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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총점 종이책 주간우수작
우리나라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 이야기, 읽어야 하는 책
"우리나라 국민들이 꼭 알아야 할 이야기, 읽어야 하는 책" 내용보기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신 우당 이회영 선생님의 삶과 발자취를 담은 책입니다. 책의 절반 정도는 이회영 선생님이 어떤 분이셨고, 어떤 업적을 남기셨는지 그 일대기를 담았고, 나머지 절반은 이회영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그렸습니다.        저자는 김태빈 작가님과 전희경 작가님입니다.'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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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신 우당 이회영 선생님의 삶과 발자취를 담은 책입니다. 책의 절반 정도는 이회영 선생님이 어떤 분이셨고, 어떤 업적을 남기셨는지 그 일대기를 담았고, 나머지 절반은 이회영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을 그렸습니다.

 

 

 

 

 

 

저자는 김태빈 작가님과 전희경 작가님입니다.

'항일 답사'를 정리하셨다는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아직까지 독립운동의 역사를 따라가는 지도나 여행정보가 꽤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주를 걷다'라는 책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쓰여 있는데,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담은 책을 발간하실 예정인 것 같아서 덩달아 기대가 됩니다 :D 

 

 

 

 

 

 

[차례]를 보면 우당 이회영 선생님의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명문가였는지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초등학교 시절 필독도서였던 '오성과 한음'이야기의 주인공인 이항복의 손자로, 이회영 선생님은 큰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명문가의 사람이었습니다. 

 '헤이그 특사'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꽤 익숙한 단어입니다. 역사 공부를 하다보면, 적어도 독립운동과 관련된 전시나 박물관에 한 번이라도 가 보았다면, 누구나 헤이그 특사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헤이그 특사를 주도했는가?'하는 점은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아요.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알려진 바가 적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 지도를 포함한 사진자료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는, 교육적인 책입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책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그리고 교양을 위해 직장인과 주부들도 꼭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이시영', '한용운', '안창호', '이준'... 우리가 역사서 속에서 따로따로 배우고 외웠던 위인들이 이름이 이 책에서 서로 마주치고 함께 일하고, 스쳐 지나갑니다. 당시의 상황을 더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책입니다.  

 

 

 

 

 

 

 

 이야기는 이회영 선생님의 마지막 순간으로 다가가고, 1부가 끝이납니다. 

 1부는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 누구이며, 어떤 뜻을 세웠고, 어떻게 그 뜻을 펴고자 노력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분들도 알고 있는 이름들, '안창호', '윤봉길', '한용운'...많은 위인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많은 사건들이 등장합니다.

 책에 수록된 다수의 사진자료들이 당시 상황을 현장감있게 전해주고, 더 구체적으로 역사 속 이야기들을 간접체험하는 장치가 되어줍니다. 독립을 염원하던 의사들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치열했는지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역사 속 장소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놓은 페이지도 있어서 이 모든 비극적인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소설 속 이야기보다 더 소설같은, 명예로운, 동시에 독자를 슬프게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2부]는 우당 이회영 선생님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여행의 기록입니다.

책을 읽은 독자들이 직접 찾아갈 수 있도록 지도와 주소 등의 정보도 함께 수록되어 있습니다.

 

 

 

 

 

[답사가이드]를 통해 얻은 팁(Tip)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여행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저자가 단순히 유적지를 소개할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 유적지를 찾아가보고 우리가 꼭 알아야할 역사의 순간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집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남아있는 유적지는 찾아가보는 것이 현실적으로 많이 어렵겠지만,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적지와 박물관은 방학 또는 주말에 꼭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실천하기 쉽게, 지도와 주소, 사진자료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책을 총평해보자면,

1. 이 책은 우리가 꼭 알아야할 역사를 생생하고 현장감있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2. 한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책입니다.

3.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유적지를 직접 찾아가보도록 권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훌륭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4. 다만, 당시 시대상황에 관한 서술과 우당 이회영 선생님의 기록이 조금 더 풍부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작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s******r 2019.01.18. 신고 공감 29 댓글 26
리뷰 총점 종이책
이회영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
" 이회영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 내용보기
올해는 3.1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4월 11일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일도 백년이 되었다.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님.책 <우당 이회영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는 이회영을 그리는 책이다.저자는 중국에서 이회영 선생과 관련된 장소들을 찾아서 답사를 하고, 오랜시간 공을 들인 자료로 이 책을 펴냈다.처음부터 몰랐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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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3.1만세 운동이 일어난 지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또한 4월 11일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고 그 일도 백년이 되었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님.

책 <우당 이회영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는 이회영을 그리는 책이다.

저자는 중국에서 이회영 선생과 관련된 장소들을 찾아서 답사를 하고, 오랜시간 공을 들인 자료로 이 책을 펴냈다.

처음부터 몰랐던 사실을 알아서 놀라웠다. 이회영의 선조가 이항복이었던 것이다.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하기 위해 애쓴 인물이다. 이항복은 권율 장군의 사위기도 했다.
이회영의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관리가 있었고 의로운 일을 했던 명문가였다.

요즘말로 치면 이회영은 금수저 신분이었다. 이회영과 6형제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상당했다. 이회영은 서구 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신학문을 열심히 공부했다.
집안의 노비들을 풀어주고, 아랫사람에게도 존댓말을 쓰는 인격자였다.

이회영은 당시의 사대부 선비로서는 무척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의 첫 번째 부인이 병으로 죽은 이후 재혼을 했는데 교회에서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상동교회에서 식을 치뤘는데 이는 조선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행한 신식 결혼식이었다고 한다.
서양식도 이색적인데 다른 한 가지에 또 의미가 있었다.
당시에 서울의 감리교의 양대 교회에는 정동교회와 상동교회가 있었다. 정동교회는 주로 양반들이 다니고 상동교회는 중인 이하의 신도가 대부분이었다. 이회영은 이에 은근히 반발하는 의미로 상동교회를 택한 것이었다.

이회영의 친동생 이시영은 조정 관리로 외부 교섭국장이었다. 헤이그 특사 중 한 분인 이상설은 이회영의 절친이었다.
이회영은 온 가족과 측근에 모두 쟁쟁한 애국지사들이 곁에 포진해 있다.
아니, 이회영 스스로부터 애국지사였기에 그런 이들이 모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진정한 동지였고 모두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게 된다.

이회영의 독립 운동을 읽으면서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국노들에 의해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주권이 빼앗긴 것은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결하는 것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이회영의 계획은 즉흥적이거나 허술하지 않았다.

치밀하게 기획하고 체계적으로 도모하여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는 방법을 모색해 나간다. 마침 그에게는 적지않은 자금이 있었고 이회영은 형제 여섯명과 일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1906년 북간도에는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이 설립되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회영은 한동안 국내에 남아서 비밀결사체 신민회를 조직했다.
한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는 거사를 기획하였다.
알려졌다시피 헤이그 특사는 실패하여 고종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뭉클하고 선열들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예전부터도 관심이 있었던 헤이그 특사의 이야기. 언제 드라마나 영화로 자세하게 재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한 그 내용에 소름이 돋았다.
1907년 4월 22일에 이준이 선발대로 먼저 출발하여, 이상설, 이위종과 해외에서 합류했다.
이분들은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하였으니 두 달에 거쳐서 간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한 이준, 이상설 특사는 러시아 횡단열차를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한다. 여기서 이위종 선생을 만나고 세 분은 배를 타고 베를린으로 가서 다시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준이 자결했다는 역사는 논란의 소지가 많다. 그래서 실제로 여러 학자들은 이준이 병사했다고 기록을 고쳐야 한다고 한다.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그런 심증을 더욱 굳혔다.
배, 열차를 갈아타면서 대륙을 횡단해 두 달에 걸쳐서 헤이그에 도착을 하셨다. 거기서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끼니까지 마다했으니 병이 나서 순국하셨다 해도 나는 이게 맞다고 여겨졌다.

이회영이 교류한 지인들에도 독립운동가가 많았다.
그랬기에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에서는 많은 독립투사 이야기들도 만날 수 있다. 흥미로우면서 감동적이었다.

당시에 독립운동을 한 것이 얼마나 헌신과 희생이었는지를 새록새록 배우는 시간이었다.


어떤 독립운동가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죽은 후에 후손이 하나도 없었다.
어떤 분들은 일제에 의해서 죽음을 맞았지만 유해를 찾지 못해서 묘소가 비어 있다.
이준이 순국한 후에 부인은 그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얼빈 등지로 전전하셨다고 한다.
이회영의 독립운동이 후손들에 의해서 알려지긴 하였지만 그가 행한 방대한 일들에 비해서는 흔적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여러 독립운동가의 헌신과 죽음을 읽으면서 계속 코끝이 찡해졌다.
이런 느낌을 받아서였다.
‘내가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고 목숨이 위험한 걸 감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조선이 독립만 할 수 있다면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고, 후손이 몰라도 상관이 없다.
시신이 수습되지 못하고 기억되지 못해도 괜찮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일이 평가받기를 원하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직 조국이 독립되는 것에 한 알이 밀알이 되고, 작더라도 보탬이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계속 읽으면서 와 진짜 이런 ‘싸나이’가 있으신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여러 자료로 이회영 선생님에 대해서 접했지만,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멋진 한 명의 인간으로 여겨졌다.
1910년 경술국치를 맞으면서 망명길에 오를 때 이회영이 형제들을 설득해서 같이 갈 수 있었다.
그때 이회영은 ‘언젠가는 반드시 조선이 독립할 것이고, 그때까지 왜적에 맞서 싸우는 것은 백사 공의 후손된 도리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백사는 이항복의 호이다.

후손된 도리. 이 표현이 왜 그렇게 마음을 치던지.
나는, 지금 우리는 이회영을 비롯한 숭고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답게 살고 있는 것일까.

이회영은 동지들과 함께 신흥강습소를 개교한다. 민족 교육과 군사훈련의 두 가지에 박차를 가한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에 의해 문을 닫는 1920년까지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를 나온 분들은 이후 1930년대까지 독립 운동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주역들, 의열단, 김원봉 대장, 지청천 장군은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일찍부터 지혜와 기지가 넘치고,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던 이회영은 독립운동에서도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했다가 뜻을 달리해서 베이징으로 옮긴 것이다. 이회영은 통찰과 선견지명이 있었고 멀리 내다보는 눈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후에 이회영 선생의 베이징 집은 독립운동의 또 다른 근거지가 되었다.

어떤 조직에 있지는 않았으나, 이회영의 처소는 누구나 잠시 몸을 쉴 수 있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회영의 정신은 늘 날카로웠고 독립에 대한 열망은 뜨겁기만 했다. 그러나 현실은 처량하고 궁핍했다. 가난해서 끼니를 겨우 이었고,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때가 많았다.
살림과 자식들 건사는 오롯이 부인의 몫이었다.

한편 이회영에게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많았다고 한다. 독립운동 계에서 이회영의 존재는 널리 알려졌고 신망이 두터웠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이를 노리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이 접근했던 것이다.
또 일제가 보낸 밀정도 있었기 때문에 항상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삶이었다.

명문가 사대부의 선비, 많은 독립운동가와 교분을 가진 인맥, 학식이 높고 예술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던 사람.
이회영은 능력이 출중하고 기개와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암흑은 깊어져만 갔고, 한 사람이 많은 일을 감당하기에는 벅찬 시절이었다.

저토록 수많은 난관과, 시험과 위험들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었을까.
감히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졌다. 일제는 조선 침략을 넘어서 청나라를 침략할 야욕을 드러냈다
이전까지 청은 독립운동가들에게 항일의 터전이었는데 이제는 위험한 곳이 됐다.

1932년에 이회영은 만주로 가기 위해 황푸강에서 배에 올랐다. 목적지는 다롄.
다롄으로 가서 조선과 중국의 두 항일 연합 세력을 지도하려는 것이었다.

얼마후에 이회영의 아들은 어머니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11월 17일 부친 대련 수상경찰서에서 사망.’
창춘에서 살고 있던 이회영의 따님이 급히 경찰서로 갔다. 일본 형사는 유품으로 노인이 입었던 중국식 겨울 두루마기와 모자, 신발을 건네준다. 그리고 딸에게 아버지 얼굴을 확인시킨 후 화장을 강권했다. 고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이회영은 심문을 당할 때 고문 끝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음에도 알고 있는 것들을 발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선생이 지도하려던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는 전혀 해를 입지 않았다.

상하이 거류민단장으로 이용로라는 조선사람이 있었다. 그는 밀정이었고 이회영의 계획을 입수하여 일제에 고급정보를 넘기는 만행을 저지른다.
출세에 눈이 멀었던 이 자 때문에, 우리 독립운동가의 거목 중의 한 명인 이회영이 너무도 허망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용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회영 순국 후 3년 후에 이회영의 아들, 독립투사 이규창에 의해서 처단되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후련함을 절로 느꼈다.
이회영을 팔아 넘긴 것은 단순한 수사 협조가 아니라 매국의 명백한 증거였다.
또한 이 일이 알려짐으로써, 그동안 득의양양하던 밀정이 움츠러드는 계기도 주었을 것이다.

이회영은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었다. 뤼순 감옥은 지금 가면 특별전시장이 있다.
전시장에는 이 감옥에서 1910년 순국한 안중근 의사, 1936년 순국한 신채호 선생과 함께 이회영의 흉상이 서 있다고 한다.

이회영 선생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았지만, 당시에 시신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기에 유해나마 조선으로 와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를 이 책에서 처음 듣고는 또 먹먹해지고 말았다.
당시에 개성군 송산리, 지금의 파주시 장단면이라는 곳에 유족들은 선생의 묘를 마련했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 포탄을 맞아서 사라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게 묘소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식민지 시대에 풍찬노숙을 하면서 끝까지 고생만 하시다 순국했는데, 또 다른 비극인 한국전쟁때 묘지마저 소실된 이회영.
참으로 기가 막혔다. 애통함을 감출 길이 없다.

이회영은 을사늑약 직후에 북만주 용정으로 떠났다. 내가 최애하는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기도 한 북간도.
망국을 하고 국경을 넘어서, 오래전 고구려의 역사가 서려있는 곳으로 이주했던 사람들.
잠시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들의 심정과 처지를 떠올려 본다.

서럽고 궁핍했을 그들이 절망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
이회영에 대해서 자세히 배우면서 한번 더 이런 생각을 깊이 해보았다.

책은 명확한 서술과 저자의 열정으로 감동적으로 읽힌다.
몰랐던 수많은 사실들을 안 것이 너무도 좋았고, 묻혀졌던 이야기를 알아서 감사했다.

묻혀져서는 안 되는 이야기였다.

이회영은 친필과 글을 몇 가지 남겼다. 그것들은 길거나 구구절절하지 않으나, 하나같이 가슴을 쳤다.
두 가지를 적으며 서평을 마친다.

1910년에 중국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가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한 이회영 선생의 글이다.
『이러한 고초는 망국대부 亡國大夫의 가족으로서 국가에 속죄하는 것이며,
선열의 영혼에 사죄하는 것이고, 동시에 내일의 자주 국민이 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족에게 남긴 전언.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 100쪽)















YES마니아 : 로얄 b********5 2019.01.17. 신고 공감 4 댓글 11
리뷰 총점 종이책
구성이 치밀하고 답사 코스까지 포함한 우당 이회영 전기
"구성이 치밀하고 답사 코스까지 포함한 우당 이회영 전기" 내용보기
필운(弼雲)이라는 호를 지닌 이항복의 10대손 이회영 선생. '한 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는 이회영 선생 전기이다.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다 고문으로 순국했다. 이회영 선생의 둘째 형 이석영 선생이 집안 어른 이유원의 양자로 갔다.   이석영은 당대 권력자이자 갑부였던 이유원으로부터 물려받은 깨끗하지 못한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운영자금으로
"구성이 치밀하고 답사 코스까지 포함한 우당 이회영 전기" 내용보기

필운(弼雲)이라는 호를 지닌 이항복의 10대손 이회영 선생. '한 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는 이회영 선생 전기이다.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지도자를 양성하다 고문으로 순국했다. 이회영 선생의 둘째 형 이석영 선생이 집안 어른 이유원의 양자로 갔다.

 

이석영은 당대 권력자이자 갑부였던 이유원으로부터 물려받은 깨끗하지 못한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운영자금으로 내놓았다.(신흥무관학교는 일제의 방해로 문을 닫을 때까지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서간도에서 1911년 개교한 이 학교는 경희대학교의 전신이다.)

 

이회영 선생은 개방적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이회영 선생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을 준비했다. '난잎으로 칼을 얻다'는 말이 있다. 난을 쳐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한 이회영 선생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회영 선생의 묵란에 제시(題詩)를 쓴 분이 일창 유치웅이다. 이 분은 심우장 현판 글씨의 주인공이다.

 

이회영 선생은 제자 윤복영을 위해 부채에 난을 치고 난이증교(蘭以證交)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선비의 절개와 기품을 상징하는 난을 사귐의 증거로 삼는다는 뜻이다.(심우장 현판은 위창 오세창 선생의 글씨로 잘못 알려져 있다.)

 

이회영 선생 집안은 경술국치에 망명을 결정했다. 이회영 선생은 임정(臨政) 설립을 반대했다. 파벌 싸움이 있게 되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은숙 여사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밥과 빨래를 했고, 베이징 시절 없는 살림에도 찾아 오는 손님들을 서운치 않게 대접하느라 늘 마음 졸였다.

 

여사는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마르크스의 아내 예니 마르크스가 생각난다. 비교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이회영 선생은 조선에서는 엄청난 부자였지만 타국에서는 가난한 투사였을 뿐이다. 육십을 훌쩍 넘긴 선생은 일제의 고문에도 동지들에 대해 어떤 발설도 하지 않았다.

 

이회영 선생은 양명학을 공부했다. 후에 선생은 아나키즘을 수용했다. 선생은 아나키스트 사상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정확히 이해했다. 선생은 특권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누구나 평등하게 대했다. 선생의 막내 동생(6형제 중 막내) 이시영 선생은 19487월에서 19515월까지 초대 부통령직을 수행했다.

 

남산 백범 광장에 이시영 선생 동상(좌상)이 있다. 김구 선생 동상(입상)도 있다. 환국 후 다른 길을 간 두 분이 화해하도록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찬 전 의원이 함께 세운 것이다. 이은숙 여사의 '서간도 시종기'로 인해 이회영 선생의 삶과 사상이 알려졌다고 할 수 있다.

 

여사가 이 책을 쓴 것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 그것도 7년에 걸쳐서였다. 1부는 이회영 선생 기록이고 2부는 관련 코스 답사이다. 코스는 셋이다. 1) 우당 기념관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까지, 2) 덕수궁에서 남산 백범 광장까지, 3) 명동에서 국립서울현충원까지이다.

 

이 책으로부터 많은 것을 새로 배웠다. 딜쿠샤 표석에 시편 1271절이란 표기가 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란 구절이다.

 

남대문로에 상동교회가 있다.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이회영 선생이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 곳이다. 이 결혼식이 양반 최초의 신식 결혼식이다. 당시 상놈의 교회로 불리던 곳으로 양반 신자가 많았던 감리교회인 정동교회와 달리 중인 이하의 신도가 대부분이었다.

 

선생은 파격적이게도 자신보다 여덟 살 어린 전덕기 목사에게 주례를 부탁했다.(28 페이지) 전덕기 목사를 이야기하려면 상동교회를 세운 스크랜턴(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턴의 딸)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홉 살에 고아가 되어 남대문시장에서 나무와 숯을 파는 작은 아버지 집에서 살던 전덕기가 선교사이자 의사인 1892년 스크랜턴 집에 고용되었다.

 

스크랜턴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정성껏 돌보고 공손하게 대접했다. 특히 이화학당을 세운 어머니 스크랜턴은 하인과 다름없던 전덕기를 가족처럼 돌보았다. 전덕기는 이에 감명을 받고 1896년 기독교인이 되었다.

 

청년 전덕기는 독립협회에 가입해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은 외국인 선교사가 세웠지만 상동청년학원은 전덕기 목사가 구국운동을 위해 세운 중등 교육기관으로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군사훈련 커리큘럼을 운영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세 번째 코스의 마지막은 주한 중국대사관이다. 이회영 선생과 위안스카이의 인연을 따라 찾은 곳이다. 망국 후 중국 망명한 이회영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위안스카이를 찾아가 결정적 도움을 받았다. 인연과 사연을 따라 잘 구성한 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리뷰어클럽으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리뷰입니다.

 

이달의 사락 m******1 2019.01.22.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천년을 위해 현재를 뿌리다.
"천년을 위해 현재를 뿌리다." 내용보기
얇은 책인데도 여간 진도가 나가지 못하는 책을 만났다. 감정이입이 잘 안 된다. 줄거리가 무겁고 문장마다 시간의 간격이 크기 때문이다. 그물코의 크기가 너무 커서 웬만한 물고기는 다 빠져나가서 그물이 휑하듯이 행간의 얘기가 휑하고 곁가지의 얘기도 많다. 얼마나 기록을 찾기가, 그의 발자취를 찾기가 어려웠는지를 짐작이 가게 한다. 아니 그 당시가 어른의 인생사 몇 줄 남기기
"천년을 위해 현재를 뿌리다." 내용보기

얇은 책인데도 여간 진도가 나가지 못하는 책을 만났다. 감정이입이 잘 안 된다. 줄거리가 무겁고 문장마다 시간의 간격이 크기 때문이다. 그물코의 크기가 너무 커서 웬만한 물고기는 다 빠져나가서 그물이 휑하듯이 행간의 얘기가 휑하고 곁가지의 얘기도 많다. 얼마나 기록을 찾기가, 그의 발자취를 찾기가 어려웠는지를 짐작이 가게 한다. 아니 그 당시가 어른의 인생사 몇 줄 남기기도 어려울 정도로 나라가 위태했고 일제의 만행이 잔악했는지 상상하기 어려움이 가득하다. 국사에서 배우는 우당은 문장도 아니고 몇 단어에 불과한 까닭을 알게 한다

 

박정희나 전두환의 군사독재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다. 그 시대의 얘기는 그저 어른들이나 매스컴을 통해서 어렴풋하게 알고 있다. 군사정권도 아닌 몇 해 전에는 회사 포인트로 예스24에서 노무현 자서전이랑 노무현 관련 책들이 결재가 안 된 적이 있었다. 잠깐이나마 그 때 공포정치의 무서움(?)을 체험했다. 그런데 외세에 의한 죽음의 공포정치는 상상이 안갈 정도이다. 그들의 압제는 듣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고문방법이 72가지나 된다고 한다.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이 침묵하고 인내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6형제를 포함한 집안 전체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조국과 의를 위해서 나라가 망한 해의 마지막 달에 압록강을 건넜다.

 

삶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둘을 함께 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할지라.” ---------- (p11)

  

6형제는 불효는 불충이라고 주장하는 유학자 가문에서는 용기를 내서 모든 재산과 인생을 받쳤다. 가문의 미래를 걸었다. 그들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의 흔적을 찾아서 기억하고 지금이라도 기록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여정 따라서 그곳에 관련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정의 시작은 필운대이다. 중명전, 상동교회, 서간도 삼원보, 북경, 텐진의 시절이 그려진다. 의무와 고난을 감내하는 무섭고 무서운 여정이었다(p61). 그리고 뤼순 감옥에서 그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용기와 고뇌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2부에서는 우당기념관에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덕수궁 중명전에서 북한산 둘레길 2구간에 성재 이시영 묘소, 명동 집터에서 주한 중국대사관까지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코스를 가이드하고 있다.

 

이회영 선생은 일제로부터의 해방뿐만 아니라 모든 독재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던 것입니다(p113). 우당은 독립에 그치지 않고 새 나라의 비전도 제시하고 무한경쟁의 다윈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갈파한다. 양명학을 배운 우당은 개방적이고 혁신적이면서 일의 성패나 이해관계보다는 옳고 그름, 그리고 과정을 중시하기에 당대의 사대부와는 생각과 행동이 여러 면에서 달랐다.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고 아랫사람에게도 존댓말을 썼다. 이런 사상의 밑받침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은 외교, 계몽운동, 의열투쟁까지 모든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하도 처량하여 눈물이 절로 난다(p78). 물려받은 재산이 현재 가치로 천억이 훌쩍 넘었지만 신흥무관학교 운영과 독립자금으로 조국의 미래를 위해 투자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 기간 내내 가장 괴롭힌 것은 일제 이외에 가난도 있었다. 서간도에서는 옥수수 알을 며칠씩 불려서 밥을 했고 북경의 가난한 동네에서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해서 주소가 길고 많다. 결국 아들과 두 손녀가 전염병으로 가족 곁을 떠난다. 추위와 굶주림은 아사직전까지 갔다. 하루에 겨우 한 끼로 독립의 그날을 기다렸다. 아들 규창은 만해의 승복으로 교복을 만들어 입었을 정도이다. 고단했던 삶의 애기는 이은숙 여사의 자서전 서간도 시종기’, 5남 규창의 운명의 여신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다. 이 목적을 달성하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다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인 것이다. ------- (p100)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p55). 그의 행동하는 역사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기록도 없고 보여 주기만 할 뿐 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을 넘어서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백년이 지난 지금 그의 정신을 생각하니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그의 묘소는 6.26 때 포탄으로 사라져서 지금 현충원의 그 묘는 빈 무덤이라는 것에 한 번 더 숙연해 진다. 이육사의 광야(曠野)는 현재의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미래에는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를 기원하고 있다. 끄트머리 연의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는 우당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듯하다. 그들의 노력으로 이 땅에서 안주하며 정체성을 지킬 수 있게 된 시대에, 그의 삶에서 무엇을 배우고 행동할 것인가는 오로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k*******4 2019.01.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