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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쯤 화장실에서 급히 나오다 미끌어질 뻔 했다. 균형을 잡기 위해 벽을 짚은 것이 잘못되었는지 왼쪽가운데 손가락이 퉁퉁 부어올랐다. 미련한 나는 병원 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며칠 지나면 괜찮겠거니 무심하게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다 부기가 빠지지 않자 압박 붕대를 사서 손가락을 고정시켰더니 그제야 부은 것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달이 지난 지금 부기는 거의 다 빠졌는데 통증이 남아서 아직 붕대 신세를 지고 있다.
손가락 하나 삐긋한 것 뿐인데도 일상이 편안하지가 않다. 불편하니까 자연히 자주 들여다보고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지게 된다. 왼손이니까 ,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이다부터 시작해서 화장실을 늘 보송보송하게 만들어야하고, 예전처럼 근육이 튼실한 것 같지 않으니 섭식과 운동에 더 신경을 쓰야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된다. 여기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몸 전반적인 체크를 하게되면서 찾아 읽게 된 시집 한 권을 소개해본다.
1994년 1월에 세계사 시인선 35로 초판, 같은 해 7월에 2쇄 찍은 정진규 시인의 시집 『몸詩』. "마음속에 난 몸의 길, 몸 속에 난 마음의 길을 따라가면서 마음이 몸을 떠나 혼자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명제로 표현할 수 없는 신체화된 상상력의 지도를 그려내고 있"다고 김인환(문학평론가)의 해설이 붙어있는 시집이다. 시인은 ' 몸詩'에 오랫동안 천착해왔는데 이 시집을 통해 매듭을 짓고 싶어했다. 긴 시간, 몸詩에 매달린 시인의 말은 이랬다.
나는 소년시절부터 영성적인 것으로서의 詩性과 육신적인 것으로서의 散文性 사이에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여기까지 흘러왔는데, 이 〈몸〉이라는 말이 내게 다가오면서부터 그것이 나의 그간의 상처들을 열심히 핥아주고 있음을 황홀하게 실감하고 있을 따름이다. -자서, 중에서
그러니까 시인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치료제를 모아놓은 약상자가 이 시집인 셈이다. 한알의 약이 되었던 시 몇편을 읽어본다.
몸詩*76 -봄비
나는 어제 새살이 돋는다고 썼다 일어선다고 썼다 하루종일 화계사 뜨락에 조용히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새살이 돋는다고 썼다 키가 자란다고 썼다 소리가 돋는다고 썼다 글자 그대로 관음이라고 썼다 소리를 본다고 썼다 하루종일 썼다 몸을 보았다 비의 몸 속에 손을 넣어 따뜻하게 만졌다 저녁 무렵엔 비! 그치고 안개 자옥하고 화계사 뜨락의 늙은 산수유 한 그루 하얀 타월에 비눗갑 하나 싸들고 마을로 목욕하러 내려가는 것도 보았다.
몸詩*55 -상처
속으로만 입고 있던 상처를 요즈음엔 몸에도 내고 다닌다 흉하다고 사람들은 피한다 그럴수록 나는 나의 꽃이라고 향내가 있다고 다가가 부벼댄다 사람들은 혼비백산 도망친다 요즈음 나의 상처는 속엣것이 넘쳐! 밖으로 기어나오고 있음이 분명한데 사람들은 自害의 흔적이라고 말한다 나는 몸에다 칼을 댄 적이 없다 꽃이 피는 순서는 밖에서 안이 아니다 고마우신 햇살과 단비도 있으셨겠지만 안에서 밖이다 일단은 고여서 밖이다 눈으로도 그대로 볼 수가 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이 되는 빠듯한 충만의 순서! 나는 그걸 아직 믿고 있다 상처가 꽃이 되는 순서! 그걸 아직 믿고 있다.
몸詩*63 -맨몸
이 여름이 나는 난감하다 내 주장대로 하자면 몸과 마음이 그 질량이 늘 같아야 하는 것인데 몸이 많이 축나 있다 어제도 허리띠 구멍을 또 하나 줄였다 어디가 아픈 게 분명하다 아니, 나는 알고 있다 마음이 몸을 파 먹어 그렇다 따지면 마음도 야위어 그렇다 마음이 배고파 그렇다 몸은 내 마음의 밥 이 여름이 나는 난감하다 더워도 벗을 수 없다 모두 다 들켜버리는 맨몸의 바다 그걸, 그 귀한 걸 이 여름엔 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슬퍼할까봐 그렇다
정진규 시인은 몸을 화두로 삼은 시인으로 유명하다. 시인의 상처받은 마음을 다스려주었다는 시들을 읽으며 시인과 같이 치유받은 느낌은 없다. 다만 시를 읽고 쓰면서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상처가 아물었다는 노시인의 고백이 마음에 닿는다. 시를 읽는 이유 중에는 분명 이 시인처럼 치유받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를 읽고 시를 쓰는 것이지. 모든 것이 흘러가도 남아 있는 몇 가지 중에 시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덧붙여 시인이 50대에 쓴 시들을 읽으며 삶의 비밀을 엿보는 것도 내가 시를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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