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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졸라의 소설 <작품>을 읽고는 절교까지 했던 세잔선생께서,발자크의 소설에 등장한 프렌호퍼라라는 화가를 보며,자신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읽고 싶어진 소설되겠다.칼 마르크스와 츠바이크의 극찬도 호기심이 들게했지만 말이다. 물론 이와 같은 찬사가 나에게도 비슷한 감동으로 전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발자크의 소설 가운데 비교적 덜 알려져 있다는 것도 읽어 보고 싶게 한 이유가 될게다.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책디자인상태가... 읽고 싶게..가 아니라..구입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녹색광선이란 출판사 이름 덕분에 쥘 베른의 소설<녹색광선>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소설에서 가져온 이름인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미지의 걸작>은 두 편의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이다. 분량이 길지 않다는 것도 읽게 만든 이유였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보니,이 소설을 읽고 싶은 이유가 왜 이렇게 많았을까? 아마도 발자크 소설 가운데 읽은 유일한 소설이 <고리오 영감>뿐이여서인지도 모르겠다.발자크의 소설은 읽다 포기한 책이 제법 된다.^^ 그런데 책머리에 편집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란미술관에서 보았던 조금은 괴팍해보이는 발자크 동상에 관한 비밀(?)이 풀린 것 같아 흥미로웠다.발자크에 대한 편집자의 글이 발자크에 대한 에세이처럼 읽혀졌다고 해야 할까...이미 알려진 발자크에 대한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로댕이 빚어낸 발자크의 동상에는 괴팍한 발자크가 아닌,창작에 열정을 쏟은 발자크가 있었던 거였다."파리의 로댕 미술관 정원에는 로댕이 말년에 주조한 발자크 동상이 서 있다.이 작품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로댕의 다른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그것은 세부적인 신체 표현이 생략된 몽상에 잠긴 채 살짝 고개를 뒤로 젖힌 약 3미터 높이의 동상이다.이 기묘한 동상은 공개되자마자 엄청난 혹평에 시달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댕은 이 동상이 자신의 필생의 역작이며 미학적 동력이라고 선언했다.그는 발자크의 삶의 정수를 요약해 완전히 몰두했기 때문이다.로댕은 이 소설가의 어떤 부분에서 영감을 받아 스스로 필생의 역작이라 일컫는 작품을 탄생시킨 것일까?"/7쪽 정말 궁금하다.한 작가의 작품을 어느 만큼 읽어야 그 작가에 대해 안다고 말을 할 수 있게 될지...솔직히 '영생의 묘약'과 '미지의 걸작'을 읽으면서 문학적인 재미를 발견(?)하지는 못했다.그러나 흥미로운 지점들은 많았다.'미지의 걸작'의 경우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소설인지 회화론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다.프렌호퍼 라는 인물만이 만들어진 인물일 뿐 실제 화가들의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프렌호퍼가 지향하는 세계에 대한 논조가 곧 예술 전반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 가기 때문이다."미란 엄격하고 어려운 것이네.결코 이런 식으로 도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지.그것의 시간을 기다려야만 하고 그것을 탐색하고 압축해야 하며 그것이 스스로를 드러내도록 긴밀하게 얽어매야 하네.형태는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보다 훨씬 더 붙잡기 어렵고 풍요롭고 굴곡 많은 프로메테우스야.긴 싸움을 거쳐야만 미를 그것의 진정한 모습으로 드러낼 수 있지."/83~84쪽 회화란 무엇인지..발자크의 시선에는 당시 그의 생각과 다른 흐름의 미술경향이 있었을 테고,그것을 바라보는 발자크의 시선이 담겨 있다.그런데 여기에는 또 발자크의 숨은(?) 뜻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회화론을 통해 진정한 예술가란 무엇인가? 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노화가가 설파하는 회화론에 대해 깊이 파고 들지 못했음에도 대부분 공감이 갔던 이유는 바로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영생의 묘약'은 바람둥이 돈 후안에 관한 이야기이긴 한데,발자크는 늙음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로 새로이 창조해 내었다.그리고 읽는 독자는 늙음과 죽음에 더해 욕망을 더해 생각해 보았다.바람둥이에 대한 응징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려냈다.언뜻 보면 응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나,삶에 대한 갈망이 집착으로 그려지는 상황자체가 블랙코메디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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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원근법을 처음 배운 순간을 기억한다. 초등2학년 미술 시간, 소풍을 다녀온 후 소풍 장소로 줄지어 가는 아이들을 그렸었다. 선을 나란히 두개 그려 길을 만들고 짝을 지어 줄지어 가고 있는 아이들을 그렸었다. 내가 그린 걸 보더니 담임 선생님이 길을 나란히 평행으로 그리면 안된다면서 점점 좁아지다가 두 선이 만나 소실되는 삼각형으로 길을 고쳐주었다. "길은 나란해요!"라고 우기는 내게 '실제로는 나란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라고 답했다. 하교길에 나는 여우 고개 위에 서서 우리 집까지 가는 길을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길은 두 개의 선이 나란한테, 내 눈에 점점 좁아지다 지평선 끝에서 두 선이 만나고 있었다.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미술사에 원근법이 발명된 순간이 있다는 건 안다. 기둥들이 줄줄이 늘어선 회랑을 원근법으로 그린 작품이 아마 원근법을 깨달은 화가가 그린 작품으로 안다. 그렇게 원근법이 발명(?)되었고, 측면의 얼굴에 눈은 정면을 보는 기괴한 평면의 이미지로 수천 년 세월을 뛰어넘는 이집트 벽화나 중요한 것은 크게 그리고 보던 중세 시대 그림에서 서양 미술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건 얼추 들어서 안다. 그리고 나서는 선과 색에 대한 논란이 이어진 것 같다.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은 선과 색, 형태와 내용에 대한 탐구를 치열하게 다루고 있다. 포스트 마던의 아이로 자란 내게,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대상에 닿을 수 없다고 말하는 포스트 마던 시대의 담론이 당연한지라, 닿을 수 없는 대상에 닿으려고 하는 프렌호퍼의 시도가 왜 무위로 끝났는지는 알 것도 같다. 다만, 프렌호퍼라는 화가를 통한 발자크의 치열한 사유가 있었기에, 대상의 본질에 닿을 수 없다는 진술로 인간들의 인식이 수렴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은 한다. 글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선'에 대한 고찰이었다. 자연에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화가가 선을 그리는 순간 대상을 배경에서 떼어내게 된다는 진술은, 재현(representation)이 가진 딜레마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 같다. '재현(representation)'에 관한 진술 중 가장 가슴이 뛰는 진술은 사실 성경 창세기에 나온다. 거기서 복수형의 하나님은 그렇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자'라고. (복수형의 하나님이라는 이슈, 단수형의 하나님이라는 이슈 역시 매혹적이나 그건 주제와 무관하므로 패스.) 저 형상이라는 단어가 image이다. 즉 인간은 신의 재현품, 복제품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본질에 닿으려는 시도를 한다는 거라고 '어숙룩하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재현된 자신들의 현실을 또 재현해 내려는 시도 역시 끝도 없이 한다. 프렌호퍼가 실패한 지점에서, 문학도였던 나는 사실 희희낙낙했었다. 20대 시절에 인간의 인지의 한계상 인간은 본질에 결코 닿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본질에 대한 지향을 포기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시달렸고, 그때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구닥다리, 문학에서 구원을 찾았다. 본질에 가장 에둘러서 가는 것이, 가장 지름길로 가는 것이라 내 마음대로 결론내려 버렸다. 즉, 비유와 상징을 통해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시도들 중 가장 적확하게 대상의 본질에 가서 닿는 방법인데?라고 생각해 버렸다. 가장 먼 길을 택하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래서, 가장 오래된 것(stories)에서 상징과 비유를 건져내는 것이, 본질을 파악하는 (영어로 쓴다면 본질을 움켜쥔다는 동사를 쓰겠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나는 믿는다. 물론, 콘래드가 <라군>에서 말했듯 망망대해에서 진리의 입자(particles)를 건지는 일이지만 말이다. 허나 상징과 비유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걸 사람과 사람 사이로 가져와 전달하는 방법은 자크 리베트가 90년대 초반에 시도한 방법이 맞다. 걸작은 과정 중에 있다고 설득하는 것. 즉, the best is in the making 이라고 주장해 버리는 거다. 그렇다면, 그리는 주체와 그려지는 대상은 영원히 그 인터페이스 안에서 완성이 된다. 심지어 그리는 주체의 '주체성'까지 이 과정 중에서 전도되는 것 - 그려지는 대상이 자신의 주체성을 나타낼 때 대상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포착한다고 말하는 것, 까지 외려 자크 리베트는 궁구해냈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인 걸작은 과정에 참여한 자들의 기억 속에만 살아있게 두고, 결과물은 영원히 봉인해버릴 수 밖에 없다. 이건 지극히 90년대다운 결론이다. 그 이전 시대인 발자크는 대상의 본질에 가서 닿을 수 없어서 결국 대상을 그리는 주체가 대상으로 가는 길과 주체인 자신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결론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완전한 언어를 통한 본질에의 지향은 원래 그렇게 무너질 수 밖에 없으니까. 결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한 구절로 맺는다. "Accordingly, the poet should prefer probable impossibilities to improbable possibilities. (따라서 시인은 개연성있는 불가능성을 개연성 없는 가능성보다 선호해야 한다.)” 즉, 예술가는 그럴 듯하나 불가능한 일을 하는 자들이란 뜻이다. 대상의 본질에 가 닿는 건 불가능하다고 애초부터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었다 - 그냥 그럴 듯한 것, 그게 재현의 최대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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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미지의 걸작」과 「영생의 묘약」을 함께 묶은 녹색광선 출판사의 『미지의 걸작』은 인간 욕망의 본질과 그 파국적 귀결을 탐색하는 강렬한 단편 선집이다. 「미지의 걸작」에서 화가 프렌호퍼는 절대적 아름다움과 진실을 화폭에 담으려다 실재와 재현 사이의 간극에 갇혀 광기와 절망으로 무너지고, 「영생의 묘약」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후손들에 걸쳐 이어지는 영생의 욕망이 어떻게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과 비극성을 드러내는지를 환상적으로 그려낸다. 회화와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이 두 편의 이야기에는 예술과 생의 본질에 대한 발자크의 깊은 사유가 응축돼 있으며, 김호영의 해설과 부록은 이 고전을 동시대적으로 다시 읽게 만드는 단단한 발판을 제공한다. 양장본 특유의 질감과 밀도 있는 편집이 인상적인 이 책은, 짧지만 응축된 문학적 긴장을 통해 인간 존재를 정면에서 응시하도록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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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 발자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 발자크의 작품에 대한 궁금증은 컸지만 막상 그 작품에 대해 독서하고 서평할 기회는 없었다. 녹생광선의 양장본 책들이 맘에 들어 보던 중 발자크의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발자크에 대한 소개글에서 발자크는 생애 내내 간절히 돈을 원했고. 부를 통해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으로 설명되어있다. 우리가 아는 발자크이다. 그는 소설을 써서 돈을 벌고 그 돈을 다시 사업에 투자하고 끝없이 쓰고 실패했다. 평민이면서도 귀족의 상징인 드(de)를 넣어 자신의 이름을 창조한 발자크, 그가 쓰는 작품의 살아있는 극적이고 생생한 욕망이 가득한 인물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은 두 개의 소설로 이루어져 있다. 첫 소설[영생의 묘약]은 호색한인 돈 후안을 통해 영원한 삶이란 불가능한 영역을 욕망하는 인간을 보여준다.(p. 11) 두 번째 소설 [미지의 걸작]은 미술이라는 주제로 루벤스, 렘브란, 티치아노, 그리고 주인공 프렌호퍼가 등장하며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p,12) 살아숨쉬는 듯 생생하게 말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욕망, 그리고 미술에 대한 이야기까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이야기가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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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오 영감>을 꼭 읽어 보라고 했던 분이 계셔서 발자크라는 이름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녹색광선에서 출판한 책들의 목록을 보다가 구입한 책이다. 사강의 <패배의 신호>를 읽고 녹색광선에 대해 생겨난 좋은 기억과 발자크를 언급해준 사람의 기억이 중첩되어 책 한 권이 내 앞으로 온 거다. 이것만 해도 경이로운 일인데 덤으로 천재 작가 한 명을 또 알게 되었다. 미술에 대해서는 재능도 취미도 없지만 내가 아는 범위 안의 다른 예술이나 창작 행위에 대입해 읽으니 무척 공감이 가면서도 시대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갈구하는 대상은 반복적이고 유사하다는 점을 또 한 번 목격하게 된다. 화가를 작가로, 그림을 소설로 바꿔 읽어도 좋을법한 걸작이다. 선(데생)을 중시하는 화풍과 채색을 중시하는 화풍의 대립이 나오는데 소설 쓰는 일로 바꿔보자면 묘사와 은유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나의 성향은 조금 복합적이다. 심리에 대해서는 묘사를, 행위에 대해서는 은유를 선호한다. 하지만 물활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살아있는 것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의도. 책의 뒷부분에는 <미지의 걸작>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에 대한 소개가 스틸 사진들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간결하게 시선을 끄는 이런 편집이 참 매력적이다. 이 얇은 책에는 소설 두 편 외에 이렇게 더 가져갈 수 있는 무엇들이 꼼꼼히 달라붙어 있다. 녹색광선에 대한 호감도가 광선처럼 솟아오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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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없는 작품. 겉표지도 너무 좋았구요. 책이 너무 예뻐서 소장하기에도 좋고 그리고 내용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았어요. 가끔 이렇게 걸작을 우연히 발견할 때면 정말 기분이 좋고 이걸 위해서 태어났나 싶기도 한데 저한테는 정말 최고의 작품이었습니다. 스포가 될까봐 줄거리는 설명하지 않을게요. 오노레 드 발자크 작가님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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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예술가가 완벽을 추구할 때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탐구한 짧지만 강렬한 소설이다. 예술과 현실, 천재성과 광기의 경계를 치밀하게 그려내며, 창작의 본질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예술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다. ‘진정한 걸작이란 무엇인가’, ‘예술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해야 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짧은 분량이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깊은 의미를 품고 있어 오래도록 곱씹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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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광선의 책이 늘 궁금했었다. 표지도 예쁘고 유명한 작가들이지만 사실 접근하기 쉽지는 않은 사람들이라 책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가 이번에 용기를 내어 두 권을 주문했다. <미지의 걸작>과 <감정의 혼란>이다. 둘 다 유명한 작품이라 더욱 기대가 된다. 예쁜 표지만큼 책 속의 만듦새도 훌륭하기를. 기대하며 올여름 휴가책으로 지정하여 읽어보기로 한다. 두근두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