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때,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거울 속에 있는 내가 무척이나 낯설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내 얼굴을 보고 있으면서도 처음 보는 것 같아 움찔하기도 한다. 거울 속에 있는 나는, 정말로 내가 맞는 것일까? 아니면,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간혹 집사람이 나에게 말한다. 집에서 보는 나와, 밖에서 친구들과 같이 만나는 내가 다른 사람 같다고.. 그렇다면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똑같게 알고 있을까? 혹 어떤 사람은 이렇게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달리 알고 있지는 않을까? 영국의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가 쓴 이 책 [에고 트릭]은 이러한 나에 대해서, 내 본질이 무엇인지, 내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하게끔 해 주었다.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평생 지속되는 하나의 본질이 있다고 믿고 있는 그것, 즉 자아가 무엇이고, 또 그것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철학, 심리학, 종교, 그리고 신경과학을 넘나들며 그것의 정체를 찾는다. 먼저 자아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는 저자는, 자아를 보는 관점이 진주관점과 묶음이론이 있음을 소개한다. 진주관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관점으로, 나를 나답게 만드는 변함없는 핵심이 존재하며, 그것이 자아라고 본다. 그에 반해 묶음이론은 자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변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묶음이라고 본다. 저자는 많은 실례를 통하여 자아란 진주관점보다는 묶음이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올바른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렇다면 자아란 무엇일까? 저자는 자아를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의 육체, 뇌, 기억 그리고 영혼과 자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성전환자, 뇌 기억장애자, 치매환자의 사례는 물론 종교인과 철학자들의 사유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임을 증명하는 문서로써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우리의 육체이다. 그러나 육체가 생존에 필수적이긴 하지만, 우리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즉, 개인의 정체성은 육체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전적으로 육체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음을 성전환자들의 성적 정체성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또한 기억은 정체성의 필수요건이지만, 그러나 기억은 수동적인 정보덩어리가 아니라 능동적인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하는 내용물이기도 하다. 이는 이미 뇌 과학의 발전에 따라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기억의 신뢰성이 극히 떨어짐을 의미한다. 우리는 선택적으로 기억하기도 하고, 심지어 창조하기도 한다. 비록 기억의 단절은 자아에 실질적인 손상을 주는 것을 우리는 치매환자들을 통하여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기억이 정체성의 핵심, 즉 자아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기에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 느낌, 지각 같은 내면의 삶이며, 이는 육체나, 기억 그리고 뇌에 의존하고, 그것들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핵심은 내면의 정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즉, 자아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뇌와 육체 그리고 심신활동의 묶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정의된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흔히 우리는 타인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내면화하고, 그 이미지들은 우리들의 일부가 된다. 또한 어떤 사람의 본성을 안다고 하는 것은 여러 환경 및 역할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아는 것이지, 하나의 고립된 환경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아는 것은 아니다. 즉, 사람들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따라서 자아는 사회적 환경과 변화에 의해서 만들어지기도 하며, 우리는 때에 따라 단일한 자아가 지닌 다양한 특성들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한 혼자일 때,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는 거울에 비친 진짜 모습이 아니라, 허영이라는 마법의 거울이 만들어 낸 자족적인 모습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장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동일한 사람을 만드는 핵심은 심리적 연결과 지속성이라고 한다. 기억과 뇌와 육체와 사회적 역할이 중요하지만, 그것들을 각각 자아의 핵심으로 규정하지 못하는 것도 심리적 연결과 지속성을 담보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그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라고 단정 짓는다. 단편적인 경험들과 속성들을 뇌에서 하나의 강력한 통합된 이미지로 만들어 내고, 이것을 자아라고 부른다는 뜻이다. 저자는 바로 이것이 자아의 속임수, 즉 에고 트릭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엄청난 변화를 겪으면서도 같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변화 자체가 사람의 속성이며, 변화과정이 충분히 완만하고 안정되게 진행되기 때문이지, 자아의 통일성 때문은 아닌 것이다. 단지, 에고 트릭을 만들어 내는 자아의 통일성은 심리적인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통일성과 지속성은 존재한다. 오류는 우리가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사물, 즉 진주관점으로 해석하는 순간 일어난다. 통합된 단일한 실체로서의 자아는 환상이지만, 자아 자체는 환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우리가 실재로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환상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존재 한다는 사실 자체는 환상이 아닌 실재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에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자아를 보는 관점이 진주관점에서 묶음이론으로 변한다 할지라도, 아니 내가 그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나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아라는 것이 뇌와 기억과 육체시스템의 활동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내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으며, 어느 날, 문득 지인들에게서 느끼는 낯선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실체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기 짝이 없다. 줄리언 바지니가 쓴 이 책도 그리 만만하게 읽히지는 않는다. 그러나 철학자들과 종교인들 그리고 심리학적 연구사례를 통하여 찾아가는 자아에의 여행은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
|
우리가 아는 애기 중에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있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 안에 내재하는 또 다른 자아에게 쫓기는 한 인간의 이중성을 다룬 작품으로, 1886년에 간행되었다. 학식이 높고, 자비심이 많은 지킬박사는 인간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악의 모순된 이중성을 약품으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에서 약품을 만들어 복용한 결과, 악성을 지닌 추악한 하이드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점차 악이 선을 이겨, 약을 먹지 않아도 하이드로 변신하여, 지킬박사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마침내 하이드는 살인을 하고 경찰에게 쫓겨, 체포되려는 순간 자살하여 모든 것을 유서로 고백한다는 내용이다. 그럼 이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두개의 모습 중 지킬박사와 하이드 중 어느 쪽이 그의 진정한 모습일까 나를 결정하는 것은 육신일까? 영혼일까? 존 로크는 구두수선공 속에 들어있는 왕의 영혼을 상상했고, 프란스 카프카는 《변신》에서 몸이 벌레로 변한 남자를 이야기 했다. 내 몸에 왕이 들어있으면 나는 왕이 되는가? 아님 내 영혼이 벌레의 몸속에 들어가면 나는 인간인가? 벌레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했다. 그럼 여기에서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생각의 주체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뇌인가? 아님 또 다른 자아(진주)인가? 단순히 생각만 하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럼 생각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 컴퓨터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요즘엔 성전환자에 대한 기사를 틈틈이 접할 수 있다. 남자의 몸을 가지고 여성의 인생을 살고, 여성의 몸으로 남성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그런 삶속에서 자아를 찾기위해 엄청난 고통과 번거로움이 수반되는 성전환 수술을 한다. 이들은 육체와 자아가 분리된 삶을 살다가 그 동일성을 획득하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한다. 자신의 육체가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기준으로 한다. 이는 나를 결정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자아(정신세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닐까? 그럼 카프카의 《변신》에서처럼 내가 벌레의 몸속에 들어가면 나는 인간이다 는 애기인데. 이게 가능한 애기인가? 17세기 철학자 존 로크는 심리적 지속성(psychological continuity)을 개인 정체성의 핵심으로 보았다. 로크는 ‘사람’을 심리학적 용어로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자기를 자기로 간주할 줄 아는 사유하는 지적 존재. 시간과 장소가 변해도 항상 동일한 사유하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존 로크의 정의는 설득력이 없다. 비록 사람은 같은 사람일지라도 20대의 나와 지금의 나가 결코 같은 수는 없다. 나를 남과 구분하는 이름은 같을지라도. 육신은 세월로 인해 변했고, 정신은 그만큼 발전했다. 그런 나는 20대의 나와는 절대로 같을 수는 없다. 그런데 동일한 사유하는 존재라니, 이건 로크가 뭔가 크게 엇나간 듯하다. 글쓴이도 말한다. 기억은 수동적인 정보 덩어리가 아니다. “기억은 능동적인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용물이다”라고 애기한다. 즉 젊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다르듯이 자아란 변치 않는 존재가 아니라는 애기이다. 즉 로크가 애기한 기억이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치매환자와 뇌를 다친 환자의 예를 들고 있다. 치매 환자는 최근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예전의 기억에 사로잡혀 산다. 그럼 기억을 잃어버린 치매환자는 내가 아는 사람인가?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가? 치매에 걸린 사람과 걸리기 전은 사람은 과연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넘치는 뇌(토르켈 클링베르그 저, 월 컴퍼니, 2012)에서 애기한 것처럼 우리의 기억자체도 조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 조작된 기억으로 만들어지는 나는 과연 나인가? 그럼 나로 규정하는 나의 자아가 가지고 있는 획일성과 통일성은 과연 무엇인가 나를 나타내는 것은 육체와 자아이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자아”라는 컨트롤 박스가 우리 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나를 나이게끔 하는 것이 자아라면 그 자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나를 나타내는 근본적인 통제시스템(이를 자아라 부르던, 이 책에서처럼 진주라 부르던, 혹은 영혼이라고 부르던)은 도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우리의 가슴에 있을까? 아니면 우리의 뇌에 있을까? 아니면 별도의 존재인가? 우리가 영혼이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그것. 하지만 이 책의 글쓴이는 가슴에는 우리의 자아가 들어갈 공간이나 기관이 없단다. 뇌에도 전체를 관장하는 중앙통제장치가 없단다. 그럼 나를 나이게 하는 자아라는 진주(핵심)는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책의 글쓴이 줄리언 바지니는 『에고 트릭』을 통해 우리가 그동안 통념으로 알고 있던 나를 구성하는 육체와 자아 중 눈에 보이는 육체가 아닌 나를 나이게 하는 자아는 과연 어디에 존재 하는가. 나를 지칭하는 통일된 나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간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실험과 논리로 이를 증명해 나간다. 천주교와 기독교와 불교등 종교적인 논리와 더불어 과학과 철학. 심리학을 넘나들며 구체적인 논리를 동원하여 우리가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을 깨부수고 우리를 일깨운다. 그동안 우리가 자아에 대해 알고 있는 잘못된 상식이 바로 “에고 트릭(Ego Trick)”이란다. 글쓴이는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모두가 찾는 핵심진주, 즉 나를 나이게 하는 자아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당당히 ‘나(I)를 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통일성 덕분이며, 이런 통일성은 자아의 속임수의 결과이다.’ 고 애기한다. ’자아의 속임수‘는 뇌가 만들어낸 복잡한 심리적 사건 덩어리가 나를 남과 구분하는 단일한 자아를 창조해 내는 놀라운 방식이란다, 이 창조로 인해 나를 나로 규정하는 통일된 자아가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처럼 스스로 인지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수시로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을 결정하는 통일성이 있는듯한 착각, 그게 “에고 트릭”이다. 즉 묶음 같은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결과란다. 우리의 내부에는 자아의 속임수가 작동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정신. 뇌. 육체의 여러 활동에서 통합된 자아의식을 가진 개인이 만들어지고 있다며, 자아와 관련하여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단지 생각하는 생존기계이며 여러분의 뇌와 육체가 제대로 기능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멀쩡하게 생활하는 것이며, 내부에서 전체를 통제하는 별도의 존재로서의 당신은 없다. 우리가 정신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생각. 열정. 감정들의 묶음일 뿐이다. 그리고 자아의 존재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끝난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이 결론은 나를 혼돈스럽게 하고 허망하게 만든다. 우리에겐 영혼도 없으며, 나를 나이게 하는 불변의 자아도 없단다. 단순히 기억의 집합들이 만들어 내는 지금의 나만 있단다. 그래서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다르다. 기억이 쌓여가는 것만큼 나는 변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에는 동조할 수 있지만 그 외에 글쓴이의 다른 논리에는 머리로는 이해가 되도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영혼이 없으니 내세도 없단다. 기독교에서도 육신의 부활(휴거)은 애기해도 영혼의 부활은 없단다. 그래서 기독교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이원론이 아니라, 육체만을 애기하는 일원론이란다. 육체와 영혼으로 분리되었다고 그렇게 믿고 있는 것 자체가 이 책의 제목대로 “에고 트릭”이란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 모두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이다. 글쓴이의 논리에 반박하고 싶었다. 물론 그의 논리에 조목조목 근거를 대가며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반론을 제기할 지식도 없다. 하지만 말이다. 세상적인 원리와 이치가 과학적인 논리로 모두 설명이 되던가 말이다. 우습다. 우리가 말하는 자아는 단순히 축적된 지식의 결합체이며. 그 결합체는 죽음과 동시에 세상에서 사라지는 유한한 존재란다. 그럼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날마다의 생을 영위하고 있는가? 단순히 기억을 쌓기 위해, 아니면 그 기억을 모아 오늘하고는 다른 내일의 자아를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얻는 건, 우리에게 남는 건, 그저 묘비에 새겨진 이름 과 내가 세상을 살다갔다는 희미한 흔적뿐이라면 우리네 삶이란 얼마나 무의미 한 것인가. 이제껏 자아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잘못된 “에고 트릭”이라고 해도, 그게 잘못된 속임수라고 해도 난 그 속임수에 기꺼이 속아주겠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내 믿음에 순종하고 싶다. 왜냐고? 그게 더 삶을 의미 있게 해주니까. 그게 내일을 생각하며 오늘에 충실해야 되는 내 나름의 이유이고 내 삶의 방정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두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
|
살다보면 갑자기 ‘내가 누구인가?’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질문은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라고들 합니다만, 정체성(正體性)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존재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 또는 그 특성을 가진 존재.(다음 사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정체성(正體性)’이란 사람이 ‘환경이나 사정이 변해도 자기가 어떠한 변하지 않는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 또는 ‘그렇게 깨달아진 변하지 않고 독립적인 자신의 존재’라고도 하지만, 대상이 개인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사회집단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정체성이란 다른 의미에서 자신을 타인과 구분하는 특성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특성을 형성하는 주체, 즉 자아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로 확대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철학에서 말하는 자아(自我)란 “사고, 감정, 의지, 체험, 행위 등의 여러 작용을 주관하며 통일하는 주체.(다음 사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편 심리학에서 자아(ego, 自我)란 “기억·평가·계획하고 여러 방식으로 주변의 물리적·사회적 세계에 반응하며 그 속에서 행동하는 부분이다.(다음 브리태니커 사전)”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발달된 자아는 특히 위협·질병 및 생활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전생애에 걸쳐 변화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변하지 않는 특성이라고 한 정체성의 정의와 다소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
<에고 트릭>은 영국의 대중철학자 줄리언 바지니가 ‘나는 왜 나인가? 나를 나로 만들어주는 자아의 핵심이 존재하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에 대하여 철학뿐 아니라, 심리학, 신경과학, 종교, 사회학 등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사유한 결과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면 사랑하는 가족이 치매 혹은 중증의 신경질환을 앓아 기억이나 인식능력 등과 같은 개인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부분들이 퇴화되어 버린 경우에 현재 질병으로 변한 모습의 이 사람이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했던 그 사람과 다른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이런 분들이 당면하고 있는 의문에 정해진 답은 아닐 수 있지만, 가까운 답을 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를 통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먼저 자아가 무엇인지를 찾고 있습니다. 자아와 육체와의 관계, 뇌의 구조와 기능을 살펴 자아와의 관계를 따지고 있으며, 나아가 기억과 자아와의 관계, 실재여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영혼과 자아의 관계를 따져보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자아가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다중적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문제를 고려하여 다중적 자아라는 개념과 소속된 사회와 자신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사회적 자아에 대하여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여기서 올바른 자아관, 즉 ‘자아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의 본질을 담고 있는 어떤 것 혹은 특정 부분은 없다. 사람의 육체, 뇌, 기억은 모두 우리 정체성에 중요하지만 이 중 어떤 것도 사람의 정체성이 머무는 자아의 핵심, 즉 진주가 아니다. 둘째, 사람은 비물질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이는 다른 모든 생물체의 구성요소와 동일한 종류의 것이다. 셋째, 진주 관점을 부인하는 것은 자아의식이 하나의 구조물임에 분명하다는 의미다. 우리를 현재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단일한 무엇이 없다면, 결국 우리는 서로 공조하는 몇몇 부분 혹은 사물들로 이루어진 결과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스스로를 동일한 사람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자아의 통일성은 어떤 점에서는 취약하고 한편으로는 강건하다. (…) 우리의 자아의식은 분명 사회적 환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식 자체는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것이지 외부에 뿌리를 두고 있지는 않다.(160쪽)”
저자의 이와 같은 주장은 ‘1. 자아의 통일성은 심리적 속임수가 만든 결과물이다. 2. 우리는 물질에 불과하지만 단순한 물질 이상이다. 3. 속성 자체가 변하기에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다.’는 세 가지 명제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나를 나로 만드는 변함없는 핵심이 존재한다는 ‘진주 관점’이라고 하는 일반적 관점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는 항상 변화하며,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의 묶음에 가깝다는 ‘묶음이론’이라 불리는 관점입니다. 저자는 ‘진주 관점’의 허점들을 제시하면서 ‘묶음이론’이야말로 자아를 보는 올바른 관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미래의 자아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논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환생이 즉 자아의 생존을 의미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육체의 지속을 의미하는지 논하고 있으며 기술의 진화가 자아를 다시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비롯하여 장수사회에서 야기될 자아의 문제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아’라고 하는 무거운 철학적 주제를 다양한 학문적 영역에서 실제 사례를 인용하여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
|
가끔 씻으러 들어 간 세면대 거울을 보고 문득 놀라고 낯설 때가 있다. 거울에 비친 얼굴과 몸이 누구인가? 하는 쓸데없는 물음이 생길 때가 있다. 공연히 이런저런 말을 해보면서 ‘목소리도 이상해……. 눈·코가 왜 저렇게 생겼지?...’ 대답 없는 푸념도 쏟아낸다. 얼굴을 찡그려 잡히는 주름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한다.
“나의 육체 안에서 느끼는 불쾌감과 남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불쾌감이에요.” (p.27)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은 사실 인간이 이 세상에 나타난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는 가장 근본적이고 어렵고 불편한 물음일 것이다. 엄청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질문이다. 수많은 인간들이 그 물음 혹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써 왔지만 ‘인간이란 바로 이거야!’ 속 시원히 답을 내어 놓지 못한다. 수많은 종교와 철학과 교육과 정치와 문화를 꿰뚫더라도 결코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명확한 답을 제시할 수 없다. 어쩌면 애초부터 대답 혹은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재귀순환의 고리와 같은 ‘에고트릭’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인간’이라 명명된 존재의 존재론적인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 「에고트릭」은 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또 하나의 시도라 생각한다. 물론, 명쾌한 대답은 찾을 수 없었다. 뇌신경학, 사회심리학, 불교의 무아(無我)론, 미래기술 등의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독자로 하여금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다방면의 분야를 신나게 이동하는 듯한 청량감은 느끼게 해준다. 12가지의 철학적 질문들은 책의 소제목들처럼 꼭 학문적 단어와 문장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살면서 한 번씩은 가져봤음 직한 질문들이다. 다만 그것을 책의 소제목처럼 멋들어지게 꾸며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지 누구나 알고 있는 것들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를 제외한 ‘상대’가 대신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더욱 어렵다. ‘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나’라는 것은 어디까지 진실이고 환상인지, 어디까지 참이고 거짓인지 ‘상대’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결국 이것은 ‘나’에게 맡겨진 존재론적인 사명임과 동시에 숙명이다. 물론, 이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지의 여부 또한 ‘나’에게 있다. 철학적 짐 덩어리를 짊어진 채 현실의 아비규환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갈 뿐이다.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다.
“우리가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기억은 어떤 식으로든 변한다. 기억은 수동적인 정보 덩어리가 아니다. 기억은 능동적인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내용물이다.” (p.72) “기억이라는 여과기를 거친 진실과 현실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해석된 사실이다.” (p.74)
‘기억’은 너무나 불안정한 도구이다. 얼마 전 군 복무시절 내 소대원이었던 동생을 만났다.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억’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책에서의 언급처럼 계속해서 재생산한다. 그리고 가공한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그 ‘기억’을 다시 꺼내 올렸을 때는 주관적으로 해석된 사실이 될 수밖에 없다.
책에서 가장 공감이 갔던 내용이다. 책을 읽기 며칠 전 그런 경험이 있어서 더 공감이 갔겠지만 누구나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내용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의 나’, ‘그 당시의 나’에 대한 ‘기억’은 굉장히 조심스러워야 한다. “야~! 내가 말이야~~ 그때는 말이야~~ 이러쿵저러쿵~~” 하는 따위의 객기는 ‘나’는 누구인가? 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술자리에서 지나간 군 생활을 안주거리로 삼을 때나 필요한 것이다.
“그를 타락시킨 특수한 환경에 놓이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사실” (p.221) “상황 요인이 개인의 성격보다 행동 예측에 좋은 지표일 때가 많다……. 실로 많은 상황에서 개인 성격이 확실한 행동 결정 요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성격이 결여되어 있다.” (p.222)
범죄수사에 대한 프로파일링 기법이 이제는 국내에서도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연쇄범죄자나 사이코패스들에 대한 수사에만 프로파일링이 적용되고 있지만 나아가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도 프로파일링을 유용할 것 같다. 그리고 요즘 TV에서 많이 다루고 있는 가정 내 부부간, 부모·자식 간 불화 문제에 있어서도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요인을 파고 들어간다. 어린 시절 해결하지 못한 상처와 쓴 뿌리를 해소하고 제거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해소와 제거 작업이 완료되면 참 신기하게도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래서 책의 언급처럼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이 사람의 성격은 이렇다.’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모두가 결여된 성격의 집합체라 생각하고 대하는 것이 더 올바른 가치판단이다.
책의 12가지에 대한 철학적 질문 중 나는 기억과 상황요인에 대한 내용에 공감이 갔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나와는 다른 질문에 공감이 가고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다.
참 어렵고 지루한 질문과 물음이지만 ‘나는 누구인가?’는 꼭 필요한 삶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현실에서 꼭 시간이 많고 상황이 허락해야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당장 쌀 한 톨 나오지 않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세면을 하다 거울을 보고, 운전하다 무심코, 책을 읽다 문득, 동료와 대화하다 화들짝 이런 존재론적 물음에 직면했을 때 아주 잠시라도 생각하고 고민하고 머리를 굴려본다면 긴 인생의 여정의 어디쯤 방점하나 찍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
|
‘우리는 어떻게, 시간의 흐름속에서, 때로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경험하면서도 여전히 동일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까? (p. 8)'라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저자는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철학과 100여년 역사의 심리학 자원을 활용하고 여러 사례들을 검증함으로써 차근차근 풀어나갑니다.
먼저 평생 지속되는 하나의 본질, 즉 자아의 핵심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데, 첫째 눈에 보이는 육체에 관한 접근에서는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결국은 여성으로 성전환을 해서 살아가는 이들의 인터뷰를 통해 개인의 정체성을 육체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전적으로 육체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으며 육체는 우리가 그 속에서 헤엄치는 일종의 매체이며 그런만큼 육체는 정체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하지만 존재를 담은 매체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 가에 미치는 영향은 과소평가하는 것은 어리석지만 사람이 곧 매체라는 시각도 잘못이라고 풀이합니다. (p. 33)
둘째로 뇌에 자아의 본질이 있다는 견해에서는 허먼큘러스 오류, 신체의 일부나 전부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허무망상인 코타드 증후군 사례를 통해 뇌의 여러 기능이 하나로 통합되어 주 제어장치역활을 하는 뇌 영역이 따로 있다는 관념으로는 자아의 단일성을 설명해내기란 불가능하다(p.45)는 말로서 반박합니다.
셋째로는 심리적 지속성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하지만 치매와 기억상실 등의 사례를 통해 특정인물이 된다함은 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으로 기억·경험·학습 같은 것을 세월속에서 축적된 모든 것이 우리(p. 82)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영혼과의 관계에서는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상관없이 그것을 애초에 어떤 실체가 아니라면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뇌와 몸이 하는 활동이며 정신은 실체가 아닌 일종의 활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p. 92)고 반박합니다.
이렇게 육체, 뇌, 기억, 영혼 등 자아의 본질을 찾으려는 시도를 모두 반박한 저자는 자아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단정짓기보다는 여려 요소들이 묶여져 있는 것이라면서 우리가 전체적으로 보면 엄청난 변화를 겪으면서 같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변화자체가 사람속성이며 변화과정이 충분히 완만하고 안정되게 진행되기 때문이라며 자아의 수수께끼를 풀어냅니다. 즉, 자아의 동일성은 심리적이며 우리는 물질에 불과하지만 단순한 물질 이상이며,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p. 197)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심리학과 친하지 않은 관계로 이말이 저말같고, 저말이 이말같아서 상당히 읽기가 어려웠지만, 성격에 관한 9장만큼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사람 마음은 백지장과도 같다며 상황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스탠퍼드 감옥실험의 책임자의 설명은 흥미로웠습니다.
솔직히 다중자아, 사회적 자아 등 각종 자아들이 등장하고 유사한 개념들이 많이 나와 내용을 모두 이해하기가 어려워 그래서 심리학은 역시 나와는 잘 안 맞는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지만, “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며, 자기를 자기로 간주할 줄 아는 사유하는 지적 존재, 시간과 장소가 변해도 항상 동일한, 사유하는 존재”라는 존 로크의 사람의 정의는 두고두고 곱씹을만 했습니다. |
|
'나'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 늘 품어온 질문이다. 여러 철학자가 이 질문에 답하려 애썼고 각기 다른 대답을 내고 이를 설득시키려 했었다. 이제 이 책을 통해 다시 '자아'에 대해 생각해본다. '자아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며 책은 시작된다. 육체는 '자아'를 이루는 구성요소인가, 아니면 다만 껍데기에 불과한가? 저자는 파괴된 육체가 자아에 영향을 끼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 이를 경험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서 이에 대한 판단을 독자 스스로에게 남겨둔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성을 통제하는 뇌가 자아를 형성하고 통제한다고 해야 할까? 뇌가 손상되어 이전과 다른 행동양식을 보이는 사람들은 자아를 상실한 것인가? 아니면 그 상태로 자아가 변형된 것 뿐인가? 어떤 이들은 우리가 경험한 모든 기억들이 우리의 자아를 형성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기억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자아란 무엇인가? 그들의 자아가 그들의 내면 어딘가에 기억되어 있을 것이므로 그들은 바로 이전의 그 사람과 같은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기억이란 것은 완전한 것인가? 기억이 사람을 만든다면 다중자아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또 우리의 많은 기억들이 상당히 많이 왜곡되고 변형된다는 것은 어떻게 대입해야 할까? 우리의 내면 속 깊숙이에 변하지 않는 핵처럼 자리잡은 '자아'가 존재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자아상와 타인이 바라보는 자아상이 일치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
결국 시간이 흘러도 우리가 스스로를 동일한 사람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어주는 자아의 통일성은 어떤 점에서는 취약하고 한편으로는 강건하다.(p.161)
이 수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각각의 개념들을 탐구하고 다시 의심하고 다시 분명하게 하면서 얻은 결과는 어이없게도 '자아'가 아닌 '자아의 속임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
자아를 이루는 단일물은 없지만 우리는 마치 그런 것이 있는 양 기능해야 한다. 마침 정신은 뇌와 육제 덕분에, 우리가 그렇게 기능하게 해주는 온갖 비책을 가지고 있다. 이런 속임수가 성공함으로써 자아는 정말로 존재하게 된다.(p.169)
이제 나아가서 저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에 대해서 논하고, 사후의 생이 존재한다면 그 때 '자아'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또한 과학의 발달 덕분에 인간의 수명이 천년쯤으로 연장된다고 할 때, 그 시간 변화하는 '자아'도 우리가 생각하는 동일한 자아일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은 지금까지 '자아'에 대해 논해온 이론들을 총정리하고, 과거와 현재의 연구들 속에서 달라져가는 '자아'의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여러가지 개념들을 차례차례로 검증하면서 이해하기 쉽게 문제점들을 도출해낸다. 몹시 모호하고 어려운 논제이지만 흥미로운 사례들을 적절하게 예로 들면서 시종일관 흥미롭게 진행시켜서 '자아'를 찾는 때로는 '자아'를 잃어버리는 여행이 내내 재미있다. |
|
내가 누구인지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 본 내가 아닌, 오롯이 나라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게끔된 것은 아마도 사춘기 즈음일 게다.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내가 아는 나와 남들이 알고 있는 나 사이의 간극을 설명할 길 없어 방황하고 고민하던 때, 과연 동일이지만 어떤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인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더랬다. 그래서 청소년 시기를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며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고 탐구하는 시기라 하는가 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아라는 개념이 애매모호하고 여전히 어렵긴 마찬가지다. 철학자나 심리학학자의 눈으로 본 자아와 종교인의 시선으로 바라 본 자아의 개념도 같지 않을 뿐더러 다양한 주장을 접할 수록 점점 더 자아의 실체와는 멀어지는 느낌이다.
나 뿐 아니라 모든 청소년들의 고민의 연장선 상에 있는 책 < 에고 트릭>을 접하며 오랜만에 자아에 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너무나 당연하여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단어 중에 하나가 '자아'란 말이 아닐까 싶다.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듯 자아란 고정불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란 막연한 생각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나'라는 존재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이가 들어 눈가에 주름이 늘고 뱃살이 쳐졌다고 어떻게 내가 아니라 할 수 있단말인가. 살이 좀 쪘어도 물리적으로 세포가 노화하여 외모는 변했어도 여전히 나는 나인 것을. 하지만 저자는 나를 나로 만들어 주는 불변의 핵심은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변함없는 ‘나’로 바라보는 이유는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에고 트릭(Ego Trick)’, 즉 자아의 속임수 때문이라고 한다. 즉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일한 개인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이 고정불변의 자아의 핵심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갖게했다는 것이다. 자아에 관한 고정관념이 워낙 강하게 자리잡고 있어 자아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뇌와 육체, 그리고 심신활동의 묶음일 뿐이라는 저자의 결론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왜 아니겠는가. 자아란 말을 처음 접한 순간부터 '개인을 규정짓는 불변의 어떤 것'이라고 우리의 뇌리에 깊숙히 뿌리 박힌 것을.
저자는 이론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직접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직접 만났다. 정체성에서 육체가 차지하는 바를 알기위해 성전환자를 만났고, 환생을 믿는 티베트불교의 승려, 치매 환자, 인지과학자 신경과학자 들의 의견을 포괄적으로 수렴하여 자아의 실체에 접근한다. 다양한 실제 사례를 통해 자아에 관한 연구결과를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따분한 윤리 교과서를 상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재미있게 다방면에걸쳐 자아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면 윤리시간이 그토록 따분하고 지루하지만은 않았으리라.
책은 우리가 알고 잇던 상상해 오던 자아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과 자아에 관한 명징한 답을 구하려했으나 여전히 가늠 조차 하기 어렵다. 책을 읽고 난 후에도 자아를 바라보는 관점을 수정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의 말대로 자아는 그림과도 같아 너무멀리 혹은 너무 가까이 있어서는 선명하게 보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참모습과 마주한다는 것이 그래서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저자가 주장하는 '묽음이론'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타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는 부분이 분명있듯,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변하지만 동시에 변하지 않는 같은 모습으로 남을 것이다. |
|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껏 나라는 존재에 대한 믿음은 허상이었을까? 돌이켜보면 내가 어떤 사건을 접했을때, 또 그 일을 통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때면 늘 먼저 떠올렸던것이 '나다운 결정' 이었다. 다시말해 나 답다는것은, 나는 이러이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고, 확고하고도 일자적인 사상적 가치관을 추구하는 사람이다라는 의미일것이다. 그래서 일까, 때로는 내가 원해서 한 결정이고, 그순간에 할수있는 최선의 선택이고, 최선의 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척 간지럽고 당황스러워서 어쩔줄 몰라할때도 참 많았다. 한마디로 '나다움'과 '나답지않음' 에서 오는 분열의 과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말을 했을때의 내가 '내'가 아니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다움'에 관한 허상을 쫒느라 난 얼마나 많은 정력을 낭비했던걸까. 게다가 내 자신에 대한 잣대뿐만 아니라, 상대를 바라볼때 그사람의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면을 마치 전체의 모습인냥 단정지어버리면서 얼마나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고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다중적이고 분열적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자아는 어떻게 구성되었을까에 관한 여러가지 사례들을 토대로한 관찰과 흥미진진한 통찰을 통해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가 정해놓은 정체성이란게 얼마나 취약한 믿음들인지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변화에 좀더 적극적으로 열려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사람에게 있어서 자기자신은 우주 전체와도 같다. 그리고 그 우주는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지금 이순간에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자아도 마찬가지다. 일자적이고 단일한 자아가 아닌 다중적이고, 분열적이고, 모순적인 자아를 인정함으로 변화에 열려있는 그 모습을 있는그대로 인정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한 자아만을 자기자신이라고 고집하는 시점에서 그 현실적인 괴리감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 1장이 자아란 무엇인가에 관한 흥미로운 주제들이었다면 3장에나오는 타인은 확장된 나, 사후의 자아는 나로인해 가치관의 변화를 일으키게 만들었다. 자아에 관한 책은 이전에도 읽은적이 있지만, 그것과 비교해볼때 동일한 내용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데다 저자의 뛰어난 글솜씨와 놀라운 통찰력 덕분에 전혀 신선한 내용을 접하는것같았다. '나'라는 환상과 속임수에 관해 통찰을 얻고자 하시는 분들에게 큰 도움을 줄수 있는 책이라 생각됩니다. |
|
‘자아란 무엇인가?'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먼저, 자아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한 것인지, 존재한다면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것인지요? 또 육체는 ’자아‘의 필수구성요소인가요? 사고를 만나거나 치매에 걸린 뒤의 나는 이전의 나와 동일한 것일까요? 우리가 죽은 뒤에도 고유한 자아는 존재하는 것일까요? 뇌는 자아형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일까요? 뇌의 기억이 자아를 형성하는 것일까요? 그러면 기억을 상실한 사람은 자아가 없는 것일까요? 기억은 불확실한 또 하나의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이 책에 이런 질문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자아에 대한 확신을 여지없이 무너트립니다. 두 개의 성으로 살아온 성전환자의 이야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영원히 지속되는 고유의 본질적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진주 관점’(pearl view)‘을 부정합니다. “뇌에는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는 중심 따위는 없다”는 임상신경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해서, 결국 저자는 1부에서 본질적 자아나 비물질적인 영혼이란 개념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2부에서 저자는 말합니다. “자아의 핵심에 있을 ‘진주’찾기를 포기한다면 너무 성급한 일일 것이다 … 우리 모두는 어떤 의미에서 정신과 물질로 이루어진 구조물이다.”(p. 107). 하나로 이루어진 본질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자아의식은 하나의 구조물임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 모습을 만들어주는 것은 여러 부분들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결과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질에 불과하지만 단순한 물질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잡성 속에서 속성 자체가 변하기 때문에, 어쩌면 자아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저자가 말하는 ‘자아의 속임수(에고 트릭, the Ego Trick)’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자아의 속임수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고 믿게끔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실제보다 더 단단하고 영원한 것처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어떤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환상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존재하다는 사실 자체에는 환상이 있을 수 없다.”(p. 211).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확고한 자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휴, 내가 분명히 이해하고 말하면서도 어렵네요! ‘3부. 미래의 자아’에서 저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육체의 부활과 사후세계를 부정합니다. 자아의 존재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얼마 전 죽은 스티브 잡스가 생각했던 삶과 죽음의 관점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네요. 스티브 잡스는 “나의 죽음은 전원 스위치가 ‘딸깍’ 꺼지는 것”이라고 말했다지요. 정말 우리는 기껏해야 “생각하는 생존 기계”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할 때,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좀 더 담담해질까요? 이 책을 다 읽고 자아에 대해 더 혼란스러워졌네요. 아직도 저자의 결론에 선뜻 동의할 수 없군요. 그래도 나란 존재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책입니다. 즐거운 자아 탐구 여행이었습니다. |
|
사람은 각기 다른 개성과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 사람만의 무엇이(자아이든 정체성이든)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 또한 나다운 무언가, 어렸을 때부터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형성된 나의 가치관, 성격 등이 나의 자아라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보니 그게 변함없이 존재하는 본질적 핵심은 아닌듯하다.
오히려 데이비드 흄이 말한 것처럼 내 자신은 여러 지각들의 모음에 불과하며 이런 지각들은 빠른 속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영원한 흐름과 움직임 속에 변화하는 것 같다.
얼마전 재밌게 본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순수하고 소심했던 승민이 사회생활하며 참 많이도 변한거 같았는데 그렇게 변한 모습또한 승민이였던거다. 자아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바꾸어 나갈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나'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