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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를 앞두고 '나라야 망하든말든, 민족이야 사그라지든말든, 나의 이익만
지켜진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인식을 가진 수많은 조선의 지도층을 볼 수 있게
하는 내용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명성황후께서 외세의 침략에 맞서면서 국가의 독립을 유지하려고 애쓴 것도
결국 가문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였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고종께서 아관파천까지 하며 지키려고 한 것은 조선민족의 자존심이나
대한제국의 번영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과 아들의 안위를 우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못생긴 엄상궁'이 조선의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던
조선총독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힌 경우는, 자신의 아들 영친왕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 아버지 고종과 자신을 만나러 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항의를 할 때
뿐이었다.
영친왕 '이은'이 일본에서 방자 여사를 만나, 화려한 결혼식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버지 고종이 돌아가신지 1년이 조금 지난 시기였고,
조선의 안팎에서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독립을 위해 가시밭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우리 황태자 전하께서는 죽으면 죽었지, 원수의 나라 여자와는 결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선민족의 염원을 외면한채 '방자' 여사와 결혼식을
올리는 던 날, 영친왕은 만면에 미소를 띄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제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민족의 구심점, 정신적 지주를
갖지 못하는 불행을 되풀이했는지도 모르겠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그 당시 일본으로 가 있던
영친왕이 이복형 '이강' 왕자처럼 외국으로 탈출하려는 시도라도 했다면
조선민족의 가슴에, '그래도 우리 황태자 전하'라는 성원이 남게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10살 아이를 인질로 데려가 철저하게 일본식으로 동화시킨
일본의 치밀함과 이등박문의 심모원려에 꼼짝없이 당한 우리민족의 불행과
이등박문이라는 인물을 가진 일본 민족의 또다른 불행이 결국 영친왕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이해와 동정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역사에서 '위대하다, 귀감이 된다, 역사로 남다'라는 찬사를 듣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가능하다. 평범한 삶도, 가족들간 누리는
안락한 일상도, 청춘의 사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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