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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흑백이거나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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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쓰기는 밝은 탁자 위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과의 단절, 고독이라는 깊은 어둠을 거쳐서만 비로소 그것은 나타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장들은 단숨에 우리의 시선을 낚아채지만 어떤 문장들은 서서히 그 속에 스며들 것을 요구한다. 그런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 우리가 견뎌야 하는 것은 어둠이라는 시간이다. (장혜령, 『사랑의 단상들』, 「어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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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글쓰기는 밝은 탁자 위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과의 단절, 고독이라는 깊은 어둠을 거쳐서만 비로소 그것은 나타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문장들은 단숨에 우리의 시선을 낚아채지만 어떤 문장들은 서서히 그 속에 스며들 것을 요구한다. 그런 세계에 들어서기 위해 우리가 견뎌야 하는 것은 어둠이라는 시간이다.
(장혜령, 『사랑의 단상들』, 「어둠이라는 권리」中에서)

하루의 시작과 끝을 책과 함께 한다. 눈 뜨면 전날 읽었던 책을 펼친다. 현실로 돌아오기 위한 워밍업. 전자책 리더기로 책을 읽은 뒤부터는 몇 시간이고 어둠 속에 누워서 책 읽기가 가능해졌다. 두꺼운 책을 들고 있느라 손목이 아프지도 않다. 암막 커튼 아래에서 게으르게 문장을 훑는다. 바깥세상의 안위는 잊은 채 이야기를 따라간다. 종종 어둠 속에서 읽은 책은 빛이 들어오는 순간 탁, 하고 꺼져 버린다. 서사는 희미해지고 문장은 휘발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할 수 있는 힘을 얻으려는 것이다.

장혜령의 산문집 『사랑의 단상들』을 읽는 내내 내 방의 불은 꺼져 있었다. 웬만하면 형광등을 켜지 않는 방. 스탠드 불빛 아래이거나 그마저도 꺼져 있는 방에서 책을 읽었다. 십 년 동안 발표할 지면을 기약하지 않으며 쓴 글을 모았다고 했다. 작가가 되려는 마음은 있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으리라. 세상으로 내보내기에는 완벽하지 않은 글. 여행의 기록과 일상의 기억을 모아 문장으로 썼을 그 방도 내내 어두웠으리라. 『사랑의 단상들』은 사랑이란 주제로 묶어가는 끝나지 않은 시다. 에필로그로 글은 끝나지만 사랑의 속성처럼 이 책은 끝나지 않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 혼자라서 가능 한 일. 그럼에도 외롭지 않은 일. 책 읽기는 광활한 이 세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빛 속에서 책을 읽었다, 그동안. 문장을 이야기를 놓칠까 봐.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안다. 이해한 것보다 놓쳐버린 이야기 때문에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을. 어떤 문장은 종이 위에서 번져가는 걸 지켜보기만 해도 흘러간다는 것을. 『사랑의 단상들』을 읽으며 전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좋았지만 전부를 사랑할 순 없었다. 사랑의 정의를 찾아가는 『사랑의 단상들』은 흑백 처리된 과거를 불러왔다.

지나고 나면 사랑이었다. 우리의 순간은. 그걸 모른 채 살아가고 죽는다. 죽으면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로 건너온다는 말이 좋았다. 그렇게 우리의 세계는 만난다.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죽음을 정의하기에는 이 세계에서의 기억과 추억이 너무 많다. 일상을 견디는 힘으로 사진을 찍고 여행을 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의 추억과 시간의 잔상을 모아 기록한다. 써야겠다는 의식도 없이 여백에 채워지는 글 때문에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은 말하여질 수 없다. 그저 느끼다가 사라지면 수긍하는 것. 언젠가는 그게 있었지 하며 떠올리는 것. 『사랑의 단상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슬프거나 기억의 덫에 빠질 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내가 알 수 없는 시간에 붙잡혀 후회하는 동안 읽었듯 당신도 원인 모를 무기력에 빠져 있을 때 읽으면 되는 책이다. 우리가 읽은 책이 본 영화가 걸었던 장소는 한 권의 책이 된다.

출근길, 합정에서 당산으로 향하는 2호선 지하철 안에서 어린 남자아이를 보았다. 내 허리 높이보다 작은 키의 꼬마였다. 아이들은 언제나 갑작스럽다. 나는 전동차 문 앞에 서 있었는데 그 아이가 어느새 내 앞에 자연스레 끼어들어 있었다. 봄이었다. 바깥의 따스한 햇살이 문안으로 들이쳤다. 그 애가 유리 문에 입술을 맞추며 뭔가를 계속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향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다른 세계를 향해 교신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낯선 것이 우리를 호명할 때」中에서-

시시각각 나는 다른 세계로 불려간다
이곳에 있지만 이곳에 있지 않다

이 하루는 저 하루와 다르다

어떤 말은 듣지 않는 게 좋다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s*****m 2019.03.10.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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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잔상들] 순간을 포착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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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도는 말들. 닿지 않았지만 나아가는 중인 어떤 흐름에 대해서. 완벽하고 정직하고 깨끗한 이미지가 아닌 흔들리고 불안하고 퇴폐적인 어떤 순간들의 이미지. 이런 이미지를 붙잡으려고 하는 시도의 산문집. 섬광처럼 오래도록 남을 이미지도, 스쳐가는 찰나의 이미지도 모두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기시감이 드는 책이다. 또 다른 가능성의 내가 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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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엇이 되지 못한 채 허공을 떠도는 말들. 닿지 않았지만 나아가는 중인 어떤 흐름에 대해서. 완벽하고 정직하고 깨끗한 이미지가 아닌 흔들리고 불안하고 퇴폐적인 어떤 순간들의 이미지. 이런 이미지를 붙잡으려고 하는 시도의 산문집. 섬광처럼 오래도록 남을 이미지도, 스쳐가는 찰나의 이미지도 모두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

    기시감이 드는 책이다. 또 다른 가능성의 내가 쓴 것만 같은 문장들로 차있고 모든 문장과 생각들은 이어져있는 것 같다. 공기 중에 흘러 다니는 생각들이 붙들리고는 활자화되어 나타난 문장들이다. (나는 불교를 공부하고 보르헤스를 읽고 나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어떤 흐름과 만물의 연결성을 생각하는 것 같다.) 평면적인 이미지의 뒷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의 책이다. 책 표지와 질감과 무게감 역시 내용의 한 부분처럼 느껴진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c*******0 2019.07.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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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도착한 혼란이 이제 겨우 시작된 혼란과 한 자리에...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이미 도착한 혼란이 이제 겨우 시작된 혼란과 한 자리에... 장혜령, 사랑의 잔상들" 내용보기
모든 시선으로부터 피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마,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마, 라고 외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조차 목청껏 소리를 쳐볼 생각을 하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조용하게 말하고 싶을 뿐이다. 속삭이자는 것은 아니다. 속삭이는 것 보다는 크게, 그러나 크게 소리를 치는 것은 아닌, 속닥이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닫힌 독백에 머물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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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시선으로부터 피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마,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마, 라고 외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럴 때조차 목청껏 소리를 쳐볼 생각을 하지는 못한다. 나는 그저 조용하게 말하고 싶을 뿐이다. 속삭이자는 것은 아니다. 속삭이는 것 보다는 크게, 그러나 크게 소리를 치는 것은 아닌, 속닥이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닫힌 독백에 머물고 말 것만 같은...


  “언젠가부터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과 맞닿은 무수한 기억의 편린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미지들은 하나의 확고한 선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돌연히 나타나는 섬광과도 같다. 그 빛은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을 강타하여 잠식한 뒤 이내 사라져버린다.” (p.14)


  길에서 길로 이어지던, 혹은 집에서 집으로 이어지던 사랑이 있다. 골목길을 돌면 갑자기 나타나는 이층집, 현관을 통하지 않고 별도의 계단을 통해 드나들 수 있었던 방, 계단은 허리 높이의 벽으로 보호받고 있었는데, 나는 어느 날 훌쩍 그 벽을 뛰어넘는 사내가 되었다. 그녀는 밤이나 낮이나 방에서 홀로 나를 기다리고, 나는 허락되지 않은 시간을 골라 띄엄띄엄 그 주변을 맴돌았다.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내려. 누군가가 보내준 좋은 차를 타고 특급 호텔에 가. 그런 다음 똑같은 양복을 차려입은 예의바른 사람들을 만나고 성대하게 차려진 음식을 먹고 그다음에야 잠깐 회의를 하는 거야. 매번 일은 그런 식이야. 그리고 그 회의에서는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하지. 거기 앉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구해야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모르는데다 사실 관심도 없거든. 계속 그렇게 살 자신이 없었어. 그건 잘못된 거라고 느꼈어. 그렇다면 그쯤에서 멈춰야 했어. 나는 회의가 끝난 어느 날, 그들이 준 돈으로 산 어색한 양복을 벗고 호텔을 빠져나왔지. 그러곤 지금처럼 사는 거야.” (p.42)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만 비행기를 탔다. 굳이 손가락을 꼽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느 비행기 안에서 영화 허, <그녀>를 보았다. 스칼렛 요한슨이 목소리로 연기하는 영화였고, 그 목소리는 그 높이에서 듣기에 좋았다. 누구와 동승하느냐에 따라 어떤 탈 것들은 스스로 공간의 구조를 바꾸어 버린다. 누군가를 대동하느냐에 따라 어떤 길들은 또렷하거나 뿌옇게 모습을 바꾸어 버린다. 


  “지하철에서 울고 있는 여자를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사랑한 적 있는 그 이상한 남자를 기억한다. 그는 더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아. 낯선 여자에게 다가가 이따금 그 사람처럼 차갑게 속삭여주고 싶은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너는 내 인생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어, 하고 중얼거린다. 그럴 때면 어디선가 그는 말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테면 생각해. 하지만 네 인생은 변하게 될 거야. 너는 나를 만난 적이 있으니까.
  세상의 모든 이상한 순간들, 그 순간들이 우리를 서서히 변화시키리란 그의 말은 옳았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그 힘을 믿는 한에서.
  딱 그만큼만, 그 힘은 파괴적이고 격렬하다.” (p.111)


  앞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옆 사람이 내고 있는 발자국을 놓치기도 하였다. 굳은 땅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인데도 자꾸 맥없이 어둡게 사라지는 발자국도 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아래로 떨어지는 아이러니로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내가 머물러 있는 동안 어느새 저만치 앞서 나아가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경험을 말하였더니 그녀는 참으로 치사한 사람이라 일갈하였다. 


  “한번은 지하철 막차 안에서 노신사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정장 차림에 중절모를 썼다. 이십 분쯤 지났을 때 그가 내게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어디를 가시나요. 나는 곧 내린다고 대답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자신의 정면을 바라본 채, 오늘밤 나와 함께 있어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돈으로 여자를 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목소리는 경험 없는 청년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그러니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뒤의 일이었다.” (p.183)


  추운 하루였다. 내일은 25도까지 기온이 오른다고 한다. 나는 되도록 오늘만 살자고 되뇌며 살았다. 어쩌면 사랑이 간절한 하루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내 눈앞에서 서서히 변하는 사람을 발견한 참이었고, 앞으로도 그 변화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나였다. 이미 도착한 혼란이 이제 겨우 시작된 혼란과 한 공간에서 한참을 있었다. 오늘은 아주 추운 하루였다. 


장혜령 / 사랑의 잔상들 / 문학동네 / 255쪽 / 2018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22.04.2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