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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무엇을 하던지 시간이 남아돈다고 생각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는 일 마다 모든 게 새로웠고 시간의 더딤에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더딜 것 같았던 시간은 젊은 시절 뛰었던 번지점프에서의 하강처럼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머리숱이 유난히 많았던 아버지께서는 머리카락이 많이 줄어 머리가 휑한 할아버지가 되셨고, 동네에서 한 미모 하셨다던 어머니는 이제 주름살 가득한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새치 하나 없이 검었던 제 머리카락도 이제 하나 둘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아이들에게 “흰머리 하나에 백원.” 하며 흰머리를 뽑아달라고 했던 시기도 이제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모든 세포는 죽음에 가까이 가려는 힘과 죽음에서 멀어지려는 힘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 몸은 새로 태어나는 세포들과 죽어가는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고 우리 몸 안에서 세포의 탄생과 죽음은 늘 동시에 끊임없이 일어난다. 세포가 사멸하는 힘이 세포가 유사분열하려는 힘을 능가하면 인간으로서 우리는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 p.39~40
마음 아픈 기억이지만 몇 해 전 삼촌이 늦게 발견한 췌장암으로 인해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그 때 삼촌은 결혼을 하지 않은 노총각이었고, 친인척들이 삼촌을 병간호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간병인이 있는 요양원에 계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후 선산에 묻히신 삼촌이 하늘나라에서는 좋은 분을 만나서 행복하셨으면 합니다.
“혼인 여부도 임종 장소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중략) 설문 문항을 자세히 살펴보면 배우자를 여읜 환자들이 배우자가 있는 환자들보다 요양원에서 숨질 확률이 훨씬 높다는 내용이다. 배우자가 있는 환자들은 집-요양원-병원이라는 세 단계를 거치기보다는 집-병원 두 단계를 거친다는 뜻이다.” - p.91
올해 5월 호주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104살)이 안락사가 금지된 호주를 떠나 스위스 베른의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경안정제 주사를 맞고 안락사 한 일에 대해 한동안 매스컴에서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안락사를 앞두고 데이비드 구달은 '나의 죽음도 결국 나의 삶 나의 선택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환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인공호흡기, 혈액 투석, 심폐소생술, 영양분 공급 등의 연명치료로 생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구요.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고, 아무리 많은 비용이 들어도, 그 비용을 갚기 위해 환자와 일가친척이 무슨 고통을 겪더라도 막아야 한다고들 생각하는 듯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보통 둘로 나뉜다.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죽기 전에 견뎌내야 하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제는 또 다른 두려움, 소생의 두려움까지 추가해야 한단 말일까? 예전에 의사들은 대부분 의사가 끼치는 가장 큰 해는 실수로 환자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오히려 환자를 계속 살려두는 게 의사가 끼치는 가장 큰 해가 된 것은 아닐까?” - p.122~123
초등학교 시절에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선물을 주던 집 근처 교회를 호기심에 얼마간 다닌 적이 있었고 고등학교는 천주교 학교를 다녀서 매달 한 번씩 미사에 참석했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지금은 교회도 성당도 다니지 않고 있는 무신론자이지만 마음 속 한 곳에는 하느님. 종교. 믿음에 대한 생각이 자주 들곤 합니다.
“종교는 여러 면에서 공포 관리가 낳은 가장 막강한 부산물이다. 문화나 도덕관 같은 다른 구성물과는 달리 종교는 기도, 순례, 예배 모임 같은 투자를 통해 자아의 가치를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죽음을 부인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라는 점에서 죽음의 공포를 달래는 데 도움이 된다. 거의 모든 종교는 사후세계를 약속하는데, 이를 통해 죽음은 삶의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옮겨가기 전에 찍는 쉼표로 지위가 격하된다. 죽음에 천착하면 무신론자들조차 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 P.238
하이더 와라이치의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을 읽으면서 제가 만약 불치병에 걸려 말기치료를 받게 된다면 의료진이나 가족의 의견이 아닌 내가 원하는(단순 연명치료가 아닌) 치료를... 삶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이 늘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는다. 대개는 그래도 괜찮다. 예를 들어 첫 대학입시에서 좋은 점수를 못 받아도 몇 번 더 기회가 있다. 그러나 죽음은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확률이 역사상 100퍼센트로, 훨씬 걸린 게 많다. 죽음은 보통 희망이 없음을 뜻하지만, 의사에게 죽음은 환자에게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다. 환자의 마지막 소원이 실현되도록 하는 게 의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일 때가 있다. 보스턴의 말기치료 전문가 라클런 퍼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환자가 원치 않는 치료는 환자에게 입히지 않아도 될 해를 입히는 조치임을 잊지 않는 게 말기치료 전문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 P.285
저도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오늘 죽을지 평온하게 잘 살다가 몇 십 년 후에 죽을지 모르지만, 만약 죽음이 다가온다면 혼자 쓸쓸히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름 행복했던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죽음이란 결국 홀로 겪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와 모든 사람, 모든 것 사이에 건너지 못하는 다리를 놓는다. 우리가 인생에서 성취하는 일 대부분은, 삶의 의미라는 겉껍질이 벗겨졌을 때 드러나는 죽어감이라는 그 실존적 외로움이 불러일으키는 순전한 공포를 상쇄하려는 시도이다. 이럴 때 허무에 맞서는 가장 든든한 방어막은 가족이고 죽음이 닥치기 직전까지 가족은 상당히 훌륭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 P.336
하이더 와라이치의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은 저자 본인이 의사이면서 임상 연구자답게 병원에서의 직접 경험과 학술적 연구를 토대로 죽음과 사투를 버린 여러 환자들, 다양한 연구 사례 등을 통해 세포 이야기(사멸, 괴사, 자식), 당신이 죽는 곳(집, 요양원, 병원), 연명치료, 환자의 죽을 권리, 죽음과 종교, 의료대리인, 바람직한 죽음 등 그 어떤 책보다도 폭넓게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독서였습니다.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면 죽음을 둘러싼 두려움이라는 수의를 벗겨 낼 뿐만 아니라 서로를 더욱 인간적으로 대하게 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헌혈 같은 이타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가능성이 더 크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닐 가능성이 더 크다. 마지막으로, 짐작과는 정반대로, 죽음을 상기하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스트레스가 적을수록 더 건강하게 오래 산다.” -P.429
- 이 리뷰는 출판사 부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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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의학은 피할 수 없는 그날이 오는 걸 절대 막지 못한다. 단지 뒤로 미룰 뿐이다. 환자와 그 가족은 임종을 맞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될지 알아야 한다. 그들은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야 한다. 얼마나 살게 될지, 환자의 삶의 질은 어떠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 본문 중에서
이 책에 대해 내용정리를 하며, 문득 내가 읽는 책 제목을 잘못읽고 "죽고싶지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너 죽고싶어? 힘들어?" 하고 묻던 우리과장님의 얼굴이 떠올라 잠시 웃었다.
어쩌다보니 2018년에는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좀 읽었다. 내 나이가 그런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볼 즈음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나는 올해에 죽음에 대한 책에 관심이 많았고 삶에 대해 종교적인 성찰과 개인적 고민을 많이 했었다.
그리고 올해의 끝자락에서 한권의 책을 추가했다. "죽는 게 두렵지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 2박3일간 출장을 다녀왔는데, 몇권의 책과 전자책을 가지고 갔었다. 읽으려했던 아델은 정작 읽지않았고 다른 책들은 틈틈히 읽고, 잔뜩 메모를 해왔다. 어떠한 책은 메모해놓은 내용으로 리뷰를 쓸 수 있었으나 어떤 책은 내 스스로도 정리가 안되 다시 읽었다.
이 책에 대해 내가 메모해왔던 것은 수명만 연장한다고 하여 행복할까.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은 계속해서 공존하게 될테고.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수명만 길어질게 아니라
내가 하는 이 말 자체가, 내 종교에 위배되는 말일지모르나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면 우리는 삶의 유한함을 정확히 받아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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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즐겨 마시던 지인은 알코올성 지방간으로 급격히 악화되어 차오르는 복수의 물을 빼고 세포 활동이 멈춰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커멓게 말라갔다. 혼수상태에 빠졌다 정신을 차리면 간 이식을 해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중개인을 통해 중국 천진에 있는 병원에서 입원하고 대기하다 사형집행 장으로 향하는 20대 청년의 간을 이식했지만 6개월을 살지 못하고 이승을 떴다. 삶의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환자들은 나이 50도 안 된 자신이 죽기야 하겠냐고 여기면서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주변인들을 공포 속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미국 듀크대에서 심장학 전임 의사로 일하고 있는 하이더 와라이치는 임상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를 예화에 실어 전달하며 생존한 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환자를 돌보는 의사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하면 환자를 가장 잘 도울 수 있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게 한다. 회생 불능의 환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기 결정권을 어디까지 행사하고, 환자의 보호자는 임종 장소와 방법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 등을 생각게 한다. 과학 기술과 의료 기술, 의료 정책, 인문학적 성찰까지 포괄하여 언젠가는 오고 말 죽음을 떠올리며 어떻게 삶을 마무리하는 게 합리적인지 생각게 한다.
마흔 아홉 번째 생일에 밥을 먹다 쓰러져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찾지 못한 채 온갖 장치를 몸에 연결하고 나서야 죽음에 관한 대화를 나누며 환자가 생존하지 못할 때를 대비한다. 의료기술과 과학지식의 발달로 현대 의학은 죽음을 피하게 해주는 데는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줄여주는 데는 별다른 방책을 내지 못하고 있다. 종교인과 무신론자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연구 결과로 보아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이 그 시간을 잘 견디도록 돕는 게 의사의 의무로 저자는 생각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병원이 즐비하지 않은 때, 공동체적인 생활이 건재한 전통적인 사회에서의 죽음은 일가친척, 이웃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집에서 이뤄졌다. 영양 섭취가 좋아지고 연명 치료를 위한 시설들의 수혜를 누리며 인간 수명은 대폭 늘어나 노후가 길어져 외로움에 시달리는 노인들도 급증하고 있다.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는 이들을 보면서 의식이 있고 거동이 가능한 노인들은 죽어서야 살던 동네로 나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집에 머무르기를 꺼려한다. 60대에 뇌졸중을 겪고 26년 넘게 혼자 지내는 시간이 불편하더라도 요양원만큼은 가고 싶지 않다는 뜻을 완강히 비치는 시어른들이 있어 마음이 무겁다.
노화로 퇴행성 질환들을 앓으며 병원 신세를 지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환자를 돌봐야 하는 가족들의 일상도 균열이 이뤄진다. 여전히 자신이 살던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쪽을 선호하는 당사자들이 있지만, 병간호에만 매일 수 없는 보호자들은 간병인이 딸린 병원, 요양원, 호스피스 시설 같은 곳을 전전하며 종내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 죽음은 보통 희망이 없음을 뜻하지만, 의사에게 죽음은 환자에게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다. 환자의 마지막 소원이 실현되도록 하는 게 의사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일 때가 있다. 전문가 라클런 퍼로는 환자가 원치 않는 치료는 환자에게 입히지 않아도 될 해를 입히는 조치임을 잊지 않는 것이 말기치료 전문가의 사명이라고 말하였다.
스물한 살의 여성 캐런은 호흡이 멈춰 병원으로 간 지 몇 달 만에 그녀는 뼈만 남은 몸으로 의식 불명 상태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딸의 연명치료를 위한 호흡기를 떼 달라고 요청했지만 의사들이 이를 거부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1975년 ‘캐런 앤 퀸런 사건’을 계기로 연명치료를 하지 않을 환자의 권리 선언이 잇따라 일어났다. 의사들 손을 들어준 법원의 판결에 불복한 퀘런의 부모는 품위를 잃지 않고 살다 갈 환자의 권리를 펴는데 한 획을 그었다.
소생 불능의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주치의와 의논하여 심폐소생술을 거부하고 자가 호흡을 하지 못할 때 인공호흡기를 부착하지 말라는 생전 유서까지 작성하여 죽음을 대비하는 권리를 열어 주었다. 현대 의학은 인간이 생존할 능력을 강화해주는 동시에 세상을 떠날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했다. 의사의 판단으로 환자가 사망했다는 말이 떨어지기까지 생이 다하는 죽음의 경계는 모호하다. 여러 의료계에서 뇌사, 뇌전도체를 통한 죽음 확인, 심정지 등으로 확연히 구분되지는 않지만 하버드 위원회는 회복 불가능한 혼수상태 또는 영구히 기능이 정지된 뇌라는 사망 기준을 제시했다.
오늘도 급작스런 사고로 응급실을 찾아 수술대에 올랐다 중환자실로 들어가 영영 못 올 세상으로 떠났다는 부음을 접하고는 삶의 덧없음을 실감하며 나 또한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두려움은 커진다. 죽음을 회피하기보다는 죽음을 논하며 인간적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매체를 활용하여 우리가 잃어버린 죽음의 면면을 되살려 죽음과 친숙해질 필요가 있다. 유한한 생명체로 이승을 떠나기 전에 걸림 없이 살아갈 힘을 얻고, 죽음 이후 남은 이들이 슬픔에 덜 겪도록 죽음과 관련하여 소통하는 분위기는 조성되어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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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폐소생술을 원하는 환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심폐소생술을 받아도 소용없을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어설프게 효과를 발휘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심폐소생술로 심장이 다시 뛰어도 뇌가 크게 손상될까봐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한번은 자동차 판매원이 환자로부터 병력을 받아 적고 있었는데,그는 내게 자신이 인생에서 제일 원하는 게 뭔지 털어놓았다. "선생님, 내 심장이 멈추면 그냥 보내주세요."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생각이 분명하고 확고해 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죽음보다 더 끔찍한 상태도 있습니다." 그가 한 말은 현대 의학이 여러 면에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음을 여실이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죽음을 모면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게 목표였다. 죽음은 적이었다. 어떤 의학적 판단을 내리든, 어떤 엄청난 임상 실험을 하든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죽음을 면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다보니 기껏해야 죽음을 지연시키는 데 매몰되었고 여러면에서 죽음보다 더 끔찍하고 부자연스러운 식물인간 상태라는 결과에 다다랐다. 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간호사 둘이 하는 대화를 엿들었다. 두 사람은 입원한 지 오래된 환자를 오랫동안 함께 간호했다. "어떻게 됐어?" 한 간호사가 물었다. "죽었어." 다른 간호사가 대답했다. "천만다행이다." - PP.153~154
여기 뇌사 판정을 받은 자식이나 혹은 부모가 있다. 그는 살아날 가망성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 죽는다는 예정도 없다. 그냥, 살아나길 기도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고, 그렇다고 다시 살아나 움직이리라는 보장은 더더욱 없다. 그대의 선택은?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이 그 답을 명쾌하게 제시해 줄 거라 기대했다면, 그대는 책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을 명쾌하게 내놓을 수 있는 책은 어디에도 없다. 종교적 관점에서도, 일반적인 사회에서도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기란 쉽지 않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은 명쾌한 해답 대신, 이에 대해 관련된 논의와 실제사례들을 이야기함으로서 그대의 생각을 부채질한다. 선택은 그대가 하기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하기까지는 그대의 주관, 그대의 가치관, 그대가 살아온 환경에서 겪을 수밖에 없던 필연적 이유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대는 어떤 가치관으로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2.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자살은 죄다. 그렇다면, 안락사도 죄인가? 잘 모르겠다. 아직까지 명쾌한 해답을 주는 곳이 없다. 이 글을 보고 누군가가 그 답을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어쩌면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창조했으므로 자해는 신의 사유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따라서 그는 어떤 형태의 자살에도 반대했다. 인간은 육신의 청지기로서, 육신은 신이 인간에게 믿고 맡긴 것이므로 인간은 육신을 해할 어떤 명백한 권리도 없었다. 로크는 자살에 반대하는 논리를 노에제도에 비유해 설명했다. "아무도 자신이 지닌 것 이상의 권력을 남에게 부여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앗을 수 없는 사람은 그 생명에 대한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없다." - P.364
로크에 따르면 안락사도 인간이 짓는 죄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런데 정말 죄가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도 있는 것 아닐까. 그렇지만, 안락사도 자살의 일종이니, 죄라고 봐야 하는 논리도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의식도 없고, 살아날 가망도 없고,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일가. 그냥 그 상태로라도 살아있길 바랄까, 아니면 빨리 이 세상에서 떠나고 싶어할까. 여전히, 명백하지 않다. 자신이 식물인간이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미리 연명치료중단이라는 서약서에 서명이라도 해 놓아야 하는 것일까?
3. 초인적인 힘을 지닌 이스라엘 판관 삼손은 자신에 대한 재판이 열리는 블레셋 성전의 거대한 기둥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하면 자신도 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블레셋인들을 무찌를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삼손의 죽음은 매우 영웅적인 죽음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대체로 자살은 치욕적이고 타락한 행위로 묘사되었다. - P.358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누군가를 구해 내고 희생당했다면 그것은 과연 자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될까? 누구도 자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것은 고귀한 희생이었다고, 얘기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이타적 자살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싶다. 자신이 죽을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만약, 안락사가 자살이고 이타적 자살도 자살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너무 많은 죄를 지으며 죽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타적 자살만은 자살이 아니란 의미에서 안락사도 자살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안락사를 선택하는 마음에는 적어도 자신이 더 이상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은 이타적 마음도 함께 들어있을 테니 말이다.
4.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에서는 어떤 질문에 대한 답도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그저 생각을 해 볼 만한 자료들과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이에 대해 스스로 많이 생각해 볼 것을 간접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의사들조차 안락사를 선호하는 지금의 현실을 이야기하며, 죽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은 그래서 소소한 재미를 주는 에세이라든가 거창한 담론을 담은 철학서와는 다르면서도 같다. 소소한 생각거리를 던져주지만, 그 끝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 던져진 잔잔한 파문,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은 죽음에 대해서, 특히 죽음을 준비하는 나의 자세에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다. 내가 그럴 경우라면, 안락사를 과감히 선택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정답을 찾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건 몹시도 두려운 일이다. 그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덜 느끼고 싶어 안락사를 선택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답이 영원히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어떤 순간에 성령의 강력한 힘이, 내게 그걸 깨닫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안락사가 죄인지, 안락사가 죄가 아닌지!
- 이 리뷰는 부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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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평균 수명이 대폭 늘어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또한 죽음을 명쾌하게 정의하는 일도 쉽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은 죽음에 관하여 시시콜콜한 데까지 캐어본 책입니다. 이의 저자 하이더 와라이치 (Haider Warraich)는 의사이자 임상연구가이며 작가이기도 합니다. 2009년 파키스탄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201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의대 부속 베스 이스라엘 디커니스 병원에서 내과 수련을 마치고, 지금은 듀크대학병원에서 심장학 전임의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세포의 죽음으로부터 인간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자신의 경험을 포함하여 다양한 연구성과들을 인용하여 설명합니다. 의학의 발전은 역설적으로 죽음의 정의를 모호하게 만들었고, 저자의 말대로 죽음보다 더 끔찍한 목숨이 등장하게 만들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입원한 환자가 의료진에게 살려 달라 애원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제는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환자를 만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의학이 인간ㅇ로 하여금 생존할 능력을 강화해주는 동시에 세상을 떠날 권리를 침해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생명의 불꽃을 중단시킬 수 있는 권리가 과연 의사에게 있을까하는 의문이 싹텄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정의가 심장사에서 뇌사로 옮겨가면서 인간답게 사유하는 기능이 무력화된 사람에 대한 연명치료에 대한 의미가 새롭게 정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뇌기능이 사라져 이미 살아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는 환자를 다양한 연명치료로 그저 심장만 뛰게 만드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라고 보아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에서 적극적 안락사에로 발전하는 경향도 생기고 있습니다.
죽음의 정의가 심장사에서 뇌사로 이행하게 된 배경에는 장기이식도 한 몫을 해왔습니다. 심장이 멈춘 다음에 장기를 적출하는 경우에는 이식된 장기가 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뇌사판정을 받게 되면 심장박동을 유지하는 장치를 끄고 죽음을 유도하고 이식할 수 있는 장기를 적출하게 된 것입니다.
저 역시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죽음에 대하여 새롭게 배우는 개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옮긴이의 참신한 번역도 한 몫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맛보기 죽음(pre-death)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만성질환이 증가하면서 대부분의 죽음이 오랜 시간에 걸쳐 질질 끌면서 서서히 소진해가는 과정을 말한다고 합니다. 만성 질환으로 인하여 죽음을 맞기 전에 무력한 상태로 지내는 시간을 말합니다. 과거에는 심근경색 혹은 뇌졸중 등과 같이 죽음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경우와는 분명 차별되는 면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필자는 아직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태어나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새롭게 가꾸고 나면 자리를 내어주고 떠난다(255쪽)’라는 부분이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저자가 한 무신론자 환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자는 믿을 수 없다고 인식하는 나라도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경우는 ‘무신론자를 강간범이과 마찬가지로 미덥지 않고 범죄 의도를 지닌 사람으로 여기지만 종교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254쪽)’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 신앙인은 ‘무신론자’라는 용어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종교라는 가면 뒤에 몸을 숨긴 채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는 더 양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말입니다.
이 책의 뒷부분은 안락사에 관한 미국인들의 인식이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하여도 설명합니다. 아무래도 이 책을 책장에 모셔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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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실직고부터 하자면, 이제 겨우 반을 읽었다. 무신론자에 대한 이야기까지. 술술 읽히는 책이기는 했지만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들에 책을 읽다가도 잠시 덮어두고 나는 생각에 종종 빠지곤 했다. 그러다 보니.. 서평 마감 기한인 오늘까지 다 읽지를 못했다. 그 점에 대해 무척 죄송하지만, 앞으로 마저 다 읽을 것이고 읽은 후에 더 느껴진 바가 있으면 나의 서평은 더 이어질 것이므로.. 기회를 주신 분께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ㅎ
나는 제목에 약하다. 이번 제목도 그냥 혹~하고 말았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이라니.. 세상에 정말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이가 있을까?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입에서 이 문장이 무한 반복 재생되고 있는 사람이라도 막상, 자신이 계획하지 않은 죽는 위기의 찰나에 외치는 말이, "살려주세요!" 다. 뭐,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본, 그리고 내가 겪은 바 그랬다.
p.39 가장 기본적인 세포 차원에서 삶과 죽음은 이 두가지를 양분해서만 보는 인간 차원에서보다 훨씬 복잡하고 역동적이면서 안정적이다. 우리가 숨 쉬는 매순간 우리 몸에는 새로 생명을 얻는 세포도 있고 사망 선고를 받는 세포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 있어도 우리 몸의 일부는 끊임없이 죽음을 맞는다. 세포사멸이 일어나지 않으면 평균적인 인간은 일생에 걸쳐 2톤에 달하는 척수를 축적하고 장의 길이는 15킬로미터에 이를 것이다. 개개인의 세포 차원에서도 사멸을 선호하는 인자와 사멸을 막는 인자 사이에 끊임없이 역동적인 밀고 당기기가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 몸 안에 있는 모든 세포는 죽음에 가까이 가려는 힘과 죽음에서 멀어지려는 힘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 몸은 새로 태어나는 세포들과 죽어가는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고 세포의 탄생과 죽음은 늘 동시에 끊임없이 일어난다. 세포가 사멸하려는 힘이 세포가 유사분열하려는 힘을 능가하면 인간으로서 우리는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세포 사이에서도 죽으려는 자와 죽음을 막으려는 자가 있다는 것, 꽤 흥미롭다. 내 몸속 세포들 역시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을 터인데.. 나의 세포는 아직 사멸을 막는 자가 더 센 듯하다. 그러니 내가 여직 살아있는 거겠지..
p.41 개인주의가 없는 세포 사회는 세포의 거주지라고 할 수 있는 다세포 유기체를 보존하는 기능만 한다. 세포는 나이가 들면 깔끔하게 죽음 앞에 무릎을 꿇는다. 세포의 수명을 연장하려고 애쓰면 세포가 흔히 늙고 쇠약한 상태로 연명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를 호비츠 박사는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살아있는 시체undead"라고 일컬었다.
맙소사, 살아있는 시체라니.. 요즘 흔히 말하는 '좀비'가 아닌가.. 좀비인 상태로 그렇게까지 살아있고 싶을까? 나는 감히 나의 세포에게 간청한다. 나이가 들면 깔끔하게 죽어달라고. 세상이 싫은 건 아니지만 좀비는 싫다. 좀비인 채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건 정말이지 끔찍하다. 그것이 나든, 나의 세포이든.
p.52 세포 차원에서 보면 불멸은 이미 고유한 이름과 생김새를 갖춘 셈이다. 그 이름은 암이고 생김새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텔로머라아제의 모순─텔로머라아제는 장수에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유해한 세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은 세포의 소멸을 방지하려는 수많은 시도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려는 세포 차원에서의 그러한 시도와 비슷한 결과를 낳았고 오늘날 죽음의 생태계에와 풍경을 바꾸어놓았다.
우리 아빠는 혈액암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몸에 좋다는 음식이랑 약을 엄마와 언니가 많이 해왔지만 대부분 의사선생님께 퇴짜를 맞았다. 몸에 좋은 건, 암한테도 좋아요.. 암과 싸워야 하는 세포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 좋은 걸 먹게 하려는 건데, 어이없게도 암한테도 좋다니.. 씁쓸하고 난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했던 항암치료는 암세포뿐만 아니라 암과 싸워야 하는 세포까지도 약하게 하기 때문에, 아빠는 참 많이도 힘들어하셨다. 그렇게 튼튼하셨던 분이.. 아빠의 튼튼했던 다리가 내 팔만큼 가늘어졌을 정도로.. 잘 먹지도, 잘 자지도, 잘 숨쉬지도 못하셨었다. 내 열아홉 기억속의 아빠는 그랬다.
p.100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원하는 장소에서 눈을 감도록 배려하는 일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이다. 마사의 사연은 그 이유를 내게 보다 분명히 각인시켜주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병에 걸리면서 인생의 종착역에 가까워지면 잃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자기 삶은 장악할 능력이다. 집에서의 영면은 그저 자기 이불을 덮고 자고, 응급신호를 듣고 간호사 무리가 우르르 병실로 달려오는 일 없이 잠에서 깨고, 채혈하는 의료진이 아침마다 혈당을 확인하려고 여기저기 찔러보는 일 없이 아침식사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들은 노쇠하면 병원 진찰 일정과 입원이 점점 일상을 지배하면서 더욱더 독립성을 잃고 속박당한다. 예전에는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이처럼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유언을 직접 작성하고 어떤 모습으로 어디서 임종할지 결정했다. 오직 세상을 떠나는 당사자만이 본인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였다.
나 역시도 이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때에 나의 가장 좋은 모습으로 임종할 수 있기를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바란다. 또 유언 역시도.. 여러 번 작성을 하긴 했지만 그때마다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떠나는 나도, 남는 이들도 서로 가슴 아프지 않고 잘 떠나고 보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꼭 적는다.
p.122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고, 아무리 많은 비용이 들어도 그 비용을 갚기 위해 환자와 일가친척이 무슨 고통을 겪더라도 막아야 한다고들 생각하는 듯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보통 둘로 나뉜다.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죽기 전에 견뎌내야 하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제는 또 다른 두려움, 소생의 두려움까지 추가해야 한다는 말일까? 예전의 의사들은 대부분 의사가 끼치는 가장 큰 해는 실수로 환자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오히려 환자를 계속 살려두는 게 의사가 끼치는 가장 큰 해가 된 것은 아닐까?
죽음이 어떤 것인지,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에 죽음은 두렵다. 또 예전에 몹시 아팠을 때 차라리 지금 그냥 죽여주세요 제발..이라고 엉엉 울면서 소리친 적이 있었기에 고통에 대한 두려움 역시 매우 크다. 이 두 가지도 충분하게 두려운데.. 거기에 소생의 두려움까지 추가하는 건.. 글쎄.. 환자가 원하는 것이면 당연한 거지만, 나는 싫다. 최근에 읽은 시에서 이런 게 있었다.
잠들기 전 기도 - 나태주
하나님 오늘도 하루 잘 살고 죽습니다. 내일 아침 잊지 말고 깨워주십시오.
나는 시인과 반대로 "하나님 오늘 하루 잘 살고 죽습니다. 내일 아침부터는 부디 잊으시어 쭈욱 깨우지 마십시오. 안 그러면 괜히 서로 의 상합니다." 라고 기도했다.
p.144 요컨대 휴스 판사는 7 대 0 만장일치 판결에서 환자는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를 중단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환자가 그러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환자의 후견인이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판시했다. 또한 그러한 요청에 따른 의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명시했다. 말기치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 판결로 말기치료는 어둠 속에서 나와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p.203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은 죽어왔지만 누군가의 죽음이 이처럼 생명의 원천이 된 적이 없었다. 사망한 후 장기를 기증하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절망에 빠진 누군가에게 희망과 생명을 선물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때문에 사람들은 단순히 철학적 의미에서만 아니라 실증적이고, 재현 가능하고, 틀림없는 방식으로 사망을 규정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단 한 사람이라도 사망을 잘못 판정하면 장기기증이라는 자비로운 소명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었다.
어차피 죽으면 내 몸은 그저 시체일 뿐이지만, 장기기증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나의 장기들로 인해 누군가에게 생명과 희망을 선물할 수 있다면.. 죽는 게 죽는 것이 아닐 것 같다. 오히려 내가 더 감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p.215 사망하는 순간에 심장 활동을 계속 모니터하게 되면서 아주 드물지만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현상인 자가 소생autoresuscitation, 즉 자라루스 증후군 현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원인 모를 이유로 맥이 끊긴 환자가 심전도계 모니터상으로 맥이 다시 잡히거나 전기 활동이 감지되는 현상을 말한다. 대개 맥박이 정지한 후 몇 분 안에 일어나는데, 대부분은 이런 현상 직후에 사망한다.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벗겨냈던 인공호흡기를 다시 달게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내 눈앞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하지만 내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부디 놀라지 마시길.. 그런 일은 없었음 좋겠다. 왠지.. 두 번 아픈 일이 될 것 같아서..ㅠ
p.230 종교와 영성은 독실한 신앙인들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프리즘을 제공한다. 데이비드의 어머니에게 데이비드가 끊임없이 일으킨 발작은 그가 어렸을 때 대성통곡한 후 온몸이 덜썩이며 훌쩍거리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데이비드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심폐소생술을 하면 데이비드가 자연스럽게 숨을 거두지 못하게 된다더니 이제는 심폐소생술을 신의 섭리라고 생각했다. 심폐소생술이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지만 실패하더라도 신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데이비드의 어머니는 아들이 평생 침대 신세를 질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가 현재 상태를 즐기고 있다고 확신했다. 데이비드의 어머니는 신이 "때가 되면 아들을 데려갈 겁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들 자신들은 독실하다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좀 무서웠다.
p.238 종교는 여러 면에서 공포 관리가 낳은 막강한 부산물이다. 문화나 도덕관 같은 다른 구성물과는 달리 종교는 기도, 순례, 예배 모임 같은 투자를 통해 자아의 가치를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죽음을 부인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라는 점에서 죽음의 공포를 달래는 데 도움이 된다. 거의 모든 종교는 사후세계를 약속하는데, 이를 통해 죽음은 삶의 마침표가 아니라 하나의 삶에서 다른 삶으로 옮겨가기 전에 찍는 쉼표로 지위가 격하된다. 죽음에 천착하면 무신론자들조차 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p.254 한 환자는 건강할 때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궁지에 몰리면 필요 없던 도움이 절실해진다." 신에게 분노하는 사람도 있다("신이면 자기 피조물을 돌봐야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내 몸은 어떤 모습이 될까? 또는 "다른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
나도 아빠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정말 절실하게 "살려달라고, 울 아빠 좀 살려달라고.." 기도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신은 내 기도에 답하지 않았고, 나도 그 이후로 신에게 기도하는 일이 없어졌다.
p.256 비신앙인들의 이성적 사고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는 이들은 현재의 삶에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지막 의무를 다하는데 집중한다. 자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은 마지막 숨을 들이쉬는 순간조차도 자신에게 맡겨지길 바란다. 바로 이런 이유로 무신론자의 95퍼센트가 안락사와 의사 조력 자살을 찬성하는데, 그 어떤 집단보다도 높은 수치다. 종교가 없는 의사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경향이 나타난다. 이들은 종교가 있는 의사보다 안락사를 찬성할 가능성이 크다.
나 역시도 나의 현재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살기를 노력하고 있다. 나의 고통이 최소화되길 바라고 있으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숨은 내가 원하는 순간 원하는 곳에서 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정말 거짓말이겠지만..
나머지 반에 대한 서평은 조만간 더 이어서...^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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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영면한다는 것은 그저 먼 과거에나 있었던 관행으로 이제는 도달하지 못할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집 침대에 몸져누운 환자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내모는 여러요인은 여전히 존재하고 상황은 갈수록 악화될 것이다. 경제적 압박으로 가족들은 일자리가 있는 곳을 따라 점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산다. 나이 든 부모와 친척을 집에서 돌볼수 있는 가족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은 악화일로를 걷는다. 의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더 오래 살고 만성질환에 더욱 취약해지며 과거 세대들보다 훨씬 더 말년에 독립적인 삶을 누릴 능력이 떨어진다.p.100
사람들 대부분 병이 들자마자 입원하거나 요양시설에 수용되고 그곳에서 발달된 의술로 생영을 연장하거나 남은 삶을 보낸다. 연명치료라는것은 치료효과 없이 생명만을 연장하기 위해 시도하는 의료행위로 심폐소생술이라든지 인공호흡기를 부착한다든지 혈액투석, 항암제투여등의 의료행위이다. 현대인들은 의례 자신이 병들고 늙으면 집을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노인 인구층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핵가족 시대로 독거노인도 많아져 불확실한 노후생활을 대비하는것이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있는 듯하다. 이제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세계에서는 불가능과도 같다. 죽음은 늘 영적 탐험과 존재 추정의 원천이었다. 수많은 학자, 철학자, 신학자, 작가가 생명 상실이 불러일으키는 답할 수 없는 의문에 매달려왔다. 죽음은 아마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 모든 문화권에서는 -생명의 탄생에 관한 의례가 형성되었듯이- 생명의 종말을 둘러싼 정교하고 복잡한 의례가 형성되었다. 유족들은 의례를 통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슬픔을 치유하고, 영원히 떠나간 이를 애도하면서 서로를 위로했다. p.149
인류역사에서 인간이 마지막에 직면했을때 치르는 가장 오래된 의례는 기적을 바라는 의례였다. 과거에는 종교인이 그런 요청을 받아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에게 빌었다. 요즘은 이런 의례를 의사가 아래와 같이 주관한다. 가능한 조치를 '모두'원하는 환자일 경우 마지막 순간에 의사나 간호사는 팔꿈치를 빳빳하게 펴 고정시킨채 손바닥으로 환자의 가슴팍을 눌러 심폐소생술을 실시한다. p.150
심폐소생술이라 하면 죽음에 이를 환자를 다시 살려내는 거의 기적과 같이 긍정적인 이미지로 떠올린것이다. 물론 나도 그랬었다. 티비나 인터넷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진 사람들에게 행한 심폐소생술로 인해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다시 되살린 사람들에게 우리는 영웅이나 위인이라 부르며 그들을 칭송하는것도 그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런 심폐소생술이 상황이 최악인 환자들에게도 무조건적으로 실행되고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의사들 본인이 위중한 상태에 빠졌을 경우 심폐소생술을 원하는 의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아이러니하지 않을수 없다. 수많은 환자를 살려내려고 시행했던 심폐소생술을 정작 자신이 환자의 입장이 되면 받지 않겠다니말이다. 이말은 아마도 심폐소생술로 심장이 다시 뛸지라도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 아닐까? 수면 무호흡증을 앓고 있던 소녀가 수술후 심장마비를 일으켜 병원에 입원한지 3일만에 의사들은 그 소녀가 뇌사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는 관으로 영양을 공급하고 기관절제수술을 해달라고 애원했으니 병원은 부모의 요청을 거절했다. 법정공방끝에 재판부는 그녀가 사망했다고 판결을 내렸지만 그녀는 지금도 요양시설에서 '연명치료'를 받고 있다.p.163
죽음이란 무엇일까? 심장이 멈추는 순간? 뇌가 멈추어 환자의 의식이 사라진 순간? 뇌사선고를 받은 환자를 사망했다고 판결을 내린 재판부는 죽음이란 의미를 무엇으로 따진거였을까?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해 과거였다면 죽음에 이르렀을 환자들이 생명이 연장되어 살아가고 있는 이시점에서 무차별적으로 연명치료을 시행할 필요가 있는가 되짚어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안락사와 의사 조력 자살이라는 용어는 비슷하게 쓰이지만 큰 차이점이 있다. 안락사는 의사가 환자의 때 이른 사망을 초래할 행동을 직접 하는 경우를 뜻하는 반면 의사 조력 자살은 환자 스스로 생명을 끊는 행위를 할 수 있게 의사가 치사량의 진정제를 처방하는 등 환자에게 생명을 마무리할 수단을 마련해준다는 뜻이다. 둘중 안락사가 의사 조력 자살보다 훨씬 역사와 전통이 길다. 의사 조력 자살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고 환자의 자율권을 강조한다. p.357
죽음을 코앞에 둔 환자들이 그들의 삶을 돌아볼때 후회스러운것 3가지는 평소에 건강을 잘 챙기지 못한것에 대한 후회, 자기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고마웠고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맘껏 해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들었던것이 기억난다. 그렇기때문에 나는 내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위 세가지를 후회하지 않도록 현재의 삶에 집중해서 살아보면 나중에 큰 후회는 하지 않을까 바래보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보이지 않는 미래를 대비해 생전유서라든가 존엄사, 연명치료여부, 장례방법, 상속여부를 미리 적어놓고 대비해야 혹시 모를 미래에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맞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하면 잘사는 방법인가도 중요하지만 이젠 어떻게 해야 잘죽는 방법인가도 알아두어야 할 때이다.
이리뷰는 예스24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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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 걸렸다.
죽는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책 제목만으로도 ... 참 무겁다.
정말 세상에 죽는게 두렵지 않을까?
한번.. 크게 아파봤던 .... 경험이 있던 나는...
그랬던 나는... 결론.... 적으로 죽는게 두렵다..
물론 그때 나는..
그때... 검진을 받고 ...
해외에 있던 나는... 검진을 위해 .. 한국으로 와야했을때.. 검진을 받고 .. 치료를 받을때... 나는...
죽음에 대해 .. 잠깐... 아주 .......깊지 않게... 생각을 해본적이 있다.
그래서 ... 더 ..궁금했던.. 이 책... 죽는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물론 나는... 지금은 죽음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내가 지켜야 할 아이가 있고 ...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 그 아이가 다 성장할때까지라도 .. 나는 건강하게 .. 살아야 한다!!! 니까 .. 하하
하지만.. 이책이... 마냥.... 쓱~ 읽고.,.. 넘어가진 않았던..... 내 나이... 곧 마흔
p.39 가장 기본적인 세포 차원에서 삶과 죽음은 이 두가지를 양분해서만 보는 인간 차원에서보다 훨씬 복잡하고 역동적이면서 안정적이다. 우리가 숨 쉬는 매순간 우리 몸에는 새로 생명을 얻는 세포도 있고 사망 선고를 받는 세포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살아 있어도 우리 몸의 일부는 끊임없이 죽음을 맞는다. 세포사멸이 일어나지 않으면 평균적인 인간은 일생에 걸쳐 2톤에 달하는 척수를 축적하고 장의 길이는 15킬로미터에 이를 것이다. 개개인의 세포 차원에서도 사멸을 선호하는 인자와 사멸을 막는 인자 사이에 끊임없이 역동적인 밀고 당기기가 일어난다. 따라서 우리 몸 안에 있는 모든 세포는 죽음에 가까이 가려는 힘과 죽음에서 멀어지려는 힘 사이에서 오락가락한다.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우리 몸은 새로 태어나는 세포들과 죽어가는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고 세포의 탄생과 죽음은 늘 동시에 끊임없이 일어난다. 세포가 사멸하려는 힘이 세포가 유사분열하려는 힘을 능가하면 인간으로서 우리는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나도 그랬지만..
며칠전..
이 책도 ...
4장 죽음보다 끔직한 목숨이 나타나다!
p.122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고, 아무리 많은 비용이 들어도 그 비용을 갚기 위해 환자와 일가친척이 무슨 고통을 겪더라도 막아야 한다고들 생각하는 듯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보통 둘로 나뉜다.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죽기 전에 견뎌내야 하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제는 또 다른 두려움, 소생의 두려움까지 추가해야 한다는 말일까? 예전의 의사들은 대부분 의사가 끼치는 가장 큰 해는 실수로 환자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오히려 환자를 계속 살려두는 게 의사가 끼치는 가장 큰 해가 된 것은 아닐까?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죽음을 막을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하는것이 맞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죽기전에 견뎌내야 하는 고통이 더 크다면.. 그 두려움이 더 크다면.. 그것조차.. 본인이 선택한다면 모르겠지만...
요컨대 휴스 판사는 7 대 0 만장일치 판결에서 환자는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를 중단하거나 거부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환자가 그러한 결정을 내릴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환자의 후견인이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판시했다. 또한 그러한 요청에 따른 의사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명시했다. 말기치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이 판결로 말기치료는 어둠 속에서 나와 세상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어짜피 죽는다면.. 그 고통을 참아내서 살 수 있는게 아니라면.. 나는...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다.
어찌하건... 이 책을 통해 ..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고 해야할까? 생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 이라는 이책의 문구
그래! 죽음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이렇게 나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지금 내게 주어진 삶을.. 더 잘 살 수 있는.... 방향으로 .. 이끌 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이 리뷰는 yes24를 통해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읽은 후 작성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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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부키> 죽는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살면서 '죽음'을 그리 자주 생각하진 않는다.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 공포가 가장 크다고 하던가? 겪어본 이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어 두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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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아마 남다른 기억 역시 아닐 것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되었다는 글을 보았다. 심폐소생, 인공호흡기 착용 등 연명의료의 중단을
잠시 '그랬다면...' '이렇게 했다면...' 이라는 뒤늦은 생각들 때문에 산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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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잠시, 저자에 대해 궁금해져서 다시 앞으로 뒤적여본다.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원으로... 현재는 듀크대학병원에서... 살아가는 땅, 대륙이 달라졌다는 건... 그 문화권이나 일상 역시 엄청난 변화를 겪었으리라. 삶의 마지막 순간은... 그 모습은... 또 얼마나 많은 차이를 보였을까.
이렇다 저렇다 저자의 의견을 주장하기 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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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 권리'와 '죽을 권리' 현대 의학은 인간의 생족 능력을 강화해주는 동시에 세상을 더날 권리를 침해하기 시작했다. 1975년 스물한 살의 여성 캐런엔 퀸런은 호흡이 멈추어 병원으로 실려 갔다. 몇 달 만에 그녀는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의식 불명 상태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부모는 딸의 호흡기를 그만 빼달라고 요청했지만 의사들이 거부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 생명윤리, 의사의 권한, 환자의 권리 등을 둘러싸고 과학 종교 법이 복잡하게 얽히고 섥킨 문제였다. 이 사건은 1년여 만에 연명 치료 중단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미국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오늘날 '죽을 권리'라고 알려진 사회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 환자는 똑같은 말만 계속한다. '의사 선생님 나 언제 퇴원해서 집에 갈 수 있어요?" 어려운 질문은 수없이 많다. 여동생이 앞으로 얼마나 더 살까요? 아들이 수술을 하고 살아날 확률은 얼마나 되나요? 아버지가 다시 걸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선생님 우리 어머니가 선생님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 작품 속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