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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모두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지만, 하이드는 모든 인간 가운데 유일하게 악으로만 구성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94p) 책을 받아보고서야 알았다. 내가 미니북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그전까지는 단 한점의 의심도 없이 기다리기만 했었는데 나중에야 확인해보니 미니북이었더라. 바보같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작기때문에 그것이 주는 장점도 있더라는. 일단 가지고 다니기 편하다. 두껍지 않아서 어디든 휴대하기 좋다. 판형이 작기는 하지만 글자가 너무 작아서 읽지 못할 정도도 아니다. 여백을 많이 안 주어서 너무 빽빽하게 구성하지도 않아서 충분히 읽기 편하고 가독성 또한 해치지 않는다. 책의 장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셈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그리 길지 않아서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것도 좋다. 즉 작가의 이야기 두 편을 읽을 수 있는 셈이다. 일석이조. 괜히 무언가 더 얻은 느낌이 든다. 분명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가 어떤 내용인지 말이다. 하지만 찬찬히 글로서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읽어보기로 결심했었다. 두얼굴의 사나이라는 것은 분명 알고 있었는데 어디서 어떻 바뀌어 버린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읽다보니 생각이 났다. 내가 어디서 읽은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야기의 전모가 기억나게 된 것이다. 읽는동안 충분히 재미는 준다. 어렵지 않게 읽히는 이야기는 약간의 폭력적인 장면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너무 가학적이지 않아서 청소년들이 읽기에도 충분히 지장이 없을 정도다. 오히려 이런 책을 읽고 지킬과 하이드라는 사람의 갭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고 어떻게 하이드가 만들어 졌는지를 설명하면서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독서토론의 책으로 선정하기에도 충분할 정도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선한 것일까 악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상에서도 분명 언급이 되어있다. 본래 악한 것이 인간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인간은 선한 상태로 그대로 유지되었을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인간은 분명 결함이 없었을텐데 말이다. 지킬박사는 자신의 모습에서 악만을 도출해서 하이드를 만들었다. 원래 있던 인간에서 내용물을 추출해서 만들었기에 하이드는 생긴 것도 못생겼고 키도 더 작고 추악한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두개의 별도의 인간이었을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너무 자주 하이드로 바뀌게 된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작가는 하이드로 변해버린 지킬을 통해서 인간이란 악을 추구할수록 점점 악인으로 변해 버린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나의 소설을 통해서 무언가 교훈을 남기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분명 현실에서 존재할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비유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충분히 지킬과 하이드라는 두 인격 모두를 우리 안에 품고 있을수도 있다.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 세계문학 - 소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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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이 두 개의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내 학문은 거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도 있겠지만, 나보다 더 연구 실적이 뛰어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조화롭지 못하고, 독립적인 개체들이 모인 조직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성격상 이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옳다고 믿으면 오직 그 길로 갔다. 내가 인간의 이중성을 인지한 것은 내 안에 있는 도덕적 측면 때문이었다. 내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성격 가운데 어느 한쪽도 모두 나지만, 그것은 내가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서술할 기적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나는 선과 악을 분리한다는 공상에 종종 빠져들고는 했다. 나는 이 두 가지를 각각 분리할 수있다면, 삶의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악한 본성은 고상한 쌍둥이인 착한 본성의 야망과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되어 자신의 길을 가면 되고, 착한 본성은 악한 본성이 저지르는 짓에 대해 괴로워하거나 참회할 필요없이, 그에게 기쁨이 되는 일을 하면서 위로 향하면 된다. 이란성 쌍둥이가 의식 세계라는 자궁 안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은 인류에게 저주이다. 그렇다면 그 둘을 어떻게 분리할 수 있을까? (-89, 90쪽)
이 세상은 어쩔 수 없이 이분법적으로 되어 있는 것일까? 하늘이 있으면 땅이 있고, 산이 있으면 바다가 있고, 물이 있으면 불이 있고, 행복이 있으면 불햏이 있고, 지옥이 있으면 천당도 있고, 善이 있으면 惡이 있고. 그렇다고해서 완전한 이분법도 아닌 듯 하다. 결과가 있으려면 원인이 있고 그 결과에 다다르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이 있을테니. 이 책은 늘 그런 고민을 하게 한다. 성선설일까? 성악설일까? 를. 인간의 본성을 선천적으로 선하다고 본 맹자와 인간의 본성은 원래부터 악하기 때문에 禮와 공부가 필요하다고 본 순자의 대립은 아주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인간의 성선설을 믿을지 성악설을 믿을지 이쯤에서 상당히 궁금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킬박사와 하이드>라는 작품은 문제작임이 분명하다. 선과 악은 언제나 우리에게 대립을 불러온다. 그것도 인간의 본성이 어둠에 가깝다는 말과 함께. 그런 까닭으로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쪽에 무게를 두는 사람도 많다. 나처럼. 하이드는 창백하고 난쟁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기형은 아니었지만 왠지 불구라는 인상을 주었다. 웃는 것조차 불쾌했다. 그는 거칠고 낮은,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25쪽) 이 책에서조차 인간의 본성은 어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제어하기 위해 그토록이나 많은 법과 규제가 필요한거라고. 또하나,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지나칠 수 없다. 이 작품은 분명 경계선안에 있다. 인간이 본디 선하다고 말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악하다고 말하지도 않는 까닭이다. 주인공 지킬박사 역시 겉으로 볼 때는 부와 명예를 갖춘 박사였지만 자신안에 내재된 본성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또하나의 자신인 하이드를 만들어내게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적인 관념과 사회적인 규범을 벗어나 자신의 마음대로 살고 싶었던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 않다는 말일까? 많은 사회적 규제와 도덕적인 관념으로 포장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야 하니 그것은 어쩌면 순자의 말처럼 인위적이거나 혹은 위선적으로 꾸며낸 모습일 것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제대로 읽어보고 싶었다. 책을 읽는 내내 조여오던 몰입도와 긴장감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명예로운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지킬박사는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분리하는 실험에 성공한다. 하지만 지킬박사의 삶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했던 그는 또다른 자신의 분신 하이드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쾌락의 어두운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선과 악의 세계를 동시에 오갈 수 있었던 지킬박사가 행복했을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선한 것이라해서 모두 옳은 것도 아니며 악한 것이라해서 모두 나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선과 악이 완전한 균형을 이룰 수는 없겠지만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지않기 위해 최소한의 양심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고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말하고 있다. 지킬로 사는 쪽을 선택한다면, 나는 오랫동안 숨겼지만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욕구를 포기하며 살아야 했다. 하이드로 산다면 지킬이 쌓아올린 명예와 이익을 포기하고 사람들의 경멸을 감내하며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102쪽) 는 지킬박사의 말처럼 어쩌면 이 작품은 우리가 지켜야 할 수많은 규율과 법제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우리는 누구나 일탈을 꿈꾸며 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궤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이드로써 죽음을 맞게 된 지킬박사가 자신이 선택했던 욕망과 일탈에는 그에 따른 대가와 결과가 있다고 하는 것만 보아도 우리의 욕망, 혹은 쾌락이 얼마나 큰 결과를 불러오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논쟁은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되고 평범한 것이다. 신의 뜻을 어겨 벌을 받는 죄인들도 이와 같은 유혹에 이끌려 주사위를 던진다. 나 역시 주사위를 던져야 할 때가 오자, 더 나은 쪽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전의 많은 사람처럼 결심을 지킬 힘이 부족했다. (-102쪽) 질서와 규율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망을 얼만큼 억제할 수 있는가 묻고 있는 것만 같다. 마음의 고삐를 너무 오래도록 느슨하게 두어서는 안된다고. 이 책의 말처럼 하이드에게 지배당한 사람은 지킬 박사 하나로 충분하니까. /아이비생각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1850년 11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부유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토목기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에든버러 공과대학에 입학했지만 몸이 약하고 문학에 흥미가 있었던 루이스는 법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다. 아버지와의 갈등과 점점 악화되는 건강으로 요양차 유럽여행을 떠났는데 그 때의 경험이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보물섬>이란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으나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창작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던 그는 1894년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 생각뿔의 미니북 시리즈를 응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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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뿔의 지킬박사와 하이드에는
1. 지킬박사와 하이드
2. 병속의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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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이라는 주제는 인류가 생긴 이래 모든 성현들과 철학자들이 한 번은 다룬 주제가 아닌가 싶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선과 악은 왜 생기는지, 과연 선이 악을 이길 수 있는지 등등 선과 악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무수히 많다. 이를 다룬 철학, 소설 등도 많고.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 선과 악을 다룬 가장 대표적인 소설 중 하나를 꼽자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아닐까 싶다. 소설 뿐 아니라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지키박사와 하이드, 이번에 생각뿔에서 출판한 책으로 다시 읽었다.
누구나 존경할만한 인품을 가진 지킬 박사,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성격의 다른 이가 존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냥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그 존재는 지킬의 실험에 의해 현실에서 다시 태어나게 되니 그가 바로 하이드였다. 오로지 악의 화신으로 태어난 하이드는 세상 속에서 그의 성품 그대로 살아가기 시작하고 이런 그의 모습은 결국 댄버스 커루 경의 살인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다. 한편 점점 변해가는 지킬의 모습에 의문을 품은 이들이 지킬과 하이드이 관계를 캐기 시작하고 지킬의 친구인 라니언 박사는 지킬과의 만남 후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마는데.
지킬의 내면에 있던 악의 존재는 단지 지킬에게만 있는 존재는 아닌 듯 싶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선의 모습과 악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다. 다만 그런 악을 외적으로 표출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분명 사람마다 다를 뿐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병 속의 악마 두 작품 모두 인간의 본성, 특히 선한 본성 밑에 숨어있는 악한 본성을 보여준다. 욕망이라는 굴레에 빠져 결코 빠져나가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과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두 소설은 페르소나라는 심리학적 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들은 어쩌면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선을 추구하는 마음일까, 악을 멀리하는 도덕성일까?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억누르기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욕망의 분출을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끼는 감정이라고 말하며 악을 혹은 쾌락이나 욕망을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여전히 흐릿하지만 소설 속에서 확인한 건 하이드가 모든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니 하이드를 만난 모든 이들은 그에게서 불쾌감을 느꼈다. 이 점만큼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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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는 모르지만 양면성의 인간을 이야기 할 때는 아수라백작, 혹은 지킬박사와 치우 친것이 아닌 온전히 사람이라는 것에 해당해야 함을 판단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 "지킬 박사와 하이드" 는 인간을 두고 성선설과 성악설로 나뉘어 그 존재에 대한 흔하게 우리가 하는 말들 중에 "이중성" 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을 변모하게 하는 것들 중에 쾌락과 분노는 그 맥락이 같다고 볼 수 있다. 절대적 선과 절대적 악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인간이 가진 다양한 모습을 통해 우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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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기일식, 같은 날이 있습니다. 그 밤에만 빛나는 그 달이 한낮의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그런 날이 있습니다.그리하여, 그날만이라도 빛과 어둠이 그리고 달과 태양이 공존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그럴까 싶습니다.결국에는, 그저 아주 그 순간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왜냐면, 그때의 신비스러움이 그것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내재돼 있던 욕망을 부른 것이었습니다. 헨리 지킬, 그는 선한 학자였습니다. 기부도 많이 하며 존경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그는, 그 억제돼 있던 것들이 폭발한 것입니다. 바로 "하이드"란 우리의 숨겨진 선한 얼굴 뒤의 악함을 폭로하고 싶었는지도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그렇게, 지킬 박사는 하이드의 심연을 오랫동안 본 것일까요? 아니면, 그 악함에 어쩌면 스스로가 먹히고 싶었던 것일까요? 하이드는, 헨리 지킬에 비해서 "그것은 기분 나쁜 혐오감"(40p)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무시당하면서 어째서였던 것일까요? - 그것은, 헨리 지킬은 누릴 수 없는 쾌락이었을 겁니다. 남들이 혐오하는 것조차, 그리고 무자비한 일을 자행하는 그 과감성까지요. 그렇게, "악" 이란 숨겨진 것을 끄집어 내면서, 쾌락과 동시에 가져온 것은 바로 "피폐함"이었습니다.
멈추고 싶었다고, 그리고 어느새 이미 그를 지배하고 있었고 더이상은 컨트롤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랬을까요? 멈추고 싶던 그 의지는 아마도 지배당하고 싶은 의지가 삼겨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더한 쾌락을 선택했을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더 정직한 글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 둘"이라고 말입니다. 더이상, 혼자가 아닌 '우리"가요. 결국에는 헨리 지킬은 하이드를 인정할 수 밖엔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빛이 가지는 속성이기도 합니다. 그림자가 긴 그 빛의 말입니다.
이 소설을 여러 콘텐츠, 연극으로부터 시작한 뮤지컬, 연극 공연과 영화로는 접했으나, 정작 문학작품으로는 처음 접했습니다.
아주 낯익은 세계문학, 하지만 텍스트로는 낯선 작품을 읽었습니다. 짧지만, 긴 _ 선과 악처럼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어째서 "고딕 문학" 이라고 하는지도 알 것 같았습니다. 지킬 박사의 편지를 읽는 어턴스의 심정으로 그리고, 그의 모습을 직접 목도한 라니언 박사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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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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