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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보는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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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이고 제3자적 입장에서 동아시아를 바르게 판단하는데 도움되며 우리가 잘알고 있지만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꼭 짚어 주며 한명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감동받아 책을 사게되어 언젠간 교수님 사인도 받아야 겠어요 한 중 일의 제각각 자기 시각에서 보아온 시각차와 우리의 역사의식과 더 잘 알게 길작이가 된다아니150자가 얼만지 세어서 쓰나ㅡㅡ차라리 표시라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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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이고 제3자적 입장에서 동아시아를 바르게 판단하는데 도움되며 우리가 잘알고 있지만 명확히 설명하지 못한 부분을 꼭 짚어 주며 한명기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감동받아 책을 사게되어 언젠간 교수님 사인도 받아야 겠어요 한 중 일의 제각각 자기 시각에서 보아온 시각차와 우리의 역사의식과 더 잘 알게 길작이가 된다
아니150자가 얼만지 세어서 쓰나ㅡㅡ차라리 표시라도 해주던가 책평하는데 짜증나네요
s****o 2018.05.3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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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한중관계 (한명기,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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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명기 교수님의 임진왜란 강의(고전의 향연 강의 중 25강~28강)를 인상깊게 들었다. 그 강의 중 ‘27강 전쟁중의 인간군상’에서 도올 선생님이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읽어볼 것을 권한 것이 이 책이다. 강의로는 부족한 부분이 있는 듯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에 이 책을 알게되었다. 또한 강의였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를 채워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읽었다. 역시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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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명기 교수님의 임진왜란 강의(고전의 향연 강의 중 25강~28강)를 인상깊게 들었다. 그 강의 중 ‘27강 전쟁중의 인간군상’에서 도올 선생님이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읽어볼 것을 권한 것이 이 책이다. 강의로는 부족한 부분이 있는 듯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에 이 책을 알게되었다. 또한 강의였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를 채워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읽었다. 역시 임진왜란과 관련해서 읽을만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특히,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강대국 사이의 틈바구니에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필히 이 책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2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지배층은 ‘재조지은’이라고 하는 명에 대하여 은혜를 받았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이것은 인조반정 이후 병자호란을 맞게되는 데에도 일정 영향을 주었다.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에 병합될 경우에 명에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걱정 하에 임진왜란에 참전하게 되었다. 참전 후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 이후 더 이상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다. 조선을 제외하고 일본과 강화협상에만 몰두하였다. 임진왜란 7년 기간 중 4년 이상을 강화 협상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조건으로 시간만 끌었다. 문제는 이것이 조선의 백성들에게는 크나 큰 고초를 가져다 주었다. 명에 대하여 우선적으로 군량을 가져다 줌으로써 조선군의 전투력은 저하되었고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었다. 명나라가 조선 백성들에 끼친 폐해는 일본군이 저지른 것에 비하여 더 못할 것도 없었다. 이런 고초를 가져다 준 명나라를 왜 이리 '큰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나?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조선의 지배층이 망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선조가 왕권을 뺏기지 않고 유지하면서 자신의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 준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당시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지배층 또한 마찬가지였다. 


#3

광해군대에서는 명과 일어나는 후금 사이에서 대외 정책을 잘 이끌었다. 두 강대국 사이에서 나름데로 외교 정책을 잘 조절했다고 알려진 광해군이 '인조 반정'으로 정권을 빼앗기게 되었는가? 대외 정책에 비하여 조선 내부의 내치에서 뒷받침을 못한 것이 원인 중의 하나였다. 또한 지배층들이 '친명' 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뿌리박고 있었다. 왕권을 지지해준 북인과 광해군이 대외 정책에 대한 생각의 차이로 멀어지면서 광해군을 지지하는 세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4

인조 반정 이후 실질적으로는 광해군 대와 비교하여 대외정책의 차이가 없었다. 표면적으로 '친명배금'을 내 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배금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나라와 후금에 대한 물자 공급 및 군량, 뇌물 등으로 인하여 조선의 재정에 아주 큰 부담이 되었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청천강 이북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통치권을 거의 상실하였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5

조선 선조대에는 화폐의 주조 및 유통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곡과 면포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업활동이 미약하였고 농업 위주의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명나라는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면서 은화를 가지고 있어면 군대의 물자를 조선에서 공급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당시 명나라는 병졸들에게 월급 명목으로 은화를 주었기 때문에 많은 은화가 공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은화의 유통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끝.

y***h 2018.08.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