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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케이스 이해영 도서출판삼인/2019.6.15.
각종행사나 공식적인 모임에서 우리는 애국가를 부른다. 어려서부터 불러왔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부르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을 생각해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의 애국가의 작곡가에 대해 고찰해 보고 언제부터 어떻게 부르게 되었는지 알아보며,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안익태 케이스>다. 저자 이해영은 현재 한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대학원을 마친 뒤 독일 마부룩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 <낯선 식민지, 한미 FTA> 등을 저술했다.
<안익태 케이스>는 가장 중요한 국가 상징 가운데 하나인 <애국가>, 그 중에서도 안익태의 <애국가>에 대한 것이며, 안익태의 전기는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애국가라면 애국이라는 공동체의 합의된 가치를 담아내야 하고 또 애국이라는 기준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애국가라는 것이 국가 상징의 주요일부 이므로 나는 무엇보다 정치학적 관심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 책 <안익태 케이스>는 정치학 연구의 한 사례이다.(p.16)”라고 책의 저술 방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애국가의 작곡자에 대한 고찰을 위해 그의 일생동안 행적을 추적하게 되고 아울러 친일행위와 그의 작곡인 <애국가>가 우리나라 애국가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을 알아본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과 현재 우리의 처지에서 애국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논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독자들도 책을 읽어가며 우리의 애국가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립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음악이란 것이 정치와 멀리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애국가의 제창을 통해 주권자 시민은 자신들 주권의 구현체인 국가라는 최고 공동체와의 정서적 결속과 ‘충성’의 서약을 한다. 이는 성전도, 사제도, 제단도 없는 ‘시민종교’적 프로세스로서, 일종의 ‘시민으로서의 순수 신앙 고백’ 같은 것이다.(p.15)” 그런데 그 곡을 작곡한 사람이 나라를 배반한 친일행위나 반인륜적인 나치에 부역한 사람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 책에서는 그 점에 대해 기록과 자료를 중심으로 자세히 지적하고 있다. 안익태가 성장기를 거쳐 미국 유학시절 애국가를 작곡할 때까지는 애국심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애국가 작곡 후에 유럽으로 건너가 일본인 에하라 고이치의 도움을 받고, 이름 또한 아키타이 안으로 개명을 한다. 그리고는 일본의 건국절에 일본천황을 위한 음악회에서 지휘를 하고, 나치 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 음악원 회원이 되어 나치활동에 조력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기원절, 곧 건국 기념일인 1943년 2월 11일 목요일 오후 7시 반, “유명한 빈의 무직페어라인(음악협회) 대공연장에서 빈 국립 오페라 합창단 그리고 시립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베토벤의 <레오노래> 서곡과 <교향곡 7번> 그리고 자신이 작곡한 <만주국>이 무대에 올랐다.(p.107)”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이날 연주회에는 베를린 일본대사관 참사관과 그리고 만주 공사관에서는 에하라 고이치가 참석했다. <만주국>이란 곡은 <코리아 환상곡>을 재활용 한 것이다. 즉 스스로 만든 <애국가>를 자기 일신을 위해 가사를 바꿔 ‘매국’의 도구로 재활용한 것이다. 에키타이 안의 상황이 아주 특수한 사실이라 하지만 그가 이처럼 친일 협력의 경로를 밟는 것은 자발적인 행보였다.
“1949년 9월 9일 같은 날 북한에서는 북한 ‘애국가’가 정식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남한의 국회는 ‘통일이 될 때까지 보류’한다는 취지로 국가 제정안이 철회 동의 되었다. 즉, 사실상 부결되었다.(p.154)” 하지만 이미 그 해 8월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로서 성문 규정화하진 않았으나 영국 등과 같이 범국민적 (초법률적) 관행으로써 정식 국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이 안익태의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애국가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이다. 상해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스코틀랜드 민요곡에 맞추어 부르던 애국가가 해방 전후에 안익태의 애국가로 조금씩 바꾸어 불리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보류시킨 애국가 자리를 슬그머니 안익태의 애국가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법률적인 애국가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박영근이 대변한 조선 음악 동맹 측의 안익태 애국가에 대한 비판은 “첫째, 해방 이전의 것이라 해방의 감격과 열정을 담지 못하고, 둘째, 음악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선율과 리듬이 ‘야소 찬미가’조 곧 기독교 찬송가 풍이며, 셋째, ‘봉건적, 종교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작품이라는 것이다.(p.145)” 이런 문제점뿐만 아니라 안익태 <애국가>의 치명적 흠결은 그 선율이나 가사보다도 그것은 지은 사람에 있다. <애국가>를 통해 ‘애국’이라는 기본 가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자신이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이다. 그러기에 ‘비애국적’애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용 모순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다시 제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다만 그 방법은 ‘모른 체하기, 통일 될 때까지 그냥 사용하기, 제2 애국가를 다시 만들기, 공모형 애국가를 만들기.’ 등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애국가의 실상이 널리 알려지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우리의 애국가가 빠른 시일 내에 제정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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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케이스 이해영 도서출판삼인/2019.6.15. sanbaram
각종행사나 공식적인 모임에서 우리는 애국가를 부른다. 어려서부터 불러왔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 없이 부르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을 생각해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의 애국가의 작곡가에 대해 고찰해 보고 언제부터 어떻게 부르게 되었는지 알아보며,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 <안익태 케이스>다. 저자 이해영은 현재 한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및 대학원을 마친 뒤 독일 마부룩 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 독일통합 10년의 정치경제학>, <낯선 식민지, 한미 FTA> 등을 저술했다.
<안익태 케이스>는 가장 중요한 국가 상징 가운데 하나인 <애국가>, 그 중에서도 안익태의 <애국가>에 대한 것이며, 안익태의 전기는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애국가라면 애국이라는 공동체의 합의된 가치를 담아내야 하고 또 애국이라는 기준에 부합할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애국가라는 것이 국가 상징의 주요일부 이므로 나는 무엇보다 정치학적 관심에서 접근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 책 <안익태 케이스>는 정치학 연구의 한 사례이다.(p.16)”라고 책의 저술 방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애국가의 작곡자에 대한 고찰을 위해 그의 일생동안 행적을 추적하게 되고 아울러 친일행위와 그의 작곡인 <애국가>가 우리나라 애국가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을 알아본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과 현재 우리의 처지에서 애국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논쟁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독자들도 책을 읽어가며 우리의 애국가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립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음악이란 것이 정치와 멀리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애국가의 제창을 통해 주권자 시민은 자신들 주권의 구현체인 국가라는 최고 공동체와의 정서적 결속과 ‘충성’의 서약을 한다. 이는 성전도, 사제도, 제단도 없는 ‘시민종교’적 프로세스로서, 일종의 ‘시민으로서의 순수 신앙 고백’ 같은 것이다.(p.15)” 그런데 그 곡을 작곡한 사람이 나라를 배반한 친일행위나 반인륜적인 나치에 부역한 사람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 책에서는 그 점에 대해 기록과 자료를 중심으로 자세히 지적하고 있다. 안익태가 성장기를 거쳐 미국 유학시절 애국가를 작곡할 때까지는 애국심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애국가 작곡 후에 유럽으로 건너가 일본인 에하라 고이치의 도움을 받고, 이름 또한 아키타이 안으로 개명을 한다. 그리고는 일본의 건국절에 일본천황을 위한 음악회에서 지휘를 하고, 나치 독일에서 유일한 조선 출신 제국 음악원 회원이 되어 나치활동에 조력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기원절, 곧 건국 기념일인 1943년 2월 11일 목요일 오후 7시 반, “유명한 빈의 무직페어라인(음악협회) 대공연장에서 빈 국립 오페라 합창단 그리고 시립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베토벤의 <레오노래> 서곡과 <교향곡 7번> 그리고 자신이 작곡한 <만주국>이 무대에 올랐다.(p.107)”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의 패배가 확실시되던 이날 연주회에는 베를린 일본대사관 참사관과 그리고 만주 공사관에서는 에하라 고이치가 참석했다. <만주국>이란 곡은 <코리아 환상곡>을 재활용 한 것이다. 즉 스스로 만든 <애국가>를 자기 일신을 위해 가사를 바꿔 ‘매국’의 도구로 재활용한 것이다. 에키타이 안의 상황이 아주 특수한 사실이라 하지만 그가 이처럼 친일 협력의 경로를 밟는 것은 자발적인 행보였다.
“1949년 9월 9일 같은 날 북한에서는 북한 ‘애국가’가 정식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남한의 국회는 ‘통일이 될 때까지 보류’한다는 취지로 국가 제정안이 철회 동의 되었다. 즉, 사실상 부결되었다.(p.154)” 하지만 이미 그 해 8월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로서 성문 규정화하진 않았으나 영국 등과 같이 범국민적 (초법률적) 관행으로써 정식 국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것이 안익태의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애국가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이다. 상해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스코틀랜드 민요곡에 맞추어 부르던 애국가가 해방 전후에 안익태의 애국가로 조금씩 바꾸어 불리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보류시킨 애국가 자리를 슬그머니 안익태의 애국가로 채워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법률적인 애국가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박영근이 대변한 조선 음악 동맹 측의 안익태 애국가에 대한 비판은 “첫째, 해방 이전의 것이라 해방의 감격과 열정을 담지 못하고, 둘째, 음악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 선율과 리듬이 ‘야소 찬미가’조 곧 기독교 찬송가 풍이며, 셋째, ‘봉건적, 종교적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작품이라는 것이다.(p.145)” 이런 문제점뿐만 아니라 안익태 <애국가>의 치명적 흠결은 그 선율이나 가사보다도 그것은 지은 사람에 있다. <애국가>를 통해 ‘애국’이라는 기본 가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자신이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불문율이다. 그러기에 ‘비애국적’애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용 모순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다시 제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다만 그 방법은 ‘모른 체하기, 통일 될 때까지 그냥 사용하기, 제2 애국가를 다시 만들기, 공모형 애국가를 만들기.’ 등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 애국가의 실상이 널리 알려지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우리의 애국가가 빠른 시일 내에 제정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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