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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글은 부드럽지만, 감정의 선이 강하게 살아있어 읽을때마다 마음을 두드린다. <월간 정여울>시리즈로 발간된 12권을 모두 소장하며 틈나는대로 '신선한 산소를 공급받듯이' 읽으려 하는 이유도 모든 글들이 감정에 파고 들어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해주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앓고 있는 문제들, 감정과 감성을 두드리는 글들로 가장 온전히 회복됨을 알게 되었다. <월간 정여울>중 11월의 책 『토닥토닥』은 이미 제목만으로 나의 답답한 마음에 숨통을 터주었다. 꿈이 흔들리는 순간, 괴거의 상처가 쉬없이 되살아나며 괴롭히는 순간, 고독이 막상 좋은것만은 아니구나 싶어 지극한 외로움에 부들부들떠는 순간, 타인과의 관계가 알쏭달쏭 혼란스러운 순간 등등 막연하게 나를 어지럽히는 문제들은 이 책안에도 있었다. 그리고, 나의 닫힌 마음을 톡톡 두드리며 '문제없으니, 괜찮으니' 나아가십시요, 라고 이끌어준다. 글이 갖는 '토닥토닥'의 위력이 이렇게 강력할줄이야....
<월간 정여울>시리즈 중 11월의 책 『토닥토닥』, 독학으로 울뻔한 나를 토닥토닥 세워주었다
21편의 글들이 모두 산소 같고 진정제 같고 회복제 같지만, 유독 마지막의 글 '희대의 독학자들, 길 위에 자기만의 방을 만들다'는 크나큰 울림을 주었다. 최근 얼마동안 '독학'이라는 문제로 심히 끙끙거리던 나를 그 어느때보다 강력한 에너지를 장전한 상태로 회복시켜주었다!
'독학', 나에게는 가장 의미 있고 살맛 나는 단어이다. 청춘이라고들 부르는 젊고 푸릇한 시간들을 멋모르고 보내버린 데 대한 회한을 상쇄시켜주는 '삶의 진정제'이다. 물리적으로는 아무리 우겨도 더 이상 '청춘'에 끼어들 수 없는 시간에 서 있지만, 앞으로 걸어가야 할 인생의 후반부에 대해 결코 회의적이지 않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나는 '독학'을 좋아하기 때문이다,라고 늘 믿어왔다. '독학 에너지'에 힘입어 하루하루아침 (불가해할만큼) 설레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독학도 위기를 맞는다. (성공의 3요소를 살려) 재미있게, 자발적으로, 꾸준히 하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나는 것보다 낯선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공들인 시간이 아깝고, 내가 이제는 재생 불가능의 돌머리(돌대XX)가 되었나 싶어 한숨이 나온다.나름 목표를 갖고 정성을 다해 따박따박 걸어온 나의 독학의 길.. 찬란한 대로가 아니더라도 나 혼자서 콧노래 부르며 편하게 걸어갈 수 있는 참한 오솔길이기를 바라건만. 때로는 또는 자주 이 길은 낭떠러지를 만나 뚝 끊기고 만다.
이렇게 거침없이 속상한 날, 정여울의 토닥토닥』중'희대의 독학자들, 길 위에 자기만의 방을 만들다'를 읽게 된 것, 운명이다. 나의 독학 의지를 살려내려는 하나님의 은총일지도. 제목만으로 기대에 마구 흔들리는 정신을 부어잡고 해당 페이지를 편다. 아, 이게 또 무슨 우연이며 기쁨인가! 이 글의 주인공, 위대한 독학자로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 낸 주인공 중 한 명이 바로바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 '버지니아 울프'가 아닌가!(두 명의 독학자에 관한 글인데 또 다른 한 명은 '황진이'이다)
"나는 지금, 그리고 영원히 나 자신의 주인공이다" -----정여울의 『토닥토닥』 159쪽
버지니아 울프가 1937년 8월 6일 금요일에 적은 일기의 일부인데, 내가 보기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독학의 대가'로서의 면모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여성의 엘리트 교육이 허용되지 않았던 19세기 중, 후반을 겪으며 남자들만이 대학을 갈 수 있는 현실을 견뎌내야 했다. 더욱이, 영국의 대표적 사전 편집자이자 학자였던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자라며 학문이란 사람의 숨통을 조일 수 있다는 점을 먼저 터득했다(하이디 파크로 산책을 나가서도 아버지는 어린 버지니아의 잘못된 어휘 사용을 일일이 짚어 교정해 주었다). 아버지가 엄격하지만 이름있는 학자라는 사실에 좋은 점도 있었으니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아버지와 비슷한 학자들이었고, 학자의 집답게 책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조성된 지적 환경을 놓치지 않고 버지니아 울프는 여러 분야의 책을 탐독하며 스스로 학문의 세계에 입문했다. 제도적으로 일괄적으로 움직이는 학문의 세계가 아니라 혼자 힘으로 발견하고 자신의 성향에 맞게 일구어낸 자신만의 독특한 지적세계를 구축해나갔다.
버지니아 울프의 지적 세계에 대한 열정과 독학의 태도는 '블룸즈버리'라는 모임으로 더 활발히 발현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버지니아 울프는 언니 바네사와 함께 블룸즈버리의 고든 스퀘어로 거처를 옮겼다. 아버지가 주도하던 숨 막히는 지적세계와의 결별이었고, 자유로운 사상을 말과 글로 교류할 수 있는 신세계로의 이동을 감행했던 것이다. 남동생 토비가 마침 캠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다니고 있었고, 그를 통해 같은 대학의 유수한 젊은이들이 울프 자매의 집으로 찾아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사교를 위한 모임이었지만 점점 과감하고 진보적인 사유를 나누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회원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버지니아 울프도 글쓰기를 통해 작가로 비평가로 공적 생활의 영역을 넓혀가게 되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고든 스퀘어로의 이사, 블룸즈버리 활동은 울프에게 '나만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서곡이 되었다." ----- 정여울의 토닥토닥』 168쪽
버지니아 울프가 평생 습관처럼 해댄 독학은 생생한 산물을 낳았다.우선,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 』이다. 내가 대학시절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책을 통해서였고, 여성의 사화 활동과 지적 활동, 특히 글쓰기를 방해하는 어떤 시대적, 사회적, 개인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재능을 자신의 힘으로 꿋꿋이 펼쳐야 한다는 '선언'은 그 이후, 내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절대적 인상'이 되었다. 혹 '페미니즘의 교과서'로 운운되기도 하지만, 성에 상관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정립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해 하는 모든 영혼에게 적용될만한 보편적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자기만의 방'이란 정신적 자주성 , 물리적 독립성, 경제적 주체성을 의미한다. 타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에 집중하여 자신을 들여다보고 표현할 수 있는 '자기만의 놀이터'라고 해야 한다.
'자기만의 방', 독립적이고 주도적인 삶을 불러들이는 강력한 주문.
대학을 다니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여러 대학에서 강연을 했고 여러 명문 대학들이 명예박사 학위를 주겠다고 설쳤으나 모두 거절했던 버지니아 울프, 대학이니 정규교육이니 제도와 권위하에 놓인 지식의 영역은 '독학'하는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먼지 쌓인 책장에서 흥미를 끄는 책들을 꺼내 탐독했고 영국 도서관을 제 집 드나들듯 오가며 쌓은 그녀만의 지적세계에서 '새로운 소설'이 탄생했다. 전통과 주류와 거리가 먼 자신만의 방법으로 소설을 써나갔다. 행위와 사건 중심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이 주 내용을 이루는 소설'을 '창조'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실제로 우리가 그렇듯) 때로는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앞뒤가 맞지 않기도 하고 특별함이 전혀 없는 사소한 생각들을 늘어놓기도 한다. 계절이 바뀌는 바깥을 바라보며 테라스의 창가에 서서 수 페이지에 달하는 '생각'만 한다. 일명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명명되는 따분하기 짝이 없고 '소설로 써낼 만큼 뭔가 대단한 것이라곤 도통 없어 실망하고야 마는' 내용일 수도 있다. 가르침이나 교훈도 의도하지 않는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비슷, 혼란스러워 읽는 이가 자주 책 속에서 길을 잃고 책속 인물들의 난해한 생각 풀어놓기에 차츰 질려 결국은 책을 덮고야 마는, 쉬이 읽히지는 않는 소설일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 인생이든 하루의 일상이든 (특별한) 행동이나 (대단한) 사건보다는 (길게 이어지기도 하고 대책 없이 끊기기도 하는) 생각 또는 (자신도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잡념이 훨씬 더 많지 않은가... 이런 자세로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집어 든다면, '경이로운 신세계'가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댈러웨이 부인』에서 밑줄 그어놓은 문장이 그렇지 않은 문장보다 더 많다. 주인공 댈러웨이 부인을 위시하여 크고 작은 조연들이 세세하게 열어주는 각자 내면의 생각들은 무한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에서는 내면의 소리 외에도 하늘을 나는 비행기 소리, 도로의 자동차의 경적소리, 시내의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의 내면과 실제를 오가는 데에 경계가 되는 빅벤의 종소리 등 외면의 독특한 소리들이 등장한다. 아무런 특별함이 없을 것 같은 평범한 하루의 평범한 생각들, 노상 다니는 장소에서 접하는 늘 거기에 있어 들리지 않게 된 소리들, 여기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이후 소설의 새로운 한 축을 정립한 소설을 써낸 것이다! 어릴 때부터 '독학'을 통해 비주류적인 방법으로 자신만의 사고와 관점을 견실하게 구축해온 덕에 자신만의 글, 자신만의 세계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의식의 흐름기법을 유려하게 보여주는, 20세기 이후 소설의 한 축을 정립한,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 소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 대해 오해할 소지가 있다. 이곳은 내가 중심이 되고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독립적, 주체적 세계이지만, 나의 세계에만 함몰하여 나밖에 모르는 고립된 세계는 아니다. 그 시대에 흔히 그랬겠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여러 형제들 틈에 끼여 자랐고 학자이었던 아버지와 봉사활동 등으로 남의 일을 챙기느라 바빴던 어머니가 집으로 불러들이는 손님들 틈에 있다 보니 '혼자'있을 시간과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의 세계에는 늘 다른 사람의 세계가 혼재했다. '블룸즈버리 클럽'도 언제나 열려있어 수많은 이들이 상시 찾아왔으며,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를 보면 결혼 후 런던에서 벗어나 살았지만 혼자 있는 날은 거의 없을 정도로 각지에서 각층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신경증을 앓고 있었지만 날마다 정원을 가꾸었고 장거리 외출을 즐겼으며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지인들의 책이나 유명세에 오른 책들을 읽기를 좋아했고(러시아 작품을 잘 읽기 위해 러시아어 독학도 했다), 아예 '호가스 출판사'를 차려 자신의 책을 포함, 많은 출판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물론 이 모든'타인과 섞여드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글을 성실히 써내었다. 즉,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자신의 중심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타인과 무한히 교류하며 세상을 향해 열어 둔 공간이었다.
"그녀들의 고독은 '사람을 밀어내는'고독이 아니라 끊임없이 ' 내 마음에 맞는 친구나 스승을 찾기 위한'고독이었다. 대중에게 알려진 버지니아 울프의 전형적 이미지는 '자폐와 우울과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 아티스트'지만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면 오히려 평생 동안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나고 적극적으로 사람을 찾아다니는 열정적 측면이 자주 발견된다. 버지나 울프는 '지음 知音'의 벗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뿐 아니라 수많은 예술가와 인연을 맺었다. 말년에는 프로이트와도 만났다. 그녀는 누구보다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더불어 숨 쉬고자 한 예술가였다."
----- 정여울의 『콜록콜록』168쪽
'나의 방'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내 자신으로서 존재하겠다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타인의 방에도 스스럼없이 들어갈 줄 알고 타인도 자신의 방으로 언제든지 환영해 들이면서 자아와 타자를 둘 다 자신의 삶에 충분히 녹여들게 했다. 이런 버지니아 울프의 특별한 사유와 존재의 방식을 정여울은 '보통의 독자 the common reader'를 바라보는 버지니아 울프의 독특한 시각에서도 발견했다.
"울프는 지식을 대중에게 나누어주거나 타인의 의견을 정정하기보다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독서하는 사람, 즉 '보통의 독자'야말로 가장 교감하고 싶은 독자라고 이야기한다.(---) 대중의 공감이라는 개념은 그녀에게 상업적 요소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의 동력'이자 보편적이고 예술적인 공감의 원천이었다. (---) 권위나 전문성에 호소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열망과 열정으로 글을 읽는 독자, 그들의 아마추어리즘이 지닌 순정한 열정이야말로 전문가나 권위자가 흉내 내기 어려운 집단적 재능임을 일찍이 감지했다. 그녀는 선구적인 '독자반응비평'의 대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 정여울 『토닥토닥』 10쪽
분명 버지니아 울프는 시대를 앞섰다. 분명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여성에게 불리한 시대였지만, 이를 엄연히 직시한 버지니아 울프는 시대에 갇혀 '그들'처럼 살기보다는 시대와 무관하게 살기로 했다.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배웠고, 자신의 소리를 들어주려는 사람이 없어도 먼저 자신의 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글로 갈고 닦으며 세상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게 했다. 평생 '독학'으로 다져진 그녀의 삶은 그래서 시대를 앞섰고 시대를 뛰어넘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오히려 할수록 더 헷갈리는 것만 늘어나는 '독학'의 블랙홀 빠져 낙심하던 차에, 정여울이 들려주는 버지니아 울프의 독학 대가로서의 면모를 읽다 보니, 내가 감탄해오던 그녀의 '자기만의 방'스타일의 이모저모가 줄줄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몰랐던 20대 초, 내가 한 명의 여성임을 인식하게 했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 살아나가야 할 내 삶을 향해 정신바짝차리자고 결심하게 해 주었던 『자기만의 방』으로 출발, 『댈러웨이 부인』을 비롯하여 그녀의 일기와 여러 책들은 지금껏 내 삶에 때로는 서릿발같은 광풍으로 때로는 따뜻한 햇살로 들어서왔다. 버지니아 울프를 향해 내가 간직해 온 이 모든 존경의 바탕은 그녀의 '독학'이다. 버지아 울프가 외적으로 거둔 업적과 영예는 그녀가 홀로 꿋꿋이 해낸 독학의 당연한 산물일 터라, '부러움'이라는 단어로 대하고 싶지 않다. 끊임없이 언제나 항상 책을 대하고 글을 써나가던 그녀의 '독학하는 삶'자체가 부럽고, 이 정신을 이 자세를 나의 삶에도 지금에서라도 실현하기를 열렬히 바랄 뿐이다.
독학의 어두운 기운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포기를 생각할 만큼) 나를 엄습해올 때, 부디 버지니아 울프를 기억해내도록 하자! 어쩌면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며 또 이를 섬세히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는지... 그리하여 이토록 긴 세월 나를 사로잡을 수 있는지 평소 '나의 아이콘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품은 찬탄 그대로... 독학의 어두운 골짜기로 내려서게 되는 순간에도 '독학의 대가'이자 '독학의 스승'인 버지니아 울프를 바라보자. 세월의 흙빛이 나의 총기에 잿빛 구름을 몰고와 나의 기억력이 무뎌지더라도 나의 성실함조차 나를 배신한다 하더라도 ... 나는 결코 독학을 놓지 않으리.
14페이지에 달하는 '희대의 독학자들 길 위에 자기만의 방을 만들다'를 숨죽인 채 읽으며, 나는 실망과 무기력에서 차츰 살아났다. 시대의 제약 따위에 아랑곳 않고 학문과 예술을 향한 열정과 열성으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두 여성 버지니아 울프와 황진이, 이들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지만 나 역시 나의 열정과 열성을 다해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의 합점을 찾아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뿌듯함, 이 다행스러움...정여울이 소개해주는 버지니아 울프의 아름다운 글귀를 적어보며... 이 희망을 어루만져본다.
매 한 마리가 언덕 위를 날고 있을 뿐. 그게 아니라면 인생의 가치란 무엇일까? 날아오르는 것. 밤이나 낮이나 꼼짝하지 않는 것. 언덕 상공에 가만히 있는 것. 손을 살짝 움직이면 훨훨 날아간다! 그리고 다시 허공에 떠 있다. 한 마리뿐.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땅 위의 모든 것이 매우 고요하고, 매우 아름답다는 것을 바라보며. 아무도 보지 않고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남의 눈길은 우리의 감옥. 남들의 생각은 우리의 새장. ..... 정여울 『토닥토닥』172쪽
버지니아 울프의 가장 대표적인 사진, 1902년 7월 George Charles Beresford가 찍었고 런던 '초상화 갤러리'에서 볼 수 있다.
책에 몰두해있는 버지니아 울프(1926년), 독학하며 살고자 하는 내 삶의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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