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0%
  • 리뷰 총점8 50%
  • 리뷰 총점6 5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6.0
리뷰 총점 종이책
문자적 인간과 이미지적 인간...
"문자적 인간과 이미지적 인간..." 내용보기
보통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문자적 인간과 이미지적 인간이다. 문자적 인간은 부정의 신화 속에 산다. "부정의 신화"란 혁명적 좌파를 공격할 때 자주 쓰는 수사로써 현실 부정을 통한 유토피아 정신을 폄하해서 이르는 말이다. 문자는 드브레가 말한대로 상징이며, 상징은 "아직 없는 것"을 향한 갈구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이미 없는 것에 대한 갈구"이
"문자적 인간과 이미지적 인간..." 내용보기
보통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문자적 인간과 이미지적 인간이다. 문자적 인간은 부정의 신화 속에 산다. "부정의 신화"란 혁명적 좌파를 공격할 때 자주 쓰는 수사로써 현실 부정을 통한 유토피아 정신을 폄하해서 이르는 말이다. 문자는 드브레가 말한대로 상징이며, 상징은 "아직 없는 것"을 향한 갈구이다. 나는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고자 한다. 그것은 "이미 없는 것에 대한 갈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끝은 역사의 시작으로 휘어져 들어간다. 맑스의 공산주의적 이상사회는 합리적 이성으로 무장한 원시공동체 사회이다. 노스텔지어적 벡터와 유토피아적 벡터는 힘의 방향이 완전히 반대지만 서로 휘어져 들어간다. 이미지적 인간은 우선 즉자적이다. 즉자적 반응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각계에 포착된 바를 어떤 검열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가능한가? 아무런 검열없이 인식이 가능한가? 푸코가 고민한 문제였고, 그의 답은 그런 인식은 불가능하다였다. 내가 보기에 이미지적 인간 역시 하나의 신화로 보인다. 특히 요즘 예술가들이 추앙하는 영웅들은 대개가 이런 인간이다. 과도한 이데올로기 시대에 대한 또 다른 과도한 반동으로 이미지로부터 모든 담론들을 희석해내려는 시도들이 이어진다. 검소한 청교도적 전통을 지닌 미국은 선불교의 유입 속에서 미니멀리즘이란 미술장르를 탄생시킨다. 하지만 거꾸로 이 미술을 설명하려는 두터운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과연 어느 쪽이 승리한 걸까?

[인상깊은구절]
물질적 이미지 - 사진, 텔레비젼, 영화 등의 지시적 유사적 이미지 -는 부정문을 모른다. 나무가 아닌 것, 오지 않은 것, 부재는 말로 표현될 수는 있지만 형태적으로는 드러날 수 없다. 어떤 금지나 가능성, 하나의 프로그램이나 기획은 - 실제의 사실을 초월하거나 부정하는 모든 것은 - 이미지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형상은 원칙적으로 충일하고 긍정적이다. 이미지의 세계가 세계를 하나의 이미지로 변형시킨다면, 이 세계는 자족적이고 완벽한 것으로 일련의 단호한 주장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훌륭한 신세계"일 것이다. 상징적인 것만이 유일하게 대립과 부정의 표시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리뷰 총점 종이책
보이는 것에 관한 사전은 없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보이는 것에 관한 사전은 없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내용보기
라틴 아메리카로 간 프랑스의 전투적 지식인이라는 레지스 드브레의 센세이셔널한 이력에 비해, 매개론(mediology)이라는 그의 작업에 대한 국내에서의 소개가 전무하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드브레는 사실 그의 정치적 활동에 못지 않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간의 학제적 연구의 구체화로서 매개론이라는 새로운 작업을 개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과를 대표
"보이는 것에 관한 사전은 없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내용보기
라틴 아메리카로 간 프랑스의 전투적 지식인이라는 레지스 드브레의 센세이셔널한 이력에 비해, 매개론(mediology)이라는 그의 작업에 대한 국내에서의 소개가 전무하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드브레는 사실 그의 정치적 활동에 못지 않게 인문과학과 사회과학간의 학제적 연구의 구체화로서 매개론이라는 새로운 작업을 개시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과를 대표하는 작업이 {미디어 선언}(Media Manifesto: On the Technological Transmission of Cultural Forms)이다. 그리고 {이미지의 삶과 죽음}은 앞서의 이론적 작업을 확장하여 '서구 믿음의 역사적 인간학'을 구성하려는 야심에 찬 시도인 셈이다. 매개론의 독창성은 미학과 기술연구를 결합하는 그 연구대상의 새로움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연구 주제는 최근 출간된 부르디외의 {예술의 규칙}(동문선, 1999 참조)와 맞닿아 있으면서도 그것이 예술적 대상 그 자체의 상징적 물질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거리를 가진다. 드브레는 이러한 매개론의 대상을 사회학자들과 기술연구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사회학자들에게는 자신들이 연구하는 대상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물질적이라는 점을 주의시킨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기술연구자들에게는 기술적 혁신과 발명의 역사라는 것이 결코 혼자서는 진행될 수 없다는 점을, 즉 사회적 관계의 매개 없이는 혁신이 발생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매개론이 자신의 그릇으로 미학과 기술 사이의 다양한 매개를 연구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매개론은 무엇으로 자신을 채우는가? 드브레는 이에 답하기 위해 '이미지란 무엇인가?' 또는'재현으로서의 이미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 대신에 '이미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실용적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의미나, 이미지의 본질이라는 어렵고 딱딱한 질문 대신에, 영화나 텔레비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기술 매체들과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드브레의 문제제기 방식은 곧바로 구체화된다. 영화관의 스크린 위에서 마주 대하는 투사 이미지와, 텔레비전의 주사 이미지,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 위에서 자가 증식을 반복하는 "클론(clone)" 속에서 우리는 동일한 대상을 보게 되는가? 물론 아니다. 기술적으로 영화가 아세테이트 필름 위에 기록된 것을 편집한 뒤에 나타나는 것인데 반해, 텔레비전은 카메라에 포착된 장면을 안방으로 즉각 전달한다. 그리고 가상공간 속에 비친 이미지들은 텔레비전과 영화의 일방향적인 전달방식과는 달리 수신자의 반응을 기본 조건으로 가진 것이다―이른바 상호작용(interactive). 바로 여기에서 출현하는 것이 기술적 매체와 시각적 재현 사이의 공존이다. 익명의 영화관, 안방, 수많은 네트 성원들의 연결은 이미지에 대한 지각의 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드브레는 이러한 기술과 믿음의 결합을 "종교적 유물론"이라고 표현한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모든 형태의 기록을 다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번역자나 사전 없이도 모든 이미지를 볼 수는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숭배와 도상의 발전의 역사가 바로 우상에서 (예술)작품으로, 숭배의 대상에서 쾌락의 대상으로, 장인에서 예술가로, 현존에서 재현으로, 초자연적인 것에서 자연으로, 인격화된 이미지에서 사물로서의 이미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도상은 다름 아닌 인격화된 우상숭배로서의 스타시스템이다. 이러한 아우라의 상실과, 함께 나눌 대상이 사라졌다는 사실에서 기술의 일방적 결정을 본다는 것은 성급하고도 위험한 발상이다. 물론 드브레 자신에게서도 이러한 믿음과 공존의 의미에 대한 답변은 없다. 그러나, 밀란 쿤데라의 말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답변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일 것이기에 드브레의 질문을 곱씹어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리라. 보이지 않는 것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 모든 정신적 인간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역사를, 기억을 찾게 되는가?

[인상깊은구절]
보이는 것이 있으며, 그것이 현실이라면 각각의 지역과 지역 사이의 소통 필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WYSIWYG 사회(What You See Is What You Get)는 결코 열린 사회가 아니다. 시각화할 수 있는 현재에서 미래를 공제하고, 또 법처럼 거역할 수 없듯이 보이는 다가올 것에서, 가능성의 게임을 공제하면서―'당신이 보여줄 것이 없기에 당신은 틀린 것이다'―비디오스페르는 우리 인류의 체험에 비추어 볼때, 가장 덜 메시아적이며 또 동시에 가장 덜 변증법적인 시대일 것이다."
c******k 2000.03.0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