭로하고 있다. 존슨이 이 책에서 루소와 마르크스를 비롯한 철학 사상가가 4인, 언어학자 촘스키, 그리고 독일 영화감독 파스빈더를 제외하면, 그가 열거하고 있는 나머지 지식인들은 입센과 톨스토이를 비롯한 소설가, 문학가들이다. 그의 서술 방식은 루소와 마르크스에서 시작하여 책 전체에 걸쳐서 이들 두 사상가들과 비교하거나, 계속해서 서술되는 소설가나 사상가의 삶을 비교하면서 고찰하고 있다. 그가 언론인이었고 역사서 저술가였다는 것이 이 책의 부분 부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지식인들은 과대망상증,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존슨의 의도였던 지덕일체의 정신은 바람직한 규범이긴 하지만 완벽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지나치게 나무라는 결백주의적인 요구로 보인다. |
| "지식인은 누구인가? 폴 존슨은 이를 18세기 후반 이후의 현상으로 본다. 이전에 사제나 율법학자가 맡았던 사회 계도의 역할을 이 세속적 사상가들이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신의 종이 되거나 해석자가 아니다. 그들은 신을 대체하고 사회의 질병을 자신들의 지성만으로 진단하고 치유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따르면 인류는 훨씬 나은 세상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논쟁적인 책은 인류에게 충고하고자 한 이들 지식인에 대한 도덕적, 지적 판단을 내린다." "지식인을 경계하라!" 아울러 "그들을 측은히 여기라!" 18세기 이후 몇몇 지식인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에서 나는 몇 개의 챕터만을 골라 읽었다. 맨 먼저는 "마르크스"를 읽었고, 그 다음엔 "루소"를, 그 다음엔 "톨스토이"와 "러셀"을, 또 "헤밍웨이"를 읽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했고, 자신이 변화의 중심에 있기를 원하며 세상을 충고했던 그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고, 많은 것을 물었으며, 많은 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제와 율법학자를 추궁하던 그는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율배반적이었고,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꿈꾸던 그는 자신 역시 착취자요 억압자였다. 논리를 추구하며 세상을 이야기하던 그는 자신에 대해서만은 철저히 비논리적이었으며, 신의 형님이 되길 바랬던 그는 너무나도 많은 이를 실망시키고 말았다. 감히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위인들이라 생각했던 그들도 나와 같은 범인(凡人)들처럼 실수를 했고, 모순적이었으며, 불완전한 존재들이었다. 아니, 그들은 범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다 더 큰 실수와 모순과 불완전을 안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존재가 되기를 원했고,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응석받이와도 같은 유치함을 지녔고, 그렇지 못한 때에는 폭력적이기까지 했던 많은 지식인들을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사는 좁은 세계 안에서 나도 그들과 같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버리지 못한다면 보다 큰 것을 절대 얻지 못하는 법인가 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자기를 얼마간 내세우고자 했고 그를 위해 애썼던 많은 이들로 인해서 이 땅의 진보가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폴 존슨의 이 책도 어쩌면 그러한 욕구에 의한 하나의 열매는 아니었을까. |
| 이 책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성인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실제 생활은 어떠하였고 어떠한 식으로 살았는지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책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학자들의 사생활격인 모습들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한번쯤 존경했을만한 학자들이 대부분이며 또 우리가 한번쯤 그들의 저서를 읽어봤음직한 지식인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은 흥미롭게도 내가 대학시절 상당한 동경의 감정을 품었던 칼 맑스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계급혁명에 의한 사회혁명등을 부르짖었으나 이 책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자신의 가정부를 착취했던 사람으로 나오고 <에밀>등의 작품으로 교육을 꿈꾸는 사람들은 한번쯤 동경하고 존경했을 장 자크 루소또한 자식들을 고아원에 내몰고 사람들에게 고약한 성미로 상처를 주었던 사람으로 나온다. 이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존경해왔던 지성인에 대한 심한 배신감이나 실망등이 일 수 있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른 것들도 그러하듯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는 것 아닐까? 어느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지는 자신의 몫이니까. 겉으로 보이는 훌륭하고 지적인 모습이 속으로 썩은 정서를 가리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하고, 또 그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원하며 항상 주의한다면 이 책을 읽는 보람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나도 학문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들과 같은 이율배반적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서 이 책을 선택했었고 그러한 결심들이 결코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항상 다짐하며 오늘도 열심히 책을 읽는다.에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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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에 앞서 항상 고민하는 것이 바로 어떤 책을 읽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책이 모두 다 좋은 책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싸게 책을 구입한 후, 책을 읽다가 돈이 아까운 생각이 들면 그래도 나은 편이다. 책을 잘 못 골라 자괴감에 빠질 때가 되어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보다 괴로운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책을 고르는 일이 참으로 만만치 않다.
미디어에서 나오는 책에 관한 품평들은 거의가 책을 홍보하는 일색이고, 잘못 만들어진 책이라고 악평을 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또한 그로 인해 책을 잘못 골랐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해서 책을 고르는 나름의 기준이 생기게 되었다. 그 기준은 출판사와 저자, 번역물의 경우 번역자가 누구인지를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다. 김영사, 시공사, 푸른 역사, 학고재와 같은 출판사는 이를테면 좋은 책을 만드는 곳으로 손꼽힌다. 저자의 경우는 우선 약력과 기존에 냈던 책들이 무엇인지를 살핀다. 번역자의 경우에도 전문 분야의 번역자가 펴낸 책을 우선적으로 꼽는다. 그 외에도 책의 목차가 어떠한지를 살피는 것도 책을 선정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하다.
『벌거벗은 지식인』은 그렇다면 어떤 책일까? 그것은 잘못 고른 책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 잘못된 부분은 바로 번역에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옮기면서 우리는 완전한 번역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되도록 모든 글을 한글로 옮겼다'는 점을 자부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번역에 대한 장인 정신의 결여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번역가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드높이고 있다. 과연 그럴까?
외국어를 한글로 옮기는 것이 번역이다. 하지만 문자와 문자를 옮기는 것은 기능일 뿐,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책은 거의 모든 문장이 직역의 형태가 아닌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책 곳곳에서 나타나는 수동태의 문장들과 영어 어법투의 문장이 너무 넘쳐흐른다. 게다가 가끔 나타나는 일본어투의 문장도 눈에 거슬린다.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한 후에 스스로가 감동에 도취한 듯한 인상이 너무 진하다. 진정한 번역가는 우리말에도 능통해야 하는 법이다.
이 책의 저자 폴 존슨은 영국의 언론인이다. 이 책에서 거론하고 있는 13명의 지식인은 18세기와 19세기에 명성을 떨쳤던 작가, 사상가들의 허구를 파헤치고 그 추악함을 폭로하는 것들이다. 유명인사 죽이기 정도에 해당되는 책이 이 책의 내용이다. 이 책에 실린 인물들 대부분이 여성 편력이 심하고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등의 문제점을 가진 사람들이다. 루소는 노출증 환자였고, 자식을 고아원에 버린 아버지였다. 톨스토이는 사창가를 즐겨 찾았던 인물이었고, 헤밍웨이는 편집증적인 거짓말쟁이였다. 사르트르는 여성을 인간 이하로 인정한 남성 우월자였고, 러셀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사람이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칫 이런 파렴치하고 비인간적인 인물들이 어떻게 명망있는 저작을 수없이 써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위대한 지식인들은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더 아프고 쓰라린, 인간적인 내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느낄 수 있기도 하다. 번역에 문제만 없었더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술자리에서 헤밍웨이를 이야기하면서 왜 그가 자살을 했는지를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술자리가 될 것인가. [인상깊은구절] 헤밍웨이는 스스로 출판이 불가능하거나 그가 설정한 최하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느끼는 많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떤 것은 출판이 되었는데, 그것은 형편없는 것이었으며, 초기 작품의 패러디에 불과했다. 한 두 개의 예외도 있었는데, <노인과 바다="">가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그 작품 역시 자기 희화화의 요소가 짙다. 전반적으로 수준은 하락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천재를 발전시키기는커녕 그것을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그의 인식이 우울증과 음주의 악순환을 가속시켰다. 그는 자신의 예술에 의해서 죽음을 당한 사람이었다노인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