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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난 주머니를 차고 끝없는 욕심을 채우며 바동거리며 살아가느라 지난한 삶을 보낸 이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다가오는 날 진초록으로 뒤덮인 산길을 오르며 위로를 받는다. 그동안 일상에 매여 사느라 떠나보낸 시간들이 기억 속 심연에 자리하여 머리를 내밀고 올랐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선택적인 출생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사회인으로 자리하며 살아오는 동안 한 개인이 겪는 일상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면서도 개인이 처란 상황에 따라 특별함이 곳곳에 끼어들어 일생의 한 축을 이루기도 한다. 닉 애덤스는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인디언 여인의 분만 현장에 동행하였다가 제왕절개로 태어난 생명의 탄생의 신비에 전율하기보다는 또 다른 생명의 죽음으로 혼란을 겼어야 했다. 질병의 고통 속에 놓인 아이 아버지는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였고 살아남은 자는 생로병사의 멍에를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였다. 누군가는 새롭게 태어나 삶의 길 위에 섰고 어떤 이는 목숨을 끊고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일련의 상황은 현실의 고락(苦樂)을 일깨운다. 만년설로 뒤덮인 신의 집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의 서쪽 봉우리에는 얼어붙은 표범 한 마리의 시체가 있다는 노랫말이 떠오른다. 표범이 무엇을 찾아 험난한 길에 들어섰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많은 이들이 채워지지 않는 뭔가를 찾아 킬리만자로를 동경하며 그곳으로 향하는지도 모른다. 순백으로 오점을 뒤덮어 정화하는 정념의 끝자락 자연의 장엄함 앞에 한없이 미약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음을 절감하며 발길을 돌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가지 않은 길을 갈망하며 새로운 공간을 찾아 나서는 이들에게 아프리카 여행은 원시 본연의 생명을 찾으려는 움직임으로 비춰진다. 작가 해리는 아프리카여행에서 사냥하던 중 부상을 입고 다리가 썩어 들어가 감각마저 느끼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자신의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이의 고통에 좌절하여 삶의 희망까지 저버린 해리에게 곧 치료를 받으면 건강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소귀에 경 읽기에 지나지 않았다. 새들이 배회하며 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지만 다리가 썩어 들어가 그의 목숨을 갉아먹는 형벌에서 그는 숙명적인 죽음을 통해 허무한 인생을 갈무리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짐 지워진 모든 의무를 뒤로 하고 자연 속에서 지친 심신을 달래며 살아가는 일은 소소한 즐거움을 선물한다. 낚싯대를 들고 강으로 내려가 메뚜기를 미끼로 송어를 낚는 닉은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유영하는 송어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물고기를 낚으며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하는 일을 즐겼다. 궤도를 이탈하여 살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살면서도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채 일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이들에게 닉의 모습은 부러움을 더한다. 작은 송어보다는 크고 멋진 송어를 낚기 위해 역량을 모아 힘을 적절히 조율하느라 골몰하던 그가 낚은 고기는 성취욕의 산물로 집중이 낳은 선물이었다. 얕은 물에 사는 작은 송어는 그의 관심 밖이었고, 그는 큰 송어를 낚기 위해 관심을 기울였다. 블랙 강에서 놀며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여행 중에 만난 진지한 친구를 그 후로는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그는 홉킨스를 추억하며 가슴에 품고 불행과 슬픔을 녹여내는 위로제로 삼아 현재적 삶을 살아갔다.
예기치 않은 전쟁은 기존의 관계가 배태하는 삶의 균형을 깨고 상흔을 남긴 채 일상을 파괴하여 치유하기 힘든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 숙명적 고통을 낳을 때가 있다. ‘이제 내 몸을 뉘며’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아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쉬지 않고 흐르는 냇물에 내면의 무료함과 답답함을 상쇄하며 전쟁의 공포에서 비껴날 수 있었다. 냇물을 보기 위해 걸어가는 동안 지금껏 알고 있던 냇물과 다른 점을 들추며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무미건조한 전선에서 찰나나마 벗어나려는 움직임으로 애잔함이 더했다. 극도로 예민한 신경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던 장교와 결별하며 기쁨을 토로하는 주인공은 전선에서 함께 생활하는 이 때문에 겪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망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목숨처럼 걸고 지키고 싶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실천하는 열정을 거두고 적대시하며 목숨을 걸고 싸워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은 인간의 존엄성과는 괴리되는 일들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자행하는 야욕의 시대에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묻어난다. 통치하거나 통치할 수밖에 없는 전쟁과는 다른 길을 찾고 싶어 하였던 닉은 쉽사리 도달하기 힘든 ‘가지 못할 길’을 향해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싶은 열망으로 길을 나섰다. 가지 않은 길로 나섰다가 길을 잃고 떠나왔던 길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의무가 지워지더라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랑하던 여자 친구를 떠나보내고 괴로워하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기며 사냥감을 향해 총을 쏠 수도 없이 부는 바람이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의 파편들을 거두어 갔다고 새로운 희망으로 달뜬 닉은 ‘사흘 간의 바람’에 여과 없이 드러난다. 불운에 놓인 사람들을 구원해 주는 사랑은 서로를 향한 관심과 정성이 어우러져 빛을 발하는데 닉은 심드렁한 모습으로 여자 친구를 떠나보내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낚싯대를 들고 나서는 광경은 ‘어떤 일의 끝’이 끝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일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원천임을 일깨운다. 카페에 밤늦게까지 앉아 있고 싶어 하는 웨이터는 잠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 중 하나인 노인의 태도를 수용하며 젊음과 자신감으로 일을 해나가는 젊은이를 부러워하며 밤이 이울도록 카페 안을 환히 비추고 싶은 소망을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에 담았다. 어둠과 밝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하는 공생체로 어둠을 두려워하는 이들의 음울함이 엄습하기를 거부하는 자기만의 저항 방법으로 불을 환히 밝혀 둔 것이리라. 궁극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한 만큼 행복의 조건을 충족하려는 일련의 활동으로 기운이 빠지는 일상을 반복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목표물을 설정해 두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느라 제대로 한번 쉬어보지도 못하고 안달재신하며 지냈던 삶은 회한을 낳아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돌아본다. 자신이 걸어 온 만큼 인생이라는 말이 예삿말이 아닌 것처럼 특별한 경험은 개인의 의미 있는 역사를 이루는 순간이기도 하다. 직업 사냥꾼 윌슨과는 달리 사냥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은 프랜시스 머콤버는 사냥감의 어느 부위를 맞추어야 포획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고 공포가 자리하여 실천에 제약이 따랐다. 머콤버는 우여곡절 끝에 사자를 맞히었지만 치명상을 입지 않은 사자는 사위어가는 목숨의 끈을 부여잡고 총기를 든 인간들에 맞서 사력을 다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달한 짐승이 끝까지 버티며 목숨을 지키려는 몸부림에 공포를 느낀 머콤버는 주춤하며 돌아섰고, 차에서 남편의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전문 사냥꾼 윌슨은 노련함으로 포획물을 손에 넣은 뒤 머콤버는 위축되어 갔지만 물소 사냥에 성공한 그는 지금껏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두려움을 극복하여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세 마리의 물소를 잡았다고 안도하고 있던 찰나 달아나던 사자처럼 총알을 몸에 박고 숲으로 달아난 덩치가 크고 멋진 물소를 찾아 나섰던 그들을 향해 물소는 반격하여 긴장감이 더했다. 물소가 사냥꾼을 해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든 아내는 물소를 향해 쏜다는 게 그만 남편의 머리를 쏴 그를 죽음으로 몰고 말았다.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은 성취감으로 희열에 감돌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못한 채 그는 짧은 생은 마감되었다.
태어난 뭇 생명들은 영생 불멸의 꿈을 꾸기도 하지만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죽음을 향하여 떠나는 길에 서서 생을 마감하는 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영원히 살아갈 것처럼 고군분투하며 지내느라 자연을 찾아 자신의 삶을 관조하며 성찰할 기회를 내지 못한 채 지낼 때가 많다. 어떤 방향으로 흘러 가야 할지 가늠키 힘든 상황에서 순리를 거역하지 않는 자연적 흐름은 닉이 냇물을 찾아 걸었던 것처럼 짙게 깔린 음울함을 걷어내는 길 위에서 의미 있는 삶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송어를 낚으며 아픈 상처를 치유하던 닉이 가슴이 시키는 일을 좇아 살아가던 궤도를 이탈한 것처럼 영혼의 울림에 따라 스스로를 돌아보며 살아갈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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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가사 중에서
이 세상을 숨 가쁘게 살아가는 방식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어서 그랬는지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즐겨 불렀다. 하지만 삶의 박자를 전혀 맞추지 못하며 기대에 못 미쳤다. 무엇을 하고 싶은데 나는 한 박자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빨랐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타 들어가는 느낌이라는 게 이거구나 싶을 정도로 거짓말로 살아야만 했다. 거짓말은 지금의 삶이 초라하고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변명과 다르지 않았다. 이럴 때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을 읽는 것은 얼마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거짓말이라는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할 것이다.
헤밍웨이의 단편집 제목과 같은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해리는 자신이 거짓말로 살아왔기 때문에 ‘거짓말로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비극적인 삶을 끌어안고 있다. 누구에게나 재능이 있다고 하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해리의 직업은 작가였다. 그러나 그가 사랑했던 여자는 불행하게도 그의 재능의 파괴자였다. 사랑하면 더 완전한 인간에 가까워지리라 믿었는데 오히려 그는 ‘등뼈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자신을 물어버린 어떤 뱀’이 되고 말았다. 차라리 자신의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이 더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이 남는다.
돌이켜보면 거짓말로 산다는 것은 자기 삶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유쾌한 방법일 것이다.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고 거짓말만 하게 되었을 때 돈값을 훨씬 잘할 수 있다는 해리의 절망을 공감하게 된다. 돈값은 우리의 영혼을 콜레스테롤로 가득 채우기 때문에 피곤한 일이다. 더구나 죽음 앞에서 딱딱해질 정도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혼란스러워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통증을 소진하는 것은 어떨까? 거짓말을 파괴하는 아주 단순한 방법은 다른 영혼이 되는 것인데 킬리만자로에 올라가는 것은 아주 좋은 파괴이지 싶다.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빛과 어둠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렇다.
그러면 왜 킬리만자로를 일까? 우리의 인생길에서 만나는 킬리만자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들이 마치 ‘온 세상처럼 넓고, 크고, 높고, 햇빛을 받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빛나거나’(「킬리만자로의 눈」), 반대로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나 자신을 놓아버리면 내 영혼이 몸 밖으로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잠을 자지 않고 누워 있으면서 뭔가에 정신을 파는 방법’(「이제 내 몸을 뉘며」)이었다. 그래서 평행한 길은 놔두고 근육이 아플 정도로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것은 ‘모든 걸 가질 수도 있었는데, 매일 우리는 그것을 더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어’(「하얀 코끼리 같은 산」) 피곤하기 때문이며, 모든 것 즉 ‘생각할 의무, 써야 할 의무, 다른 의무들을 등 뒤에 뒤에 버리고 왔다’(「심장이 둘인 큰 강 1부」)는 행복이 아닐까?
헤밍웨이의 단편집『킬리만자로의 눈』은 아주 단순하게 거짓말을 파괴하는 소설 같았다. 어느 순간 삶에 의욕을 잃고 죽음 혹은 허무에 빠진 우리에게 사냥을 하거나 스키를 타거나 송어 낚시를 하라고 한다. 사소하다고 하면 너무 사소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아주 ‘좋은 파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 매일 맞고 꺽이며 사는’(「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 두려움에서 벗어나 ‘댐이 터진 것 같은 절대적 흥분상태’를 느낄 것이다.
일찍이 단편소설의 거장 레이먼드 카버는 문학이란 삶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며, 삶에 충실하고, 삶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의 중심인물은 움직이는 캐릭터여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인지 헤밍웨이의『킬리만자로의 눈』을 읽는 내내 마음이 어디론가 쏜쌀같이 움직였다. 낮보다는 밤이 더 강렬하여 잠들지 못하는 밤에 불을 켜두어야만 했다. 그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빛이 아주 좋고 정말 아름답다’(「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는 것이 진짜 문제였다. 혹, 거짓말로 들리겠지만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느 누구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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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일은 잘해야 외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中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이상 쓸 수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작가는 절망한다. 쓸 이야기를 한아름 안고 죽어야 하는 것, 그걸 이야기로 풀어내지 못한 것만큼 작가를 허탈하게 하는 것은 없다. 끊임없이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 창작의 고통과 글쓰기의 외로움을 숙명인냥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 그들이 바로 작가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창작의 고통이 정점에 다다르자, 그 실망과 허무의 절정에서 입에 문 장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전쟁을 비롯한 삶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가 몸소 체험한 소재들을 그는 장편과 단편에 담아 발표했다. 정영목의 번역으로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단편집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독자가 만나는 것은 헤밍웨이의 단편 속 인물들이지만, 그 인물들은 헤밍웨이와 닮거나 어쩌면 헤밍웨이 그 자신이란 느낌을 받는다. 소설이란 장르에 담기지 않고 이야기의 비약만 제거한다면, 그 이야기 모두는 작가의 과거이자 현재였고 또 가까운 그의 미래였다. 아프리카 사냥 여행, 낚시, 전쟁터의 경험, 작가수업, 사랑했던 여인, 이별, 어린시절 아버지와 보낸 기억들 그리고 자살에의 충동을 담고 있는 이야기는 날것으로의 그의 삶이었다.
<킬리만자로의 눈> 첫 장은 무척 인상깊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 해발 고도 5895m, 그 서쪽 봉우리를 마사이족 사람들은 응가예 응가이, 즉 `신의 집'이라 불렀다. 기이한 것은 그 서쪽 봉우리 근처에 얼어서 말라붙은 표범 사체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실일테다. 이어지는 문장은 헤밍웨이의 절박한 의혹이자 물음이다. " 이 표범이 무엇을 찾아 그 높은 곳까지 왔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
작가 해리는 새롭게 사귄 애인과 아프리카 사냥여행을 왔다 가시에 다리를 긁혀 한쪽 다리가 썩어가고 있다. 죽음이 평원의 야수처럼 그 주위를 맴도는 지금 새롭고 진귀한 경험들을 쌓기 위해, 전쟁터와 이국을 떠돌았던 과거가 스친다. 이제 돈많은 여인을 사귀었고 소설로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는 머릿속 가득하다. 하지만, 이제 어쩌면 죽어야 하는데 그건 가정이 아니라 시시각각 현실처럼 다가온다. 곁의 애인은 해리를 위로하고 희망을 주려하지만 해리는 비행기가 그를 구조하러 올 것이라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 사랑하고 열망하던 이 지상에서 죽음은 아직 해리의 몫이 아니라고 믿었다. 소설은 해리의 죽음을 킬리만자로의 눈밭에서 얼어죽은 표범과 대치시킨다. 그 둘의 공통점은 야망과 회한을 품고 고독과 대면한 채 외로이 사라졌다는 것일까?
"바로 그때 그는 자신이 지금 죽음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생각은 빠르게 들이닥쳤다. 그러나 물이나 바람처럼 들이닥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악취를 풍기는 공허처럼 들이닥쳤다. 묘한 것은 하이에나가 그 공허의 가장자리를 따라 가볍게 미끄러지듯 달려갔다는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킬리만자로의 눈>, p.32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에서 머콤버의 죽음은 행복과 비극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돈많은 갑부인데다 잘빠진 몸매, 아름다운 아내를 소유한 남자다운 남자. 하지만, 아프리카 초원에 사냥을 온 그는 직업사냥꾼 윌슨과 사냥을 하다 아내가 보는 앞에서 사자에 놀라 도망치는 겁쟁이로 전락한다. 더불어, 아내는 윌슨과 바람을 피우고 머콤버의 자존감은 끝없이 추락할 시점, 다시 물소 사냥을 하며 되찾은 용기와 삶에의 자신감이 그를 구원한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눈을 멀게 하는 백열의 빛이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것을 느끼며"(p.119) 머콤버는 최후를 맞는다. 빗나간 아내의 총알에 희생된 그의 생이 이 소설의 제목처럼 짧지만 행복한걸까? 남겨진 이들이 머콤버의 주검앞에서 던지는 `할 일이 지랄맞게 많다'는 푸념은 뭇 독자의 서글픔을 자아낸다.
가장 인상깊은 단편은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이란 작품이다. 마치 헤밍웨이 노년시절의 허무와 절망을 그리고 있는 듯한 이 작품은 하지만, 젊은 시절인 스페인 내란 취재를 위해 그곳에 머문 시기에 집필되었다. 돈 많은 여든 노인은 자주 `깨끗하고 불이 환한' 카페를 밤늦에 홀로 찾는다. 사람들은 늦은 시간이라 모두 카페를 떠나고 종업원들도 일을 접고 문을 닫아야 할 시간, 귀가 먼 노인은 밤새 앉아 새벽 3시까지 `브랜디 한 잔 더'를 외칠 뿐이다. 노인은 지난주에도 자살을 하려다 실패했다. 귀머거리 노인을 앞에 두고 두 명의 젊은 종업원이 나누는 대화는 평범하지만 그 대화가운데 독자는 사뭇 우리네 삶이 외로움과 허무로 가득들어차 있다는 진실과 대면케 된다.
"지난주에 저 노인네가 자살을 하려고 했어." 한 웨이터가 말했다. "왜요?" "절망에 빠졌거든." "무슨 일이 있었나요?" "없었어." 어니스트 헤밍웨이,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p.125-126
그 외의 작품은 "닉 애덤스 이야기"로 헤밍웨이의 젊은 시절과 생애를 짧게 스케치하고 있는 단편들이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몇 해에 걸친 일상을 사실적인 필체와 다른 제목으로 그려내고 있지만, 모두 닉 애덤스가 주인공이며 그 이야기의 흐름은 어린 시절 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겪은 일부터 작가지망생으로 살았던 시절, 전장의 포화와 사랑이야기, 실연의 아픔과 낚시와 캠핑을 즐기던 날들의 구체적 묘사가 주를 이룬다. 10여 편의 작품들은 소설이지만 전기로 읽혀도 충분히 독해될 수 있으며, 헤밍웨이의 젊은 시절과 그가 겪은 생의 주요한 사건들을 파악할 수 있다. 헤밍웨이는 장편으로 성공한 작가지만, 단편들은 그의 경험과 일상을 더 가까이 바라보게 해주고 있다.
"좋은 글은 진실한 글이다. 누군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면 그 이야기의 진실성은 작가가 지닌 삶에 대한 지식의 양과 진지함의 정도에 비례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헤밍웨이는 작가의 가장 중요한 미덕을 경험과 지식에 두었다. 그는 작가론을 쓰지 않았지만, 여기저기에 발표한 글속에서 작가는 글을 쓰기 전에 대상에 대해 철저히 알아야만 글을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소설들이 하나같이 상상력 이전에 경험을 2차 가공한 것에서 시작됨은 이 단편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그는 소재를 찾아 위험한 전쟁터를 누볐고 아프리카의 야생을 찾아 맹수 사냥같은 독특한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그의 단편들을 읽으며 전해오는 감동은 `실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셈이다. 킬리만자로의 초원에서 죽음에 다다른 해리와 사자와 맞닥뜨린 절정의 순간을 묘사하는 머콤버의 절박함은, 온전히 헤밍웨이의 것이다. 자살시도에 실패하고 쓸쓸히 새벽 3시까지 브랜디를 홀짝이는 노인네는 공교롭게 젊은 시절 상상한 그의 실제 `미래'였다. 그러니 그의 삶과 문학에는 조금의 간극도 없다. 이 진실성은 그가 생을 과대포장하고, 거짓 희망을 쫓아 인위적인 교훈을 작품안으로 끌어들이지 않은 이유다.
뭇 독자들은 그의 작품속에서 희망과 기쁨이 거세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허무와 절망, 그것이 삶에서 그가 끌어낸 온전한 진실이라면 어떨까? 희망을 구현하지 못해도 패배와 실패 가운데 생의 진실들을 포착해낸 문학은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2012.6.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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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유명한 그림 '절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난 왜 헤밍웨이의 단편소설집인 <킬리만자로의 눈>에 있는 단편들을 읽으며 뭉크의 '절규'를 떠올리게 되었을까.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이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일상생활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담겨 있는 그림 <절규>' 그렇다면 그 그림을 소설로 쓴 것은 어쩌면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뭉크는 어릴적 죽은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 대신에 따랐던 한 살 연상의 누이가 사춘기 나이에 죽음으로 인해 '불안' 에 쌓여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자신 주의에 감도는 '죽음'이라는 빛, 그 빛은 도망간다고 하여 도망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친구들과 산책중에 자신 혼자만 느낀 감정, 그것이 '킬리만자로의 눈'이나 '프랜시스 머콤버의...' 의 이야기에 담겨 있는 듯 하다.
이 단편소설집을 읽기 전에 헤밍웨이의 다른 단편집을 읽었었다. <우리들의 시대에>라는 책으로 그 책에 실린 단편들에도 '닉 애덤스' 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연작으로 그린 이야기가 있다. 물론 '닉 애덤스'는 '헤밍웨이' 자신이며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그려 놓은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집에서 '닉'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자신의 삶과 모습을 담아 놓은 이야기들,어쩌면 자전적인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헤밍웨이'그를 기억하는 작품으로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라던가 '노인과 바다' '무기여 잘있거라'라는 장편이다. 단편으로 기억하기엔 그의 장편의 힘이 컸다. 장편에 가려져 있던 단편들을 읽으며 그의 삶은 들여다보듯 그의 삶을 조망해 본다. 어느 날 문든 친구들과 산책을 하다가 자신 혼자서 느끼는 감정 '절규'를 경험하듯 모든 것을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두려움'이나 '죽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킬리만자로의 눈에는 그런 '죽음'에 대한 공포가 담겨 있다. 킬리만자로에 쌓인 눈을 눈이라 하지 않고 하얀 코끼리에 비유를 했다. 하지만 킬리만자로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얻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사냥여행을 떠난 '해리'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한순간에 그의 삶이 무너지고 말았다. 가볍게 여겼던 다리의 부상이 점점 그의 삶을 파고 들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오른쪽 다리에 괴저가 시작된 이후로 그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고,통증과 함께 공포도 사라졌다. 이제 그가 느끼는 것이라곤 이게 끝이라는 커다란 피로와 분노뿐이었다. 지금 다가오고 있는 이것에 그는 호기심이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이것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이제 이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써야 할 글이 많이 저장되 있었다. 그런데 하나도 꺼내보지 못하고 단순하게 여긴 상처로 인해 무릎을 끓어야만 한다. 죽음이란 가까이가면 갈수록 더욱 살고 싶다는 '절규'를 하게 만든다. 자신의 모든 것을 놓아 버릴 수가 없어서 공포와 맞써 싸우는 해리,하지만 어느 한수간 그것을 담담히 받아 들이고 그는 모든것을 놓아 버리듯 킬리만자로의 눈이 덮힌 꼭대기를 향할 수 있었다. 받아 들이면 편안해지지만 그렇지 못하면 고통에 절규할 뿐이다.
해리가 써내려고 했던 머리 속에 담겨 있던 소설과 함께 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곳에 사냥여행을 오기 전까지는 그가 그렇게 '죽음'과 맞써 싸우게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하는 순간에 그리고 무언가 깨닫는 순간에 '죽음'이 닥쳐 온다고 흔히들 이야기 한다. 평생 철이 들지 않아야 오래 산다고 한 이야기처럼 그가 고통과 분노를 놓아 버리는 순간 그에게 찾아 온 죽음이라는 또 다른 그림자, 삶을 희망으로 붙잡을 그 무엇이 없다고 생각한 해리에겐 그저 자신 안에서 아직 산고를 거치지 않은 소설을 쏟아 내는 것,죽기 전에 빛을 보게 만들고 싶은 이야기들이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쏟아 내야만 그가 이르려는 그 세계에 도달할 것만 같다. 뭉크가 산책중에 순간에 마주한 '절규'가 그려지는 장면이다. 모든 것으로부터,자신이 간단한 상처로 인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말을 귀를 닫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받아 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지만 절규하면 절규할수록 통증은 더하고 냄새는 더욱 지독할 뿐이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해리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절규했다면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에서 머콤버는 순간 '두려움'과 맞써게 된다. 모든 것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머콤비 아내와 사냥군 윌슨과 함께 사파리로 사자사냥을 간다. 하지만 그의 손은 달달 떨리고 있다. 왜 안그렇겠는가 지금까지 그에겐 그런 모습이 없었는데.하지만 사냥꾼 윌슨에게 지고 싶지 않고 자신의 남자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던 머콤비는 사자를 잡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그들 모두와 함게 사자사냥에 나서게 된다. 두려운자는 한 발의 총탄으로 저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발을 쏘게 되어 있다. 사냥꾼은 어느 부의를 맞추어야 단명하게 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는 모른다.옆에서 알려 주어도 들어오지 않는다.그에게 두려움이 엄습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어떻게 하여 사자를 맞추게 되고 어설피 맞은 총알에 사자는 숲으로 들어가 마지막 숨을 쉬고 있다가 자신을 찾아 나선 인간들에게 마지막 힘을 다하듯 달려든다. 그 순간에 '두려움'을 느낀 머콤버는 뒤로 도망치고 그런 모습을 차에서 지켜보는 아내, 사자는 결국에 윌슨에 총에 맞아 죽게 되고 머콤버는 두려움에 떨게 되고 밤에는 아내마져 그의 곁을 떠나 윌슨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어진 물소사냥에서 머콤버는 전날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두려움을 극복한 듯 물소들의 죽음에 '행복과 희열'을 느끼는 그,그리고 달라진 그를 알아보는 아내. 세마리의 물소는 그들의 손에 죽는다.그런데 첫번째 정말 멋지고 큰 물소가 죽은 줄 알았는데 사자처럼 총알을 몸에 박고 숲으로 도망쳐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던 것, 그 물소를 찾아 마지막 숨을 끊어 놓기 위하여 나섰던 그들,너무 분기탱천한 달여오는 물소에게 한방을 먹이려던 그를 물소가 그를 덮칠까봐 아내는 물소를 쏜다는 것이 그의 머리를 쏘고 만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순간에 그는 '죽음'에 이른 것이다. ' 머콤버의 삶에서는 사파리사냥을 통하여 '약육강식'의 세계도 보여준다. 사파리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사자사냥도 했다.그리고 물에서 힘이 센 '물소사냥'도 했다. 더이상 그에게 두려움이란 없다. 모든 부를 가졌고 이쁜 아내도 가졌으며 사파에서 최강자들을 사냥했다는 자만감,자신 위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고 했더니 남자라는 강위에 여자라는 강이 있다는 것을 그는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가졌다고 생각한 순간,행복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에 아내가 쏜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머콤비'의 아이러니한 삶을 행복이라고 해야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한다. 정말 뭉크의 '절규'가 또 한번 그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남자들은 밖에서 늘 큰소리를 친가.자신들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정말 그럴까? 자신들이 또한 안에서 '여자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잊고 산다. 남자 위에는 분명히 여자가 존재한다. 그것이 누군가 동등한 저울에 올려 놓으면 둘의 관계는 동등해지겠지만 한쪽에서 기울게 한다면 그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난다.
'이제 머콤버는 마음에 들었다. 더럽게 이상한 친구야. 어쩌면 이제 오쟁이 지는 것도 끝나게 된 것인지 몰랐다.그래, 그건 더럽게 좋은 일이지. 더럽게 좋은 일이야. 이놈은 아마 평생 두려워하며 살았을 거야. 뭐 때문에 그런 두려움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하지만 이제는 끝났어.' 죽음이 나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순간에 죽음은 나의 것이 되었고 두려움을 극복했다고 생각한 순간에 죽음을 맞게 되었다. 삶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그런가 하면 메뚜기를 미늘에 꿰어 송어를 낚아 올리듯 삶의 결과물은 어떤 것이 끌려 올지 모르는 것이다. 미끼만 꿰어 먹고 도망가려는지 큰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은 것이 올라올 수도 있고 작은 것일까 하는 순간에 끓어 올릴 수도 없이 큰 송어가 올라올 수도 있다.그렇다고 그모든 것을 한꺼번에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은 노인처럼 청새치를 잡았지만 상어밥으로 모든 것을 주고 뼈만 앙상한 청새치의 흔적만,기억만 안고 살아갈수도 있는 것이다. 무엇이 삶의 정답일까. 그의 작품들을 읽다보면 채우기 보다는 '비우기'를 먼저 하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여 짧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많은 생각을 한다.모든 것을 다 가질수는 없다. 내가 던진 낚시바늘에 무엇이 걸려들지 모르는 것이 삶이고 인생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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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읽었던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을 다시 읽은 것은 킬리만자로 가까이 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림자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가왕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노랫말처럼 ‘구름인가 눈인가’ 구분할 수 없는 ‘저 높은 곳 킬리만자로’의 흔적을 보았을 뿐입니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표범과 하이에나의 정체를 밝혀보기 위하여 ‘킬리만자로의 눈’을 다시 읽었습니다. 표범은 제목 아래 적힌 글에만 등장합니다. “킬리만자로는 해발 19,710피트의 눈 덮인 산으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다고 한다. 그 서쪽 봉우리는 마사이어로 ‘응가예 응가이’, 즉 ‘신의 집’이라고 부른다. 서쪽 봉우리 가까운 곳에 얼어서 말라붙은 표범의 사체가 있다. 이 표범이 무엇을 찾아 그 높은 곳까지 왔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초원에서 먹이를 뒤쫓을 표범이 그 높은 킬리만자로에 올라갈 이유는 분명 없어 보입니다. 작은 초식동물을 뒤쫓는 일상의 쳇바퀴에서 벗어나 최고봉에 올라보려는 고상한 꿈을 가졌던 표범일까? 하이에나는 ‘킬리만자로의 눈’의 끝 부분에 죽음의 사자를 따라서 등장합니다. 하이에나는 스스로 사냥도 하지만 포식자가 먹고 남은 썩은 고기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로 하이에나를 죽음의 그림자로 그려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이에나와 함께 온 죽음의 사자가 그의 몸에 올라타자 숨을 쉴 수 없게 됩니다. 그의 죽음을 마중 나온 사람은 오랜 친구 콤프턴입니다. 퍼스 모스 기종의 2인승 경비행기를 몰고서 말입니다. 그리고는 ‘온 세상처럼 넓고, 크고, 높고, 햇빛을 받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킬리만자로의 평평한 꼭대기’로 갑니다. ‘신의 집’으로 말입니다. 해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건은 사소하기만 합니다. 큰 영양무리의 사진을 찍으려고 접근하다가 가시에 무릎이 긁혔고, 바로 소독약을 바르지 않은 까닭에 염증이 생겨 다리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부주의하면 심각한 사태를 당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작가는 생사의 기로에 선 해리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려냈습니다. 킬리만자로에 오기 전에 갔던 장소와 사건들을 떠올리며, 그것들을 구성하여 글로 남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합니다. 1차 발칸전쟁 기간 중인 터키의 카라가치, 오스트리아 슈룬츠에서 맞이한 크리스마스 등등....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빗대어 그려낸 것은 아닐까요? 이어지는 단편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에서도 주인공 남자의 죽음을 다루었습니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는 부자 여성과 결혼한 해리의 죽음을 다루었다면,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에서는 부자 남성 프랜시스 머콤버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머콤버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총에 설맞은 물소가 달려드는 순간 그를 구하려는 생각에서 아내가 쏜 소총에 맞은 것이다. “그는 물소의 거대한 몸뚱어리가 그를 거의 덮치는 상황에서 코를 앞세우고 다가오는 머리와 거의 수평이 되게 총을 놓고 신중하게 겨냥을 한 다음 다시 쏘았다. 그는 사악한 눈과 머리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 순간 갑자기 눈을 멀게 하는 백열의 빛이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그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느낀 것이었다.(119쪽)” 사실 머콤버는 며칠 사자사냥을 하다가 비슷한 상황을 겪었는데, 역시 설맞은 사자가 수풀 속에서 튀어나오자 그만 등을 돌려 달아났던 것입니다. 그런 그를 두고 아내가 비웃었다고 생각한 머콤버는 자존심을 회복할 계기가 필요했던 것인데, 결국 사고로 이어진 것입니다. 사자사냥을 앞두고 소말리아의 속담을 알았더라면 머콤버도 실수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용감한 남자는 사자 때문에 세 번 겁을 먹는다. 처음 사자의 발자국을 볼 때, 처음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때, 처음 사자와 마주할 때(75쪽)” 의식하지 못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게 되면 어떤 생각이 들까 궁금해집니다. 하지만 누구도 답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으니 말입니다. 두 편의 단편은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다는 점과 등장인물의 죽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나름대로 곱씹어 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11편의 단편들은 유럽, 혹은 미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여기에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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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장르소설을 제외하고 순수 소설 중 좋아하는 작가를 가장 먼저 꼽으라고 한다면 헤밍웨이를 꼽을 것이다. 그의 짧은 하드보일드 문체는 그의 글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또한 그의 작품 이외의 생활에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들이 작품 속에 투영되어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헤밍웨이의 삶의 일부분을 본 것 같은 느낌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 아직 그의 작품 중 제대로 읽어본 것은 <노인과 바다>와 이번에 읽은 단편집 <킬리만자로의 꿈>을 포함한 몇 편의 작품들 뿐이다. 많이 알려지고 책으로 나온 작가라 익숙해서 그런지 언젠가는 읽겠지하는 생각 때문에 아직까지 그의 대표 장편들도 읽어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읽은 단편집 <킬리만자로의 눈>이 반가웠다. 이 작품집에는 <킬리만자로의 눈>을 포함하여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온 땅의 눈>,<이제 내 몸을 뉘며>,<가지 못할 길> 등과 함께 에피소드 형태로 수록된 <닉 애덤스 이야기>까지 총 1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들 모두 헤밍웨이의 인생과 낚시,사냥 등 그의 취미와 종군기자,군인 생활 등을 하면서 경험한 삶의 희노애락이 모두 들어가있는 소중한 작품들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작품이 가장 눈에 띄었다. 이미 알려진 <킬리만자로의 눈>을 제외하고 <이제 내 몸을 뉘며>와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이었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헤밍웨이의 예술적 완성도와 그의 경험에서 기초한 꼼꼼한 설명과 묘사,잔잔하게 흘러가는 인생의 한 단면을 가져온 듯한 소재를 살려낸 그의 가독성있는 문체가 빛났던 작품들도 있었지만 이 두 작품이 이들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내 몸을 뉘며>는 헤밍웨이가 1차 세계대전 때 적십자사 운전병으로 참전했을 때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해서 쓴 것인데,비교적 잔잔하게 흘러가는 묘사 속에 전쟁이라는 소재를 가져와 굳이 안 맞게 느껴졌지만 헤밍웨이만의 힘있는 문체로 비교적 잘 살려내고 있다. 여기에는 비슷한 내용의 <가지 못할 길>도 포함될 것이다.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은 프랜시스 머콤버라는 부자가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로 사냥 여행을 떠났다가 겁쟁이라는 망신을 당하고 그 여행에 함께 한 사냥꾼 윌슨이 그 사자를 해치운 순간 아내가 자신을 버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서의 짧고 행복한 삶이란 머콤버가 변화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인데,사자 사냥에 실패하고나서 몸소 물소 사냥을 성공시킨 장면에서 그의 행동변화가 나타난다. 그 변화로 자신감을 찾고 달라진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 역시 그의 취미인 사냥을 소재로 인간 내면의 변화를 기묘하게 포착해 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왠만한 작가라도 이 정도의 소재로 이런 작품을 쓰기는 힘들 것이다. 헤밍웨이만의 경험과 필력이 없다면 쓰지 못했을 것이다.
위 두 편만 예를 들었지만 다른 작품들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힘이 있다. 짧은 대화와 설명을 자주 씀에도 쓸데없는 설명이나 묘사가 나오지 않는 것은 헤밍웨이만이 가진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헤밍웨이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수록된 작품 모두에 헤밍웨이의 삶이 투영되어있다. 비록 사생활에서는 네 명의 아내와 결혼했고,여러가지 사고로 온 몸이 거의 부상이었을 정도로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소설에서만큼은 그런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드문드문 작품에 나오는 죽음도 무섭게 표현되지 않고 잔잔하게 그냥 시간 흘러가듯이 나타나고 있다. 아마 헤밍웨이도 작품 속에서만은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2/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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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좋아하는 작가가 있으세요?' '네,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해요.' '그럼 하루키를 닮고 싶으세요?' '아니요. 그의 라이프 스타일과 성격은 좋아하는 그를 닮고 싶지 않아요. 그보다는 헤밍웨이를 닮고 싶어요.' '왜요?' '음...뭐랄까? 하루키는 스파게티를 직접 삶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집에서 고양이를 만지며 시간을 보내죠. 그에 반해 헤밍웨이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넓은 초원에서 껑충껑충 뛰는 살벌한 짐승들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요. 그 둘의 차이를 아시겠어요?'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의 이름이 석자는 아니지만, 우린 똑똑히 기억한다. 미국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헤밍웨이는 국민 대부분이 알 것이다. 그의 대표작인 작품 <노인과 바다>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테니까. <노인과 바다>는 간단한 줄거리지만 아직까지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명료한 문체와 간단한 줄거리, 시작과 끝이 확실한 소설. 소설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읽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는 특이한 소설이다. 언제 다시 읽어도 그에 따른 느낌은 다 다르다. 개인적으로 그런 소설이 진짜 소설의 맛이라 생각한다.
헤밍웨이의 소설은 그의 삶이라 생각된다. 흔히 소설은 상상력에서 피어오른다고 생각하는데 헤밍웨이는 거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본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정말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활동범위가 광활했다. 그런 경험들이 지금의 작품들로 녹아든 게 신기할 뿐이다. 작가로서의 모든 걸 다 갖춘 사람이 바로 헤밍웨이인 것이다. 이야기의 소재, 경험, 글쓰기, 문체, 상상력. 감히 누가 따라올 수 있을까?
<킬리만자로의 눈>은 헤밍웨이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단편들이다. 자전적인 작품들도 몇 보인다. 요즘 단편처럼 허영을 건드리는 장치따윈 없으며 '무엇을' 염두해두고 쓴 소설도 아니다. 정말 단편답게 마지막 문장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마치 낚시꾼이 잡아준 고기들처럼. 그 작품들 중에 유독 기억에 남는 단편이 있다.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 전문 사냥꾼을 고용한 주인공. 주인공에게 아주 미인인 아내가 있다. 미인을 차지한 그 남자의 매력은 단지 '재력'뿐이다. 박력도, 용기도, 체력도, 남자다움도 실종한 시시한 주인공. 그가 사냥에 나섰다가 부인에게 창피만 당하게 된다. 그런 주인공은 부인에게 뭔가 보여주려 과감히 사냥에 나서게 된다....그런데..
이 작품을 읽었을 때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단순 내용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의 씁쓸한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닮아있다..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는 친한 친구사이였다.
그의 단편들을 읽을 때면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문체에 자신감에 베어있다. 이런 느낌을 딱히 어떻다, 라고 표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단지 '느낌'이니까. 그리고 머릿속에는 영상이 그려진다. 주인공은 전부 헤밍웨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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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표지를 바라봤다. 킬리만자로의 눈처럼, 큰 붓의 궤적처럼, 꼬아진 줄처럼도 보이는 그것은 분명 이 단편들이 그러하듯, 어느 꼭대기에서 매듭지어져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여기 수록된 단편들은 보편적으로 가장 우수한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 편집자와 옮긴이의 재량껏 선택/배열되었다. 죽음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삶을 제대로 더듬어가던 인물처럼 이 책의 배열은 죽음으로 연결된 최전방과 최후방의 꼭짓점 사이에서 의식의 흐름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표제작인 ‘킬리만자로의 눈’이 제 죽음과 마주한다면, ‘인디언 마을’은 타인의 죽음과 마주한다. ‘알게되는 순간’이, ‘알았다고 생각하던 순간’으로 거슬러 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양쪽 세계의 죽음 사이에서, 살아있던 만물들의 우직한 ‘어떤 순간들’은 필연적이며 역설적으로 삶을 이야기한다. 생(生)이 사(死)로 넘어가는 순간이 어떻게 자유 혹은 파괴로 넘어가는가. 밀어내는 죽음은 자유를 느끼지 못한다. 서로의 생 간의 연결과 긴장이 없는 죽음은 그저 파괴로 전락할 뿐. 해리는 아내가 계속해서 그의 생을 바라고 끌어당김으로써 평온한 자유를 위한 과정을 거쳤지만 머콤버의 삶은 그럴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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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인터넷에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 메이저리그 투수의 킬리만자로 등반 준비 소식이었다. 연봉 425만 달러(약 50억 원)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가 해발고도 5,895미터의,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올라야만 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중학생 시절 읽었던 헤밍웨이의 단편 『킬리만자로의 눈』이 준 감동 때문이었다. 그 감동은 꿈이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 투수는 올해 1월 킬리만자로의 정상에 올랐다고 한다. 평생의 꿈을 이룬 그는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렇게 어린 소년에게 감동과 꿈을 선물했던 헤밍웨이의 단편 13편을 묶은 단편집 『킬리만자로의 눈』 (문학동네)이 출간되었다. 『노인과 바다』가 작가의 노련함을 보여주는 소설이라면 이 단편집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 노련함이 ‘형성되고 축적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시인 거트루드 스타인의 말처럼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적인 문인(文人) 중 한 명이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비극을 체험한 후 등단한 그의 작품들에는 환멸. 공허와 고독, 그러면서도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 모두를 위한 기록 <킬리만자로의 눈> 『킬리만자로의 눈』은 헤밍웨이 최고의 단편으로 사랑받고 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생생함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작품은 실제로 킬리만자로산과 인접해 있는 아프리카 케냐의 암보셀리 국립공원에서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이 발표된 1930년대의 암보셀리 지역은 국립공원이 아니었으며 사냥도 가능했다.) 이 시기 그는 이미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라 있었지만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무릎이 가시에 긁혔을 때 완벽한 치료를 못해 오른쪽 다리가 썩기 시작하는 소설가 해리는 제대로 된 글이 나오지 않아 초초해하는 헤밍웨이 자신과 닮아 있다. 이제는 잘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알게 되면 쓰려고 아껴두었던 것들을 영영 쓰지 못할 터였다. 뭐, 그것을 써보려고 애만 쓰다 결국 쓰지 못하는 일도 함께 없어지는 것이지만, 사실은 영영 쓸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랬기 때문에 옆으로 밀어놓은 채 쓰는 일을 미루어왔던 것인지도 몰랐다. (p. 14) 남편과 한 자녀까지 잃어버린 미망인 그녀(헬렌)에게 해리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그녀는 그를 통해서 새로운 삶을 구축했고 그 또한 자신의 옛 것을 팔아 안정과 안락을 얻었다. 그러나 그 삶은 너무나도 공허하게 끝을 향해 달려간다. 마치 하얗게 빛나는 킬리만자로 정상의 만년설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소멸되어 가는 것처럼 말이다. 『킬리만자로의 눈』은 어찌 보면 일장춘몽과 같은 인생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모두를 위한 기록이다. 허무한 존재들의 안식처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일명 두꺼운 책의 대명사…….로 불리는 『율리시스』의 저자 제임스 조이스는 헤밍웨이에게 문학과 삶 사이의 장막을 축소한 작가라는 찬사를 보내면서 단편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늦은 시간 텅 빈 카페에 홀로 남아 있는 노인, 그리고 두 웨이터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절망에 빠져 자살을 기도했던 노인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웨이터들의 상반된 시선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은 연로(年老)한 손님이 어서 집에 가주기를 바라고 나이가 위인 사람은 나뭇잎 그늘에 앉아 있는 손님의 심정을 이해했다. “잠들고 싶지 않은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고, 밤에 불을 켜두어야 하는 그 모든 사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지.” (p. 131) 8페이지에 불과한 이 짧은 소설의 전면에는 허무가 깔려 있다. 연장자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이 알고 보면 허무 그 자체라는 것을.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건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 즉, 안식처라는 사실을……. 솔직히 내가 이 이야기의 참맛을 느끼기엔 아직은 좀 이르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삶의 허무에 대해 논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게다.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은 독자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혹시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하지 않나요?”라고. 영웅이 되기를 소망했던 청년 <이제 내 몸을 뉘며, 가지 못할 길> 이 단편집에 포함되어 있는 『이제 내 몸을 뉘며』와 『가지 못할 길』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품이라고 한다. 영웅이 되기를 소망했던 청년 헤밍웨이는 적십자사의 운전병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두 단편을 통해 우리들은 그야말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었던 젊은 시절의 그를 간접적으로 만나 볼 수 있다.(그때 헤밍웨이의 나이가 19세였다고 하니 두려울 게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영혼이 언제 빠져나갈지 모르는 전쟁터, 여기저기 누워있는 시체들, 더운 날씨로 인해 그들의 몸은 부풀어 오른다. 그런 상황 속에서 편히 잠을 잔다는 건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수면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그 욕구를 물리치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유년시절 송어낚시를 하던 냇물을 떠올리고, 기도문을 외우고, 깨어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젊은 운전병은 자신이 원하던 영웅이 되지는 못했지만 훈장을 받고 아무나 할 수 없는 경험을 쌓는다. 단편소설은 적은 분량 안에 심오한 메시지를 담아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간결해야 하는데 바로 그런 면에 있어서 헤밍웨이가 제격이라고 하겠다. 그는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를 구사한 작가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킬리만자로의 눈』은 대작가의 탄생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인 동시에 그의 특색 또한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끝으로 라이프지의 글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친다. 헤밍웨이의 스타일은 간결하고 깔끔하면서도 생생하고 풍부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스타일을 흉내 냈지만 그 누구도 똑같이 해내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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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이 비처럼 내리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비에 젖은 채 보도 위에 납작 엎드린 꽃잎처럼 하염없이 무기력해진다. 넥타이가 그저 올가미 같고 삶이란 게 그렇게 또 교수대에 매어 달린 것처럼 버둥거리기만 하다 끝나버릴 것도 같다. 그런 날엔 생각나는 술이 있다. 바로 '마티니'이다. 헤밍웨이가 그렇게도 좋아했다고 하는 마티니. 그는 종군기자 시절에도 아예 두 개의 수통에다 진과 베르무트를 따로 갖고 다니면서 틈날 때 마다 섞어서 마실 정도로 애호가였다고 한다. 이번에 나온 단편집 '킬리만자로의 눈'을 읽어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비애가 마치 아쿠아 블루의 수족관처럼 가득 차 있어서 놀라웠는데 때문에 왜 헤밍웨이가 그토록 마티니를 좋아했는지 알만했다.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는 말도 있듯이 독과 다름없이 영혼을 좀먹는 이런 끝 모를 우울엔 그야말로 독한 마티니가 제격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삶은 빈 의자와도 같다. 누군가 와서 앉아주기를 기다리는 빈 의자... 홀로라서 외롭고 세상이 가진 크기에 비해 턱없이 작아서 공허한 우리들은 그렇게 빈 의자마냥 누군가 와서 채워주고 다른 무엇으로 거길 메워주길 바란다. 의자가 누군가 앉아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의자로써의 의미가 없다고 흔히 생각되듯이 그렇게 나의 고독도 나의 결여도 오로지 내 부족함과 약함의 증표인 것만 같아서 우리는 겁먹은 짐승마냥 잔뜩 움츠러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제발 누군가 다가와서 이 버둥거리는 발목을 단단히 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깥으로, 타인에게로 자꾸만 시선을 던지는 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자신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바라보지는 않고 말이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다르다. 적어도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이 단편집에서 보여 지는 헤밍웨이는 확실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누군가 채워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고독한 빈 의자로 남고 싶어 하는 쪽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역자의 해설을 보면 이 단편집의 단편들은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치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한 삶의 최후에서 그 최초로 역행하는 하나의 여정처럼 엮어져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여정에서 우리는 그러한 헤밍웨이의 의지를 보게 된다. 헤밍웨이 최고의 단편이라고 평가받는 첫 작품 '킬리만자로 눈'에서 마지막 작품 '인디언 마을'까지 이르는 하나의 여정이 그야말로 지속적인 결별을 통한 자초(自招)하는 고립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관계를 속박으로 여긴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관계가 '영혼의 지방(脂肪)(p.24)'이 되어 자유롭게 위해서는 깃털처럼 가벼워야만 하는 영혼에다 자꾸 무게를 주고 둔중하게 만들어 현실이라는 중력에다 길들이기 때문이다. 즉 저절로 '유쾌한 굴복의 삶을 묵인(p.31)'하게 하기에 헤밍웨이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고립되려 한다. '하얀 코끼리 같은 산'에서의 남자처럼 여자에게 낙태를 강요하고 '인디언 마을'의 인디언 아버지처럼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살해 버린다. '심장이 둘인 큰 강'같은 단편은 아예 홀로 있음으로 인해 완벽한 유토피아가 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도 모자라 모든 단편이 상실과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끝나는 것과는 달리 이 단편만은 영원히 그 좋았던 시간이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끝나기까지 한다.
결국 헤밍웨이는 관계의 단절로 인해 남게 되는 에너지를 이제 사냥에다 쏟는다. 헤밍웨이는 단편집 내내 사냥을 주된 모티브로 반복해서 보여준다. 예로부터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사냥을 하면 육체만이 아니라 그 영혼까지 취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즉 사냥한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 단편집에서 사냥이 그토록 반복되는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해 사냥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의 투영이며 바로 그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 자체의 상징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단편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에서 나오는 말이기도 한 '이 푸에스 나다 이 나다 이 푸에스 나다('또 어, 허무 또 허무 또 어, 허무'라는 뜻. p.132)'처럼 궁극적으로 '나다(허무)'를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삶에 있어서 유일하게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사냥이 구원인 것은 그 사냥을 못하게 되었을 때 등장인물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보면 드러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킬리만자로의 눈'에서의 해리,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에서의 홀로 카페에서 죽치는 노인 그리고 '살인자들'에서의 권투선수 올레 안드레손이 그렇다. 그들은 모두 사냥이든 낚시든 아무튼 포괄적으로 말해 그 어떠한 포획 행위도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삶은 나날이 권태와 무기력만 쌓여가는 지루한 퇴적물에 다름 아니며 사냥을 하지 못하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문득 죽음이라는 순백의 눈 아래 묻히게 될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헤밍웨이는 사냥이 하나의 구원적 행위임을 드러내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관계를 가지게 만들고 삶에 매달리게 만드는 모든 두려움들 역시 바로 이 사냥이 없음으로 비롯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사냥을 하지 않을 때 그들이 듣게 되는 소리를 통해서다. 해리는 하이에나의 소리를 듣고 머콤비는 사자의 소리를 들으며 '이제 내 몸을 뉘며'에서의 닉 애덤스는 시간을 의미하는 누에가 잎을 갉아먹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 모든 소리는 그들에게 초조함과 두려움을 준다.
도대체 사냥이 무엇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삶에 집착하게 만드는 근본적 두려움까지 없앨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죽음의 태도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죽음은 어차피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로서는 오로지 긍정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라고 본다. 죽음 뒤에 남겨지는 것이 오로지 허무밖에 없다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무 것도 남겨두고 싶지 않으니까." 남자가 말했다. "뒤에 아무것도 남겨두고 싶지 않아" (p.22)
그러니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 죽음을 대하는 태도다. 여기서 사냥을 다시금 생각해보면 사냥이란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에서 잘 드러나듯 매순간 죽음과 대면하게 만드는 것이며 이 단편의 사자 에피소드에서 보듯 최후까지 그 대상과 투쟁하는 가운데 죽음을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죽음을 회피하거나 그저 굴복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대해 끝까지 당당하게 맞서게 한다. 그래서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본래의 나로서 죽을 수 있도록 말이다. 즉 사냥은 그 대상과 겨루면서 그 대상과 자신에 대한 순수한 몰입으로 인해 그 무엇도 아닌 온전한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게 한다. 다시 말해 대낮 같이 환한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헤밍웨이는 사냥을 구원적 행위로까지 여긴다. 왜냐하면 '킬리만자로의 눈'의 해리에게서 대표되듯이 그들이 결국 무력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는 건 억지로 스스로를 세상에다 결부시켰기 때문이다. 사냥은 바로 이 족쇄를 끊는 다. 즉 세상으로 부터 자신을 다시금 스스로 탈취하는 것이다.때문에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죽음 조차도 그냥 죽음이 아니요 오히려 해방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역시 '킬리만자로의 눈'에서의 해리의 마지막 꿈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머콤버가 물소 사냥을 통해 본래의 자신을 자각하고 그래서 현실을 상징하는 아내 마고의 세계에서 결별하게 되는 그 순간, 마고가 쏜 총에 의해 죽을 때 눈부신 빛과 함께 해방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이쯤 이르면 이제 헤밍웨이가 이 단편집 전체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는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필연적으로 한 번은 도래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겸허히 긍정하고 그것이 도래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마치 투우사가 목숨을 걸고 황소와 겨루듯 최선을 다해 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최선이란 현실의 안락함을 위해 나를 죽이고 굴종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한 현실의 달콤한 유혹과 타협을 거부하고 본연의 자신답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머콤비 에피소드에서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사냥꾼들에게 맞섰던 사자처럼 자기 존재의 위엄을 끝끝내 고수하는 가운데 있어서의 최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모든 두려움은 바깥의 것으로 제거하기 위해 해리처럼 거짓말로 스스로를 속이거나(p.25) 머콤버처럼 삶을 제대로 마주 대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p.87)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두려움을 지우려고 바깥이나 타인에게 눈을 돌리면 돌릴수록 더욱 더 두려워질 뿐인 것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두렵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시선을 돌려 스스로를 먼저 보아야 한다. 사냥이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은 바로 그 귀환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또한 헤밍웨이가 소설 속 닉 애덤스 홀로 완벽했던 유토피아로도 잘 보여주지 않았던가?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로도 완벽하기에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필요는 없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바깥의 현혹이 너무도 커서 움츠려만 드는 자신을 느끼게 되는 우울한 날이면 이제 마티니를 벗하듯 이 책을 벗해야 한다. 이것은 차라리 닉 애덤스가 소설에서 놓쳤던 송어의 턱에 있는 미늘(p.197)과도 같은 마티니다. 턱에 있는 미늘이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늘 되새길 수 밖에 없는 존재이듯이 이 소설은 취하면 취할수록 당신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더 또렷이 각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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