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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기묘한 이야기로 느껴졌던 내용이 실상은 우리의 현실을 신랄하게 드러내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다시금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도 부제를 마주하는 순간 읽었던 내용들이 재배치된다는 사실은 글을 읽을 때, 어떠한 관점을 갖고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필경사 바틀비>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허먼 멜빌의 이 단편소설은 바로 그러한 의미에 잘 부합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모비딕>과 더불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작품이 아닌가 싶다.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의미가 내포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이 작품이 여러 곳에서 언급되었다는 생각이 들기에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로 만나볼 수 있게 된 점은 행운이 아닌가 싶었다. 이미 작가와 제목에서는 자주 들었던 터라 성급하게 읽기 시작해서일까? 처음에는 바틀비라는 필경사의 이야기가 자못 기묘하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화자인 변호사에게 고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하여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일체의 일들을 거부하는 그의 모습은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현실에서 자신이 일하는 직장에서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있기에 그러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왠지 당연해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화자인 변호사는 이러한 바틀비의 납득할 수 없는 모습에 대하여 나름의 배려와 기회를 주지만, 바틀비는 이상하리만큼 그러한 변호사의 호의를 철저히 무시 내지는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심지어 사무실에서 아예 기거하는 바틀비에 질린 변호사는 오히려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까지 바틀비를 피하는 모습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마저 든다. 결국 부랑아 수용소에서 끌려가서 거기에서도 일과 식사를 거부하고 끝내 죽음에 이르는 바틀비의 삶은 읽는 이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그는 왜 일을 거부한 것일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다시금 책의 처음으로 되돌아간 나에게 <Bartleby, the Scrivener : A story of Wall Street>라는 제목을 새롭게 발견하면서 갑자기 읽었던 내용들이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된다. 통상 <필경사 바틀비>라는 제목만을 보았는데, 부제의 '월 스트리트의 이야기(A story of Wall Street)'를 보면서 한 남자의 기묘한 이야기가 아닌 월 스트리트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순과 비참한 근로자의 삶을 꼬집는 이야기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다시 읽을 필요도 없이 바로 이 짧은 부제를 통해서 말이다. 바틀비가 고용되기 전부터 일하고 있던 두 명의 필경사 터키와 니퍼즈에 대한 이야기부터 생각해보자. 한 명은 오전에 다른 한 명은 오후에만 유능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둘의 모습도 달리 보이게 된다. 이 둘은 완벽하게 제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시간의 반만 제대로 일을 하는 셈이다. 부제를 보기 전에는 이들을 고용한 변호사가 나중에 바틀비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러한 단점을 눈감아주고 배려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적은 비용으로 이 둘을 고용할 수 있다는 효용성이 부각되면서 변호사의 철저한 관리자의 모습으로 보여지게 된다. 바틀비 역시 싸구려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사무실에서 기거하는 모습은 그의 기행이 아니라 최소의 비용으로 근로자를 고용하여 최대의 효과를 내려는 변호사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중략) 내 사무실은 불투명 유리 접이문으로 구분된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내 필경사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내가 차지했다. 나는 기분에 따라 이 문을 열어놓기도 하고, 닫아 놓기도 했다. 나는 접이문 옆의 한 구석에 바틀비를 배치하되 내 구역 쪽에 두었다. 사소한 일을 해야 할 때 이 조용한 남자를 편하게 부르기 위히서였다. (중략) 한층 만족스러운 배치를 위해 나는 키가 높은 초록색 접이식 칸막이를 세워 바틀비를 내 시야에서 완전히 차단하되, 내 목소리는 들릴 수 있게 했다. - p. 32 ~ 33 中에서 - 변호사가 자신의 사무실의 모습에 대하여 설명하는 부분을 보자. 단순히 변호사가 운영하는 사무실의 배치도를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 공간을 당시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으로 확장하고 나면 자본가 또는 경영인들이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하여 근로자들을 자유롭게 배치하고, 근로자는 이에 순응해야 하는 불편한 모습으로 비춰지게 된다. 시야를 차단하되 목소리는 들려야 한다는 변호사의 말은 오로지 근로자들에 대한 일방적인 지시와 명령만이 존재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유용해. 나는 그와 잘 지낼 수 있어. 내가 그를 내쫓는다면 그는 나보다 덜 관대한 고용주에게 걸려 거칠게 다뤄지다 불쌍하게 쫓겨나 굶어 죽게 될 가능성이 높아. 그래, 나는 싼값에 즐거운 자기 긍정을 살 수 있어. 바틀비의 편을 들고 그의 이상한 고집을 너그럽게 봐준다해도 내가 지불해야 할 비용은 거의 없다시피 하지만 내 영혼에는 장차 양심에 달콤한 양식이 쌓이는 거야. - p. 41 中에서 - 일을 거부하는 바틀비에 대하여 관대한 모습을 보여주던 변호사의 내면은 이처럼 그가 유용하다는 점과 더불어 그러한 관대함이 자신의 최소한의 양심에 명분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 대목은 근로자를 인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효용성과 자기만족에 근거한 것임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변호사의 자비심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위선적임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변호사는 당시 자본사회의 고용주 내지는 자본가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에게 고용된 필경사들은 자본주의의 위계 질서와 비인간적인 사회구조의 희생양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틀비가 '하고 싶지 않다.'라는 말로 일을 거부하는 것은 그러한 암담하고 모순적인 사회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동적인 저항의 의미로 변이된다. 이러한 최소한의 수동적인 저항에도 크게 당황하는 변호사의 모습은 당시 자본주의의 모순과 구조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바틀비의 이러한 수동적이 저항을 의미하는'싶은'이라는 단어가 주위 동료들도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에 경기를 일으키는 변호사의 모습 역시 근로자의 노동 운동을 두려워하는 자본가의 모습으로의 변이로 보여지게 된다. 부제를 통한 이러한 내용의 변이는 멜빌의 이 작품이 왜 보르헤스의 눈길을 끌었는지 공감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에 착안하여 이 작품을 그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에 포함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필경사 바틀비>는 꿈의 상상력이 낳은 한가로움 혹은 기교 이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것은 세계의 일상인 아이러니들 가운데 하나인 '허무함'을 보여 주는 슬프고 진실한 작품이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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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름만 들어도 묵직하고 삶에서 지표를 알아가게 만들 것 같은 심오함이 숨어 있는 이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나에겐 두 가지나 있다. 우선, '피로사회'를 통해서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당연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이름을 통해서이다.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구성은 보르헤스가 엄선한 스물아홉 권의 작품집으로, 혼돈(바벨)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인생과 우주의 의미를 찾아 떠나려는 모든 항해자들의 든든한 등대이자 믿을 만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고 출판사의 서문에 밝혔듯이, 보르헤스의 총체적인 책을 찾아 헤맨 흔적을 담은 여정이라고 한다. 그 첫 번째로 선택한 '필경사 바틀비'는 나에게 우울함을 가져다 준 책이다. 읽고 나서 그저 우울하고, 삶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저렇게 철저하게 자신의 생각 속에 깊숙히 들어가서 살 수 있는지 의문만 들었다. 보르헤스는 해제를 통해 "[필경사 바틀비]의 문체는 주인공 못지않게 음울하다." 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필경사 바틀비'를 통해 나 자신도 어느새 그러한 음울한 분위기에 전염이 된 듯 잠깐은 무기력한 상태를 경험한 듯하다.
이야기 화자는 월스트리트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자신이 밝혔듯이, 그 자신이 안락한 삶을 제일로 생각하는 인생관을 갖고 있다. 어느 날, 자신의 사무실에 바틀비라는 필경사를 채용하게 된다. 처음의 인상대로 라면, 바틀비는 변호사를 도와서 사무실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자신의 업무를 해 줄 수 있는 성품을 가진 조용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너무나 상반되게 바틀비는 필사 이외에 그 어느 것에도 관심과 의욕을 보이지 않고, 늘 "하고 싶지 않습니다"로 일관한다. 보통 고용주 같으면 그러한 비협조적인 사무원은 해고를 하는 게 일반적인데, 변호사는 자신 조차도 알 수 없게 바틀비의 그러한 행동에 대해 이해하는 방향으로 자꾸만 나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바틀비의 말투를 흉내내는 상황까지 맞이하게 된다. 급기야, 주위 사람들의 질타와 건의로 바틀비를 내보내려고 하지만, 바틀비는 그러한 상황에서조차도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로 일관한다. 분통터질 노릇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변호사는 그러한 바틀비의 태도에서 동정과 그의 삶을 뒤덮고 있는 외로움과 고독을 이해하게 되고 자신마저 그를 내몬다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을 뒤덮고 있는 부조리와 변호사가 바틀비에게 품고 있는 생각과 행동의 아이러니는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바틀비의 무엇이 변호사를 붙들었을까? 늘 "하고 싶지 않다"라고 일관하는 바틀비를 비난하거나 낙오자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는 변호사의 태도가 더욱 답답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결국, 건물에서 무단 점거하고 있는 바틀비를 건물주의 신고로 경찰에 강제 연행되고, 감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바틀비, 과연 바틀비의 생각 속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늘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감옥에서도 벽을 쳐다보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는 바틀비를 통해 작가 하먼 멜빌은 삶의 허무함을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알 수가 없다. 바틀비가 죽은 뒤 변호사가 소문을 통해 그에 대해 알 수 있었던 것은 과거 바틀비가 워싱턴에서 배달 불능 우편물 취급소에서 말단 직원으로 일했다는 것 정도이다. 과거 바틀비 직업 이력도 이 이야기의 하나의 축을 이루는 아이러니다. 갑자기 해고가 되었지만, 바틀비는 부치지 못하는 우편물들을 태우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그 일이 바틀비에게 가장 어울리는 직업은 아닐까? 그 보다 더 그를 잘 대변해 주는 그의 이력은 없을 것 같다.
바틀비를 통해 삶에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저 허무만 가득차고 우울만 가득 안아버린 독특한 독서시간이었다. 워낙 난해하고 짐작하기 힘든 작가인 보르헤스가 [필경사 바틀비]를 선택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도 글 속의 화자와 같이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라고 토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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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알고 있던 글을 또 한 편 읽었다. 이런 글이었구나, 이런 내용이었구나, 이런 지독함이 담겨 있었구나. 영영 모르고 살았다면 좀더 평온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렇게 알게 되어 앞으로의 삶이 덜 행복해진다 싶어도 그 불행의 한자락을 끝내 모른 채로 살지 않아서 다행이기만 하다는 마음이다. 오늘은 어째 내 마음이 여유로워진 듯하다. 바틀비 덕분일 것이다.
불행한 시대, 불행한 사람. 누군가는 행복과 행운에 겨워 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반대쪽에는 전혀 그런 은혜를 입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든, 어느 공간이든. 내가 어느 쪽에 속할 것인가, 어느 쪽으로 넘어갈 것인가를 따지는 일은 그래서 많이 서글퍼진다. 아무래도 안도보다는 염려하는 마음이 크게 마련이니. 혹시라도 바틀비처럼 되면 어쩌나, 바틀비처럼 되고 싶지는 않은데, 바틀비라고 해서 그렇게 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지 않았겠는가, 바틀비, 바틀비......
책의 크기는 작은 편, 두께도 얇은 편이다. 한달음에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한 장 한 장, 한 장면 한 장면이 던지는 삶의 지독한 무게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보르헤스 세계문학 컬렉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하나인데 이런 이름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다. 내 의식이 한층 높아진 듯하다.
'광기'라는 말은 얼마 전까지 내 정신 안에 없던 것이었다. 보드 게임을 하던 중 '아컴 호러'나 '광기의 저택'과 같은 게임을 하면서 러브 크래프트라는 작가의 이름을 통해 서서히 친숙해진 낱말인데.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 미국 사회의 어느 영역에 널리 퍼졌다는 이 '광기'의 분위기가 당시 미국 소설과 어떤 연관성이 있었던 것인지 이제야 조금씩 잡히는 느낌이다.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 그 시대 미국과 미국인들의 속성 일부를. 독립 전쟁과 남북 전쟁과 대공황과 자본주의 성장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등등. 그리고 그 혼탁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살아남아야 했던 이들의 절박한 의지를.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었으리라 싶은 광기의 시대, 그 분위기를.
마음은 약하고 섬세하고, 그럼에도 의지의 어떤 부분은 지독히도 강하고, 올곧아서 타협하기 힘들어하는 성격을 가진 이들은,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내기가 참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모습이라는 게 어떠하든. 본인이 원해서 얻은 게 아닌 천성으로 갖고 태어난 사람들일 경우 더더욱. 바틀비처럼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속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겉으로 표현하는 사람, 바틀비와 같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용기라고 할 수 있을까. 용기라면, 이 용기는 이 말을 하는 사람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이끌어주는 매개체가 되어 줄까. 글쎄, 답은 함부로 말할 수가 없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말하는 바틀비와 말 못하는 바틀비가 같이 살고 있을 것이니.
앞서 읽은 잡지인 뉴필로소퍼에서 소개 받은 책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과정과 이어지는 책으로. 사는 일은 참 쉬워 보이다가도 짬짬이 이런 어려운 문제를 만나 헷갈린다. 이 문제 앞에서 단순해지지 않아 다행이다. 바틀비의 고집이 내내 애잔하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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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고전문학강의>를 조금은 재미나게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고.무튼 필경사바틀비 에 관한 설명에 로렌스의 평이 실려 있어 흥미롭긴 했다."로렌스는 멜빌이 천국을 믿었으며 그래서 그가 연옥에 살게 되었노라고 썼다."/89쪽 '멜빌에 관한 로렌스의 저 말은 '필경사바틀비'에서도 느낄수 있는 감정이였다.솔직히 말하면 머릿속 복잡한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로렌스가 명쾌(?)하개 정리해 준 것 도 같고.바틀비를 바라 보는 이들이 사는 곳이 연옥은 아니였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물론 바틀비 자신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연옥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70쪽 내외의 짧은 단편이다.게다가 변호사의 시선으로 바틀비를 관찰하는 형식으로 소설이 진행되다보니 뭔가 지속적인 긴장감이 들었다.특별하지 않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 특별한 무언가가 뿜어지는 듯한 기분이랄까...피고용인이 고용인을 지배하는 듯한 이상한 분위기...신기한건 바틀비의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반복적인 말 속에서 뭐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있지 ?라는 생각만 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때론 하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한 당당한 거부를 표현하는 것도 같고,또 융통성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어떨땐 소통 자체를 할 수 없는 사람인건가..라는 생각도 들고 고용인인 변호사가 자신을 조금은 양심적인 인물로 생각하고 싶어 바틀비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시작부터 끝까지 묘한 기분이 들게 한 소설이였다.이후 간략하게 바틀비의 과거에 관한 언급을 통해 그가 그럴수 밖에 없었음을..아니 그럴수도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지만..그럼에도 뒷맛이 썩 개운하지는 않았다."나는 바틀비 때문에 내가 겪고 있는 불편이 전부 영원의 세계에서부터 예정된 것이며 나처럼 하찮은 인간이 통찰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신비한 목적을 위해 그가 나에게 배정되었다는 논리에 빠지게 되었다."/68쪽 변호사가 하고 있는 생각을 나 역시 종종 드는 마음이라서 그랬을까...아니면 애초에 궁지로 몰아 넣지 않았으면 되지 않았던 거 아닌가 라고 따지고 싶은 걸까..흥미로운 건 이 바틀비 란 인물에 대해 들뢰즈,아감벤,지젝등 이론가들이 철학전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였다.그리고 보르헤스가 '필경사바틀비'를 바라본 시선에도 격한 공감이.."<<필경사바틀비>>는 꿈의 상상력이 낳은 한가로움 혹은 기교 이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그것은 세계의 일상인 아이러니들 가운데 하나인 '허무함'을 보여주는 슬프고 진실한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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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은 《모비딕》의 작가이다. 예전에는 소설 속 흰 고래의 이름인 ‘모비 딕’ 대신 그 흰 고래를 연상시키는 ‘백경’ 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고는 하였다.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가세가 기울었고, 이후 선원이 되어 배를 탄 경험을 하였는데, 이때의 경험이 《모비딕》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번 선집에서 보르헤스는 《모비딕》대신 (집요함으로 치자면 《모비딕》의 에이햅 선장에 버금가는) ‘필경사 바틀비’를 내세운 소설 《필경사 바틀비》를 소개하고 있다. 보르헤스는 두 작품이 하나는 거대한 바다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월 스트리트의 작은 사무실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에이햅 선장과 필경사 바틀비가 보여주는 ‘광기와 그런 광기를 전염시키는 환경의 비현실성’에서 유사함을 지적한다. 지금이야 누구든 한 번쯤 읽고 넘어가야 하는 명작을 쓴 작가이지만 살아 생전에는 독자나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허먼 멜빌이지만, 너새니얼 호손만은 그를 인정하였다고 하니 좋은 작가는 좋은 작가를 보는 눈 또한 가지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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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우리는 언제 놀라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소설 속 무엇이 우리를 놀라게 했는가?"하는 물음과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필경사 바틀비』는 두 질문에 같은 것으로 답할 수 있는 이야기다. 내가 생각한 답은 '허무함' 혹은 그와 쌍둥이나 다름없는 '덧없음'이다. 무엇의 허무함이고 덧없음인지 얼마간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줄거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신을 '나'로 소개한 화자는 스스로 밝히기를 '극도의 안전 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는 법률 관련 업계에 종사하는 '야망 없는 변호사 가운데 한 명'이며, '부자들의 채권과 저당권과 권리증서들을 다루며 안락하게 일'하는 신중함이 장점이라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나'가 업무가 크게 늘면서 새로운 필경사를 고용하게 된다. 그렇게 고용된 필경사가 바로 '바틀비'다. 『모비딕』속 에이해브의 광기에 찬 복수와 비극적 운명과도 닮아 있는 바틀비지만 그 태도는 모순으로 가득하다. '하고 싶지 않다'는 수동적인 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능동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바틀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표현을 찾자면 '수동적 능동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야기가 결말에 닿아 '나'가 바틀비의 이력을 이야기해줄 때까지 독자는 왜 바틀비가 '하고 싶지 않'아 하는지, 그 고집스러움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 하나는 저절로 알아차리게 된다. 바로 바틀비의 '싶은'이라는 표현이 갖는 마력이 전염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내 경우에는 평생을 필사로 먹고 살아온 60대 동료 필경사인 터키가 쓴 '싶다'는 단어를 '나'가 짚어내는 순간에 바틀비처럼 나 자신 역시 '싶은' 것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에 놀란 이유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말이 뭐라고 마음속에 숨겨진 '소망'이라고 해도 좋을 본능을 일깨웠을까 싶어 졌기 때문이다. 터키도, 또 다른 필경사 니퍼즈도, 화자인 '나'조차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바틀비의 당당하고도 단호한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태도에 끌렸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야기가 결말 무렵에 이르면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끌림, 전염이 사실은 이미 텅 빈 껍데기를 향한 '죽어버린' 혹은 '의미를 잃어버린' 어떤 것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 지점에서 이 짧은 소설, 도무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는 거부를 거듭하는 바틀비의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 된다(왜 그런지 궁금하다면 길지 않으니 꼭 읽어보시길). 세상에 존재하는 일단의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존재 이유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하나의 의미가 살아남아 전해지기 위해서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바틀비의 이야기가 허무함과 덧없음에 수렴하는 이유는 이미 바틀비는 의미를 잃고 껍데기만 남아버렸기 때문이다. 바틀비의 말과 행동이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 또한 바틀비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 역시 텅 비어있었으므로, 바틀비의 울림을 따라 공명했던 것이 아닐까. 그 공명이 이야기 밖에서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의 내부에까지 퍼졌던 것은 아닐까. '본래 그러했어야 했던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랬으면 좋겠다'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런 의도가 전해 지거나 실현되지 못하고 유실되어 사라졌다면, 그 사라짐으로 인해 처음의 의도를 통해 삶의 무게 혹은 마음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었던 사람들, 행복해져야 했던 사람들이 불행 속에서 절망하며 죽어갔다면(반드시 숨이 끊어지는 '죽음'이 아닐지라도) 처음의 의도는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어지는 것일까. 바틀비의 이야기에 담긴 비극은 그 지독한 허무함으로 허무 타령을 일 삼곤 했던 나를 놀라게 했다. 덧없음이 다시 의미를 갖는 순간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허무함은, 덧없음은 상실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 바틀비의 삶은 허무했으나 그의 이야기는 전해지고 다시 전해져서 다른 의미를 낳을 것이다. '싶다'는 말이 사치처럼, 때로는 금기처럼 되어버린 시대. '하고 싶다'는 마음이 오래된 박물관의 박제처럼 낡아가는 이 날들에 바틀비의 삶은 어떤 의미를 낳게 될까. 새롭게 생겨난 이 의미에 허무함과 덧없음에서 느꼈던 놀라움보다 더 커다란 놀라움을 느낀다. 조용하고 격렬하게 분노하는, 수동적인 능동성을 소유한 바틀비. 나도 가끔 바틀비처럼 말하고 싶어 질 것 같다. "아니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