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고를 때 누군가의 추천을 받거나 신문에서, 혹은 다른 매체에서 이름을 접하거나 했을 때다. 혹은 어떠한 문학상의 수상 소식에 작가와 작품명을 기억한다. 조지 손더스라는 이름은 아마 이웃분의 리뷰에서 발견했을테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2017년 맨부커상 수상 소식과 '현존하는 영어권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 혹은 '영미문학계의 천재', '작가들의 작가'라는 타이틀 때문이었다. 소설을 구매해놓고 몇 페이지를 들추었다가 다 읽지 못하고 다음 책을 읽기 시작했다가 도중에 멈췄다. 일 년을 묵혔다 다시 펼쳐들었는데 어떠한 서사를 기대했던 소설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초반에는 정처를 찾을 수 없었다.
역시나 일 년이라는 기간이 필요했던가. 필요에 의해 읽게 된 책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인기를 누렸던 영화 <신과 함께>의 영향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 곧 그리워하게 되는 감정을 겪게 되어서일까. 미적거렸던 소설이 점차 마음속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조용히 스며 있었다.
![]()
소설 속에서 바르도는 죽은 영혼들이 잠시 머무는 공간이다. 구천이라고 표현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49재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였다. 즉 이승과 저승 사이의 시공간이다. 그 기간 동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담은 내용이다. 짧은 문장들. 어디에선가 실제로 있는 글들을 인용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죽음에 대한 철학서 인지 모를 정도로 애매모호하게 그렸다. 나는 처음에 마흔여섯 살의 '내'가 열여덟 살의 신부를 맞이하여 막 행복한 삶을 시작하려던 즈음에 들보가 떨어져 '병자 상자에 들어가는 것'을 잠시 병원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용은 링컨 대통령의 아들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링컨의 측근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회상이 짧게 이어졌다. 그것을 바라보는 일련의 인물들의 말소리가 마치 넋두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이해했다. 병자 상자는 이들의 관이며, 이들은 죽은 영혼들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원했던 것처럼 병이 나아서 병자 상자를 나갈 수 있을 거로 기대했다.
떠도는 영혼들이 있는 곳에 링컨 대통령이 찾아와 죽은 아들의 시신을 꺼내어 껴안고 울고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링컨의 셋째 아들이었던 윌리는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즉 이 소설은 링컨 대통령이 아들을 잃고 무덤에 찾아가 시신을 안고 오열했다는 이야기를 모티프로 만든 소설이다.
![]()
자기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아버지의 슬픔을 느낀 윌리는 다시 오겠다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저세상으로 가지 않으려 한다. 아버지를 기다리겠다는 것. 그렇다고 링컨이 대통령 관저로 돌아오지도 않았다. 윌리를 보내기 위해 바르도를 떠도는 영혼들은 직접 링컨을 데려오려고 했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몸을 가졌지만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영화 <신과 함께>에서도 나타났지만 떠도는 영혼들 중에서 좋은 영혼만 있는 게 아니다. 새로 온 영혼들을 이용하려는 이도 있는 법. 좋지 않게 소문난 영혼들도 있었다. 윌리를 돕는 영혼들 중에 로저 베빈스 3세와 한스 볼먼, 에벌리 토머스 목사가 선한 영혼들로 윌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영혼들의 위무가 펼쳐지는 곳이다. 이승에 두고 온 사랑하는 사람, 아직 죽음을 인정하지 못해 떠돌고 있었지만 열한 살 어린아이 윌리가 오며 이승에서 했던 잘못들, 마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던 거다. 영원이 바르도에서 머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들이 윌리를 죽음의 세계로 보내기 위해 링컨을 데려왔듯 그들도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
다른 사람의 경험은 내 경험과 다를 수도 있는 것일까? 다른 사람은 다른 어떤 곳으로 갈 수도 있을까? 거기에서 완전히 다르게 가지를 뻗어나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까? 그러니까, 내가 본 것은 그저 내 마음, 내 믿음, 내 희망, 내 은밀한 공포가 만들어낸 것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일까? (277페이지)
죽음을 보며 비로소 우리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가까운 가족이든, 친구든, 혹은 누군가의 죽음이든. 죽음은 우리 삶을 바로 보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왔던 것,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영혼들이 후회하던 일들이 나의 것일 수도 있으며, 내 주변의 삶일 수도 있다.
어떻게 우리가 잊고 있었을까? 그 모든 행복하던 때를? (365페이지)
삶과 죽음은 어쩌면 한끝 차이일지 모른다. 일부러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해도 어디에선가 불쑥 우리에게 다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소중한 날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좀더 잘할 걸, 하는 후회는 누군가의 고통이다. 고통이 오열로 터져 나오는 법이다. 조곤조곤 읊조리듯 읽었던 문장들이 드디어 하나가 되어 머릿속을 부유하기 시작한다. |
|
다소 난해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나 조차도 미리보기를 통해서 몇 장만 봤을 뿐인데 '이게 뭐지? 왜 이렇게 헷갈리지?' 라는 생각을 했으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때 그랬다.. '뭐지? 도대체 뭐야? 무슨 내용이지?' 이 책은 그 보다는 훨씬 쉬운 책이다. 오롯이 책에만 집중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술술 읽히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절대 어려운 책이 아니다.. |
|
이 책을 고른 데에는 여러가지 흥미로운 요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나와 취향이 맞는 맨부커에 2017년 최종수상작에 선정되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정영목 번역가가 번역한 책들 중 다수가 나와 취향이 잘 맞는 작품들이었다. 이 두 가지의 최고의 궁합이 한 작품에 들어있으니 나로써는 구매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책소개에서 '이것은 읽는 책이 아니라 경험하는 책이다'라는 문구였다. 실제로 읽어보니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색다른 독서 경험을 하게 했다. 책은 실제로 작가가 워싱턴을 방문했다가 링컨 대통령이 아들을 잃은 후 무덤에 찾아가 시신을 안고 오열했다는 실화에 착안했다고 한다. 바르도는 티베트의 불교 용어로 죽은 영혼이 사후 세계에 가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이승과 저승 사이의 공간이다. 소설은 화자가 사건을 주도하는 일반적인 구조와 다르다. 화자 없고 대화도 분절되어 있어 하나의 단락과 장들은 마치 전체 퍼즐에서 튀어나온 조각과도 같다. 죽은 영혼들은 바르도에서 대화를 나누며 보이지 않은 형체들의 울림이 소설의 전개를 압도한다. 소설가가 왜 예술가인지 정면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누구든 쓸 수 있는 글로 마치 하나의 창의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책이 아닐까 한다. |
|
바르도의 링컨 리뷰입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전개가 흥미로워요. 이 소설의 큰 줄기는 링컨과 그의 아들 윌리의 죽음에 관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르도’를 떠도는 영혼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매듭을 푸는 것, 저마다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미련이나 슬픔, 분노나 집착을 털어내고 진정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르도에 등장한 어린 신참, 그리고 그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에 영혼들의 세계가 술렁대기 시작하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이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둘 진정한 죽음의 세계로 향한다. 이러는 와중에 서로에 대한, 더 넓게는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을 경험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바르도의 링컨』은 죽은 영혼들의 목소리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존재 조건에 대해 탐구하게 한다. 지극히 슬픈 서사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위트는 결국 삶이란 이렇듯 ‘희극과 비극이 함께 존재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
|
*스포일러 조심* 조지 손더스는 왜 이런 형식을 택했을까? 그는 고전적이고 연극적인 방식을 통해 소설의 설정과 기반이 독자에게 낯설게 보여지길 바랐던 것 같다. 소설의 주요 화자들(볼먼, 베빈스, 목사 그리고 윌리)은 구천을(바르도와는 다른 의미이지만 이해를 위해 종종 섞어 쓰도록 하겠다.) 떠도는 혼령들(정확하지는 않지만 이것 역시 이해를 위해 섞어 쓰도록 한다.)로서, 뒤섞인 기억을 되뇌며 숨었다 돌아다니기를 반복하는 망각과 기만의 세계에 머무르고 있다. 아래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작가는 개인의 원한과 번뇌를 벗고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스스로 문제를 목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르도를 떠나 새로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나름 진지하게 하기 위해서 작가는 쓸 수 있는 모든 수를 쓴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길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영혼과 영혼 혹은 영혼과 육신이 닿을 때 마다 정신과 감정이 감응된다거나, 버티고 있는 영혼들을 구원하거나 지옥에 쳐넣기 위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현상들, 살아있는 인간이 병자-형태를 찾고 정서적인 교감을 나눌 때 그 광경을 보며 손모아 기적을 바라는 행위들은, 만약 조지 손더스가 평이한 문장으로 말했다면 허무맹랑해 보였을 것이고 재기발랄한 문장으로 적었다면 이 책이 원하는 결말로 다가가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연극의 극본처럼 보이는 이런 형태는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숙련된 독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도전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글에는 내러티브가 없다. 살아있는 주인공은 없으며 에이브라함 링컨의 숭고함도 없고 아수라장의 혼백을 구원해줄 영웅도 없다. 황량한 땅위에서 마치 인간인 것처럼 버티고 있는 혼령의 소란스러움과 불완전한 묘사로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그날 밤의 사건들, 그리고 스포츠 중계 중의 광고처럼 독자와 링컨 사이에 끼어드는 발췌문들 뿐이다. 1부 첫번째 장을 여는 한스볼먼의 혼란스럽고 자전적이지만 흡입력있는 이야기 뒤에 덧붙여지는 혼란스러운 대화는, 무방비한 독자를 진흙탕에 쳐박은 뒤 발로 마구 짓밟는 듯하다. '너희들이 원했던건 이런 이야기지? ' 하지만 그 들뜸은 '병자-상자'가 등장하고 로저 배빈스 3세가 등장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던지고 한 아이가 등장하고 한스 볼먼이 그 아이에게 사과하는 결말에서 독자의 기대는 산산조각 내버리고 만다. 두번째 장부터는 더 심각한데, 목적을 알 수 없는 일기나 기사, 기록문의 일부가 랜덤하게 등장하고 나열되며, 독자를 완전히 무너뜨린다. 무려 9장에 들어갈 때까지, 의도를 알 수 없는 발췌문이 유령처럼 독자를 감싸고 150년 전으로 천천히 데리고 간다. 처음 100페이지 동안 발생하는 일이라고는 새로 들어온 소년을 보기 위해 어떤 남자가 찾아오는 것 밖에 없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고 돌풍과도 같은 짜증에 주위를 둘러보면, 나는 어느새 스산한 바람이 부는 묘지에서 유령이 되어 있었다. 조지 손더스는 이 정신나간 귀신들을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을까? 당연히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전도하거나 종교적인 메세지를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평가받는 링컨의 위대함을 보여주고자 함일까? 그것도 아니다.(아닌 것 같다.) 링컨은 마음이 따스하고 책임감이 있는 자로 묘사되지만, 동시에 대통령과 아버지의 정체성 사이에서 넘어질듯 흔들리고 있다. 그는 못생겼지만 동시에 듬직하며, 따스하지만 냉정하고 매정하며, 윌리를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죽어가는 윌리를 침대에 내버려둔 채 파티를 연 사람이기도 하며, 아들의 죽음에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지만 수천명의 무고한 시민을 전쟁을 통해 몰살시킨 주범이고 국민을 내전의 소용돌이에 쳐 넣은 장본인이다. 그는 구세주이자 살인자이다. 사람들은 그를 우유부단한 시골뜨기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훌륭한 인품의 굳건한 자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맞냐고 물어본다면 양 쪽 다 맞다고 할 수 밖에 없다. 91장에서 윌리가 '그 말'을 외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물질빛피어나는' 현상과 함께 사건의 방향이 급변하는 장면은 참 인상적이었다. 뭔가 지지부진해 보이던 이야기는, 썰매를 타고 미끄러지듯 빠르게 전환된다. 102장에서는 볼먼과 배빈스가 나누는 대화는 무척이나 독특하다. 마치 그들과 함께 그곳에 오래 머물렀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랜 벗과 함께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바르도에 머물기 전 나는 무엇이었는지, 죽은 나를 보러온 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미처 놓지 못하고 있던 의심과 아쉬움을 끈을 놓는 순간, 그들은 바르도에서 사라진다. 이렇듯 조지 손더스는 강렬한 영감에 원대한 계획과 치밀한 설계를 통해 어려운 이야기를 훌륭하게 마무리 지었다. 이 시끄럽고 복잡한 이야기의 마지막이 볼먼의 속죄와 배빈스의 소멸로 끝나지 않고(정말 슬프다.) 흑인인 토머스 헤이븐스의 독백으로 마무리 되는 것이 그 지독한 설계의 한 예시로 보인다. 바르도에 떠도는 영혼들 중 왜 토머스만 링컨의 행동에 영향을 준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 링컨이 죽을 때까지 오래 함께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하지만 이 또한 소설의 다른 설정들처럼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불완전한 링컨은 죽은 윌리를 마주하고 자신을 '오픈'했고,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흡수' 했으며 흑인의 혼령과 긴 여행을 떠났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진정한 아메리카나로 보인다. 부커상 심사위원단의 일부가 미국인이었다면, 휴머니즘과 다양성을 섞고 소통이라는 키워드를 씌워 링컨과 게티스버그의 원죄를 연결한 이 소설은, 그들에게는 일종의 도파민 파티라고도 볼 수 있겠다. 링컨을 세종대왕으로 바꾸고 윌리를 평원대군으로 바꾼 뒤 고춧가루를 적당히 뿌려 억울한 사연으로 죽은 조선의 백성이 세종의 몸에 하나씩 들어간 뒤 말과 글을 알지 못해 고통받음을 읍소하면서 마무리 한다고 해도 이렇게 고평가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적어보니 꽤 괜찮아 보인다.) goodreads 를 읽어보니 거기도 별5개와 1개의 배틀이 벌어지고 있던데, 한국에서는 오죽하랴. 그저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영미권 내 고평가의 원인이지 않을까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나는 링컨을 잘 모름에도 큰 감동을 받았다. 말하고자하는 바를 위해 소설의 요소를 엿가락 늘리듯 바꾸어 버리는 기술적인 완벽함에 대한 감탄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엿가락을 통해 정확히 필요한 타이밍에 필요한 감정을 전달해주는 귀신과도 같은 솜씨에 감탄했다. 화자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작별할 때마다 울컥함과 아쉬움을 느꼈는데, 소설을 읽으며 그런 감정이 든 것이 살면서 거의 처음이었다. 고된 여정 끄트머리에서 친구를 떠나보내는 슬픔을 가득 짊어진 채, 부디 성불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떠났다. 하지만 아직도 지상 어딘가에서는 내세든 지옥이든 갈곳을정하지 못해 떠돌고 있는 아픔과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이 하나로 뭉쳐져 맴돌고 있는 바르도를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언젠가는 '물질빛피어나는' 현상과 '뼈-오싹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길. 9.5/10 - 23년 9월 22일 읽음 |
|
바르도는 세계의 사이 혹은 이승과 저승 사이를 의미하는 티베트의 불교 용어로 작품 속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머무르는 시공간입니다. 이 작품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윌리 링컨을 중심으로, 아직 이승가 저승 사이의 시공간인 바르도에 머물러 있는 영혼들이 대화를 나누며 서사를 이끌어가는 특이한 형식의 소설인데 바르도에 머물고 있는 40여 명의 영혼들이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주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링컨에 관한 여러 자료들에서 인용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챕터가 포함되며 가상의 세계와 실제 세계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보완하는 형태로 소설이 진행됩니다. 독특한 형식으로 흘러가는 소설이라 그 점이 작품의 매력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작품의 독특한 개성이 익숙한 흐름이 아니어서 다소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
|
이 소설의 큰 줄기는 링컨과 그의 아들 윌리의 죽음에 관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르도’를 떠도는 영혼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매듭을 푸는 것, 저마다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미련이나 슬픔, 분노나 집착을 털어내고 진정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르도에 등장한 어린 신참, 그리고 그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에 영혼들의 세계가 술렁대기 시작하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이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둘 진정한 죽음의 세계로 향한다. 이러는 와중에 서로에 대한, 더 넓게는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을 경험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바르도의 링컨』은 죽은 영혼들의 목소리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존재 조건에 대해 탐구하게 한다. 지극히 슬픈 서사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위트는 결국 삶이란 이렇듯 ‘희극과 비극이 함께 존재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라고 했지만, 첫 장을 넘기기 어렵네요ㅜ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