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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인 현택수 교수는 뒤의 해제에서 '부르디외 사회학에의 초대'라는 말로 본 책을 소개하였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절한 소개였다는 생각이 든다. 부르디외의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강연문인 본서에서는 부르디외의 주요개념인 아비투스, 문화자본, 상징폭력, 그리고 무엇보다 장(場, Champ)등의 개념이 그 짧은 분량에 비해 비교적 자세하고 광범위하게 설명되고 있다. 부르디외는 일종의 주술행위이자 상징적 권력부여라 할 수 있을 '강의'의 성질에 대한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회학 이론들에 대해 하나, 둘 이야기를 해 나간다. 그는 권력은 물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때문에 우리는 장(場) 속에서 경쟁, 대립함으로써만이 재생산되는 아비투스와 장의 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을것이라 역설한다. 아울러 그러기 위해서 사회학은 끊임없이 그 상징적 권력부여의 측면에 대해 거리를 두고 반성하여, 과학의 '상징폭력'적 지위에 이의를 제기하여야 함을 그는 주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이 갖는 탁월성은 굉장히 '실천적'이면서도 '다원적'이라는 점에 있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자신의 말마따나 그저 '신비화 작업'일 따름인 과학의 '객관성'을 비판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는데, 자칫 지적 허무주의나 상대주의로 흐를 수도 있을법한 그의 이러한 작업은 "보편화 담론을 이용한 상징폭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는 두텁고 굳건한 목적하에 이루어지고 있기에 권력이나 폭력에 대해 결벽적인 지식인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함정을 가볍게 뛰어넘고 있는 듯 싶다.(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의 생전의 '행동'을 통해 명명백백히 보여졌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그는 지난 2002년 사망했다-사회적 실천의 영역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끝으로 본서의 번역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굉장히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 읽히는게 사실인데, 이유는 부르디외의 난해한 화법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어이없는 번역의 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역자마저 해제에서 불만족스러운 번역이라 인정하며 '독자의 각별한 인내심과 양해를 구한다'고까지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다소 '뻔뻔하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내 6000원은 어쩔 것이란 말이더냐. 동문선의 책은 비싸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다시 번역'해서 개정판이 나왔으면 하는 조그마한 바램을 가져본다. |
| 부르디외는 2002년에 죽었다. 그가 처음으로 사회학으로 개종을 하고서도 그는 한때 부르쥬와라는 비판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강의를 읽다보면 그가 어떻게 실천하는 이론가로 변했는지를 어느정도 파악할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그의 이론은 아주 편하게 써있다. 조금더 그의 이론을 공부하고자 한다면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이론의 핵심은 장과 아비투스 그리고 문화적 재생산과 어떻게 문화자본이 자신의 문화유산을 상속하기 위해서 사회구조를 이용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스럽게 그런 구조들에 속아넘어가는지 그의 냉철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을 관찰함으로 가능하리라. 암튼 그는 너무나도 여러가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의 한틀을 이해한다면 그가 그처럼 사회학에 자신의 전생을 걸었는지 알수 있을 것이다. |
| 이 시대의 몇 안 되는 행동하는 지성이었던 피에르 부르디외가 타계한지도 어언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사람은 갔지만 그의 이름과 이론은 남아 사회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난 6월 11일부터 7월 18일까지 모 미술관에서 있었던 부르디외 사진전에서 나는 인간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더불어 학자로서의 냉철함을 느꼈었다. 그가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꼈던 알제리 사회에 대한 것들로 가득 찬 그의 노트를 바라보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왔던 지난 날이었다. 동시에 1950-60년대 한국 사회 역시 사진 속 알제리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콜레주 드 프랑스는 16세기에 새워진 특수한 학교로 국가에 의해 특정 분야의 최고로 인정받은 이들이 교수로 재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책은 부르디외의 취임 강연을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학자로서 강의를 한다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얇은 두께는 기존 부르디외의 사상을 어려워하던 이들에게 적지 않은 희망을 불어일으키리라 생각된다. 역자가 이미 언급하였듯이 장문의 어눌한 말투, 필체는 부르디외의 트레이드 마크였으며, 동시에 그의 이론을 난해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동시에 우리나라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적지 않은 오류들로 인해 많은 이들이 부르디외라는 이름에 고개를 가로저었던 것도 사실이다. 부르디외는 특정한 장(champ) 에 속한 개인이 사회로부터 체득한 아비투스(habitus) 를 통해 자신이 속한 사회에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인간의 삶으로 파악했었다. 이는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키고 이들 간의 상호작용을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일종의 ‘중범위 관점’을 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의 ‘문화 자본’ 이라는 용어는 전통적인 부유층이 자신들의 지위를 타 계급과 어떻게 구분짓고 또 공고화하는지의 기제를 설명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물론 몇몇 이들은 이 개념을 두고, 경제 자본에 예속된 영역의 일부로서 파악해야 된다는 견해를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는 부르디외의 이런 사상을 깊이 있게 맛볼 수는 없다. 하지만 짧은 분량의 연설은 그가 이야기했던 아비투스나 장의 개념에 대해 어느 정도 틀을 형성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동시에 이 책의 매력은 다름 아닌 학문에 대해 그가 취한 태도에 있다 하겠다. 그는 철저히 객관적 혹은 주관적인 태도에 대한 배제를 꿈꾼다. 대신 그는 사회학만이 지닌 힘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역사를 통해서만이 역사가 지닌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로 이해될 수 있다. 기존의 지배적 학문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 제기는 그에게 있어서 사회학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였다. 이러한 그의 변화에 대한 갈구, 지향은 그의 사상을 변화를 위한 현실 파악의 기제로 작동하게 만들었으며, 그로 하여금 현실의 문제에 끊임없이 대항토록 만들었던 것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던 부르디외. 대학 4년 내내 지겹도록 들었던 문화자본과 아비투스라는 단어를 뒤로한 체, 느지막히 읽는 그의 책은 감미로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