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게 사람은 나와 닮은 점이 많은 쪽에 더 강한 공감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소설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탄생부터가 거북스럽고 그 모습 또한 괴기하게 그려지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 이름없는 ‘괴물’에 먼저 마음이 쓰인다. 작가가 그를 위해 할애한 공간 덕이다. 작가는 탄생의 시점부터 그(괴물)가 느낀 혼란과 좌절, 이로 인한 증오의 감정을 설득력 있는 흐름으로 제시한다. 이 소설의 흐름을 따르다 보면 자연스레 ‘괴물’의 감정선에 동조하게 된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이름 없는 연쇄살인범, ‘괴물’을 위한 탄원서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는 태어남과 동시에 창조주에게 버림받았다. 그는 태어남과 동시에 사랑과 애정이 아닌, 원인 모를 증오와 폭력을 마주했다. 그에게 세상은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애정에 대한 기대를 품게 했던 한 가정에 대한 짝사랑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소설은 빅터가 창조한 ‘괴물’의 선한 본성이 슬픔과 증오로 타락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 선한 본성은 ‘괴물’을 괴롭게 하고, 결국 그를 죽음으로 이끈다. “죄로 더럽혀지고 자책에 만신창이가 된 지금, 죽음만이 나를 구원해 줄 유일한 존재요.” (p. 316) 1818년 출간된 이 소설이 현대에 주는 울림은 크다.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소외되고 미움 받는 사람들의 분노에 대한 자그마한 이해의 ‘틈’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아”라는 쉬운 말은 소설이 그리는 ‘괴물’의 처절한 슬픔 앞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그렇다고 내 불행에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오. 누구도 공감해 줄 수 없을 테니.” (p. 313) 감히 공감할 수 없는 불행에 던지는 가벼운 말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다.
![]()
|
|
역사는 신이 될 때 비로소 끝날 것이라 했던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빅터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자 했고, 그 결과물이 프랑켄슈타인이었다. 자신이 상상했던 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예측과 달리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자인 자신 조차 외면하게 만드는 괴기스러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결국 빅터는 자신의 피조물을 버렸다.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면서, 정점을 향해 끝을 모르고 달려가는 현대의 과학기술을 떠올렸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고안되고 만들어지는 과학기술의 산물들이 과연 인간의 편의에만 영향을 주는 것일까. 물론 긍정적인 기능이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으나, 그에 상응하는 부정적인 부분도 존재한다고 본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간의 질병 치료를 위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겠지만 이것이 비단 인간의 삶을 훌륭하게 회복시킬 것이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유전자 연구는 계속되고 있지만 여기서 발생하는 윤리적, 인권적 논란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점을 예로 들 수 있겠다. AI는 어떠한가. 이들이 소설까지 쓰는 마당에, 인공지능이 현 인류를 넘어서는 지상 최고의 종이 되는 세상이 불가능하다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욕망은 인간의 본성일 수 있다. 물론 본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통제가 어려운 영역일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다듬어져야 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고통스러운 과정들은 인간의 욕망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현되었을 때 발생했다.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했을 지 모르나, 결과는 걷잡을 수 없었을 때가 허다하다. 아인슈타인의 핵 물리학이 그랬듯이. <프랑켄슈타인>의 빅터가 도달하고 싶었던 꿈은 괴물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의 욕망을 무작정 발현하기 이전에 그 종착점은 어디일 지에 대해 그려보는 과정이 필요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