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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특히 여러 권으로 된 대하소설을 읽을라치면 항상 갈등에 쌓인다. 나오는 대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완간이 된 후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완간이 되었다고 연속해서 다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는 별도로 각기 일장일단이 있겠지만 나는 후자를 선호하는 편이다. 윤홍길의 [문신]도 많이 망설였다. 그러나 이미 저지르고 본 일, 전5권으로 되어 있다는 책을 3권까지 출간된 것을 보고 읽기 시작했는데 4,5권이 빨리 출간되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한 가족 구성원들의 신념과 욕망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마주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대하소설은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도 많이 쓰였다. 조정래의 [아리랑]이나 박경리의 [토지]가 대표적일 것이다. 특히나 [토지]는 최참판댁의 흥망사를 중심으로 쓰였지만 최서희 개인사에 가깝다면, [문신]은 오롯이 한 가족 구성원 모두의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는 면이 [토지]와는 다르게 읽힌다.
먼저 1권만을 읽은 상태에서 산서의 천석꾼 최명배의 가족사를 제대로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산서 최씨의 당주 노릇을 하고 있는 최명배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윤곽이 드러난다. 일제의 토지조사를 기회로 삼아 자신의 재산 불리기를 서슴지 않은 그는 그것이 독립운동이나 진배없다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 얘기였다. 하마터면 게도 놓치고 구럭마저 잃을 뻔했던 그 위중한 시기에 야마니시 아끼라, 아니 당시 최명배였던 그는 체면이고 나발이고 돌볼 겨를 없이 이 논, 저 밭, 그 산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더금더금 걸터들였다. (…) 그 무렵 산서 일대 땅들을 확실하게 챙겨 놓았기 망정이지, 안 그랬더라면 시방 산서 사람들 거개가 동척 농장 머슴 신세로 전락해 애면글면 목숨 겨우 부지하고 지냈을 게 아닌가. 독립운동이란 게 뭐 별거이더냐. 크든 작든 많든 적든 대일본 제국에 손해 끼치는 일이라면 좌우지간 뭐든지 다 독립운동이 틀림없지 않은가.’(268쪽)
강제모집을 나올거라는 극비정보를 미리 듣고 최씨 겨레붙이들만 산속으로 피신시킨 최명배. 황량한 강제모집이 한바탕 산서 지역에 휘몰아친다. ‘굴비 두릅처럼 엮인 채 화물자동차로 끌려가는 남정들, 토끼 같고 노루 같고 소 같은 초식동물들 …… 그 곁을 따라가며 땅바닥에 엎드러지고 고꾸라지며 선지 같이 시뻘건 울음으로 남정들 발목 움켜잡거나 옷자락에 매달리는 아낙들, 지렁이 같고 쇠똥구리 같고 민달팽이 같은 미물들 ……’(37쪽) 그들이 산서 최씨만 사람이냐고 들고 일어났을 때도 당당하게 큰소리친다. 어차피 남은 사람들은 또 먹고 살아야 하기에, 대지주 최명배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에게 동족은 거추장스러운 것이었고, 오직 재산을 불리고 그 위세를 맛보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그러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먼저 창씨개명을 하고 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식들의 입신양명 조차도 자신의 위세를 떨치기 위한 수단으로 삼지만 자식들의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다.
독서회사건으로 약혼자를 잃고 퇴학처분을 받아 집에 와 있는 맏딸 최순금, 그녀는 변함없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아버지의 온갖 구박을 이겨내며 동생과 어머니를 다독인다. 고보를 졸업했지만 입신을 바라는 아버지의 소원과는 달리 집에서 빈둥거리는 최부용, 그는 폐병에 걸려 죽기만을 기다리며 사회에, 집안에 냉소한다. 자신의 아버지를 악덕지주 야마니시 아끼라라고 부르는 사회주의자 최귀용, 산서 제일의 수재로 사회주의 제국을 꿈꾸는 최부용의 이종동생 배낙철, 그리고 최명배의 의중을 대신하는 장조카 최진용. 이들이 엮어가는 이야기 그 일부가 드러난다.
배낙철은 귀용과 함께 화적으로 가장하여 최명배의 사랑채를 털어 온갖 귀금속과 돈을 강탈해간다. 여기에 부용의 방조가 있다. 그러던 중 배낙철이 사회주의자라는 것이 알려지고 그를 잡기 위해 순사와 헌병들이 그의 집이 있는 오암리 일대에 깔린다. 순금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동척농장 관리책임자 기꾸찌. 어느 날 밤 교회에 갔다 오던 순금이 기꾸찌에게 능욕을 당하려는 찰나 천치 하인 춘풍이가 나타나 구해준다. 화적이 배낙철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최명배, 부용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듣는 순금, 이들이 엮어가는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마음은 벌써 2권으로 가있다.
책의 제목인 ‘문신’은 병정으로 뽑혀 전쟁터로 나갈 남정들이 고향을 떠나기 전 신체 어느 부위에 자기 가족들이 식별할 수 있는 모종의 표시를 먹으로 새겨 넣던 풍습인 부병자자(赴兵刺字)에서 왔다고 한다. 살기를 기원하며, 죽더라도 시체나마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던 풍습이다. 책에서도 강제모집 사태를 겪고나서 산서 일대에 입묵소동이 벌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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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1[지은이 윤흥길, 펴낸 곳 문학동네, 408쪽]을 읽고
부병자자. 병정으로 뽑혀 전쟁터로 나갈 남정들이 고향 떠나기 전, 신체 어느 부위에 자기 가족들이 식별할 수 있는 모종의 표지를 먹물로 새겨넣던 그 풍습이 부병자자赴兵刺字, 즉 문신이다. 제목 ‘문신’은 178쪽 부용과 귀용의 대화 속에서 등장한다. 산서山西라는 지명이 가장 먼저 가슴으로 들어섰다. 혹시 내 고향 장수군의 산서인가 싶어서다. 오래전부터 산서 사람들 사이에는 최명배를 적당히 높일 경우 ‘상곡 그 어르신’이라 호칭하였다. 아내는 관촌댁이고 아들 부용, 귀용, 덕용과 딸 순금을 두었다. 최명배에겐 산서 최문 종중과 천석꾼 땅덩이만이 오로지 그의 관심사다. 장차 힘없는 이웃들이 겪게 될 끔찍한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애시당초 이 세상에 태어날 적부텀 지놈들 스스로 짊어지고 나온 팔자소관 인 것을 낸들 어쩌란 말이냐면서. 모집이라는,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걱정거리라고는 오로지 농사 한 가지뿐이었다. 열 놈이건 스무 놈이건 간에 자기하고 사돈의 팔촌도 안 되는 남남지간 붙들려 가는 일이야 최명배가 전혀 걱정할 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맏아들 부용과 외동딸 순금에게는 독립이니 뭐니 하는 허깨비(?)들이, 부친 최명배 몰래,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마치 족보나 땅문서 같은 실물로. 부용은 뇌짐(폐결핵)을 앓고 있고, 최명배에게 뇌짐은 천하의 몹쓸 병이다. 장차 치료비 몽땅 떠안을 아비한테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그 무시무시한 재앙을 무단히 집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제 한 목숨뿐 아니라 식구들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든 장본인인데, 그놈 어느 구석 예쁘고 기특한 대목 있다고 생살 진배없는 재물 뭉떵뭉떵 떼어 약값으로 꼬라박는단 말인가. 부용은 경성 유학 생활을 하며 동생 귀용이 점점 엉뚱한 길로 빠져들고 있다는 심증을 오래전부터 굳혀왔다. 뜨겁고도 끈끈한 일탈의 유혹을 채워 넣는 장본인은 보나마나 배낙철이 분명하고, 유혹의 입김은 다름 아닌 사회주의이다. 최명배의 생각은 이렇다. 토지조사사업을 할 무렵 산서 일대 땅들을 확실하게 챙겨놓았기 망정이지, 안 그랬더라면 산서 사람들 거개가 동척농장 머슴 신세로 전락해 목숨 겨우 부지하고 지냈을 게 아닌가. 독립운동이란 게 뭐 별것이더냐. 크든 작든, 많든 적든 대일본제국에 손해 끼치는 일이라면 좌우지간 뭐든지 다 독립운동이 틀림없지 않은가. 그 상곡 어르신이 놓은 헛기침 두어 방에 의해 긴급 소집된 문중회의. 창씨개명에 대해 논해야 하는 자리다. 귀용의 의견은 이렇다. 어떤 집안에서는 창씨 문제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국 이누꼬로 작명했다며, “이누꼬란 견자, 그러니까 개자식이란 뜻이지요. 말하자면 제 목숨하고 맞바꿔서 조상님들을 남의 나라에다 팔아먹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자조자학이 담긴 창씨인 셈이지요.” 아버지의 의견이다. “최씨 가문 후손으로 태어나서 조상 신위 앞에다 우리가 바칠 수 있는, 기중 실팍허고도 생색나는 효도가 달리 또 있는 게 아니란 말이여. 후제까장 두고두고 우리 최씨 가문에 대가 끊치는 일 없게코롬 악착같이 살아남는 일, 바로 고것이 일등 효도고 우듬지 후손 도리여.” 부용이 중재한다. “귀용이랑 잠깐 상의를 했습니다. 우리 가문은 야마요시로 창씨 허는 것이 기중 무난허겄다고, 형제간에 일찌감치 합의를 봐뒀습니다.” 상곡 어르신이 “어이, 최명배, 허고 불르는 것보담은 야마요시 메이바이, 요로코롬 불르는 편이 휘낀 더 입에도 보드랍고 귀에도 착착 갬기는 것들 않으요?” 항렬이 높은 새터 어른은 “여부가 있겄는가! 암먼, 그렇고말고! 우리 족질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옛날 옛적에 펄써 내지인이 되고도 자 가웃은 남어돌만침 큰 인물 아니든가!” 그러나 ‘야마요시 메이바이‘로의 창씨개명은 접수를 거부당하고, 결국 최명배는 야마니시 아끼라로 개명한다. 부용은 이종 동생 낙철을 만난다. 오늘 자정 영감 사랑채에 강도단이 들 예정이라고, 미리 대문 빗장을 살짝 뽑아두라는 게 낙철의 얘기다. 이게 영감한테 갱생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라며. 고민하던 부용은 귀용에게, 족자로 가려진 대청마루 쪽 벽면을 살펴보라고 은밀하게 귀띔한다. 결국 벽 속에 꽁꽁 숨어 있던 비밀 상자가 멱살잡이로 끌려나오자 야마니시는 마침내 절망의 끝을 보고야 만다. 비밀 상자 내부는 빳빳한 고액권 지폐 뭉치와 더불어 진귀한 금은보패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순전한 24금짜리, 그것도 냥쭝으로 헤아리는 금송아지에 금거북이, 금지환에 옥지환, 흑진주에 백진주, 금강석에 녹주석, 단백석에 강옥석, 산호에 호박, 자수정에 연수정, 황수정에 홍수정서껀 갖가지 금은보패가 상자 안에 흔전만전 넘쳐날 지경이었다. 챙길 만한 재물 웬만큼 챙기고 나서 화적패는 바람처럼 종적을 감춰버린다. 그런 일이 있은 뒤부터 야마니시 아끼라는 완전히 겉 다르고 속 다르게 처신하기 시작했다. 바깥세상 향해서는 피천 한 닢 강도당한 사실 없노라고 딱 잡아떼었다. 집안 쪽 향해서는 마누라를 비롯한 가솔들을 달달 볶아먹곤 했다. 부용은 누님 순금에게 “악질 반동지주 야마니시 아끼라를 단죄하는 소극적 행동이 아니라 차제에 아예 끝장을 내뿌리는 적극적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애당초 낙철이 계획이었지요. 그런디 귀용이가 그 계획을 끝까장 반대혔고, 저 역시 극구 말렸지요. 차라리 낙철이 계획대로 그냥 모르는 척 내비뒀드라면 얼매나 좋을 뻔혔는가, 허는 생각이 요즈막에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부용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순금의 가슴을 조각조각 자디잘게 저미는데, 둘의 얘기를 섭섭이네가 듣고 만다. [뒷이야기] 일제가 1939년 국민징용령을 발동했고 3년 후, 윤흥길 작가는 194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8년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장마, 완장, 황혼의 집, 윤흥길의 전주 이야기 등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문신’ 집필부터 탈고까지 이십오 년, 자그마치 원고지 6500매의 방대한 분량의 대작으로, 올해 비로소 완간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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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황국화과정과 창씨개명 당시 굴곡된 시기에 한 가족을 통하여 불행한 시대를 거쳐간 인간 군상들에 대하여 쓴 소설이다. 한국 문학사에 있어서 일제시대는 상당히 많은 문학작품을 배출해낼수 있는 시기다. 식민지가 꼭 외세에 의하여만 조성되는 것이 아니고 피식민지 자체의 모순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은 아직도 남북이 분단된 상태이고 남한은 절대적으로 미국의 영향하에 있는 나라다. 정치 군사 외교뿐만 아니라 경제분여 심지어는 사회문화 변동도 조치ㅏ도 미국을 따라가고 있고 이제는 완전히 미국의 모습을 거의 닮은 나라가 되었다. 일제시기에 오늘날 시기가 그렇게 다르지 않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