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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역자 양명수(이대 기독학과 교수)에 의하면, 리쾨르가 1960년에 쓴 것으로 본격적인 해석학자로서 자리 잡기 전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평한다. 리쾨르가 악의 문제를 택한 것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먼저 현상학적 되풀이를 통해 악의 고백을 찾아낸다. 그 고백들은 사유되지 않은 부르짖음, 탄식, 두려움의 외침이다. 고백을 통해 체험은 언어 속으로 들어온다. 그 언어들은 상징 언어요. 일차 상징들로 자기 이해를 물리적인 표현으로 한 것들이다. 이런 일차 상장의 해석이 신화다. 그래서 신화는 2차 상징이다.
해석학의 순환이란 믿어야 안다. 그러나 알아야 믿는다고 하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의 명제와 같이 간다. 이 해석학적 순환이 어떻게 근대의 합리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할까? 해석도 생각으로 하지만 생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생각나는 생각이 있고, 생각하는 생각이 있다. 근대 이후 주체철학은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생각으로 모든 것을 말하려 하는 것으로 자율적 인간의 책임을 높이는데 공헌했다. 그러나 생각나는 생각이 없이 불가능하다. 상징이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일으키는 직접 적인 생각 없이 생각하는 생각은 불가능하다.
이 책은 2부체제로 1부는 일차 상징: 흠, 죄, 허물을 그리고 2부 처음과 끝의 신화에서는 제의적 세계관, 악한 신과 비극적 인간관, 아담 신화와 종말론적 역사관, 유배된 영혼과 신화와 앎을 통한 구원, 신화의 순환운동을...
일차적인 악의 상징= 노예 의지 노예의자란 개념 속의 악의 상징, 내면화 된 악의 경험은 허물 의식이다. 그 허물 의식이 노예 의지에 가깝다. 이 개념은 흠의 개념 속에 그 싹이 들어 있었다. 맨 뒤의 상징은 그 앞에 나온 상징들의 내용을 모두 취한다. 그러므로 상징들은 순환관계에 있다. 노예의지는 세 축으로 형성되며, 첫째 축은 '뭔가 있는 것'이고 두번 째 축은 '외부성', 세번 째 축은 '오염'이다. 악의 상징이 아무리 뿌리가 깊다해도 선만큼 근원적이지는 않다. 흠의 상징은 노예 의지를 통해 이미 그 점을 말하고 있다. 또 포로딤의 상징을 통해서도 그 점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 국가가 적의 손에 들어가더라도 계속 일하고 생산하고 창조하고 존속하지만, 오직 적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 자유로운 듯해도 이미 그의 일은 소외돼 있다. 그처럼 포로 상태에 빠진 한 국가의 이야기는 뿌리 깊은 악과 근본선의 문제를 암시한다. 훔의 상징의 궁극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오염의 구조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악함이란 선함의 대체물이 아니며 다만, 인간 안에 있는 순결과 빛과 아름다움이 되색되고 희미해지고 추해진 것임을 알게 된다.
적국의 포로가 된 상태로 일을 하는 것은 제 아무리 자유롭더라도 자유로운게 아니다. 라는 점을 짚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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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길이란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이라 한다. 현대성(모더니즘)의 반성으로 3가지 길이 제시되고 있다. 하나는 탈현대주의다. 탈현대주의는 현대 정신이 고양한 인간의 주체성과 합리성을 제약하고 탈역사를 주장함으로 새로운 인간 해방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두 번째로는 계몽주의 정신 곧 현대의 합리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서양의 위기가 기술 합리성에 치우친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기술 합리성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초래한 획일화를 치유할 대안으로 상호 행위 곧 커뮤니케이션을 내세운다. 그리고 제3의 길이 폴 리쾨르의 해석학이 이라고 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적 세계관은 윤리력을 견지하고 있다 한다. 윤리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불출되는 새로움이라고 하고 그 새로움은 새 세상을 넘보고 일군다고 한다. 메리 더글라스의 순수와 위험을 읽고 악은 순수함을 저해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순수와 위험 관점에서 악의 상징이 무엇인가 궁금하여 이 책을 구입했다.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도전해 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