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처럼 테크놀로지의 생산과 그 혁신 주기가 빨라진 적도 없을 것이다. 물론 기술 발달의 속도를 측정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이미 그 선례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속도경쟁은 빠름과 느림이라는 우리의 지각 정도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빠름과 느림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속도에 대한 가치평가를 할 수 있는 잣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누구보다도 앞서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요구나 더 빠른 프로그램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 우리는 그것을 '좋은' 속도라거나 아니면 '나쁜' 속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것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가하는 애매한 기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즉 인간이 아닌 대상을 인간을 위해 사용할 때에만 속도는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이미 눈치챘겠지만, 이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는 관점도 최신의 기술 발전 앞에서는 적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21세기 기술이라는 GNR―유전공학(genetics), 극미기술(nanotechnology), 로봇공학(robotics)―은 인간종 자체의 변형을 자신의 목표로 삼고 있기에, 인간과 기술 사이의 관계는 이제 더 이상 인간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로서의 기술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는 물음 자체를 의미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오늘날의 기술의 무제한적인 혁신 한가운데서, 고개돌려 이러한 문제를 낳은 근본원인이 무엇인가를 묻게 하는 책이 바로 조르쥬 바타이유의 책이다. 즉 기술발달에 대한 찬미 또는 숭배를 가능케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바타이유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속도경쟁과 가치 부재의 뒷면에는 인간과 기술간의 소외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가 불러온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 가 정보혁명의 물결 속에서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났다고 할 수 있다면, 이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기술에 의한 인간 소외 또는 지배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이다.
물론 기술발달의 이점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기술이 가져다주는 엄청난 혜택을 모든 사람에게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 구도는 기술과 인간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러하기에 기술의 발달 가운데서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일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놓치고 있다.
인간이 자신 바깥의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마주할 미래의 기술들은 전혀 새로운 모습을 띨 것이다. "인간이 대상으로서의 세계를 변형하고 순치(馴致)함으로써 세계를 사물화할 때―사물 그 자체로서의 목적이 아니라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때―인간은 자신을 세계로부터 분리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기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에 대해 늘 경계를 늦추지 않아야 한다. 즉 어떤 기술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그 선택에는 기술개발의 포기라는 항목도 들어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고유한 한계인 죽음을 기술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생물학적으로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다―에 대해 우리는 분명하게 말해야만 한다: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 기술 개발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바타이유가 고대 사회의 제사와 축제, 소비에 대한 찬양 등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사물이 되지 않고는 인간적이 될 수 없고, 동물의 무의식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사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세계와 하나가 되지 않은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이것은 인간 삶의 가능성이자 또한 그에 고유한 한계이다.바쉬노프스키 형제(Wachnowski Brothers)의 {매트릭스}(1999)와 빈센초 나탈리(Vincenzo Natali)의 {큐브}(1997)에 나오는 시스템의 굴레, 바로 거기에 당신과 내가 존재한다. 만약 당신이 시스템의 순환체계 속에서 계속해서 시스템의 에너지를 충전해주는 배터리로 남는다면, 당신이 오로지 체제가 부과하는 도덕과 규율의 질서 속에서 꿈꿀 뿐이라면, 우리에게 미래는 오늘의 연장으로서만 존재한다. {큐브}의 카잔(Kazan)이 보여주듯이, 시스템으로부터의 탈출은, 미래는 저항하는 자, 주변인, 소수자들에게만 열려있는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싸움 뒤의 동물이 보여주는 무력한 시선은 물 한가운데에 물이 섞여 있듯이 존재도 세상과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음을 잘 말해주는 시선이다" |
|
벼르고 별러 바타유'를 다 읽었다. 두껍지도 특별히 어렵게 쓰여진 것도 아닌데, 꾸물대느라 이제사 읽어낸 예쁜 노란 표지의 책.
수단으로서의 인간과 초탈을 위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제1부에, 이윤의 법칙이나 폭력을 벗어나지 못하여 현실적 목적에 종속시키는 근대 산업사회 이후의 군사질서에 대한 비판이 제2부에 기술된다.
완결로서의 철학적 논지보다는 현재를 짚어낸달까, 하나의 초석을 이루는 담론의 시도로써 의미를 갖는단다. 어차피 사상을 벽돌담의 벽돌로 본다는 바타유이니만큼 무겁게 파헤치는 논조라기 보단 한편의 논문인 듯 읽기엔 수월하다. (물론, 그의 사상의 무게가 가볍단 뜻은 아니다.)
전쟁이나 권력 앞에 놓인 인간의 상황이 극히 개인적일 때, 혹은 상실의 슬픔과 부재에 대한 고뇌를 두고 난해하다 느껴질 때, 이 한권의 책이 더욱 유익하리란 생각이 든다. 번역자의 힘일까, 참신하고 덜 어려워서 읽는 내내 상쾌하였다.
[인상깊은구절] "절대적 존재"를 생각해낸 것은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우월한 가치를 확정하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확장에의 욕망은 결과적으로 절대적 존재를 더욱 왜소하게 만들 뿐이다. "절대적 존재"의 객관적 개성의 절대적 존재는 세상 안에서 동일한 성격의 다른 개별적 존재들과 나란히 자리잡게 된다. 세상 안의 "절대적 존재"란 주체인 동시에 대상이므로, 그러면서도 대상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p.43) 인간은 사물의 질서와 타협 불가능한 내밀한 질서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사도, 인류도 없었을 것이고, 내밀한 질서, 개체성의 신성한 고뇌가 그 파괴적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오직 자연적 특성(인간의 자연적 특성을 구성하는 계획)이 위협받을 때만 진통을 겪으면서 그 내밀한 고뇌의 성스러운 신성에 이르게 되는 존재이다.(p.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