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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의 전개는 조셉 콘라드(폴란드계 영국 소설가로 근현대소설 분기점으로 일컬어짐)를 기준으로 했을 때 전형적인 근대 소설 형식을 따른다. 진입하거나 흐름을 따라 가는데 있어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천일야화처럼 그가 보고 듣는 풍경과 세상을 담다가, 이야기를 자양분 삼아 자란 그가 어느 시점 핵심 이야기꾼이 되는 전환을 맞이한다. 앞서 콘라드를 언급했지만 이 소설에서 아프리카 모험 항해소설을 기대해선 안 된다. 공간 이동과 상징성이 분명하나 수면 아래 가라앉은 비밀의 바닥을 서칭하는 호수에 더 가깝다. 크게 전진한다기보다는 조금 알수록 더 많이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 열린다. 실제 아이가 보는 세상이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팔려가는’ 노예 처지인 주인공은 현실을 비판하거나 냉소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감각적으로 그리며 상상하는 모습이다(한줄 요약하라면 He pictures or imagines로 문장을 시작하리라). 그의 호기심과 영향력 있는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소설을 이끈다. 그가 끌리는 대상(의 이야기들)이 자신을 키울/돌볼 뿐 아니라 독자도 함께 빠져들게 된다. 오셀로의 이국적 모험과 이야기에 휘말리는 데스데모나처럼. 소설은 마치 사는 이유가 들려줄 고유하고도 특별한 이야기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이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 성격과 성공이나 외부 조건을 더 앞지른다. 주입된 강요에 투사처럼 맞서는 쪽이 아니라 인상 쓰지 않고 조용히 가지치기하며 수풀림을 빠져 나간다. 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돈과 섹스(성기)가 끊임없이 주인공과 관계와 이야기를 팽팽하게 끌어당긴다는 데에 있다. 아버지의 빚을 대신해 무역 ‘상인’인 삼촌에게 넘겨진 이후 남녀 구분 없이 성적 희롱과 추행에 노출되며 소년은 서서히 세상에 눈뜬다. 식민주의 책략이나 기획을 저격하고 폭로하는 글은 아니며, 소년의 눈과 귀와 입을 통해 안전하고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직조한다.
6개의 챕터 소제목(담장이 있는 정원, 산동네, 내륙 여행, 화염 문, 욕망의 숲, 핏덩어리)만으로도 이야기 추적이 용이하다. 친절하고 구체적일 거라는 인상을 풍기나 아이의 눈높이를 통해 관찰자로서의 거리를 유지해, 다소 모호하고 흐릿하게 보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이 ‘다가오는’ 풍파를 잘 모르기에 과장되게 묘사하지 않아 안도했다. 부모의 불화를 눈치 챘던 터라 원죄 의식과 죄책감을 비롯하여 버림 받거나 내쫓기는 ‘유기 공포’를 어깨에 짊어진 친구인 까닭에서다. 울음기 가득한 뜬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유수프는, 비록 고향집에서 추방되었지만 사람들의 연민과 보호를 받는다. 부성애와 모성애를 자극하는 그 앞에 온 마을이 동원된다. 삼촌을 따라 나선 인도양 무역 횡단에서 원주민과 개척민 사이의 충돌과 긴장감을 맛보지만 거친 강도로 밀고하진 않는다. 언뜻 보면 유순한 순응주의자 같은데, 속내는 경계와 경계를 오가는 난민으로서 여러 삶의 방식을 존중할 뿐 어떤 정해진 율법과 종교와 혈연적 관행도 따르지 않는다. 고행(苦行)자처럼 조용히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간다고나 할까. 이런 잔잔한 소년을 향한 숙모의 치유 갈망 손길이 위험한 유혹으로 더해져 클라이맥스를 연출한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상기시키는 숙모의 역사는 철저히 남성적 지배 논리와 공포 심리로 구축된 듯하다. 재력과 지역 유지라는 위세에 힘입어 지금의 남편(삼촌)을 산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의 공허한 삶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병들어 아픈 몸과 지울 수 없는 흉터로 상징된다. 주변 어른 칼랄의 만류에도 주인공은 정원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미혹되어 숙모의 부름에 응한다. 신성한 이야기꾼으로 변모한 그는 숙모의 미지의 위험한 몸도 이야기 집처럼 열어본다. 누구의 성적 도발과 어느 정도의 스파크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소설은 영리하게도 안타까운(더한) 사연을 지녔으나 주인공과 합을 이룰 소녀를 투입한다. 숙모의 집과 방에 그녀가 있어 마치 간 것처럼 알리바이를 깔아주지만 눈밝은(?) 독자는 안다. 주인공의 대단한 호기심과 이끌림은 소녀가 그곳에 없어도 들어서고 말았을 거라는 사실을. 이와 관련된 추문을 알게 된 삼촌도 그를 질책하거나 응징하는 편보다는 별 다른 조치 없이 아내의 부도덕성을 침묵으로 욕보이고는 덮는다.
구르나의 ‘낙원’이 ‘제인에어’같은 계몽적인 근대소설 같다고 밝혔듯이, 내용은 매우 아프게 현실적이고 지금 우리네 모습을 비춘다. 각종 출신과 이유(명분)로 신분제를 적용하고 내분과 충돌을 벌이는 상황이 이 좁고 작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각종 이분법적 프레임 씌우기와 갈라치기와 정쟁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임금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러 조건과 배후로 ‘팔리고 저당 잡힌’ 삶이 그리 낯설지도, 딱히 불쌍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도리어 우리 모두가 어떤 정해진 판에 들어갈 작은 퍼즐 조각으로 받아들여진다. 무역 착취와 굴종 외교를 두려워하는 그들 앞에 나타난 더 원색적인 허기를 지닌 독일 군대의 존재는 층층의 식민 지배와 폭력을 암시한다. 주인공이 동정을 뗐는지, 꿈의 신부를 맞이했는지조차 불투명한 열린 결말은, 다음 이야기보다는 그가 감각적으로 상상한 세계를 와장창 금가게 하며 현실 속으로의 진입Into the reality을 알리며 마무리된다. 그가 살아갈 종주국의 앞날을 함부로 예상하지 못하게 하나, 분명한 것은 에덴동산의 문은 굳게 닫힌다. 그가 선악과를 따먹었는지조차 불투명해짐으로써 어쩌면 그는 아직 추방 전이고 새로운 집의 도래는 아직 열려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주인공이 독립체인 성인 남자로서 혼인을 앞둔 시점에서 끝나는데, 그 독립과 결맹이 어디까지 확장 적용되는지 역시 미지수.
* 번역서로 보충해 읽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마음과 달리 벌써 한 달이 지났고, 이번 달 책탑에 하염없이 밀릴 듯해 토론 때 메모해둔 것을 바탕으로 가볍게 감상을 남긴다. 구르나 원서 세 권 연속 읽기는 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