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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가 쓴 소설, 흥미가 생길 수 있다. 예전에 우리나라의 정재승 교수와 김탁환 소설가가 공동으로 '눈먼 시계공'이라는 소설을 발표했을 때 과학과 소설이 만나면 얼마나 상승 효과가 있을까 살펴 본 적도 있었는데.(그 책에 대한 만족도 평가는 숨겨두고.)
이 작가, 대단한 사람이다. 내가 감히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민망할 정도로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통섭'을 읽어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완수하지는 못했다. 읽기 실력을 더 쌓아야 읽어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접었는데, 이 책은 그에 비하면 읽기는 수월하다. 당연히 내용도 흥미롭다. 과학과 문학이 잘 만나면 이런 작품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오래오래 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얼마나 신선하고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이 책은 그에 비하면 확실히 과학적이다, 아니 과학 그 자체다. 상상이 아니라 관찰과 판단에 의한 결론으로서의 과학. 그것을 문학이라는 형식으로 펼쳐 보이는 역량, 그러므로 이 작가가 바로 '통섭' 그 본연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를 잘 하는 사람은 다른 것도 다 잘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게 현실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것인데, 평범한 나로서는 이 작가만큼 능력이 많으면 좋을까 어쩔까 그게 좀 궁금해지기도 하고.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을 때 벌레를 좋아하는 사람과 벌레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분별은 대략 언제쯤 일어나는 것일까. 나는 지독하게 싫어하는 쪽인데, CSI 라스베거스 편의 그리섬 반장은 벌레를 무척 아낀다. 이 소설의 주인공 래프는 벌레나 생물을 아주 아끼면서 관찰할 줄 아는 소년이다. 어떤 어린이는 곤충을 죽이는 데 재미를 느끼고, 어떤 어린이는 곤충을 보살피는 데 재미를 느끼고, 그 기질의 차이, 거기서 생물학자가 탄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미국 그 넓은 땅의 한 시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어린 시절이라는 게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이끌어주는 것인지 보여 주는 소설이다. 저절로 배우고 간절히 배우고 좋아서 배우는 일의 진면목이 담겨 있다. 우리가 버릇처럼 하는 말, 자기주도적인 학습 과정이 바로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것. 래프와 같은 아이가 생물학자가 된다는 것은 모두에게 축복이 되는 것이다.
개미,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 대상은 아니다. 개미에 관심을 갖는 어린이, 그 과정이 내 관심이라고 해야겠다. 학자라면 이렇게 자라는 게 가장 바람직할 것 같다. 래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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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에드워드 윌슨!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통섭(consilience)을 주창한, 개미 연구가이자 세계적인 석학(이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석학이다) 에드워드 윌슨이 소설을 썼다. 과학자가 쓴 소설이라면 어떤 편견을 가지게끔 한다. 과학적인 내용이 과도하게 들어가서 과학교양서인지, 소설인지 분간이 가질 않거나, 혹은 과학적인 내용을 싹 빼버리는 경우엔 그냥 심심한, 그래서 도대체 왜 이런 소설을 썼다 싶은 느낌이 들거나, 뭐 그런 편견 같은 것 말이다. 물론 과학자가 쓴 소설이라는 게 그리 흔하지는 않을뿐더러, 또 그런 편견에 들어맞게끔 쓴 소설은 세상에서 그리 평가가 좋지 못하니까 쉽게 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은 그런 편견은 편견인 경우가 많다. 에드워드 윌슨의 『개미언덕』은 딱 에드워드 윌슨이라는 과학자, 그것도 개미에 관한 석학이 쓴 소설이라는 선입견에 딱 들어맞는 소설이다. 선입견이라는 것이 대체로는 부정적인 경우가 많지만, 이 경우에는 꼭 부정적인 의미만을 담지는 않는다. 에드워드 윌슨이라는 인물을 조금 알고 있다면, 그가 왜 이런 소설을 썼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이고, 그가 개미 얘기를 바탕으로 썼다는 것 역시 당연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얘기이다. 감수를 한 최재천 교수나, 번역을 한 임지원씨나 쓰고 있듯이 이 소설은 에드워드 윌슨 자신을 모델로 하고 있다. 한 반쯤 에드워드 윌슨과 소설의 주인공인 라파엘 셈스 코디는 모두 앨라배마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둘은 모두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생명의 신비를 몸으로 느꼈다. 한 사람은 앨라배마 주립대를 졸업하고, 석사학위까지 마치고, 하버드대학으로 진학해서 박사를 취득했지만, 한 사람은 플로리다 주립대에 진학해서 당연히 개미 연구를 했지만, 외삼촌과의 약속대로 하버드대학 법학대학원에 진학해서 변호사가 되었다. 한 사람은 생물학 박사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변호사가 되었지만, 모두 개미와 자연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고,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 그 직업을 선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배경보다 더 라파엘이 에드워드 윌슨의 분신임을 일깨워주는 것은 라파엘의 성향이다. 라파엘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로 이야기하고 있는, “중간을 공략하라”가 바로 그것인데, 에드워드 윌슨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자연에 대한 사랑과 함께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을 사랑하지만, 과격한 방식은 안 된다는 것, 바로 그것.
그는 시위와 같은 과격한 방식에 기대지 않는다. 변호사가 되어 양쪽을 다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좌파의 급진주의도 배격하고, 우파의 종교적 극단주의에도 몸서리를 친다. 남은 것은 중도이며, 합리적(?)인 설득과 타협뿐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삶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는 어찌 보면 급진적인 이론을 내세웠다. 양쪽에서 다 비판, 아니 비난을 받았다. 르원틴 같은 좌파 과학자들에게는 극우 인종주의라는 비판을, 종교 쪽에서는 하느님의 섭리에 반하는 진화론의 거두로 치부되었다. 그가 취한 태도는 학문은 학문을 말한다는 것이었고, 진리는 그냥 진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최근의 『지구의 정복자』에서 혈연 선택을 버리고 집단 선택을 돌아선 것도, 그저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럴 수가 있는 것이었다. 바로 소설에서 평생을 바쳐온 자연에 대한 경이와 함께 그런 에드워드 윌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될까 싶은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라파엘은 거의 순탄하게 모든 것을 이룬다. 과연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래서 소설은 에드워드 윌슨의 이상(理想)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에드워드 윌슨은 그게 가치 있다고 할 것이다. 현실만 깔고 앉아서 불평한다면 미래에 대한 이상은 연기와 같을 뿐이니 말이다. (2013.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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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419페이지, 23줄, 27자.
라파엘 셈스 코디는 앨라배마 주 노코비 카운티의 클레이빌 출신인 청년입니다. 글은 대략 5부로 나뉘어 있고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만, 공통적으로는 라파엘(래프)의 성장기와 성취를 중심으로 진행합니다. 물론 의도는 제목이 암시하듯 환경입니다. 한 소년이 관심을 주변의 동물에서 환경으로 옮기고 그것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로스쿨에 진학하고, 환경전문변호사가 되어 실제 상황에서 그 역량을 발휘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소설로써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작은 에피소드들이 섞이게 되고, 읽는 사람은 이 흐름을 주요한 줄기로 해서 책을 판단하게 됩니다. 전체적으로는 무난합니다. 무난하다는 것은 보통이란 뜻이 되기도 합니다.
프로그맨이 왜 제일 앞에 등장하는가 했더니 이유가 있네요.
140611-140614/14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