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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가슴이 매우 아팠다. 사전에 감지된 투표에 대한 열기나, 바꾸고자 하는 열망 등을 고려했을 때, 이번에는 무언가 이루어지리란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결과는 다소 엉뚱(?)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결과는 다수 국민의 뜻이고 현실이었다. 투표율을 감안할 때, 지지율 이라는 것이 전체 국민의 30% 수준을 왔다 갔다 하는 것 이지만, 그리고 다수결제도가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게임의 룰이 그러했고, 그 룰에 따른 결과는 이 땅에 뿌리깊게 드리워진 거대한 장벽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러한 시점에 읽게 된 박노자 교수의 글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읽기 전부터 조금은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박노자 교수가 쓴 책들을 전작읽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을 읽었고, 또한 그의 주장에 많은 공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글은 우리사회를 파헤치고, 우리로 하여금 반성하게 만들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안겨주지만, 그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아니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것들을, 이방인의 눈으로써 직접적으로 꼬집기에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곤 했다. 한국사회는 이 땅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온 사람들이 느끼는것 이상으로 배타성이 지배하는 사회이지만, 미국이나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사회라고 홍세화씨는 말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폐쇄성을 아프게 찌르는 박노자 교수의 글은 이 땅의 보수는 물론 진보 모두에게 불편함을 안겨준다고 덧붙인다. 그는 머리로는 좌파적인 사고를 하지만, 몸은, 생활은 이미 우파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보내는 경고가 바로 다소 어색한 제목의 글 [좌파하라]라고 추천사에서 말하고 있다. 박노자 교수는 사회주의 소련에서 자랐으며, 사회주의 소련이 자본주의 러시아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것을 몸으로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사회주의를 꿈꾸는 좌파이다. 소련은 사회주의국가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그는 진정한 좌파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차별을 시도하기에, 이 땅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글은 더없이 쓴 소리가 되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사회를 계급간의 갈등으로 보고 있다. 아니 좌파는 계급적 성격을 떼어 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라고 단언한다. 그렇기에 극우정치가는 물론 소위 리버럴이라 불리는 자유주의자 모두를 죄악시 하고 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 혹은 진보진영이 자본주의에 대한 극복보다는 자본주의 폐해를 바로잡고, 그것을 복지로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박노자 교수는 자본주의는 이미 위기에 봉착하였고, 보다 가혹한 착취를 통해서만 겨우 유지되는 유효기간이 끝난 체제로 보고 있다. 그렇기에 이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직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간의 갈등만이 남아 있을 뿐 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사회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한국사회의 문제는 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정권이 바뀐다고, 대통령이 바뀐다고 최소한의 자본주의 합리성마저도 갖고 있지 못한 한국사회가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 단언한다. 정치인이라면 오늘의 ‘세’보다는 내일의 ‘가능성’을 훨씬 중요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들은 정치인이 아니라 눈앞의 권력을 나누어 먹는 정객이 옳은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선거를 앞두고 이념보다는 실익을 위해 서로 통합하는 진보진영에게 그가 보내는 쓴 소리이다. 그는 자본주의의 대안사회로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복지문제는 결국 계급간의 갈등이며, 신자유주의는 피지배계급에게 끝없는 신분하강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속적인 성장과 고용이 보장될 때에야 복지제도는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이미 자본주의가 위기에 봉착한 지금, 북유럽의 사회복지제도 축소는 당연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만이 자본주의가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문제는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를 떠나서 지금의 자본주의가 어떤 자본주의인지를 정확히 인식해야 하고, 대안사회로 내세우는 사회주의가 어떤 사회주의 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자본의 사적 소유영역을 과감히 축소하고, 부의 재분배가 지속적일 수 있도록 공공화하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노동과 상관없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그가 대안으로 내세우는 사회주의 사회이다. 그렇기에 그는 혁명을 꿈꾸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친 한국사회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결코 자본주의로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좌파의 우경화는 민중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하는 그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계급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함께, 계급자체가 변혁의 출발점이 되어야 비로소 사회가 변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좌파하라!고 말한다. 박노자 교수의 글은 역시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 책 또한 총론적인 면에서는 아프지만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각론에서는 예전보다도 더 불편하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 대안사회로서의 사회주의는 꿈 같은 얘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미 자본주의의 독수에 깊이 중독되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나 역시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또 그런 사회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사람이지만, 100년 후의 유토피아 보다는 10년, 아니 5년 후의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변혁된 사회를 더 바란다. 그렇기에 선거 결과가 아프게 다가오고, 리버럴과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이 합쳐서라도 이 땅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보수를 대체하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작은 발걸음일지라도 지금보다는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의 출발점이라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글이 생각난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 혹은 좌파의 문제는 대중을 가르치려 한다는 점이다. 물론 과거에는 계몽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판을 두드리면 자신이 알고자 하는 모든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시대에, 변혁을 위해서는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는 진정성이 아닌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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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끝난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후보가 니콜라 사르코지를 누르고 17년 만에 좌파 정권이 집권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세기말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닥치면서 전 세계 경제를 초토화했기 때문이다. 최근 그리스는 국가 부도 사태에 이를 정도가 되어 버렸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그 어느때보다 힘든 상황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도 문제지만,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대중들이 하루 하루를 불안해하고 자신만 불행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강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고, 과도한 착취와 사회적 소외로 인한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이 OECD 회원국 중 자살율이 최고라는 것에서 도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이번 한국의 총선에서는 보수당인 새누리당(구 한나라당)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새누리당이 쇄신을 주장하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해서가 아니다. 이는 전적으로 진보당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의 잘못이 크다. 최근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 부정사태와 관련하여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당권파와 비당권파의 진흙탕 싸움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한국 사회에 ‘진보’, ‘좌파’가 있기라도 한걸까. 국민들만 정치 놀이(?)에 속고 있다는 느낌이다. 지금과 같은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을 내다본 이가 있었다. 바로 이 책을 쓴 박노자다. 박노자는 한국사회에서 소위 ‘정치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정객’이라고 부른다. 제대로 된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정객은 정치인이 아니어서 눈앞의 권력을 나누어 먹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고, 절대적인 목적은 집권이기에 집권을 위해서라면 세인의 상상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온갖 곡예(?)를 다 한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예리한 통찰과 비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한국사회에 대한 거침없는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때로는 통쾌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지만 너무 적나라해서 부끄럽고 꺼려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에서 태어나 자본주의 러시아로의 급격한 변화를 지켜보았고, 고교 시절 우연히 본 북한영화 춘향전을 통해 한국을 알게 되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동방학부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고대 한국의 가야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정작 북한이 아닌 한국행을 택해 2001년 한국으로 귀화하였으며 현재는 북구의 복지국가인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한국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독특한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다양한 사회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정서를 체험하였고, 그 결과 자신만의 호흡으로 그 사회를 들여다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박노자와 전문 인터뷰 작가인 지승호 사이에서 있었던 인터뷰를 글로 엮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글은 명쾌하고 잘 정리가 되어 있다. 박노자는 인터뷰 내내 일관되게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더 이상 희망과 미래를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고속성장을 경험한 우리에게 있어 자본주의는 익숙한 제도이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 제도를 버리라고 한다. 더 이상 자본주의로는 이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문제는 자본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윤을 최대의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상 자본주의는 인간을 위한 시스템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민중들은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런데 소위 ‘정치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무엇을 하는걸까? 그들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박노자는 다소 비관적인 시선을 보낸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하고 이념만을 외치는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과 정객들은 진정한 좌파가 아니라고 한다. 민주화 과정에서 정권에 발을 들여놓거나 제도적 이해에 연루된 ‘참여파’ 지식인들은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과거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정권교체를 줄곧 부르짖으며 스스로 진보적 지식인이라는 환상을 포기하지 않고, 그보다 조금 더 ‘왼쪽’에 서 있다고 이야기되던 지식인들은 대중매체의 위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이 던져주는 유명세를 누리며 정작 스스로의 급진성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한국사회의 진보와 좌파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진중권, 문재인, 유시민, 조국, 박원순도 모두 그의 예리한 칼날을 비켜갈 수 없다. 정객들은 마치 투표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듯이 주장하지만, 투표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잘라서 말한다. 민주화되고 나서 네 명의 대통령, 즉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이 집권을 했지만 서로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민중에 대한 정책은 일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고수하고 국가보안법은 상존했으며 해외파병을 하는 등 못할 짓(?)을 해놓고 진보니 참여니 하면서 말 잔치만 요란하게 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부르주아 정객 중에서는 어느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달라질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대북정책이 약간 달라질 수 있는데, 다행히 대북정책이 완화되면 아주 좋지만 그건 한국사회의 기본 모순과는 무관한 거라고 진단한다. 그리고 북한사회와 그 정권은 구분해서 보아야 하고, 비판할 부분은 비판할 줄 아는 좌파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또한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었던 ‘나꼼수 현상’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있다. 나꼼수의 욕설 같은 것을 들으면 한국사회에서 쌓일 수밖에 없는 모든 원한이 풀리는 것 같은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으로, 한국사회를 진짜 바꾸자면 과학적인 분석과 동시에 출발점이 계급이 되어야 하는데, 이명박만 가지고 문제를 만들면 한국사회의 기본 문제를 은폐시키는 차원도 있을뿐더러 욕설만 가지고는 한국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한다. 한국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가 박노자가 지적하는 ‘핏줄’ 이데올로기인데, 이는 나꼼수에서도 볼 수 있다. 가족들과 ‘혈족’ 사이의 중간단위인 사회적 이익집단이나 보스에 의해서 주도되는 정파 같은 집단, 즉 의사(擬似)가족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있는 집단에 ‘핏줄’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면 선배나 보스를 ‘가족의 어른’, ‘형’으로 파악한 나머지 비판적 사고는 그 자리에서 마비되는 일이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자신들의 결점은 애써 외면하고 남의 단점만 이야기하는 현재의 “빠”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정권만 바뀌면 뭔가 달라질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이런 것도 문제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제까지 당해왔으면서도 아직까지 정객들을 믿고 있는 것이다. 정객들은 대중들을 이용하는 법을 잘 아는데, 정작 대중들은 정객들을 사용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새누리당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번 나꼼수 제작자 ‘김용민’ 막말 사건이나 진보통합당 비례대표 경선 비리 등에서도 정객들의 파렴치한 모습이 드러났음에도 오히려 대중들이 그들에게 휘둘리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을 믿어서는 안된다. 대중들이 단합하고 행동해야 한다. 박노자는 한국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만 비판의 칼날을 가져다 대는 것은 아니다. 2002년 7월 22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70여 명을 총기로 살해한 블레이비크 사건을 통해 북유럽 복지사회에서 생겨나고 있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는 우리가 복지국가로 알고 있는 노르웨이에서 급진적 좌파의 고학력자로서의 오만과 무능, 그리고 온건 좌파의 신자유주의적 배신을 배경으로 극우파가 성장하게 된 배경과 함께 자본주의 경제 발전 주기 말기의 과잉생산 위기의 상황에서 대타협을 추상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며, 장하준 식의 ‘스웨덴 모델’이 심각한 착각일 수도 있다고 한다. 서유럽식의 관리사회적 복지제도는 지속적인 성장과 고용이 보장될 때 작동할 수 있었던 하나의 제도모델에 불과한 것으로, 자본주의가 근본적 위기에 봉착했고, 이전과 같은 성장이 더 이상은 불가능해진 현실에서, 게다가 이미 그들 나라에서 복지제도가 급속히 후퇴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진보가 그러한 제도를 교과서처럼 암기하는 것은 착각이 아닐 수 없다고 일침을 가한다.
이외에도 정규직 노동자가 노동인구의 절반을 훌쩍 넘어선 현실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한국의 노동운동조직은 비정규직의 노조가입을 여전히 배제하거나 총파업 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한국사회의 재벌의 경영은 투자자를 위한 경영이 아니라 사회와 노동자를 위한 경영으로 바꿔야 하고, 많은 면에서 반사회적인 재벌을 친사회화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사회가 재벌 경영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박노자는 폭포수처럼 한국사회가 가진 문제점을 쏟아내고 있다. 속이 시원한 느낌이 든다. 박노자는 국내정치 뿐만 아니라 대북정책, 재벌, 노동, 신자유주의, 다문화, 복지 등 한국사회 전반을 종으로 횡으로 횡단하며 진보와 좌파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브레이크 없이 몰락을 향해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고장 난 기관차를 멈춰 세우고 지금 고통당하는 민중에게 새로운 인간의 미래를 함께 열어가자고 제시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좌파의 의무라고 한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자본주의로부터 극복될 수 없다. 인간을 위한 자본주의는 없다. 자본주의라는 고장 난 차를 수리해보겠다는 시도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전면적 위기의 시대인 지금 시대착오적인 망상일 뿐이라고 한다. 한 쪽 끝에서만 내달리는 매스컴의 보도로는 현재 한국사회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는데, 박노자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한국사회의 독특한 서열문화와 핏줄 이데올로기에 익숙해서인지 현실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음에도 자꾸만 자본주의 사회에 안주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박노자는 혁명을 이야기하였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이 사회를 뜯어고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나 자신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어서인지 그가 지적하는 문제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내 머리도 어느 정도는 이 사회에 적응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항상 시원하고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뭔가 개운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고 눈을 감을 수는 없다. 이 사회가 더 나빠지지 않고 인간다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고민하고 생각하며 행동해야 할 것이다.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고 자본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고민하게 한 책이었다.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의미가 없다는 점을 꼭 명심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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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글을 읽다보면 그의 진중함이 그대로 보이는 것만 같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 심지어 나의 글에서조차 가끔은 모순과 거짓행동을 보게 되기도 하는데 그의 글에서는 자기반성과 성찰,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 것만 같다. '진솔하다'라는 표현은 딱 그에게 맞는 말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불편하지만 진실이라는 것은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 불편함때문에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더욱더 악화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유니세프를 후원하고 성탄카드는 항상 유니세프에서 제작한 카드만 구입해 사용하시던 신부님이 카드 구입처를 바꾸시면서 '유니세프에서는 낙태를 권장하고 있으니 후원하면 안되겠다'라고 하신적이 있다. 가톨릭에서는 공식적으로 산모의 생명이 위독한 경우 외에 낙태를 허용하고 있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또한 동성애는 죄악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책에서 박노자도 언급하고 있듯이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평화와 연대에 대한 업적은 대단하지만 다른 모순적인 부분들도 많다. 언젠가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불편하지만 진실인 이러한 이야기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고민을 털어놨었는데 그때 그 선생님은 어려운 문제들, 특히 가톨릭에서 가르치는 교리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부분들이지만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 아닌가 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 선생님의 말씀은 이론만을 고집하던 나에게 깨우침과 더 많은 고민을 던져주셨고 지금까지도 그것은 계속 진행중이다. 박노자의 글은 '인권'에 대한 생각의 중심을 고민하게 해 주셨던 그 선생님의 말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해 고민하는 커다란 돌 하나를 던져주는 그런 느낌이다. 어렵고 힘들지만, 불편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단호하게 중심을 잡고 흔들림없이 확신을 갖고 옳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진심이 와서 박히는 그런 느낌.
나는 스스로를 좌파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좌파하라'는 말에 선뜻 응하지 못한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좌파하라'라는 말을 했다면 오히려 지금 현실에서 왠 헛소리인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박노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정통이라는 느낌에 진심이 담겨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더 진중하게 '좌파하라'는 정언명령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된다. 정치가,라는 것에 대한 불신의 편견때문에 선거 자체에 큰 관심을 갖지 않다가 투표 며칠전에야 받은 정당 홍보인쇄물을 보면서 고민을 시작했었다. 최종적으로 두 정당을 놓고 고민을 했지만 아무래도 녹색당은 독자정당의 역할보다는 진보신당과 연대하여 환경분야의 역할을 맡는것이 좀 더 현실적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정당투표를 했는데 그런 내 생각이 더 명확하게 잘 정리되어 글로 표현된 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 내가 스스로 좌파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박노자가 이야기하는 좌파의 성향이 있는건 맞나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박노자의 '좌파하라'를 읽고 있으려니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관, 계급성과는 관계없이 그저 성실하게 신앙생활만 하던 친구들이 제주해군기지 반대 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며 변화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진지하게 자신의 세계관을 검토하고 옳은 길을 찾아 가려는 친구가 있는 반면에 주교님이 신앙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강론하는 것을 들으면서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며 맹목적으로 변화하는 친구도 보게 된다. 가끔 그 맹목적인 지지가 무섭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제주해군기지 반대 이외의 사회문제에 대한 기준점이 없이 뭐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해내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생활하는 모습은 전혀 아닌데, 나는 꼼수다를 애청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깔깔대며 좋아라 웃는 친구의 모습이 불편하기만 한데 나는 그저 그 모든것을 방관자처럼 바라보고만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의 모습이 불편한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혹시 내가 그들의 의식화를 믿지 못하는 편견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은 아닌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빠들에 대한 불편함도, 나꼼수의 팬들에 대한 불편함도 그 실체가 무엇인지 몰랐는데 조금씩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한가지의 모습만 바라보고 달려가는 맹목적인 추종의 느낌이 그 불편함의 실체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박노자가 이야기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동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믿고 싶다.
'좌파하라'는 언젠가 박노자의 글을 읽으면서 나 자신의 이기적인 개인주의 성향을 반성하게 되었던 것처럼 다시 한번 나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해 성찰하게 하고 있다. 진중하고 진솔한 그의 글을 그 태도와는 달리 성급하게 달려들어 읽어버린 내가 내 안에 담긴 것을 정리하기에는 나 스스로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고 설득력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홍세화님의 추천사를 다시 한번 더 읽고 되새겨본다. "진보를 참칭해온 리버럴들에 대한 비판은 물론이고, 비정규직을 배제해온 한국의 이상한 대기업 노동조합과 줄곧 두 손 맞잡아온 좌파정치의 불편한 진실을 겨냥하는 그의 최근 글들은 전면적인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를 맞아 더욱 박진감 넘치는 설득력을 얻고 있다. [좌파하라]라는, 한국어로는 약간은 어색한 제목을 단 박노자의 이번 책은 언설로는 모든 진보를 말하는 '좌클릭'을 행하면서도 정작 몸은 리버럴들의 품에 안기는 '우클릭'의 시대를 가로지르며 '좌파, 좀 제대로 하라'는 경고로 내게는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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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하라. 뭔가 어감이 이상하다. 박노자의 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나만은 아닌 모양이다. 진보신당 대표 홍세화 씨도 약간 어색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 단어를 ‘좌파, 좀 제대로 하라.’(8쪽)로 해석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종북좌파가 아니라 좌파라고 칭하는 사람들에 대한 박노자의 일갈인 것이다. 읽는 동안 내 속에 내재해 있던 민족주의나 얼치기 민주주의를 다시 느낄 수 있었고, 감성인지 이성인지 잘 모를 것들이 그의 주장 중 일부가 너무 이상적이라고 태클을 건다. 그리고 그가 너무 급진적으로 변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한국사회가 너무나 보수화된 거라는 대답을 들려줬다는 말에 다시 한 번 더 나와 한국사회를 돌아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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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년전 까지만 해도 주식시장과 부동산의 폭락과 버블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서적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제 그 정도 가지고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 되었다. 요즘 눈길이 가는 신간이 <점령하라>에서부터 시작해서 <마르크스 평전>에 다가 <좌파하라> 정도인데, 이 책들은 자본주의의 썩은 뿌리와 함께 자본주의를 버리라고 충고한다. <좌파하라>의 박노자는 그야말로 마르크스의 계승자이자 분신 같다.
1. <좌파하라>에서 박노자는 진중권과 나꼼수를 아주 잠깐 톡 쏘는 맛을 내는 콜라 같은 탄산음료에 비유한다. 막말로 그냥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는 것이다. 박노자는 마르크스와 같은 생각이다. 아래로의 계급투쟁이 일어나야 참다운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자본가들을 보호하고 있는 쉴드는 너무나도 두껍게 형성되어 있다.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북한이라는 전가의 보도다. 이건 뭐 그냥 휘두르면 엄청나게 흔들린다. 뭔가 생각대로 안 풀리면 북한을 끌어들이면 되니 만병통치약이다. 게다가 정규직이라는 암기도 있다. 같은 프롤레타리아트인 줄 알았는데, 그들은 다르단다. 다름을 인정하자는 좋은 뜻을 왜곡해서 사용하는 그들은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아니라고 모든 투쟁에서 배제하려 한다. 이를 박노자는 피착취계급의 ‘수직적 분산’이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2. 박노자가 계승한 마르크스의 착취 개념은 신자유주의를 이렇게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 손’은 자본주의 공황에서 자본가의 이윤율을 유지하기 위해 1. 저임금 노동의 과도한 착취에 의한 초과 이윤을 수취하고. 2. 기술 혁신에 의한 신상품 개발과 새로운 상품 시장의 창출에 힘쓰고. 3. 산업 부분에서 금융 부분으로 자본을 유출시켜 거품 경제를 만들고. 4. 의료와 교육과 같은 비시장적인 부분의 시장화를 일으킨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착취가 부의 양극화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에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것은 좌파 지지율의 상승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진보당의 약진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정객(당장의 집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들의 집단인 통합진보당이 진정한 좌파였던 정치인(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가 먼 미래까지 보는 사람)의 집단인 진보신당을 흡수한 것은 아쉽다.
북유럽의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같은 복지국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외국노동자와 국내노동자들의 경쟁을 부추긴 세력은 좌파세력이고 이 허점에 민족주의라는 카드를 제시하며 들어온 우파의 상승세가 눈에 띈다.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지만 신자유주의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라는 점은 똑같다. 결국, 이것은 자본주의 공황 대처법으로 태어난 신자유주의의 패닉이며,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종언의 이유라고 말한다.
3. 박노자는 <좌파하라>에서 촛불 운동과 점령하라의 운동으로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쉽지 않다고 전한다. 그래서 좌파하라고 한다. 촘촘히 얽혀있는 자본가들의 조직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말처럼 그들 역시 조직으로서 싸움을 전개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너무 높다. 반걸음만 앞서 가도 따라가기 어려운데 다섯 걸음도 넘게 앞서있다. 게임이라면 따라가기 쉬울 텐데, 현실은 게임이 아니니 문제다. 잠시 좌파하라가 원하는 세상을 꿈꿨으나 장벽에 막혀 전향한 이들이 현실에서 그들을 가로막고 있으니 말이다.
4. 책의 내용에서 벗어나 책의 외적인 부분을 말하자면 인터뷰 내용에서 중복되는 부분이 많아서 좀 아쉬웠다. 그 탓에 읽을 때 집중력이 떨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꼼꼼히 살피지 않고 대충 읽게 된 부분도 있었다. 그런 부분을 좀 더 보완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이다. 누구 책임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번에 더 좋은 책을 읽기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단지, 개인적인 이기심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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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박노자씨의 책을 읽어보게 되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보니 현재 박노자씨가 우리나라에 없기 때문에 스카이프를 통한 화상 인터뷰로 내용을 담아낸 모양이었다. 좌파하라라는 강렬한 제목의 이 책은 그만큼 너무나 우경화된 우리사회를 향한 메시지였다. 예전에도 비슷한 표현을 썼던 기억이 있는데 우측으로 핸들이 너무 틀어져 있으면 90도를 돌릴만큼의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180도 만큼의 힘을 주어야 그나마 가운데로 올듯말듯 하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현실이다. 그러니까 굳이 다양성이라는 가치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를 향한 애정만큼은 그 누구못지 않은 이런분들의 이야기는 귀담아 들어둘 필요가 있다.
이 책에는 에필로그에도 적혀있지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지, 한국에서 좌파 정치가 부진한 이유는 무엇인지, 해외 좌파의 흐름은 어떤지, 그가 왜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출마했는지,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있다.
다른건 그렇다치고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도 납득을 못하고 있었던 터라 이 책을 통해 하나의 논리를 접할 수 있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과연 그것만이 전부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에 저렴한 인건비의 해외노동인력유입이 늘어나면 보수정권의 지지기반도 더불어 공고해진다니 어떻게 보면 슬픈 현실이다. 정작 세계화를 외치며 자본과 노동력의 유연성을 주장하는 것은 이들이 아닐까 싶은데.
우리나라 좌파 정권이 현실정치에 타협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근시안적이라며 비판하는 부분 등은 나도 너무 래디컬한 주장이 아닐까 싶어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산가족들이 왜 죽기전에 북한에 가서 죽고 싶다라는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는가, 그것이 과연 안보가 무너지는 일인가라며 국가가 막는 일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라며 질문을 던지는 부분에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주장임에도 왠지모를 심리적인 장벽이 느껴졌다는 사실에 나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또 하나 재미었던 부분은 노르웨이에서는 어린 자녀들에게 우리나라 처럼 밥시간에 '밥 먹어라'가 아니라 '밥 먹을 의향이 없니'라고 묻는다는 것. 복종에 대한 문화가 어디서부터 형성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었다는. 나도 이래야겠다라는 생각도 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