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는 예수가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 더 나아가 예수가 놀라운 가르침을 전하기 때문에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말에 진정으로 귀 기울일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과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의 존재 자체, 필멸의 운명을 지닌 그의 몸을 통해, 그의 죽음을 통해 전해지는 말에 귀 기울일 때입니다.
예수에게 그 어떤 희망, 사랑, 용서의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은 순간, 오직 남은 것이라고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저 말 한 마디밖에 없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예수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인간이 하느님께서 계신 자리에 있다고, 하느님께서 계신 자리는 다름 아닌 거절당하고 단죄당하는 인간이 있는 바로 그 자리라고. 예수가 체포되고 단죄받기 전까지는 이야기를 읽는 이들이 나중에는 결국 다 잘될 거라는 환상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가면 예수가 자기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이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 그래서 우리도 우리에게 지금껏 익숙한 언어로, 단어로 예수가 전하려 했던 그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마르코는 단호하게 분명한 선을 긋습니다. 우리에게는 더는 그런 기대와 환상을 품을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의 순간, 체제 전환의 순간, 중대발표가 공표하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 그리고 이 세계 안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전부를 뒤엎는 사건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 복된 소식이 선언하는 이 새로운 세계는 그 어떤 고통과 재난과 실패가 닥치더라도 하느님의 통치권이 위협받을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렇기에 이 소식은 상상을 초월한느 충격적이고 어두운 소식이면서 동시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을 읽다 p. 109 / 로완 윌리엄스]
그가 서사를 풀어내는 한가운데 빠져있을때면 놀랍다는 말을 어떻게 더 표현할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벼락맞았단느 표현보다는 쓰나미가 덮어버린 느낌이다. 한 챕터를 읽을때마다 내용의 흐름에 휩쓸려간다.
둘째로 엄청나게 디테일하다. 앞서 쓰나미를 묘사한 이유가 몸에 담궈지지 않은부분이 없다. 그저 서사를 풀어낸 과정이겠지만 내용에 빠져 숨이 막혀버린다.
셋째로 결코 감정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끝에는 가슴속에 남아있는 존재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
누군가가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두말없이 말할꺼다. ‘로완 윌리엄스’의 책을 읽어보라고 말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책은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를 매료시킬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으로 읽고난 후기를 적을 수 있는 범주의 책이 아니라 판단이 된다. 그냥 신앙이라는것을 갖고있는 누구나 다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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