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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또 독자들은 무엇을 기대하며 글을 읽을까? 글을 효용은 다양할 것 같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도 있고,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전달할 수도 있다. 남들이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시각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제공할 수도 있다. 독자로서는 자신의 처지나 생각에 궤를 같이하는 글에 공감하고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아무튼 울림이 있는 이야기가 되어야 존재가치가 생긴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김영민 교수의 칼럼은 제목에서부터 많은 질문을 던진다. 일상의 소재를 새로운 시각에서 접근해 생각의 실마리를 잡고 실타래 하나하나를 풀어나간다. 좀 삐딱하고 거칠지만 자유롭고 짜임새가 있다. 유머와 위트가 있어 무겁지 않다.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인생의 본질적 문제까지 터치한다. 다양한 책과 영화, 대화에서 얻은 이야기 재료에 자신의 생각이 잘 버무려저 있다. 그런 만큼 울림이 크다.
이 책에는 저자가 일상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영화와 대화에서 만난 다양한 이야기가 5부로 나누어져 소개된다. 삶의 반대편에 있는 죽음을 통찰하며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보여주기도 하고, 우리 모두가 불확실성을 삶의 요건으로 받아들이며 찰나의 행복보다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아도 좋다는 지혜를 들려주기도 한다. 교수라는 직업인으로서 학생들에게 근거없는 희망과 격려를 주는 스승이 되기보다 제자와 함께 배우는 도반으로서의 스승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느껴진다.
우리가 접하는 일상에서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문제의 본질까지 파헤쳐 보는 생각의 깊이가 느껴져서 참 좋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이 유머러스하며 리드미컬하다. 대부분 언론에 기고한 글들인데 다른 기고문에서 느낄 수 없는 그만의 스타일이다. 좋은 글쓰기의 본보기가 아닐까 싶다. 명절 때 시골에 내려가 부모님께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엄마가 “너 대체 결혼할 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아버지가 “손주라도 한 명 안겨다오”라고 하거든 “후손이란 무엇인가?”라고. “늘그막에 외로워서 그런단다”라고 하거든 “외로움이란 무엇인가?”라고. “가족끼리 이런 이야기도 못 하니?”라고 하거든 “가족이란 무엇인가?”라고.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신성한 주문이 되어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추석이란 무엇인가>에서)
크리스마스 이브인 어제 아침에 일출의 명승지 정동진에 시간여행을 다녀왔다. 이 책을 기차 안에서 읽으면서 정동진에서 일출이 아닌 일몰을 생각해 본다. 이 곳을 찾았던 과거의 추억은 일출 광경처럼 아름답게 채색되어 기억되지만, 일몰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살아가면 지금 순간순간이 더 소중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그런다면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를 찾아오는 소소한 근심은 우리가 누려야 할 행복으로 바뀌지 않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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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 블로그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 아니면 자기 계발서 위주의 책들을 주로 읽었다(간혹 베스트셀러 중에서 고르기도 했지만). 지금도 폭넓은 독서를 한다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정말 예전에는 편식을 해도 아주 심한 독서 편식을 했다. 그러다 우연찮게 시작한 예스 블로그를 통해 여러 블로거님들의 다양한 리뷰들을 읽고 서평단 책들을 접하면서 독서의 새로운 세상을 맞게 되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저자 김영민 교수는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으로는 알고는 있었지만 저자의 책을 읽을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러다 작년 초 옆 블로지기인 시골아낙님의 리뷰를 인상 깊게 읽은 후 마음을 바꿔 책을 구입했다. 어김없이 서평단 책 등 다른 책들을 읽느라 책장에 꽂아두었다가 작년 연말 김영민 교수의 신간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이 서평단에 당첨되어 읽으면서 부랴부랴 책장에 꽂혀있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을 꺼내 읽었다. 책을 다 읽은 후 다른 서평단 책 리뷰를 먼저 쓰느라 리뷰를 잠시 미뤘는데 책 구입한 지 1년이 다 되어 리뷰 적립 예스 포인트가 사라질 위기라 미뤘던 리뷰를 이렇게 쓴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서울대 김영민 교수가 지난 10여 년간 일상, 학교, 영화, 독서에 대한 이야기들을 묶은 책이다. 자칭 배우 전도연을 닮았다는 김영민 교수(실물을 보지 못했기에 사진으로는 비슷한지 모르겠다.)의 독창적이면서 자유롭고 유머스러우면서도 깊이있는 글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상처 입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확장된 시야는 삶이라는 이름의 전함을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관조 속에서 상처 입은 삶조차 비로소 심미적인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이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 p. 37 ▶ 청소년기를 지나 사회 초년생 때만 해도 죽음에 대해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젊을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살다 중년이 되어가던 재작년 오랜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나서야 인간의 유한함. 죽음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도 언젠가 돌아가실 것이고, 나 또한 그 길을 맞이 할 것이다. 친구의 죽음 이후 주변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깊어지고 확장된 것 같다. 내 삶을... 그리 아웅다웅하며 살지 말자고. 오늘 하루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자고 다짐해 본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남이 해줄 때만 맛있다. 추석 음식을 마음 편히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직접 음식을 하지 않는 가정의 권력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송편 속에 콩을 넣는 만행이 지속되고 있다. 송편을 한입 물었는데, 그 속이 꿀이 아니라 콩일 경우 다들 큰 좌절감을 맛보지 않나 - p. 64 ▶ 명절이 다가오면 아내의 스트레스가 증폭이 된다. 신혼 때보다는 덜 하지만 아마도 명절 음식 준비하는게 스트레스인가보다. 나는 명절 전날부터 전 부치는 것을 도와주며 아내 눈치를 살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추석상에서 아내가 내 앞에 놓은 송편들은 전부 콩 송편이다. 이상하게 다른 식구들은 꿀 송편과 콩 송편을 골고루 먹는 것 같다. 나도 꿀 송편을 좋아하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콩 송편만 먹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난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누가 그랬던가, 휴식의 궁극은 죽음이라고, 쉬고자 하는 욕망의 끝에는 죽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만화책으로부터 우리가 휴식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칫 죽음을 통해서라도 휴식을 취하려 들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만화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 p. 90 ▶ 초등학교 시절 집 근처에 만화방이 있어서 한동안 만화책에 푹 빠져 산 적이 있다. 만화방 할아버지는 내가 단골인지라 추가로 1권 더 읽으라고 할 정도였고, 어머니께서 늦게 까지 집으로 안 오는 나를 데리러 만화방에 찾아오실 정도였다. 당시 얼마나 만화에 빠졌냐면 공부하려고 구입한 종합장에 직접 만화를 그리곤 했다. 꽤 많은 양을 그렸던 것 같은데 이사를 여러 번 하면서 없어졌다. 지금은 어릴 적 재주가 온데간데 없지만 당시에는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서 그림대회에서 상을 받은 기억이 난다. 만약 그때 계속 만화를 그렸으면 지금 만화가나 웹툰 작가가 되었을까?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나는 휴식을 취할 때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본다. 이들이 야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세월호 합동분향소에 들렀을 때, 다음과 같은 유족의 편지가 벽에 매달려 있었다. "없는 집에 너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 가." 엄마는 이미 지옥에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p.182 ▶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2014년 4월 16일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을 포함해 476명의 승객을 태운 여객선이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 침몰했다. 우리는 사고 경과를 보며 분노했고 슬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졌다. 아니 잊혀지길 바랬는지 모르겠다. 세월호 사건 이후 정권이 바뀌고 우리는 희망을 꿈꾸게 되었다. 그러나 희생자 어머니, 아버지들의 고통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다시는 대형 사고 앞에 무기력한 정부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코로나 19에 맞서 총력을 기울이는 정부의 대응을 지켜보는 이유다... 소반이 사용되던 19세기에 사람들은 양반을 없애기보다는 모두 양반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양반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들도 제사를 지내고 족보를 위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주화의 20세기를 거쳐 21세기가 되었어도 값싼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하는 처지는 여전히 대물림된다. 지난달 지하철 구의역에서 고장 난 스크린도어를 보수하다 사망한 19세의 청년 김 씨가 남긴 갈색 가방에는 틈이 나면 먹으려고 준비한 컵라면 한 개와 나무젓가락 그리고 숟가락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양반'과 '노비'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 p.203 ▶ 양반이라는 사회 계층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양반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존재한다. 본인의 능력이나 노력과는 상관없이 부모를 잘 만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과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간의 계층 이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과연 2016년 구의역 사건 때 19세 청년 김 씨의 컵라면 한 개와 나무젓가락 등을 보고 모두들 분개했지만 과연 이후 우리 사회는 변화하였는지? 재작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스카이캐슬" 속 인물들의 이야기는 그저 드라마 속 허구의 이야기였을까? 공정하고 정의로운 함께 공존하고 성장하는 우리 사회를 오늘 꿈 속에서라도 만나고 싶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고 저자 김영민의 글을 좋아하게 됐다. 평소에도 깊이와 재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저자의 글을 좋아 하는데(김정운 등) 깊이있고 통찰있는 글을 따라 읽다가 저자를 닮은(닮았다고 주장하는) 영화배우 전도연이 나왔을 때의 유머스러움과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면 내가 김영민 교수의 글을 좋아하게 된 이유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좋았지만 지난 10여 년간의 신문 칼럼, 영화, 인터뷰를 한데 묶은 책이라 후반부로 갈수록 책에 대한 몰입이 다소 떨어졌다. 특히 '대화편'에서 그랬다(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민 교수의 자유로운 글의 리듬감에 몸을 맡기고 책을 읽었다. 앞으로 출간 계획인 논어 시리즈가 기대되는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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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반해서 읽게 된 책이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니.. 어쩌면 죽음을 핑계로 삶을 말하는 역설 같기도 하고, 어쩌면 죽음을 직면해보자는 섣부른 교훈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아침에 일어나서 죽음을 생각한다면 쓰지 못할 말도 없을 것 같아 모처럼 읽을 만한 글을 보게 된다는 기대감이 앞섰다.
저자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신문 칼럼을 쓰고 있고, 작년 추석에는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오르내렸다고 하나 신문을 사절한지 오래되다 보니 나에게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맞다. 더군다나 책도 이 책이 처음이라고 하니 말이다. 이 책은 그동안 저자가 신문이나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책을 읽다 보니 드는 궁금증이 한가지 있다. 칼럼에서 저자의 글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아마 극과 극으로 갈리지 않았나 싶다. 누군가는 낄낄거리며 웃으면서 읽다가도 그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글은 거칠다. 그러나 거친 글 속에서도 지켜야 할 품격을 지니고 있고 또 유연하면서도 단단하기조차 하다. 어쩌면 저자는 자신 특유의 글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 글은 이러니 읽고 싶으면 읽고, 읽기 싫으면 아무 말 하지 말라는 것처럼..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들었던 거칠다는 느낌은 글을 읽어갈수록 유머와 해학으로 다가온다. 마치 블랙 유머집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책은 다섯부분으로 되어있다. 일상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영화에서, 대화에서 저자가 만나고 경험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그는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내가 알고 있고,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인지를 되묻는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 내가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생각하게끔 만든다. 더군다나 그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목에 힘주지 않는다. 쉽게 말해 가르치려 들지를 않는다. 지금까지 많은 책들을 읽어오면서 섣부르게 교훈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진리인양 가르치려 드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기에 더 신선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책에 있는 수많은 글 중에서 이 책의 제목처럼, 아침을 열면서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저자가 말한 이유는 이렇다. 이미 죽어 있다면 제때 문상을 할 수 있고, 죽음이 오는 중이라면 죽음과 대면하여 놀라지 않을 수 있고, 죽음이 아직 오지 않는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더불어 정치인들이 말하는 가짜 희망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고, 공포와 허무를 떨치기 위해 사람들이 과장된 행동에 나설 때 상대적으로 침착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침착함을 가지고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과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단순히 나 자신만의 삶이 아님을 느끼기도 한다.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는 저자. 그는 소소한 근심을 누리는 건 그것을 압도할 만한 커다란 근심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에게도 소소한 근심 한가지가 생겼다. 그가 또 다시 책을 쓸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글쓰기가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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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그럴싸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모 인터넷 서점에서는 이 책에 ‘오늘의 책’, ‘강력추천’ 딱지를 붙여놨다. 책을 살 이유는 충분했다. 제목 좋고, 추천 붙고. 흡사 세상 다 살아보고, 모조리 학습하고, 무언가 깨달은 노교수가 말년에 짐짓 ‘크흠’ 하며 인생의 비기를 한자 한자 손글씨로 써내려 간 듯 한 제목이었다. 프롤로그는 제목이 주는 기대에 부응했다. 그리하여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생활에서는 멀어지지만 어쩌면 생에서 가장 견고하고 안정된 시간.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 책을 읽기 시작해서 얼마안가 저자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또 깜짝 놀랐다. 새해를 대하는 저자의 마음가짐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목표나 계획 같은 건 없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권투 선수 중 한사람이었던 마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벼락과 같은 인용이었다. 저자는 로마의 오비디우스와, 카이사르에서 죽음에 대해 설파 하다가 시공간을 초월 한 것이었다. 1000년의 세월을 지나 유럽에서 신대륙을 건너 벼락같이 타이슨을 불러낸 것이었다. 아아 타이슨과 새해의 계획이라니. 저자는 새해의 계획이란 힘든 것임을, 지켜질수 없는 것임을, 잘못 했다간 큰일 날 일인 것임을 상기시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아아 타이슨이라니. 이 책은 기꺼이 실용서이기도 하다. 저자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다. 실용과는 솔직히 거리감이 느껴지는 직군이다. 그럼에도 그는 칼럼을 통해 실용을 전파한다. 이 ‘실용’은 올해 꽤 핫 했다고 한다. ‘추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칼럼이다. 당숙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라고 물으면 “곧 하겠죠, 뭐”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당숙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 때라서 일부러 물어보는 거란다”라고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 라고 대답하라. 엄마가 “너 대체 결혼 할거니 말 거니?”라고 물으면 “결혼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거기에 대해 “얘가 미쳤나?”라고 말하면, “제정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정체성에 관련된 이러한 대화들은 해묵은 잡귀와 같은 오지랖들을 내쫓고 당신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다. 칼럼이란 무엇인가. 정치학과 교수인 만큼 정치에 대해서 쓴 글도 꽤 있지만 그 부분이 얼마나 좋은지 굳이 쓸 필욘 없을 듯하다. 타이슨과 실용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 만으로도 이 책은 소임을 다했다. 추천드린다. 여담으로 모 인터넷서점의 ‘오늘의 책‘이란 딱지는 ’이 책 좋습니다‘와 동의어가 아니다. 실례로 한국남자들이 전역 후에 여자들에게 억울하다며 징징댄다고 주장하는 ’그 책‘도 ’오늘의 책‘이다. 안타깝께도 ’오늘의 책‘에는 똥과 된장이 섞여 있는 것이다. 혹자는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알겠냐 말할 것이다. 변명을 해야겠다, 똥을 먹어보니 된장이 더 맛있는 줄 알겠더라. 아참 이 책은 된장이더라. |
![]()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참으로 비장한 제목이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 책을 구매하고서도 한동안 책꽂이에 꽂아두기만 하고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조금은 무거운, 말 그대로 ‘엄근진’의 기운이 훅 몰려들 것 같아서였고, 또 한편으로는 진중한 마음으로 읽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엄근진 :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한을 일컫는 말)
“이 책 재미있어요. 유머코드도 많고.”
단골책방 책방지기님의 추천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더 오랜 시간, 이 책은 제목만으로 나와 친근해졌을테다.
재미있다고? 유머코드가 많아?
그렇게 용기 내어(나와 맞지 않으면 다시 책꽂이에 꽂으면 될 일에 용기씩이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고, 어느새 웃음을 흘리며 몰입한 나를 발견했다. ㅋㅋ 비문이기는 하나, 딱 이정도의 웃음이었다. 크게 웃음이 터진다거나 잔잔히 미소를 짓는다기보다는 큭큭 새어나오는 웃음 ㅋㅋ 하지만 그 웃음 속에 때로는 부드러운 연민이, 날카로운 비판이 서려 있어 마냥 쉽게 읽히고 잊히지는 않을 듯하다.
‘책은 지난 10여년간 그가 일상과 사회, 학교와 학생, 영화와 책 사이에서 근심하고 애정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책날개에 적힌 소개처럼 총 5부로 구성된 책은 수십편의 짧은 글들을 빼곡이 싣고 있다. 아무래도 내가 관심이 가는 내용 때문인지 일상, 학교, 사회, 영화, 대화로 나누어진 중에 1부 일상과 3부 사회에서 나의 마음을 이끄는 대목들을 많이 만났다.
“또 한 해가 가고 오네요.” “당신 나이가 되면 모든 게 선명해질까요?” “아니요.” “그럼 더 혼돈스러워지나요?” “그냥 빨리 흘러가요. 비 많이 왔을 때 흙탕물처럼.” p.27
시간의 몰매를 피할 방법은 없다. 그나마 바로 이 순간이 남아 있는 나날 중에서 가장 젊고 좋은 때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p.28
몇 번이고 내 블로그의 어디엔가 적었듯이 나는 내가 이 나이에 여전히 서투르고 미숙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리지 않은 나이이니 연륜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침착하게 상황을 마주하고 여유롭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여전히 많은 것에 서툰 사람이 아닌가. 그저 빨리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남은 날 중 가장 좋은 날인 ‘지금’을 놓치지 않으려 다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마저도 게으름으로 흘려보낼 때가 많으니, 이 글을 적으며 다시 한번 그러지 말아야지, 마음 먹어볼 뿐이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야 말겠다는 이들을 위한 세 가지 주례사’ 중 한 대목도 눈길이 갔는데, 이미 ‘결혼을 하고야 만’ 나를 반성하게 하는 글이었다.
첫째, 아무리 부부지만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각자, 상대가 모르는 외로운 전투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우자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외로운 싸움을 혼자 수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외로운 전투 중인 상대를 되도록 따뜻하게 대해주기 바랍니다. 둘째, 살다 보면 둘 중 한 사람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나 잘못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나머지 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잘못을 한 상대보다 우위에 서게 되고, 사정없이 비난을 퍼붓게 되기 십상입니다. 바로 그 순간, 제발 정도 이상으로 잔인해지지 말기 바랍니다. 외로운 전투 중에 실수한 상대를 되도록 따뜻하게 대해주기 바랍니다. p.47
특히나 배우자가 잘못했을 때 ‘정도 이상으로 잔인해지지 말라’는 글에 얼마나 찔렸는지 모른다. 나보다 더 속이 상할 사람을 앞에 두고 위로는 커녕 내 분을 못 이겨 뾰족한 말을 일부러 꺼낸 것은 아닌지, 거기에 더해 내 속에 쌓여있던 오랜 앙금을 풀어낸 것은 아닌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마도 나는 몇 해가 더 지나 지금보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부족한 사람일 것이다. 그저 겉으로만 허허로운 척할 뿐 속은 그리 변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 좋은, 지금보다 손톱 만큼이라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대를 접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언젠가 내 이야기가 마무리 될 때 세상사람 다 몰라준다 해도 나만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작은 의미를 하나 손에 쥐고 싶다.
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이, 인생에도 끝이 있다. 모든 이야기들이 결말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듯이, 인생의 의미도 죽음의 방식에 의해 의미가 좌우된다. 결말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동안 진행되어온 사태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서 산다”는 말의 의미다.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죽은 것인가. 삶은 선택할 수 없지만 죽음은 선택할 수 있다. p.175
*나에게 적용하기 옆자리분에게 연민을 가지고 대하자(적용기한 : 지속)
결혼생활은 그와는 다른 별도의 역량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 역량은 다름 아닌 연민의 능력입니다..(중략)..그렇게 연민을 가질 때, 사람은 비로소 상대에게 너무 심한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p.44 *기억에 남는 문장 마이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대게 그럴싸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깨닫게 된다. 링에 오를 때는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다. p.25
이렇듯 성장은, 익숙하지만 이제는 지나치게 작아져버린 세계를 떠나는 여행일 수밖에 없다. 익숙한 곳을 떠났기에 낯선 것들과 마주치게 되고, 그 모든 낯선 것들은 여행자에게 크고 작은 흔적 혹은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는 우리를 다시 성장하게 한다. 혹은 적어도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p.35
사이다 발언은 듣는 순간에만 시원할 뿐, 논리가 부족한 경우가 많으니, 사이다만 들이켜다 보면 논리 내공은 날로 추락하게 된다. p.78
그리고 지도자라는 자리가 꼭 좋은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지도자에게는 책임이 따릅니다. 책임은 대개 무겁습니다. 무거운 것을 들고 있다 보면 힘이 듭니다. 오랫동안 힘든 상태가 지속되면, 우울해집니다. 우울한 나머지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뿐 아니라 일을 너무 잘해도 사람들이 시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위 지도자의 영광에는 이렇게 힘든 면이 함께 하곤 합니다. p.85
쉰다는 것이 긴장의 이완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오직 제대로 긴장해본 사람만이 진정한 이완을 누릴 수 있다. 당겨진 활시위만이 이완될 수 있다. p.87
진정한 평가의 시간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찾아옵니다. 그러면 미래에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의 삶을 평가할 때 적용되어야 할 평가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때 평가 기준은,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사회적 명예를 누렸느냐, 누가 오래 살았느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보다 근본적인 평가 기준은, 누가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p.115
어떤 존재를 지탱했던 조건이 사라지면 그 존재도 사라진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소멸의 여부가 아니라 소멸의 방식이다. 소멸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p.125
블레즈 파스칼 Blaise Pascal 은 말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여기에 있는 나를 보는 것이 놀랍다. 왜냐하면 거기가 아니라 여기에, 다른 때가 아니라 현재여야 하는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p.174
왜 해석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겠는가?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쓸쓸해서 해석을 하고, 초조해서 해석을 하고,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 해석을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불안해서 해석을 한다. p.265
책은 인류가 발명한, 사람을 경청하게 만드는 정말 많지 않은 매개 중 하나죠. 그렇게 경청하는 순간 우리가 아주 조금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자기를 비우고 남의 말을 들어보겠다는 자세요. p.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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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에 끝이 있듯이, 인생에도 끝이 있다. 모든 이야기들이 결말에 의해 그 의미가 좌우되듯이, 인생의 의미도 죽음의 방식에 의해 의미가 좌우된다. 결말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동안 진행되어온 사태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은 제대로 죽기 위해 산다"는 말의 의미다." -<어떤 자유와 존엄을 선택할 것인가>에서
칼럼을 즐겨 읽지 않는다. 즐길 수 있을 만큼 찾는 법도 모르고 그다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추석이란 무엇인가'만큼은 잘 알고 있다. 언제 읽었는지, 그리고 누구의 글인지도 모른 채 읽었다. 그냥 추상적으로 글쓴이를 가늠하기를 '방구석에서 책을 많이 읽는 사람' 정도였다. (방구석이라는 표현에는 절대 비하가 없다. 그저 그 구석 오롯이 혼자 책을 읽었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랬던 그 사람이, 이 사람이었다니.
내가 읽은 사회는 그렇다. 나를 누구의 기준으로 비교하는 걸 '죽도록' 싫어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남의 이력을 보고 곧잘 그를 '좋다' '훌륭하다' '꽤 배우신 분'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나도 그랬다. 방구석에서 홀로 책만 파고들었을 것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 하는 곳의 교수였다니. 이 작가의 글의 태가 보편적인 그들과 달라서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그런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거라는 나만의 또다른 판단 때문이었다.
올해 칼럼을 묶은 책은 이 책까지 딱 두 권이다. 처음 읽은 건 <선망국의 시간>이었다. 그 글을 읽고 나는 사회에 대해, 한국에 대해,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조금 깊어질 수 있었다. 이 글 또한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건, 지하철에서 계속 웃으면서 읽었다는 점이다. 이것만큼은 작가가 알아주면 좋겠다 싶어서 꼭 굳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면 영원히 살 것처럼 굴기를 멈출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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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포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냥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글을 쓴다. 그리고 책을 낸다. 이 둘의 장단점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나는 후자를 택한다. 단, 그 사람이 정말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택한다는 말이다.
김영민 작가의 삶을 나는 모른다. 이런 글을 쓰면서도 학교에서는 가만히 앉아 책을 읽었느냐 안 읽었느냐를 따지고, 그럼 오늘의 수업은 그만. 이라는 말을 꺼낼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의 첫 리뷰를 읽고 작가의 행동과 생각이 일치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작가, 교수, 누군가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정성들여 그의 책을 정리해주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그리고 사이사이 그가 어떤 (괜찮은) 사람인지까지 꼼꼼하게 넣는 글의 배열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궁금해진다. 대체 이 작가, 어떤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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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안 읽고 건너 뛴 부분이 있다. 영화의 부분에서였다. 이 작가의 생각을 다 훔치고 싶지만 역시 영화는 내가 어려워하는 지점이다. 물론 그 영화를 안 봤다 해도 글의 흐름만으로 영화의 분위기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어려웠다. 그래서 다른 부분을 곱씹으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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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증명해야 할 것들이 남아 있다. 스스로를 갱신하여 현대적인 공공의 삶을 구현할 수 없는 쥐떼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기 전과는 더 이상 같을 수 없다. 이 땅에 희망이 있어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기에, 희망을 가진다. -<희망을 묻다>에서
그의 질문은 구체적이다. 그렇지만 뚜렷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말을 하는 사람은 결코 스스로를 모르는 사람이다. 다만, 그 답을 모르기 때문에 끊임 없이 답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묻는다. 계속 묻지만 질문의 형태는 매번 달라진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던질 질문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는 이유는 꼭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고, 너무 빨리 잊는다"-<참사는 오래 지속된다>에서
개인은 결국 '우리'를 향해 가고자 생각을 하고 불편을 감수하고 오래오래 질문을 던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물론 아닌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끝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서로를 알아 본다고 믿는다. 그래서 한다. 서로를 알아 보고 서로를 위하기 위해.
나는 늘 세월호 관련 글을 끝까지 읽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도 여럿 그러리라 생각한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 남겨진 이들의 마음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참사에 대해서는 세월호를 뺄 수 없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부분에서는 결국 다른 쪽을 먼저 읽게 된다. 스스로 두려운 것이다. 결코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어서. 감히 읽지도 못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정말 혼자일 때, 책과 나 둘만 있다고 생각할 때 읽는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이 책은 웃게 하고 울게 하고. 사람이 뭘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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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끝으로 저자의 말 중 피식피식 웃게 한 부분을 또 보여주고 싶다. (이쯤되면, 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안 살까봐 두려울 정도인 셈이다!) 김민정 시인과의 대화에서다.
민정: 혹시 운동권이셨나요? 영민: 운동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운동권이라는 오해를 받은 적은 있습니다. 제가 쓴 글을 보고 누군가 너 빨갱이구나, 그런 적이 있어요. 너무 미안했죠, 빨갱이들에게 정말 미안했습니다.
맛없는 디저트를 먹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고 말하는 작가가 부러워진다. 나를 명확하게 생각하고 그 안에서 확장을 한다는 건, 꽤나 심도있는 일이다. 나는 그 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기분이 부쩍 들기 때문이다. 노력의 여부와는 상관 없이 깊이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쨌거나, 곧 2018년이 저물지만- 나는 이 책을 기필코 한 번 더 읽어야 한다. "우리 함께 시시한 행복을 꿈꾸기"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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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1
내게 있어 일단 무조건 호감가는 부류는, 글을 잘! 쓰는 사람 (순전히 내 기준이다), 책을 즐기는 사람 (책을 공기처럼 숨쉰다면 백퍼다), 제 분야에서 ‘프로’임이 절로 드러나는 사람 (섹시하기까지 하다)이다. 이 삼박자가 맞는 사람이면, 그냥 사랑에 빠질 수도.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근래 읽었던 컬럼이 계기였다. 기사 통해 ‘추석이란 무엇인가’ 란 제목의 짧은 컬럼을 읽고 저자가 몹시 궁금해졌더랬다. 그러다 그 컬럼 등을 모은 그의 신간이 나온 걸 알고 주저없이 집어들었다. 미어터지는 출근길 전철 안, 45도 각도로 책을 펴서라도 읽는 걸 멈출 수 없게 만든 그의 글은 키득거리며 웃게 만드는 유머러스함과 동시에 우리 사회에 대한 결코 가볍지 않은 시선들을 세련된 ‘까기’ 방식으로 한껏 드러내 주고 있었다. 햐, 정치학 교수님이 세상 불공평하게 글도 참 잘 쓰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분 당선 기록도 있다. 어쩐지 예사롭지 않더라니. 흐뭇. 일단 독서란 모름지기 ‘즐거워야 한다’ 가 지론인데 (그 즐거움이 앎에서 오는 것이든, 단순히 재미에서든, 타인과의 지극한 공감에서든) 그의 글은 다양한 성찬을 맛보고 난 듯한 뿌듯함 마저 얹어 준다. 그것도 무려 컬럼으로.
빌 브라이슨, 메리 로취 류의 ‘유머와 위트+지적 호기심 충족’ 글을 특히 좋아라 하는데, 그들만큼의 즐거움을 주는 국내 필자를 새로이 발견한 소소한 행복이랄까. (순전히 협소한 내 기준에서지만) 뇌의 다양한 영역을 건드려주는 책을 읽고 나니
뭔가 개운하다. 훗, 에필로그조차 신박하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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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밌다. 글의 리듬이 좋고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글 안쪽으로 들어서게 하는 힘이 있다. 몹쓸 개그나 내뱉는 아저씨들만 만나오다가 이렇게 센스 있는 아저씨를 만나니 반갑고 기쁘다. * 그래도 자꾸 전도연 배우를 가져다 쓰는 건 그만 하셨으면 좋겠.. 전도연이잖아요... 교수님도 아시잖아요... * 글을 잘 쓰신다. 휙휙 넘어가는 것 같아도 문장의 쓰임들에 거슬림이 없다.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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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럽게 마주하는 재치와 유머에 폭소했다 무게와 태도와 온도 모든 것이 적절하고 깔끔하다
* 복지국가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어느 절간에 가서 마음의 위로를 구하는가? 어떤 이들은 절간마저 떠나버린다. 일본의 위대한 만화가 쓰게 요시하루는 절간에서마저 떠나버린, 그야말로 완전히 '증발'해버린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이처럼 성소에서마저 사라져버린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정당성을 외부 악과의 비교 속에서 찾는 데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오멜라스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낫다는 데 안주하지 않는다. 악이 너무도 뻔뻔할 경우, 그 악의 비판자들은 쉽게 타락하곤 한다. 자신들은 저 정도로 뻔뻔한 악은 아니라는 사실에 쉽게 안도하고, 스스로를 쉽사리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악과 악의 비판자는 일종의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 악을 요청한다. 상대가 나쁘면 나쁘다고 생각할수록 비판하는 자신은 너무나 쉽게 좋은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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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무겁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제목이지만 내용은 꽤 산뜻하다.
프롤로그에서 언급한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적당한 냉소와 허무가 유머감각과 필력에 어우러져 읽기 쉽고 재미난 에세이가 되었다. 유명한 추석시리즈부터 다양한 꼭지들의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만원 전철 속의 시간도 빨리 지나가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읽다가 잠들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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