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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방향으로 소멸한다. 나는 이미 다다를 수 없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소멸하며, 동시에 아직 다다르지 못한 것을 향해 무한하게 소멸한다. 블랑쇼가 본 심연은 그 한 방향이다. 그 두 무한한 점근선적 소멸은 이 세계의 바깥을 원한다. 이 바깥의 세계는 오직 이 세계가 사라질 때에만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세계 속에 있는 한 나는 오직 점근선적 운동으로만 존재하며, 그 운동은 결국 죽음과 침묵을 동반한다.
침묵은 과소인 동시에 과잉이다. 다시 말해 침묵은 등가교환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너무 적거나 동시에 너무 많으며 결코 하나로의 일치에 이를 수 없는 불가능에 대한 반응이다. 불가능에 대해 가능을 온몸으로 염원하는 것은 곧 죽음을 염원하는 것이다.
침묵은 때로 과소 또는 과잉의 수다다. 등가의 수다가 내적 합목적성을 유지한다면 과소와 과잉의 수다는 그런 것이 없다. 이 수다는 말을 많이 할수록 더 애매해지고, 모순이 증폭되며, 말을 더 적게 할수록 교환할 수 있는 의미가 희박해진다. 이 때 말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감추며, 그 감춤 그대로를 드러낸다.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블량쇼가 말한대로 중성적인 것이다. 나는 바깥의 세계를 염원하지만 안쪽의 세계에 살고 있다. 나는 밤을 염원하지만 낮의 빛에 던져져 있다. 그래서 나는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곳에서 헤메고 있다. [인상깊은구절] 문학의 공간, 그 안에서 언어는 능력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곳에서 언어란 우리가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언어 안에 우리가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곳에서 언어는 결코 내가 말하는 언어가 아니다. 그러한 언어 속에는 말하는 자는 결코 내가 아니다. 내가 너에게 말을 거는 것도 결코 아니며, 내가 너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도 결코 아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모두 부정적인 성격의 것들이다. 그러나 부정은 단지 좀더 근본적인 진실을 위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 진실이란 이 언어 속에서 모든 것은 긍정으로 회귀하며, 또한 이 언어 안에서 부정하는 것은 긍정함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언어는 부재하는 자격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언어는 침묵하지 않는다. 왜햐나면 바로 이 언어 안에 내재한 침묵이 서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습관적인 언어의 특성은 그것을 듣는 행위 자체가 이 언어의 성격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공간이라는 이 지점에서의 언어에는 상호 이해가 없다. 시의 기능의 위협성은 바로 이 점에서 기인한다. 시인은 들리지 않는 언어를 듣는 자 인 것이다. 이 언어는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