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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이 에세이집의 원제는 Les testaments trahis. 우리말로는 '배반 당한 유언들'이다. 잡지에 게재했던 에세이 아홉 편을 묶은 것이다. 내가 실제로 읽고 이 리뷰를 쓰면서 인용문의 쪽번호를 달고 있는 책은 우리나라에서 1990년에 초에 청년사에서 번역해 출판한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는, 쿤데라가 알게 되면 펄쩍 뛸만큼 과대망상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이다!
흔히 카프카가 죽기 전에 자신의 미발표 원고들을 모두 태워달라고 유언했지만 그의 친구 막스 브로드가 그 유언에도 불구하고 고심 끝에 카프카의 원고들을 책으로 펴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카프카가 투병생활을 하던 요양원에서의 마지막 날들까지 원고 교정에 매달렸던 사정을 감안한다면 카프카의 유언이 과연 그의 모든 원고를 태우라는 것이었는지 아리송해진다. 즉슨, 당시의 정황을 논리적으로 되짚어볼 때 카프카의 유언은 "이미 출간된 것은 어쩔 수 없고, 미출간 원고 가운데 이것들은 출간해주기 바라고, 편지나 일기 같은 사적인 글이나 처녀작들은 폐기해주기 바란다"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카프카를 거의 숭상하다시피했던 막스 브로드는 바로 그러한 충정 때문에 오히려 친구의 유언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그만, 닥치는 대로 원고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출간하게 됐던 것이다. 생전에 일부 작품 말고는 대개 출판사들로부터 거절을 당하는 무명에 불과했던 카프카가 오늘날 세계문학사의 어엿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 막스 브로드의 공이 컸지만, 브로드의 예술관은 너무 조야한 것이어서 카프카가 '저자'로서 골라준 좋은 작품과 그저그런 작품의 구분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브로드는 또한 카프카를 아버지나 애인들의 관계망 속에 한정시키는 황당한 짓을 범하기도 했다. 오늘날 많은 독자들은 여전히 카프카를 아버지 앞에서 유약하고, 애인들에게 우유부단했던 소심남으로 떠올리고 있다. 만약 브로드가 유럽문학사를 좀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카프카를 유럽 소설사의 맥락에서 잘 자리매김하도록 노력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은 참 통한스러운 일이다. 유언 집행인으로서 막스 브로드는 카프카가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만 셈이다.
막스 브로드, 카프카의 어처구니 없는 유언 집행인
막스 브로드 자신이 작가였다는 점은 사태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든다. 즉, 브로드는 <사랑의 마법 왕국>이라는 소설에서 친구인 카프카를 모델로 하는 '성 가르타'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는데, 이 인물은 카프카의 종교 사상가나 진배없는 순수한 면만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게도, 후대에 와서는 브로드의 이 왜곡된 '카프카 상'이 일반적인 것으로 유포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카프카의 <성>이나 여러 소설을 읽어보면 금새 카프카가 여느 남성 작가와 다름 없이 짖굳고도 적나라한 성애의 묘사에 충실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전기적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생전의 카프카가 미혼 남성으로서 어떠한 정도의 성생활을 영위했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이다. 성(sex)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문학 자체에 있어서도 카프카는 막스 브로드 같은 정도의 (비록 그가 서른 편이 넘는 소설을 발표한 작가라고 해도)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높은 수준이었다. 이를테면 카프카는 유럽 문학사의 여러 정황들을 때로는 찬미하며 때로는 조롱하고 있는데, 前 세기의 영국의 이른바 리얼리즘에 대한 반감은 매우 컸던 모양이다. 그러나 카프카는 그러한 반감은 매우 유쾌한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아메리카>에서 디킨즈의 소설을 흉내내는 대목이 그렇다:
카프카의 문학적 유희: 디킨즈 골려먹기 (데이비드 코퍼필드 흉내내기!)
소설 <아메리카>의 첫 페이지 : 뉴욕 항에서, 칼은 배에서 빠져 나오던 중 자신이 선실에 우산을 잊어버리고 왔음을 깨닫는다. 그 우산을 찾으러 가기 위해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지식하게, 자신의 가방(소유물 전체가 들어있는)을 어느 낯 모르는 이에게 맡긴다 : 물론, 그는 이로써 가방도 우산도 잃어버리게 된다. 소설 초입부터 유희적 모방의 에스프리가, 그 무엇도 온전히 사실 같지 않으며 모든 게 약간은 희극적인 그런 하나의 상상 세계를 탄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97쪽)
밀란 쿤데라가 카프카 못지 않게 안타깝게 생각하는 '배반 당한 유언'의 사례는 야나체크다. 체코(슬로바키아) 예술사의 두 거장이랄 수 있는 야나체크와 카프카, 공교롭게도 이들 작품의 사후 소개 역할을 맡았던 것은 똑같이 막스 브로드이다. 이 독일인은 체코 밖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실 야나체크와 카프카를 전 유럽에 잘 알릴 수 있는 호재였지만, 정작 그 자신의 좁은 시야 때문에 이 두 거장을 체코에 속박시키는 실수를 범했다. 요컨대 그는 카프가의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야나체크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그를 위해 투쟁했던 것이다.
이 책에는 이렇듯 쿤데라가 유럽 소설과 음악의 역사에서 오해된 작가와 작곡가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에세이들을 싣고 있다. 그 가운데 1부와 3부만 새삼 돌아본다:
제1부. 파뉘르쥬가 더 이상 웃기지 않는 날
제3부. 스트라빈스키에게 바치는 즉흥곡
쿤데라는 유럽 음악의 1천년 역사, 소설의 400년 역사를 놓고 본다. 고대의 음악은 바흐에 이르러 일단락되고, 이후 고전주의 음악으로부터 새로운 음악의 시대가 열린다. 이 새로운 음악의 시대는 인간의 감상에 큰 무게를 두는데,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유럽 음악의 1천년 역사를 자신의 작품에 품으려는 시도를, 스트라빈스키가 감행한다. 사회주의 러시아는 물론이고 전 유럽에서 스트라빈스키의 그러한 시도에 반발한다.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전면적인 몰이해에 맞서 아예 스스로 지휘하고 녹음하기에 이른다(사진). 소설에 있어서도 물론, 새로운 시대에 와서는 심지어 대작가들조차 앞 시대의 소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못하는 경우들도 있었는데, 이를테면 나보코프가 <돈키호테>에 대해 남긴 글을 참으로 무지의 소치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하다:
견딜 수 없고 사실 같잖은 잔혹으로 가득한, 반복적이고 유치하고 과대평가된 책; 그 '흉측한 잔혹'은 그 저작을 '이제껏 씌어진 책 가운데 가장 야만스럽고 딱딱한' 책의 하나로 만들고 있다; 갸없은 산초는, 연이은 몽둥이질을 통해, 최소한 다섯 번은 이를 모두 으스러뜨린다. (74쪽)
그리고 기억할 만한 문장들:
브로드는 카프카의 일기를, 약간 검열을 본 뒤에, 출간했다; 그 일기에서 그는 창녀들에 관한 암시뿐 아니라 성에 관련된 모든 것을 삭제했다. ... 이리하여 오래 전부터 카프카는 신경증 환자들, 쇠약자들, 식욕부진자들, 허약자들의 수호 성인, 기형아들과, 우스꽝스런 프레시외precieux들과 히스테리 환자들의 수호 성인이 되었던 것이다 (59쪽)
바흐가 그의 동시대인들이나 그의 후배들의 예술에서 읽을 수 있었던 미래는 그가 보기에 추락과 같았을 것이다. 생의 만년에, 그가 오로지 순수 폴리포니 음악에만 집중하여, 그 자신의 후대 작곡가들과 시대의 취미에 등을 돌린 것; 그것은 역사에 대한 불신의 제스처요, 미래에 대한 말없는 거부였다. (즉, 역사는 반드시 상승하는 길만은 아니라는 것!) (77쪽)
감정적인 사람들보다 둔감한 사람은 없다. 돌이켜 보라: 감정들이 넘쳐나는 문체 뒤에 숨어 있는 심장의 메마름. (115쪽)
번역자들은 어휘를 풍부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 이 경향성 역시 심리상으로 이해가 가는 일이다: 번역가는 무엇에 의해 평가 받는가? 저자의 문체에 충실한 정도에 따라? 이는 그의 나라의 독자들로서는 판단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반면, 어휘의 풍부함은 어떤 가치, 어떤 훌륭함으로, 역자의 능력과 솜씨를 보여주는 그런 증거로 독자에 의해 자동적으로 느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휘의 풍부함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가치도 나타내지 않는다. (128쪽)
소설을 연극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한 사람은 바로 플로베르(헤밍웨이는 포크너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에 대해 '가장 존경스런 우리의 스승'이라 말한다)이다. 그의 소설들에서는, 등장 인물들이 일상적 분위기에서 만나며, 이 분위기는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 현재 순간의 구체성을 파악하는 것, 이는 플로베르 이후, 소설 발달사를 특징 짓는 여러 항속적인 경향성의 하나이다: 이는 거의 900여 페이지에 걸쳐, 18시간의 삶을 묘사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 그 절정, 그 참된 기념비를 발견하게 된다; 블룸이 거리에서 멕코이를 만나 걸음을 멈춘다; 단 일초 동안, 서로 주고받는 두 마디 말 사이, 무수한 일들이 일어난다. ... 서사예술과 극예술, 이 두 예술에서 구체성에 대한 열정은 상이한 힘으로 표현된다. (152~3쪽)
잃어버린 현재에 대한 탐구; 한 순간의 선율적 진실에 대한 탐구; 이 달아나는 진실을 덮쳐 사로잡고자 하는 욕망; 그리하여,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저버리는,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을 세상에서 가장 덜 알려진 무엇이 되게 하는 그 즉각적 현실의 신비를 꿰뚫고자 하는 욕망. 내가 보기엔 구어에 대한 연구들의 존재론적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어쩌면 야나체크의 음악 전체의 존재론적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예누파>의 제2막; 며칠간 산욕열을 앓고 난 뒤, 예누파가 침실을 나서며 자신의 신생아가 죽었음을 알게 된다. 그녀의 반응은 뜻밖이다: "그래 그가 죽었어. 그럼 이제 그는 아기 천사가 된 거야" 그녀는 마치 마비된 듯, 비명도 몸짓도 없이, 어떤 기이한 경이로움 안에서, 위의 문장들을 차분히 노래한다. ... 그것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또한 그에 못지않게 정확한 것이다. 당시 체코에서 가장 영향력 있던 작곡가 노박은 이 장면을 조롱했었다: "이는 마치 예누파가 제 앵무새의 죽음을 애석해 하는 것과 같다." 바로 여기, 이 멍청한 냉소에 모든 것이 있다. (161쪽)
라블레에게는 테마와 다리의, 전경과 배경의 2분 따위는 미지의 것이다. 그는 심각한 한 주제에서, 어린 가르강튀아가 뒤를 닦기 위해 발명한 방법들의 열거로 신속하게 옮겨 가는데, 하지만 하찮건 심각하건, 이 모든 이행이 그에게는 미학적으로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며, 내게 동일한 즐거움을 맛보게 한다. ... 서스펜스를 조작함이 없이, 이야기를 짜고 진실임을 가장함이 없이 글을 쓴다는 것, 한 시대, 한 사회, 한 도시를 묘사함이 없이 글을 쓴다는 것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 소설가가 형식과 이의 강제 규정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를 매료시키는 것이나 그의 심중에 담긴 것으로부터 단 한 줄도 멀어지게끔 강요 받지 않는 그런 구성을 창조하는 것. (185쪽)
도스토예프스키의 등장 인물들의 정체는, 다소 직접적으로 그들의 행위를 결정 짓는, 그들의 개인적 이데올로기에 있다. 키릴로프는 자신이 자유의 지고한 표현으로 여기는 그 자살 철학에 완전히 젖어 있다. ... <전쟁과 평화>에서 톨스토이의 등장인물들 역시 매우 풍부하고 발전된 지성을 소유하고 있으나, 그 지성이 변화하며 다양한 형태를 보이므로, 인생의 각 단계마다 달라지는 그들의 관념들에 입각해서 그들을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리하여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것에 대한 또 다른 개념을 제공한다; 여정; 구불구불한 길; 그 연속되는 단계들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종종 앞선 단계들의 완전한 부정을 나타내는 그런 여행.(24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