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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일생과 그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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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가 바로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라 베토벤과 관련된 행사가 꽤나 많이 기획되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많은 부분 취소되어 아쉽다. 개인적으로 여름휴가 때 독일을 여행하면서 겸사겸사 베토벤 관련 음악 축제도 가보려고 계획 했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게 못할 듯 싶다. 그래서 찾아본 것이 바로 베토벤에 관한 전기였다. 아마추어 클래식 애호가로서 베토벤의 삶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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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가 바로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라 베토벤과 관련된 행사가 꽤나 많이 기획되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많은 부분 취소되어 아쉽다. 개인적으로 여름휴가 때 독일을 여행하면서 겸사겸사 베토벤 관련 음악 축제도 가보려고 계획 했었는데,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게 못할 듯 싶다. 그래서 찾아본 것이 바로 베토벤에 관한 전기였다. 아마추어 클래식 애호가로서 베토벤의 삶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위대한 예술가들의 전기를 읽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영감을 주는 일이라 이번에 베토벤의 괜찮은 전기를 한 번 찾아보았다. 그 중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어느 신문에 난 책 소개 글 때문이었다. 수많은 베토벤 전기들이 보여준 허상들을 벗겨내고 가장 최근에 연구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제대로 썼다는 소개였다. 이 책은 약 10년전인 2009년에 네덜란드에서 출간되었는데, 지휘와 음악학을 전공하고 한 때 유명 지휘자인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조수로도 활동했던 현직 교수가 집필했다. 한국어 번역 역시 독일에서 음악학 석사를 받은 전문가가 했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한 이후 예술적으로 좀 더 완벽한 베토벤 음악을 선보일 목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매년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8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전기 형식이라 연대순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프롤로그의 첫 장면은 1827년 빈에서 거행된 베토벤의 장례식 풍경이었다. 수많은 조문객들이 들어찬 호화로운 장례식 풍경이 그 당시 스케치로 그려진 그림과 같이 이 책에 실려있었다.



저자는 베토벤의 장례식에 몰려든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재미있는 언급을 하고 있다. 베토벤이 죽기 15년전쯤부터 빈 문화를 지배한 것은 이성에 호소하는 베토벤의 고전주의 음악이 아닌 가볍고 익숙하고 불편함을 주지 않으며 감각에 호소하는 음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베토벤의 장례식이 빈의 일반 시민들로 성황을 이룬 이유는 베토벤이 당대 문화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당시 베토벤의 주요 작품들이 유럽 대도시에서 연주되고 있었으며 많은 황제와 왕들이 그의 음악을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주었다는 말이다. 프롤로그에서 또 하나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한 신문에서 이 책에 대해 평가한 내용과 관련된 것이었다. 베토벤 사후에 많은 기록들이 조작되고 위조되었으며, 그 중심에는 말년에 베토벤의 비서직을 수행했던 안톤 펠릭스 쉰들러가 있다는 것이다. 쉰들러는 베토벤을 그리 오래 알았던 것도 아닌데다 베토벤의 작곡에 대해 기술할 만한 음악적 지식도 갖추지 못했으나 베토벤 사후 그의 공식적인 자서전을 내면서 베토벤이 청력을 잃고 대화할 때 사용했던 여러 권의 대화집을 없애고 가필을 해 조작했으며, 자신의 관점에서 베토벤의 명예를 실추시킬 만한 내용을 삭제했다고 한다. 이런 전모는 1970년대에 와서야 밝혀지게 되었기에 지금껏 베토벤의 원본 자료라고 하는 것들은 쉽게 믿을 수 없게 되었다면서 저자 자신은 좀 더 다양한 자료들을 분석해 베토벤의 전기를 새로 쓴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내용 자체가 논문급이다. 



첫 장에서는 베토벤 가문에 대해 주로 언급하고 있다. 베토벤 가문의 사람들은 고집이 세고 투사 기질을 지녔으며 자존심이 강했다고 하는데,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테너 가수이자 카펠마이스터였으며 포도주 판매업을 했던 사업가이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에게 어린 시절부터 베토벤을 매우 엄격하게 가르쳤다고 알려진 베토벤의 아버지는 제대로 생활을 꾸리지 못하고 가족을 책임지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음악가로 알려졌지만 실제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물론 12살에 궁정 카펠레에 소프라노로 들어가 아버지의 후광 덕분에 궁정 가수로 임명되었지만 곧 아내와 딸을 잃고는 좌절에 빠져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했는데, 그 어디에서도 베토벤이 가장으로서 실패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무례하게 처신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베토벤의 이름인 루트비히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이라 한다. 게다가 그것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난 죽은 형의 이름을 그대로 물러 받은 것이라고 한다. 베토벤은 오랫동안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펠마이스터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으며 다섯 살 무렵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지나치게 엄격하고 혹독하게 피아노를 가르쳤으며,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음악 애호가들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하면서 천재 소리를 들었기에 무엇보다 음악은 그에게 집 안에서 혹은 집 밖에서 스스로를 한 인간으로 내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고 평한다.



베토벤은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흉터가 남았고, 남편을 일찍 잃은 뒤에 병적으로 엄격한 금욕과 참회로 일생을 보낸 어머니의 우울한 기질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베토벤이 평생 결혼하지 않은 이유를 이 책에서는 어머니가 결혼에 부정적 입장이라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을 지키려 했다고 소개한다. 한편 궁정 가수로서 아들을 가르치는데 한계에 부딪힌 베토벤의 아버지는 스승을 찾아다녔는데, 모차르트가 전 유럽을 여행하며 런던, 파리, 빈의 궁정에 모습을 드러내고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들과 교류하던 나이에 베토벤은 자신이 태어난 도시인 본에 처박혀 케케묵은 모호한 음악가들 여러 명에게서 무질서하게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오히려 베토벤이 음악가로 성장하는데 이런 스타일의 교육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역설적으로 베토벤은 성실하고 평범한 스승들의 비호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틀에 갇힌 체계에 길들여지지 않으면서도 기본적인 음악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중요한 시기에 상상력의 힘에 대한 믿음을 배웠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 베토벤의 진정한 첫 번째 스승으로 여겨지는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를 만나게 되는데, 네페는 그 당시 독일 고전주의라 일컬어지는 새로운 예술 사조가 꿈틀거리던 도시인 라이프치히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추측하건대 베토벤도 일찍부터 스승인 네페를 통해 라이프치히에 뿌리를 둔 고귀하고 이상적인 예술적 사명을 접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라 언급하고 있다.



베토벤이 나중에 자신을 독창적인 천재라 부를 수 있게 만든 특성과 음악적 사고방식은 네페를 통해 바흐 가문의 한 사람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의 음악을 배운 덕이라 말한다. 베토벤은 14살에 본의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오페라 공연과 음악회에서 바소 콘티누오 연주자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오페라의 피아노 악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기 때문에 베토벤은 오페라 악보를 보면서 바로 피아노로 연주해야 했고, 이를 통해 대단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읽으면서 바로 악보 파악 훈련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 언어에 대한 이해력도 높였다는 말이다. 그리고 스승의 권유에 따라 변주곡 형식의 첫 작품을 작곡하게 되었는데, 18세기에는 보통 기본 베이스 선율을 주고 그것을 기반으로 새로운 선율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작곡 수업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궁정의 정권 교체기에 궁정 관리와 음악가들의 술책으로 인해 1785년부터 1790년 사이에는 작곡을 하지 못했으며, 대신 연주 활동은 계속 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1785년 모차르트가 본의 궁정 음악감독으로 올 뻔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토벤이 직접 빈에 가서 모차르트에게 음악 수업을 받기도 했다는데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본과 빈을 오가면서 아우크스부르크에 들려 오르간 및 피아노 제작자인 요한 안드레아스 슈타인을 만나 그가 만드는 현대적인 피아노포르테에 감명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청년 시절 본의 명문가 브로이닝 집안의 딸들을 가르치며 그 집안과 돈독한 사이가 되었고, 그 집을 드나드는 많은 지식인들을 통해 이마누엘 칸트나 셰익스피어, 실러의 희곡들을 접하고 토론했다고 한다. 그 집안의 딸 엘레오노레에게 첫 연정을 품었던 베토벤은 자신이 남긴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에서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고 한다. 1790년에 베토벤은 비올라 연주자로 계약을 맺고 정식으로 궁정 악사가 되었고, 관악 팔중주 음악에 대한 수요가 커지자 자신도 관악 팔중주를 위해 두 개의 작품을 작곡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관악기의 기술적 가능성과 표현력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두 개의 칸타타도 의뢰 받아 작곡 했으나 연주회에 올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1790년부터 2년 동안 베토벤은 오페라 아리아 주제로 피아노 변주곡을 작곡했는데, 18세기에 피아노 소나타는 이미 성숙 상태라 야심 찬 젊은 작곡가가 능력을 인정받기에 적합한 분야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었다고 한다. 이 당시 작곡한 리기니의 아리에타에 의한 24 변주곡을 이 책의 저자는 높게 평가하고 있다. 1792년에 베토벤은 빈으로 가서 하이든에게 작곡 수업을 받았는데, 모차르트는 이미 1년전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고 한다. 하이든은 베토벤에게 대위법을 철저하게 훈련시켰지만 스승과 제자 모두 최신 작곡 기법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하이든은 현악 사중주와 교향곡 분야에서 새로운 원칙을 발전시키고 완성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이 당시 빈에서 생활하면서 평생 후원자가 된 리히노프스키 공작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 비창 소나타 등을 헌정한다. 빈에서 베토벤은 청중 앞에서 피아노 천재로서 자신의 재능을 선보일 기회가 자선음악회 밖에 없었지만 귀족층을 위한 개인 연주회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려 나갔다고 한다.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법은 차원이 달랐다고 하는데, 막힘이 없고 강렬하면서도 조화로운 연주로 동시대 음악가들을 능가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피아노에 대한 천재적 감각으로 인해 많은 피아노곡들을 교향악적으로 작곡했지만 현악 분야의 작곡은 많은 연주자들의 연주를 듣고 공부하며 실력을 쌓아 나갔다고 한다. 그 중에는 외국 연주 여행중에 만나게 된 첼로 연주에 탁월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던 장 루이 뒤포르도 있었다고 한다. 베토벤은 외국 연주 여행 중 베를린에서 쥐벼룩에 물려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발진열을 앓았는데, 이게 합병증으로 번져 신경계를 약화시키고 청력에 이상이 생기게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책에는 베토벤이 초반에 현악사중주를 만들기 위해 꼬박 2년을 투자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베토벤의 악상이 담긴 스케치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초본 악보와 수정본을 대조해가면서 베토벤이 얼마나 작은 부분까지 꼼꼼히 검토하고 조율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베토벤의 악상이 담긴 많은 스케치북이 그의 사후에 몇 푼 안되는 돈에 여기저기 팔려나가 결국 소실되었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편 이 시기 베토벤은 자신의 현학적인 현악 사중주가 소수의 엘리트 그룹에게만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폭넓은 청중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교향곡으로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교향곡은 막 기악 음악 작곡에서 최고의 원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때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회를 기획하고 직접 참여했는데, 모차르트 곡과 하이든의 곡 사이에 자신이 만든 교향곡 1번과 같은 곡들을 끼어 넣어 선보였다고 한다. 또한 유명 호르니스트로 조반니 푼토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던 요한 벤첼 슈티흐를 위해 소나타도 작곡했는데, 호른 연주를 꽤 잘 했던 그의 기교에 맞춰 그 곡을 작곡한 이후 이 때 배운 것들을 오케스트라 음악에서 잘 활용했다고 한다. 이어서 제자 카를 체르니와 페르디난트 리스에 대한 이야기도 전개된다. 열 살짜리 피아노 신동 카를 체르니가 베토벤에게 배우는 장면들이 몇 가지 묘사되어 있는데, 제자에게 스케일만 연주하게 했고 그러면서 완전히 새로운 손 자세와 엄지를 쓰는 기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손가락이 연주하는 내내 손은 건반 위에 둥실 떠다니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가르쳤고, 베토벤은 직접 제자의 손등에 뜨개바늘을 올려놓았고 연주하다가 바늘이 떨어지면 주워서 그걸로 손가락을 탁탁 쳤다고 전해진다. 체르니의 유명한 제자가 바로 프란츠 리스트였고, 그 역시 베토벤의 전도사가 된다. 



이 책에서는 베토벤의 청각 이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귀에 통증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차츰 고음역의 음향을 분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한편 피아노 연주나 작곡을 할 때는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음성을 제대로 인지 못했는데, 시기상으로 보면 1811년과 1812년 무렵에도 제자의 연주를 아주 정확하게 수정해 줄 수 있었지만, 그 이후 청력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고 한다. 1814년 베토벤은 마지막 실내 음악회에 출연할 수 있었고, 1815년에는 노래 반주자로 공식적인 무대에 마지막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1818년부터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대화 수첩이나 석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연히 청력 이상을 손보기 위해 온갖 치료법과 비의학적인 요법들이 다 동원되었고, 메트로놈을 만든 멜젤이 베토벤을 위해 특별한 보청기도 제작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베토벤은 왼쪽 청력까지 완전히 잃었다고 한다. 사실 베토벤은 앞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았고 자신이 예술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좀 더 성숙해졌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 바로 그 순간에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이었다고 한다. 정신적 멘토인 플루타르코스를 끌어들여 슬픈 체념을 했고 운명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면서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갔다고 서술한다. 하여간 정신적으로 고통받던 베토벤은 빈 인근 하일리겐슈타트에서 6개월 간 휴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빈으로 돌아갈 날을 코앞에 두고 두 쪽에 달하는 긴 편지를 작성한 후 보내지 않고 평생 간직하게 된다. 이른바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라고 언급되는 글과 함께 또한 불멸의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의 사망 직후 발견되어 지금까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우선 유서라고 불리는 글에서 베토벤은 삶을 끝장낼 생각까지 했지만 자신을 붙잡은 건 바로 예술 그 자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베토벤의 청력 상실은 저주가 아니라 은총이고 축복이라 말한다. 그의 운명은 어려운 선택의 순간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면서 장래가 보장된 피아니스트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온전히 작곡에 몰두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으며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음악적 규칙이나 관습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990년대 개인적으로 직접 영화로도 보았던 "불멸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 책에서 거의 3부작으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도대체 불멸의 연인이 누구냐에 대해 수많은 의견들이 존재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빈에서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요제피네 폰 브룬스비크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미 남편이 있었던 그녀에게 연정을 느꼈지만 어찌 할 수 없었고, 그녀의 남편이 죽은 이후 1804년 다시 만나게 되면서 애정을 확인했고, "희망에 붙여"(Op. 32)라는 작품을 그녀에게 특별히 선물했다고 한다. 물론 이후에도 그녀와 계속 거리를 유지했으며 그 관계는 1807년 가을에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또한 베토벤의 작곡 방법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베토벤은 처음부터 선율이나 리듬과 같은 구체적인 부분을 가지고 씨름하지 않았으며, 구체적인 주제가 아니라 막연한 아이디어를 조성의 공간에 그려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곡을 진행하며 장르와 악기 편성, 조성, 지금까지 작곡한 작품 전체에서 새 곡이 차지하는 자리까지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피아노 음악은 기술적으로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작곡가를 자율적이고 해방된 존재로서 창조와 수용 과정의 중심에 우뚝 세웠다고 평하고 있다. 어쨌든 베토벤은 빈에서 두 번째 아카데미를 열고 음악회를 개최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후 테아터 안 데어 빈의 작곡가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수락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조건으로 매년 오페라 하나씩을 작곡해야 했는데, 가져온 대본들이 싸구려들이라 베토벤을 화나게 했다고 한다. 결국 베토벤이 선택한 오페라 대본은 프랑스에서 온 "레오노레"였다고 한다. 사실 베토벤은 프랑스 파리에 가서 머물 생각을 계속 했었는데, 프랑스와의 연결고리를 중간에서 만들어준 게 바이올리니스트 로돌프 크로이처였다고 한다. 베토벤의 제9번 바이올린 소나타를 헌정 받은 크로이처는 사실 이 소나타가 터무니없이 난해하다며 연주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가 된 "레오노레"는 주제가 조건 없는 사랑의 힘인데, 때마침 불멸의 연인 요제피네와의 두 번째 섬씽이 있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편 베토벤은 빈에서 살리에리에게 오페라 작곡을 배웠다고 한다. 물론 베토벤 스스로 충분한 형식미를 만들어 나가면서 자신만의 독창성을 보여주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과 관련된 이야기도 자못 흥미롭다. 사실 베토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며 대규모 교향곡을 작곡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 했으나 저작권 등 돈 때문에 이 교향곡을 로프코비츠 후작에게 헌정하되 제목을 보나파르트라고 붙일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를 선포한 것에 베토벤이 분노해 그 악보 표지를 찢어 내동댕이 쳤다는 일화에 대해서 저자는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 교향곡을 헌정하려 했던 그 후작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자 마지막 순간에 베토벤은 이 교향곡의 이름을 신포니아 에로이카라고 붙이고 나폴레옹과 연관 짓지 않았다고 한다. 이 교향곡에 대한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 당시 음악회에서 서곡이나 아리아 혹은 협주곡을 연주한 다음에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이 아닌 첫 번째 순서에 바로 연주했다고 하는데, 이례적으로 긴 연주 시간 때문에 이미 피곤해진 청중이 늦은 저녁 시간에 이 곡을 듣게 되면 효과가 줄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 또한 테레제 말파티와의 일화도 흥미롭다. 엘리트층 은행가 집안의 맏딸이었던 그녀는 베토벤과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났지만 서로 결혼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시 성사되지 못했고, 테레제를 위해 음악만 선물했다고 한다.



그게 우리가 알고 있는 짧은 소품인 "엘리제를 위하여"라 한다. 1865년 루트비히 놀에 의해 재발견된 이 악보의 제목을 그가 테레제가 아니라 엘리제라고 옮겼다는 것이다. 물론 베토벤의 자필 악보는 이미 사라지고 없어서 이 이야기가 맞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를 언급하며, 베토벤의 유일한 심리극이라 칭하고 있다. 그 안에는 거칠게 폭발하는 감정, 비탄, 고통, 분노, 그리고 악마 같은 운명의 힘에 과감히 맞서는 저항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베토벤은 당시 피아노로 낼 수 있는 온갖 음향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한다. 평생 동안 베토벤은 불가능해보이는 음향의 조합을 찾으려 애썼다고 한다. 온갖 다양한 악기를 시험해 보았고 자신의 음향의 이상향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달라고 끊임없이 피아노 제작자들을 재촉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에게 피아노는 더 이상 음악회를 준비하기 위한 연습 악기가 아니었고, 새로운 피아노 음악에서 활용할 색채나 기교적인 효과를 찾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앞서 언급한 "레오노레"에 대해서도 기나긴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이 오페라의 첫 번째 판본이 완성되기 까지는 꼬박 2년이 걸렸고, 서곡을 비롯해서 몇몇 부분은 공연 마지막 순간까지 고쳤다고 한다. 베토벤 스스로도 이 오페라가 자신의 전체 작품을 통틀어 가장 큰 산고를 치르고 태어난 영혼의 아이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제목이 다른 것과 혼동되어 이 오페라를 상연할 극장장이 "피델리오"로 바꾸자고 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이 오페라의 주인공이 레오노레였기에 원래 제목을 고집했지만 나중에 극장장의 의견을 따랐다고 한다. 이 오페라의 초연은 준비 미숙으로 망했고, 프랑스 군대가 빈으로 진군해 들어와 귀족들 대부분이 영지로 떠나버린 마당이라 지나가는 프랑스 군인들에게 급히 무료 입장권을 나눠주어 공연장을 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베토벤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낙담했고, 계속해서 이 오페라를 수정해 나갔다는 것이다. 한편 베토벤의 오랜 친구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슈판치히에 의해 최초의 전문적인 현악 사중주단 구성되자 베토벤은 오케스트라적인 음향이 기본이 되는 현악사중주의 언어를 새로 개발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 바이올린의 신동이었던 클레멘트와도 함께 작업을 했는데, 문제는 그 당시 바이올린 제작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몸통과 활의 구조 변화에 따라 음향, 연주 기법, 연주 스타일에도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 불행히도 클레멘트는 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피아노 신동이었던 베토벤은 피아노 협주곡의 경우 혼자 힘으로 일구어 나갈 수 있었지만 바이올린 협주곡의 경우는 어느 정도 클레멘트의 지식과 능력에 의존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한쪽으로 살짝 치우친 감이 있다고 언급한다. 악기의 서정적인 면이 강조되었고 폭넓은 기술적 가능성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했다는 말이다. 특히 음악적 대화가 부족하지 않도록 오케스트라가 더 이상 반주자가 아닌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파트너로 탈바꿈 했다고 한다.



이렇게 기술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서도 연주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음악 콩쿠르의 곡으로는 좀처럼 채택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어서 교향곡 5번과 6번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는데, 이 두 교향곡은 1808년 같은 자리에서 나란히 초연 되었다고 한다. 두 교향곡은 거의 같은 시기에 작곡되어 두 사람의 귀족(로프코비치와 라주모프스키)에게 헌정 되었고, 1년 뒤 거의 동시에 나란히 작품번호 67과 68로 출판되었으며, 형식적인 면에서도 모두 첫 번째 악장은 짧은 편이고 페르마타로 마무리되는 네 마디 모티프로 시작된다는 유사성을 언급하고 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휩쓸던 시절 혼란스러운 시대상 때문에 화폐가치까지 떨어진데다 종신연금을 약속했던 귀족들로부터 제대로 돈도 받지 못해 베토벤은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국가가 몰락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빈 음악계의 우상이 프랑스의 위성국가인 독일로 옮아간다고 하니 귀족들이 나서서 베토벤을 빈에 붙잡아 두기 위해 종신연금이라는 당근과 함께 명칭상 황궁의 카펠마이스터란 칭호를 붙여주었다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베토벤 자신은 거대한 영웅적인 스타일에 종지부를 찍고 아직은 감추어져 있지만 진실한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주의로 전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곡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이라 언급한다. 그는 이제 내면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보이는 실내악곡을 작곡하며 최대한 많은 부분을 독주자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1812년 여름 휴가 때 베토벤이 소망해왔던 대문호 괴테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양쪽 다 상대방에 대한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이 해 여름 휴가 때 불멸의 연인인 요제피네와 우연히 짧은 재회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저자는 암시적으로 그 때 재회 이후 요제피네가 출산한 아이가 베토벤의 아이란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그 아이가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 시기에 만든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10번 Op. 96을 보고 이 책의 저자는 상실과 슬픔, 체념과 위안, 과거의 행복한 시절이나 잃어버린 이상향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동경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며 불멸의 연인과의 사랑을 끝낸 이후 서글픈 절망을 내면화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작품번호 95의 현악 사중주와 작품번호 96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베토벤의 창작 활동에서 전환점이 되는 작품들이라 말한다. 또한 1812년 4월과 10월에 마무리한 7번, 8번 교향곡 역시 전환점에 서 있는 작품이라 말한다. 특히 7번 교향곡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선율과 리듬이라면서 그 이전 어느 누구도 이렇게 작곡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클라라 슈만의 아버지는 이 7번 교향곡을 베토벤이 술이 취한 상태에서 작곡한 것이라 주장했다고 한다. 한편 일종의 부수음악으로 작곡한 "웰링턴의 승리"가 청중들의 큰 호응을 얻으면서 국가주의 물결을 등에 업은 채 어느새 국가를 대표하는 작곡가 역할 수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베토벤이 유럽 각지의 민요 편곡 작업을 10년 넘게 한 사실도 언급하고 있다. 



1814년 빈 회의 때 세계 각국 정상과 귀빈들에게 베토벤의 음악들을 들려주었기에 군주들 사이에 베토벤의 명성이 높아졌고, 빈 회의의 화려한 곡 위촉 작업이 계속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 때 베토벤은 작곡가로서 최고의 사회적 영광과 침체의 깊은 늪을 동시에 경험했다고 평하고 있는데, 청중들이 환호하는 곡들을 작곡했으나 핵심이 완전히 결여되어 베토벤의 작품이라 보기 어려운 작품 몇몇도 선보였다는 것이다. 사실 1812년에 베토벤은 작곡가로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으며, 1814년의 이 모습들은 새로운 길을 찾는 변화의 과정 중에 어쩔 수 없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진통이었다고 언급한다. 결국 1814년 여름에 새로운 피아노 소나타 e단조 작품번호 90번을 작곡하면서 새로운 음악 언어를 실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 이 책의 후반부에는 그 유명한 조카 카를과의 일화들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1813년부터 동생의 아들에 대한 양육권을 두고 제수와 기나긴 다툼을 벌인 일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많은 시간과 돈과 정신적인 에너지를 허비하면서 후견권 싸움에 끈질기게 매달린 이유로 저자는 조카가 베토벤에게 자기 연민의 대리인이었다는 점을 언급한다. 조카와 함께 살고자 했던 시기가 불멸의 연인과의 사랑이 완전히 끝났을 무렵이었고, 자신의 상실감과 빈틈을 메우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또 하나의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베토벤은 다양한 통로로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으면서도 대체 왜 늘 돈에 쪼들렸던 걸까? 저자는 베토벤이 정기적으로 불멸이 연인인 요제피네의 생활비를 계속 지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베토벤과 요제피네의 관계가 정리된 순간을 음악으로 영원히 간직하고자 그는 연가곡 "멀리 있는 연인에게"(작품번호 98)를 작곡했다고 한다. 이 곡은 제대로 된 최초의 연가곡이며 슈베르트에서 브람스에 이르는 모든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표본으로 삼은 작품이라 소개하고 있다. 이 곡은 꿈의 여인과 함께 살기를 그리던 베토벤의 모든 희망이 이제 끝났음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의 베토벤은 동양 사상도 탐닉했고, 고대 인도 경전 리그베다에 매료되었으며, 헨델이나 바흐 음악을 통해 알게 된 고전적 스타일에서 탈출구를 발견했다고 한다. 옛 작곡 기법인 푸가를 자신의 음악 언어로 받아들였지만 진부한 틀을 벗어버렸는데, 작품번호 101의 A장조 소나타는 옛 푸가 원칙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음악에 받아들이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음악이라 설명한다. 특히 강박과 약박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며, 이렇게 박자의 느낌이 사라져 듣는 이로 하여금 시간의 감각을 잃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특징은 후기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 사중주에서 그 정점에 이르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어서 음악사에서 가장 과감하고 복잡하고 까다롭고 수수께끼 같은 제29번 피아노 소나타, 작품 번호 106, 이른바 하머 클라비어 소나타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다.



이 곡은 베토벤의 이전 소나타에 능숙 해야 하고 무엇보다 상당한 지구력이 필요한 음악이라 한다. 이 음악은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이며 파악하기 어려우며 청중은 한 번 들어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라고도 설명한다. 한편 베토벤의 작곡 후반기에는 메트로놈 기호를 표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메트로놈 기호를 여러 작품에 기입해 놓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뒤부터 벌써 템포에 대한 견해가 엇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베토벤 음악을 원전 악기로 연주하게 되면서 베토벤이 지정한 메트로놈 기호가 대부분 연주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베토벤의 장엄미사와 9번 교향곡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특히 장엄미사를 상품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베토벤의 지독한 기회주의적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앞뒤 재지 않고 예술가로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당당히 얻으려는 그의 성급함에서 빚어진 부작용일수도 있다면서 동생 요한이 장엄미사로 파렴치한 협상을 하도록 베토벤을 부추긴 사실도 지적하고 있다. 1821년 불멸의 연인이었던 요제피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몇 달 뒤에 완성된 피아노 소나타 Ab장조 작품번호 110은 마치 불멸의 연인을 위한 레퀴엠과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편 말년의 베토벤을 향한 시선은 존경과 몰이해가 뒤섞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생애 마지막 5년간 빈 사람들이 보기에 베토벤은 기념비적인 존재인 동시에 별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베토벤의 건강 상태는 계속 나빠졌는데, 1821년부터 간과 췌장 질환, 그리고 과도한 음주량이 결합되어 신경계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1824년부터 눈이 잘 안보여 힘들었다고 한다. 1825년에 좋아지는듯 했다가 1826년 증상이 다시 도진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서술되어 있다. 말년의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절반 정도는 실명 상태였다는 말이다. 이어서 1820년대에 베토벤이 젊은 작곡가 세대와 만난 내용들도 이야기되고 있는데, 로시니, 베버, 프란츠 리스트, 슈베르트 등이 언급되고 있다. 한편 이 책에서 저자는 1824년 5월 7일을 서양 문화사에서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쳐야 할 날로 언급하고 있다. 바로 빈에서 베토벤 제9번 교향곡이 초연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 교향곡의 자필 악보는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하는데, 이 음악회에 대한 일화도 넘쳐난다. 그 중에서 흥미로운 언급은 정작 세계사에 남을 이 음악회가 끝나고 베토벤은 음악회 수익이 작다고 몹시 좌절했으며, 수익금 배분 문제로 격렬한 다툼까지 벌였다고 한다. 또한 "환희의 송가"는 원래 실러 자신도 높이 평가하지 않은 시였다고 하는데, 원래 프리메이슨 단원들이 술자리에서 부르기 위한 노래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베토벤은 원본 시에서 술자리 노래를 연상케 하는 모든 요소와 순수한 정치적 색채를 띤 연을 삭제하여 위대한 노래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은 우울하게 전개된다. 우선 양육권을 넘겨받은 조카 카를을 애지중지하게 키우지만 카를은 1826년 자살 기도를 하게 되고, 후견권을 슈테판 폰 브로이닝에게 양도하게 되었다고 한다. 1827년 초 카를이 군인으로서 군사교육을 받고 주둔지로 떠난 다음 날 베토벤은 유언장 공증을 통해 조카를 단독 상속인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이 시점에서 불과 12주 뒤 베토벤이 사망하게 되고 회한이 남은 카를은 나중에 자신의 아들에게 베토벤의 이름인 "루트비히"라는 이름을 그대로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가 작곡한 후기 현악 사중주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마지막 푸가 악장이 딸린 Bb장조 사중주를 모든 사중주 음악의 괴물이라 칭하고 있다. 그리고 c# 단조 사중주를 작곡하기 위해 베토벤은 600장이나 되는 스케치를 남겼다고 하는데, 그래서 베토벤은 이 곡을 자신이 작곡한 최고의 사중주로 여겼다고 한다. 마지막 사중주의 작곡을 마무리 후 악보에 적어 넣은 "어렵게 내린 결정,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라는 문구에 대한 설명은 의외로 소박했다. 높은 수익을 약속하고 성부를 직접 필사한 슈판치히에게 친필 악보 권리를 넘기는 것에 대한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베토벤의 유작은 "우리 모두는 길을 잃었네, WoO 198"이고, 베토벤의 사망 직전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애잔한 감정이 느껴졌다. 베토벤의 다른 전기 작품들을 읽지 않았지만 이 책에서 서술된 베토벤은 날 것 그대로의 베토벤, 모든 종류의 불공정과 착취에 민감하지만 어떨 때는 이기적인 베토벤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d****o 2020.05.21. 신고 공감 6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