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엄기호 나무연필/2019.12.15. sanbaram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더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수도 있다. 이때 우리는 고통을 피하거나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고통을 나눈다는 것의 의미와 고통을 나누는 방법에 대해 세 사람의 예를 들어서 고찰한다. 저자 엄기호는 국제단체에서 일하며 세계 곳곳의 현장에서 고통을 인권의 언어로 읽는 법을 배웠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가르치는 곳과 사는 자리에서 곁에 있는 이들의 곁에 서는 연습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닥쳐라, 세계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등 여러 권이 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3부로 되어 있다. 1부 고통의 지층들에서는 고통을 겪는 이의 곁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에 대하여 말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언어가 어떻게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응답을 할 수 없는지, 그리하여 곁을 파국으로 몰아가는지를 ‘주문’이라는 말로 다루고 있다. 2부 고통의 사회학에서는 어떻게 고통이 이 사회의 정치이자 경제가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3부 고통의 윤리학에서는 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곁에 대하여 말한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을 억눌러왔다. 고통은 부끄러운 것이고 고통을 말하는 것은 나약한 짓이라고 비난했다.(p.16)” 이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은 그것을 감추려고 했지 고통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선아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는 남편에 대해 고통을 느낀다. 그러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하여 이혼을 하게 되면서 자기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발견하기도 한다. 집단상담을 하고, 명상을 하면서 자기의 고통의 뿌리를 찾아 해소해보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나중에서야 지인들과 뚝길을 걸으며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각자의 사연 있는 고통을 스스로 극복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고통의 실증적 측면은 철저히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 측면뿐이다. 그렇기에 고통을 나눌 수 없게 된다. 자기의 억울함을 법에 호소하는 것도 쉽지 않다. 법은 법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만 듣는다. 자기가 당한 고통과 피해를 아무리 길고 상세하게 이야기하더라도 변호사들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다. “그건 됐고요, 그래서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길게 이야기해봤자 그들은 항상 “그건 됐다”고 말한다.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조각되지 않은 말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말이기 때문이다. 법은 들을 말만 듣는다. 이렇게 이웃과 소통하는 것도 사회적 언어가 아니면 제대로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재희 어머니는 가정의 중심이 되어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버텨내며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가정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병으로 수술을 하면서 지속적인 고통을 당하게 되자 가족에게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통의 호소에 점차 가족이 지쳐서 곁을 떠나간다. 환우모임에 나가 이야길 하며 마음이 편해졌지만 계속되는 반복에 모임에서도 설 곳이 없자 고통호소를 입에 달고 살게 된다. 옆에서 지켜보는 재희는 어머니의 호소를 들어주지만 계속되는 반복에 지쳐간다. 다행히 형제자매들의 공감과 도움으로 현실을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재희 어머니의 이야기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고통의 주체가 아니라 고통이 그 주체임을 보여준다.
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경청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들어주는 게 아니다. 경청은 잘 듣고 돌려주는 응답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재희 어머니는 자기말만 한다. 곁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사회학적 언어는 고통의 고유함과 개별성 보다는 사회성에만 주목하기 때문에 당사자 개개인의 구체적 사연들이 종종 ‘공감’이라는 말로 너무 빨리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p.90)” 그리하여 종국에는 개별성이 ‘사연’이나 ‘사례’로 여겨진다. 환우들끼리의 나눔의 자리에서는 개별성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경청’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언어화되는 자리에서는 선언적인 사회학적 언어만 남는다고 말한다.
금슬 좋기로 소문난 덕룡 아버지는 80대에 병든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좋아하고 아끼던 서가의 책들을 다 치워버리고 점점 말이 없어지며 초췌해져갔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동생의 정성어린 권유로 사이비 종교에 심취하게 되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주문’을 외면서 생의 의미를 다시 찾았지만 교인들 외에는 곁에 남은 사람이 없게 된다. 자기가 겪은 것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붙잡을 수 있는 존재 중 하나가 신이다. “신은 내가 말하지 않은 것도 듣는 존재다. 신에게 기도할 때 절박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이렇게 말하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은 아시지요?’(p.66)”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다르다. 앞의 말은 내가 내 입으로 떠든 말이고, 뒤의 말은 내 말 사이로 빠져나간, 그러나 오로지 신의 귀에만 들릴 수 있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 말은 신에게만 할 수 있다. 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기에 신에게 매달리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통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사회적 측면, 관계의 측면, 그리고 실존적 측면이 그것이다.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인식하고 동시에 주변과 공감하고 더구나 실존적 측면을 응시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마법의 단어’는 없다. 그런 단어는 사실상 ‘주문’이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 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주문은 이 길을 봉쇄한다.(p.114)” 사회과학적 언어든 심리학적 언어든 혹은 정말 주문이든 간에, 이런 말들은 고통의 다른 차원을 대면하고 고통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 사실은 불가능한지를 직면하는 것을 방해하는 ‘주문’이다. 모두가 각자 다른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p.125)” 사람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존재감’이 필요하다. 내가 존재할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느낄 때 삶은 비로소 살아갈 만한 것이 된다. 존재감에서의 핵심은 내가 쓸모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SNS의 소통이 사회적 소통의 중심이 되면서 사람들은 고통을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하여 팔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많이 모일수록 이득을 보는 것은 공론의 플랫폼들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구경거리를 양산해야 한다. 이들이 보기에 세상의 비참이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겨루고 다투는 ‘싸움’의 속성을 지닌 좋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고통을 나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앎에 도달하는 글쓰기를 통해 사람은 그 자신과 동행할 수 있다.(p.234)” 고통의 당사자에게 글쓰기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글쓰기의 탄생이 자서전과 일기에서 비롯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물은 자기에 대한 앎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무관심하기 때문에 거울이 필요 없다. 오로지 자기를 알고자 하는 인간에게만 남이라고 하는 거울이 필요하다. 고통을 통한 직접적인 연대는 없다. 고통의 곁에 곁이 되는 연대를 통해서, 혹은 슬픔을 공유할 수 없다는 슬픔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고통을 나눌 수 있을 뿐이다. ‘동행과 연대는 고통으로부터 한 다리 건넌 우회만을 허락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통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엄기호 나무연필/2019.12.15.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더러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수도 있다. 이때 우리는 고통을 피하거나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고통을 나눈다는 것의 의미와 고통을 나누는 방법에 대해 세 사람의 예를 들어서 고찰한다. 저자 엄기호는 국제단체에서 일하며 세계 곳곳의 현장에서 고통을 인권의 언어로 읽는 법을 배웠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가르치는 곳과 사는 자리에서 곁에 있는 이들의 곁에 서는 연습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닥쳐라, 세계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었어> 등 여러 권이 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3부로 되어 있다. 1부 고통의 지층들에서는 고통을 겪는 이의 곁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에 대하여 말한다. 고통을 호소하는 언어가 어떻게 응답을 기대하지 않고 응답을 할 수 없는지, 그리하여 곁을 파국으로 몰아가는지를 ‘주문’이라는 말로 다루고 있다. 2부 고통의 사회학에서는 어떻게 고통이 이 사회의 정치이자 경제가 되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3부 고통의 윤리학에서는 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곁에 대하여 말한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을 억눌러왔다. 고통은 부끄러운 것이고 고통을 말하는 것은 나약한 짓이라고 비난했다.(p.16)” 이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은 그것을 감추려고 했지 고통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선아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는 남편에 대해 고통을 느낀다. 그러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인하여 이혼을 하게 되면서 자기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발견하기도 한다. 집단상담을 하고, 명상을 하면서 자기의 고통의 뿌리를 찾아 해소해보려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나중에서야 지인들과 뚝길을 걸으며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각자의 사연 있는 고통을 스스로 극복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고통의 실증적 측면은 철저히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해야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 측면뿐이다. 그렇기에 고통을 나눌 수 없게 된다. 자기의 억울함을 법에 호소하는 것도 쉽지 않다. 법은 법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만 듣는다. 자기가 당한 고통과 피해를 아무리 길고 상세하게 이야기하더라도 변호사들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다. “그건 됐고요, 그래서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길게 이야기해봤자 그들은 항상 “그건 됐다”고 말한다.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조각되지 않은 말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말이기 때문이다. 법은 들을 말만 듣는다. 이렇게 이웃과 소통하는 것도 사회적 언어가 아니면 제대로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재희 어머니는 가정의 중심이 되어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버텨내며 사회적으로 인정도 받고 가정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병으로 수술을 하면서 지속적인 고통을 당하게 되자 가족에게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고통의 호소에 점차 가족이 지쳐서 곁을 떠나간다. 환우모임에 나가 이야길 하며 마음이 편해졌지만 계속되는 반복에 모임에서도 설 곳이 없자 고통호소를 입에 달고 살게 된다. 옆에서 지켜보는 재희는 어머니의 호소를 들어주지만 계속되는 반복에 지쳐간다. 다행히 형제자매들의 공감과 도움으로 현실을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재희 어머니의 이야기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고통의 주체가 아니라 고통이 그 주체임을 보여준다.
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경청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며 열심히 들어주는 게 아니다. 경청은 잘 듣고 돌려주는 응답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재희 어머니는 자기말만 한다. 곁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다. “사회학적 언어는 고통의 고유함과 개별성 보다는 사회성에만 주목하기 때문에 당사자 개개인의 구체적 사연들이 종종 ‘공감’이라는 말로 너무 빨리 휘발되어버리기도 한다.(p.90)” 그리하여 종국에는 개별성이 ‘사연’이나 ‘사례’로 여겨진다. 환우들끼리의 나눔의 자리에서는 개별성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경청’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언어화되는 자리에서는 선언적인 사회학적 언어만 남는다고 말한다.
금슬 좋기로 소문난 덕룡 아버지는 80대에 병든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좋아하고 아끼던 서가의 책들을 다 치워버리고 점점 말이 없어지며 초췌해져갔다.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동생의 정성어린 권유로 사이비 종교에 심취하게 되면서 다시 활기를 찾았다. ‘주문’을 외면서 생의 의미를 다시 찾았지만 교인들 외에는 곁에 남은 사람이 없게 된다. 자기가 겪은 것을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이 붙잡을 수 있는 존재 중 하나가 신이다. “신은 내가 말하지 않은 것도 듣는 존재다. 신에게 기도할 때 절박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이렇게 말하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신은 아시지요?’(p.66)”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다르다. 앞의 말은 내가 내 입으로 떠든 말이고, 뒤의 말은 내 말 사이로 빠져나간, 그러나 오로지 신의 귀에만 들릴 수 있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 말은 신에게만 할 수 있다. 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기에 신에게 매달리게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통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사회적 측면, 관계의 측면, 그리고 실존적 측면이 그것이다.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인식하고 동시에 주변과 공감하고 더구나 실존적 측면을 응시하는 것,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마법의 단어’는 없다. 그런 단어는 사실상 ‘주문’이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 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다. 주문은 이 길을 봉쇄한다.(p.114)” 사회과학적 언어든 심리학적 언어든 혹은 정말 주문이든 간에, 이런 말들은 고통의 다른 차원을 대면하고 고통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 사실은 불가능한지를 직면하는 것을 방해하는 ‘주문’이다. 모두가 각자 다른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p.125)” 사람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존재감’이 필요하다. 내가 존재할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느낄 때 삶은 비로소 살아갈 만한 것이 된다. 존재감에서의 핵심은 내가 쓸모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SNS의 소통이 사회적 소통의 중심이 되면서 사람들은 고통을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하여 팔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많이 모일수록 이득을 보는 것은 공론의 플랫폼들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구경거리를 양산해야 한다. 이들이 보기에 세상의 비참이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서로 겨루고 다투는 ‘싸움’의 속성을 지닌 좋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고통을 나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앎에 도달하는 글쓰기를 통해 사람은 그 자신과 동행할 수 있다.(p.234)” 고통의 당사자에게 글쓰기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적 글쓰기의 탄생이 자서전과 일기에서 비롯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물은 자기에 대한 앎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무관심하기 때문에 거울이 필요 없다. 오로지 자기를 알고자 하는 인간에게만 남이라고 하는 거울이 필요하다. 고통을 통한 직접적인 연대는 없다. 고통의 곁에 곁이 되는 연대를 통해서, 혹은 슬픔을 공유할 수 없다는 슬픔을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고통을 나눌 수 있을 뿐이다. ‘동행과 연대는 고통으로부터 한 다리 건넌 우회만을 허락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고통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
|
가족들 중에서 누군가 아파서 입원을 했을 때, 그 사람의 고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정말 못 견딜 정도로 힘든 일이다. 병상에 누워 고통을 호소할 때 자신이 대신할 수 있다면 하고 생각을 해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한 일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심정을 따질 겨를조차 없기 마련이다. 고통은 항상 주관적인 감정에 의존하고, 자신만의 고통이 가장 크고 심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지고 싶었던 것이라 이해된다.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의 기획 의도는, 아마도 주위의 고통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은 목적이 개재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책의 앞부분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당사자들에게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저자가 왜 ‘고통’이라는 주제를 들고 나왔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책 말미에’에 기술된 저자의 말을 통해서 그 의문의 일단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아마도 저자는 인권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상담을 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상담자로서 건네는 위로가 상대방의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의 기억을 확대시키는 역할을 목도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오히려 상담자가 지치고 끝내 그만두기도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고통의 실체와 의미에 대해 천착하였던 것이다.
저자는 ‘끝이 없다는 것.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느끼는 것. 그것이 고통의 끝자락에 단단히 붙어있는 가장 큰 절망이라는 고통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위로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고통이 전이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크게 세 항목으로 나누어져 있다. 먼저 1부에서는 ‘고통의 지층들’이라는 제목으로, 고통을 겪는 다양한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하고 ‘고통의 곁, 그 황량한 풍경에 대하여’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사례가 책의 후반부에까지 이어져, 다양한 임상 사례처럼 제시되면서 고통의 실체에 대해 조금씩 진전된 의미를 짚어내고 있다고 하겠다. 고통의 가장 큰 특징은 당사자에게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를 하더라도, 그 의미가 당사자에게 절대로 전달될 수 없다고 한다.
‘고통을 전시하고 소비하는 메커니즘에 대하여’라는 부제가 달린 2부는 ‘고통의 사회학’에 대해서 천착하고 있다. 절대적인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의 상황을 오히려 조롱하고, 그것이 마치 당사자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처럼 여기는 현상에 대해서 저자는 주목하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소비하는’ 그릇된 풍조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아마도 사회학자로서 저자가 직접 겪으면서 고민했던 문제들에 대한 진단이라고 이해된다. 저자는 ‘사랑과 우정’을 통하여 그것이 극복될 가능성을 떠올리지만, 이른바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자 하는 ‘관종’들에 의해 그것이 변질되어 나타나는 세태에 대해 지적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리는 가족을 잃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는 ‘세월호’ 유족들 주위에서 이른바 ‘폭식투쟁’을 일삼는 몰지각한 현상을 이미 목도한 바 있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여겨진다.
마지막 항목은 ‘고통의 윤리학’에 대해 논하면서, ‘고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곁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그러나 2부까지의 내용이 구체적인 사례를 통하여 현 세태에 대한 분석에 기반하고 있다면, 윤리학을 다룬 부분은 당위적이고 때로는 공허하기까지 하다고 생각되었다. 아마도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하지 못하는 세태에 대한 해결책이 그만큼 막막하기 때문일 것이라 이해된다. 고통을 겪는 이가 자신의 경험을 직접 ‘말과 글’로 풀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인터넷을 통하여 그것이 유통되면서 자칫 신상이 노출되고 또 다른 고통이 첨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글쓰기로부터 세상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하면서 참고했던 책들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 ‘참고문헌을 대신해서’를 통해 다양한 참고 도서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차니) * 개인의 독서 기록 공간인 포털사이트 다음의 "책과 더불어(與衆齋)“(https://cafe.daum.net/Allwithbooks)에도 올린 리뷰입니다. |
|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치료제 “이 고통이 진짜 끝나긴 할까요?” |
|
한 줄 한 줄이 너무 좋았다. 발췌를 하자면 거의 책 전체를 통째로 옮겨야 할 상황이라 나에게 와닿는 내용 위주로 요약하기로 한다. 우선 질문이 던져진다. 고통을 전시하여 소비하지 않되 고통의 절대성에 사람들이 충분히 공명하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중심으로 고통이 과연 말로 표현될 수 있는지, 고통은 어떻게 이 사회의 정치와 경제가 되었는지, 고통의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자리는 어디인지를 말하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으로부터 삶의 의미와 가치를 끌어내고 싶어한다. 이를 위한 노력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대화하는 공간인 내면을 구축하게 한다. 자기에 대해 알면서 문제를 특정한 방식으로 겪는 자기를 알고 다룰 수 있는 것도 물론이다. 그러나 이런 내면의 구축 자체를 무화시키는 고통이 있다. 자기에 대한 앎은 고통의 원인을 알고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를 통제하는 것을 통해 고통의 원인을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고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만 채근하며 원인을 더 키울 수 있다. 자기와 무관하여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압도적인 고통 앞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때 직면하게 되는 것이 바로 고통의 무의미다. 고통의 무의미성이야말로 인간이 겪어야 하는 가장 큰 고통이다.
내가 나에게조차 겪은 것을 설명할 수 없는데 미쳐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일이 반복되면 나중엔 내가 겪은 일이 실제로 내가 겪은 것인지 아니면 지어낸 것인지조차 헷갈리는 단계에 이른다. 이럴 때는 홀로 있되 자기와 '더불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버려진 외로운 상태가 된다. 실존이 불가능한, 실존의 위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고통을 전달할 수 있는 '말'도 없다. '소리'를 지르며 신호를 보낼 수 있을 뿐이다. 언어를 통해 타인과 '공동의 집'을 지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이 실존적 죽음이 야기하는 고통을 견뎌낼 수 없다. 오직 신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거나 동식물에게 의지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통의 실존적 측면은 철저히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 측면뿐이다. 그것이 사회가 고통에 귀기울이게 할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 법의 언어로 고통을 설명할 때의 딜레마가 있다. 자신의 고통을 야기한 현 사회의 말과 권위를 승인하고 재생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법의 언어뿐만 아니라 사회학화, 심리학화하여 문제를 바라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너무 확실하게 설명하는 단어는 종종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자기를 발견하고 생각하게 하는 사유의 단어가 이제를 사유를 방해한다. 고통에 직면하여 언어를 잃어버리는 순간 파괴되는 집은 하나가 아니다. 다시 지을 수 없는 공동의 집은 세 가지 차원이다. 하나는 사회적 차원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동료들과 짓는 집이며,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안에서 자기 자신과 거하는 '내면'이라는 집이다. 고통의 끔찍함은 이 모든 거주지를 파괴하고 사람을 존재로부터 추방해버린다는 것이다.
특히 고통을 말하는 이가 타인의 응답을 거부하고 그저 자신의 이야기만을 듣기를 요구한다면, 사람들 사이에 집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이의 곁에 있는 사람의 세계가 같이 무너진다. 사실은, 내가 겪는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고통을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울 수 있게 된다.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그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 고통의 원인과 이유를 분별해내어 자기를 탓하지 않되 자기의 힘을 기르고, 고통의 보편성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고 다른 외로운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한편 2부에서는 성과 중심의 사회 모습을 묘사하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말과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 던져진 사회에는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 사회가 만들어놓은 성과에 대한 판별 기준이 있다. 게다가 한 사회의 성과에 대한 인정 체제는 노동 그 자체의 특성보다는 노동 외적인 것에 의해 결정된다. 성과로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없을 때 우리는 친밀성의 영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서로에게 가져야 하는 관심은 상품화된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자신이 고통에 차서 절규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던 사람들이 시장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했을 때 주목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대의 현존을 기뻐하고 상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유익한 존재가 되려는 게 아니라, 상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유익한 존재가 되어 존재감을 느끼려 한다. 이때 필사적이 되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내가 버림받고 나보다 더 큰 유익을 주는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불안 때문이다. 관계에 대한 '확신'만이 유일하게 이 불안을 없앨 수 있으나, 그것이 불가능하므로 더 큰 유익을 주어야 한다. 고통이 전시되고 소비되는 한 이유다. 관종이라는 존재 한 명을 본다면 심리학적이거나 병리학적인 현상일 것이나, 관종이 대량으로 양산되고 있다면 사회적 현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고통을 말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그 자리는 당사자가 아니라 당사자의 '곁'이다. 고통을 겪는 이가 고통의 절대성으로 인해 응답을 바라지 않는 말, 상호성을 제거한 일방적인 말만 함으로써 말을 파괴한다면, 응답을 기대하는 말, 응답할 수 있는 말을 하는 것은 고통의 당사자가 아니라 그 곁에 서 있는 이다. 단순히 주변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에게서 살짝 비켜나 설 수 있고 그 자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 존재의 조건이 '복수성'이듯(남을 통해 나를 알게 되고 남으로부터의 인정을 통해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되듯), 자신의 대한 앎에 도달하는 글쓰기를 통해 사람은 그 자신과 동행할 수 있다.
또한 고통은 곁을 고통에 빠뜨리므로, 그 곁에게도 다른 누군가가 필요하다. '고통의 곁'의 고통은 그가 끝까지 응답하지 않을지 모른다는 절망이다. 고통의 곁에서 그 곁의 곁이 되는 것,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고통의 곁에 선 이는 고통을 겪는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고통의 곁을 지키는 이에게 곁이 있을 때, 그 곁을 지키는 이는 기약 없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지금 당장' 반응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여유로움'과 '매개'라는 더 넓은 세계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보다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여유롭다).
그런데 마지막 장에서는 자기를 '신중하게' 드러내어 자기로부터 세상을 보호할 수 있는지 도전하고 있다. 세상이 보호받으며 동시에 새로 지어질 수 있다고, 신중한 드러냄이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고 말한다. 내내 아파하고 부끄러워하며 글을 읽다가 준비되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해가 바뀌고 10일이 되지 않아 만난 이 책을, 나는 올해의 책으로 꼽을 것이다. |
|
이 책에서 저자 엄기호가 강조하고 있는 지점은 고통을 겪는 사람 못지 않게 그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고통의 ‘곁’)이 무너지지 않게 사회가 도와주고 지원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에 함몰된 상태는 철학적으로 죽음의 상태와 같다. 바깥을 상실하고 외부와 연결망을 상실한 상태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바깥을 회복하면 고통에 함몰된 상태에서 벗어나 회복될 가능성이 생성된다. 고통받는 사람의 곁에 누군가가 계속 붙어 있어줘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고 강조한다. |
|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주변의 말을 '징징거림'으로 폄훼하고 경청도 전에 말을 자르고 응답도 없이 조언만 해왔다. 그건 나도 고통스러워서 남의 말이 들리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듣지 않기 위해 더 떠들어댔고, 마음의 청력이 다 닳아버렸다. 내 상태가 완전한 폐허라는 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함부로 곁을 청하지 않고 나 또한 함부로 곁에 서지 않겠다는 다소 서늘한 결론에 닿았다. 나는 나의 개별적인 고통을 너무 가벼이 여겼다. 나의 고통을 급박하게 사회화시켰고 정치화시켰다. 고통은 그런 성정의 것들이 아닌데 말이다. 절주와 운동, 독서, 그리고 관계의 단식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