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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라는 사회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접근한 책입니다. 제목이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여서 "왜?"에 포커스를 맞춰 극단주의의 히스토리를 기대하고 봤지만 책 내용은 기대와 상당히 달랐습니다. 책 서술의 대부분은 극단주의에 관한 미국의 대표 심리학 이론인 '집단 극단화 이론'을 반박하는 내용입니다. "극단주의의 원인은 집단 극단화 같은 허구적이고 협소한 개념이 아니라 사회 역사적 맥라 속에서 찾아야한다.(p.209)" 이 얘기를 하고자 책의 9/10을 미국 심리학을 비판하는데 썼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간 미국 심리학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자신과 주변 상황에 대해 각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론을 제기할 때 단편적인 사례와 묘사를 사용하여 어떤 근거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기도하지만, 일반화하기 힘들어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비판하는 것도 좋지만 "~하는 뇌는 어떻게 생겼을지 참으로 궁금하다."와 같은 표현은 과연 중립적인 비판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집단 극단화 이론'에 대한 심리학 교양 같은 서적이었으며 극단주의, 혐오에 대한 심도 있는 역사적 배경이나 해당 사회 문제를 위한 대안을 기대한다면 다른 책을 찾는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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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한남충이에요?” “아! 아니야! 나는”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10살짜리 꼬마 입에서 지금 한국의 남성들이 가장 싫어할 단어 하나를 뱉어 버리니 말이다. 그냥 ‘문재인’을 문제인이라고 써서 살짝 놀렸을 뿐인데,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웬만한 남성들이 듣는다면 ‘극대노’를 할 말이었다. 솔직히 그 때를 생각해보면 화가 나기보다, 당혹스러웠다. 어떻에 10살짜리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거지? 유튜브에서 봤나? 벌써 이 나이에 워마드에라도 들어가셨나? 여러 생각이 오갔지만 역시 아이에게 어떻게 그 말을 알았는지 물어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어떻게 알았냐? 누구한테서 배웠냐?”고 물어보니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언니들한테 배웠다는 것 이었다.” “언니가 몇 명 있는데?”라고 물어보니 대학생 언니까지 있고 자기가 막내라고 이야기를 했다. 인터넷에서 만들어진 혐오 표현이 대대손손(?) 내려와 10살짜리가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속어가 됐다는 것이 정말 놀라웠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난리인 것인가? 그래서였을까. 을유문화사에서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라는 책에 대한 서평단을 뽑는다고 했을 때, 정말 반가웠다. 어떠한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일까, 어떤 부분에 대하여 문제제기를 하는 것일까? 대안은 무엇일까? 등. 여러 생각을 하며 이 책을 받게 됐다.
뜨끈 미지근한 학문으로 극단주의를 해석하다.
솔직히 이과인 내가 문과의 과목들을 공부했을 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그 뜨끈 미지근 탐구 방법과 이로 인한 결과 때문이었다. 뭐 하나 확실한 것이 하나 없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것이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내 불만의 Top of top이 심리학이라는 과목이었다. 사람의 심리를 분석한다는 것, 사회의 심리를 분석한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차원의 일이그는 하지만, 언제나 저 사람이 분석한 것이 맞는지 의심이 들게 하는 분야다. 수학에서의 ‘공리’라는 개념이나, 물리학에서의 ‘원자’ 혹은 ‘중력’이나 ‘빛의 속도’와 같이 변하지 않는 개념은 없고, 모든 것의 연결성만으로 이야기를 하니, 어떤 결론을 도출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주는 임팩트는 딱히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적어도 하나를 건진 것 같다. 그것은 ‘배타성’이라는 키워드다. 저자는 극단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를 배타성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이것만으로도 솔직히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지 않았나 싶다. 280장 분량의 책을 읽으면서 세 글자의 단어 하나를 건진 것인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가 우리 사회를 해석하고 알아가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불만
솔직히 이 책은 탁상에서 쓰여진 책이라는 생각이 크다. 요즘 내가 읽는 독림 연구자들의 책들은 대개 현장에서의 연구가 기본이 되어 있다. 기자들이 쓴 책 또한 대부분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동들이 반영된 것들이다. 하지만 대개 이 책에서 쓰여진 책들은 여러 자료들을 짜깁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농후하게 들었다. 저자 자신이 심리확과에서 수학했기에 심리학적 지식 조금 우리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 조금 해서 만들어진 책이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가 아닐까 싶다. 그냥 인상비평이 아니다. 이 책에는 들어가지 말아야 할 부분 또한 상당히 많다. 주제에서 벗어난 미국 심리학에 대한 비판을 왜 이 책에서 하는지 솔직히 안타깝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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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극단주의의 실체로서 극단주의의 3대 특징은 배타성,광신,강요이다. 육체적 안전과 정신적 안전을 포괄하는 안전에 대한 위협 혐오와 분노,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지배층등도 극단주의의 주요한 원인이다. . 무엇이 극단주의를 만드는지 두루 살펴보고 있으나 후반부에 가면서 학대 위계 사회에 대해 언급하고 이를 살펴보았다. . 100의 힘을 가진 사람은 90의 힘을 가진 사람을 학대하고 90의 힘을 가진 사람은 80의 힘을 가진 사람을 학대하는 식의 공격이 확산되다 보면 그 사회는 상호학대가 촘촘히 얽혀있는 학대 위계사회가 되기 마련이다. 사실 반민중적인 지배층이 각종 사회집단을 이간질시키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고도 단순한데 그것은 바로 차별이다. 한국인들을 지배하는 중요한 감정중의 하나는 억울함이다. 억울함은 차별대우를 받을때 체험하는 전형적인 감정이다. 여성운동을 적대시하는 남성들의 경우 대부분 역차별을 거론하는데 이것은 여성해방반대에도 내가 더 억울해, 그런데 왜 너희들이 난리야 라는 식의 억울함이 한 몫하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층이 민중 항쟁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 희생양 만들기보다 더 자주, 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수법은 이간질 혹은 갈등조장이다. 과거 한국 사회 지배층이 호남과 영남 사이의 지역 갈등을 적극 이용했다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는 각종 사회 집단들을 모조리 이간질해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 학대위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력감(권위주의적 성격), 굴욕감(자존감의 손상), 고립과 고독(사회 혹은 관계로부터의 배제), 삶의 의미 상실등을 반복적으로 또 만성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학대를 당하는 것은 곧 안전을 위협당하는 것이므로 학대위계사회는 사람들이 극단주의자가 될 가능성을 크게 부추기게 된다. . 한국에 퍼지고 있는 극단주의와 혐오를 살펴보면 한국사회에서 최고의 약자는 아이들이고 이 지구상에서 성적 때문에 자살까지 하는 나라는 한국 말고 또 없다. 학대 당한 아이들은 피학대로 인한 고통과 분노를 엄마를 향해 표출하고 미워하게 된다면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기란 거의 불가능해진다. 즉 엄마 혐오가 인간혐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엄마 혐오는 모은 혐오로 현상의 출발점이자 기초라고 말할 수 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엄마 혐오, 나아가 인간 혐오 심리를 감슴속에 품은채 성장 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극단주의에 해방은 정말이지 힘들어질 수 있다. 한국사회은 마치 100층 건물에서 100층은 99층을, 99층은 98층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거대한 학대 빌딩이라고 할 수 있고 이 학대 빌딩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서로를 학대하게 만드는 건물주에게는 저항하지 못한다. 단지 건물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만 학대하면서도 서로 싸우는데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현실이다. . 한국인들을 자기 마음대에 들지 않는다면 대통령은 바꿀수 있지만 CEO나 재단 이사장은 바꿀수 없다. 각종 정신적 위협에서 해방되려면 기층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는 민중이 몸담고 있는 기층 단위나 조직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학대위계사회에서 돈을 아무리 벌어도 무시당하는 고통, 존중받지 못하는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다. 철 지난 성장 타령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각종 격차와 그에 따른 차별을 해소함으로써 관계를 회복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국내 범위에서만 살펴볼 경우, 절대 다수의 생존 불안 해결은 직업과 상관없이 최소한의 사회적 사삶을 유지할수 있는 소득이 보장될때 가능해진다. 즉 직장에서 해고당하거나 사업을 하다 파산했을 때에도 소득이 보장되어야만 생존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럼점에서 사회안정망의 확립, 나아가 기본 소득제 도입을 시급히 고려해야 하는 것으로 극단주의 예방과 해결을 제시하고 있다. . 저자는 미국 심리학자 선스타인을 대표로 집단 극단화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개인이 집단화되면서 이성을 잃고 극단화되었다는 사례를 조작했다고 주장하며 비평한다. 개인들은 합리적이지만 집단이 비슷한 생각의 상승작용으로 비합리적인 경우 극단적으로 된다는 이야기도 한다. 여러 극단적인 테러세력과 단체에 대항하는 미국의 심리학적인 방어론도 유사한 사례로 든다. . 이렇게 배타적이고 광신적인 극단주의에 대한 해결책은 사회 안전망 확충이라는 제도적인 개선책. 개인들이 무력해지지 않는, 무력해지면 극단주의로 쉽게 빠져들 수 있기에 사회적 공포를 줄이고 제거해나가야 한다. 언어적으로 좋은 해결책이지만 그 구체안과 실현여부 그리고 적용에 대해서는 우리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지는 않는가라는 반문을 하고 있다. . 더욱이 현실에서는 이러한 극단주의에 내몰리는 대표적인 군중심리로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는 스카이캐슬을 보며 오히려 악의 역할인 사교육의 코디네이터가 더 인기가 높아진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 이러한 책들이 지속적으로 나와 군중이 아닌 민중에게 계몽하는 역할을 해줘야 사회적인 개혁의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
| 극단주의에 대한 꼼꼼한 분석이 인상적인 책이었다. 사람들이 강하게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극단적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어떤 것이 극단주의라 불릴만 하며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 분석해서 구분해주는 책이다. 게다가 심리학 책을 몇 권 읽다보면 쉽게 접하게 되는 이론들(집단이론 등)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지적해준다. 이렇게 새로운 눈으로 기존의 이론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
| 극단주의에 대한 꼼꼼한 분석이 인상적인 책이었다. 사람들이 강하게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극단적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어떤 것이 극단주의라 불릴만 하며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 분석해서 구분해주는 책이다. 게다가 심리학 책을 몇 권 읽다보면 쉽게 접하게 되는 이론들(집단이론 등)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도 지적해준다. 이렇게 새로운 눈으로 기존의 이론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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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과 ‘분노의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할 책 극단주의가 무엇이고 극단적인 이유를 살펴본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더구나 사회학과 심리학을 바탕으로 극단주의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는 설명을 붙인 책이어서 서평단과 상관없이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책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 같은 기대는 벗어나지 않았다. 특히 미국 중심의 심리학 이론이 한국 사회와 어울리지 않다는 점, 그리고 미국에 어울리는 미국 심리학의 무비판적 수용으로 한국 사회는 안전과 안정을 찾는 게 더 어려워졌다는 설명은 이 책이 갖고 있는 가장 큰 가치이자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학자인 김태형 저자는 극단주의 특성을 ‘배타성’, ‘광신’, ‘강요’로 설명하고 여기에 ‘혐오’를 덧붙였다. 주목할 것은 극단주의는 우리 사회의 안정과 안전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 위협은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도 포함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갖고 바라봐야 할 요인이다. 또한 지배층이 극단주의를 부추기는 것도 관심 있게 살펴야 할 대목이다. 저자는 극단을 설명하면서 집단극단화를 제시하다. 이는 신념, 감정, 성향을 중심으로 심리적 격리, 사회적 폭포 현상, 정보의 폭포 현상, 평판의 폭포 현상 등을 ‘설명의 장(場)’으로 끌어온다. 특히 집단극단화와 인터넷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최근 정치권을 비롯해 영상(유튜브)을 ‘주장의 도구’로 활용하는 경향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다. 저자는 극단주의 예방과 없애기를 위해 ‘사회적 차원의 근본적인 대수술’을 제시했다. 그 중 정신적인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을 위해 차별, 무시 현상인 학대 현상을 막기 위해 ‘격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극단의 문제는 격차를 넘어 정신적 차원의 문제로 접근할 필요성이 크다. 이는 ‘교육’과 ‘문화’의 시선에서 접근하고 이와 잘 어울리는 방안이 필요하다. ‘배타성’, ‘광신’, ‘강요’, ‘혐오’가 극단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만큼 네 가지 현상이 일상에서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심한 경우 법에 의지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는 근본적 해결 방법으로 보기 어렵다. 저자는 인터넷이 극단을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인터넷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공감하고 동감한다. 인터넷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는 순기능 대신 역기능을 악용할 때다. 저자가 미국과 캐나다에서 발생하는 총기 사고를 예로 들었듯이, 총기 자체는 죄가 없다. 총기를 쓰는 사람이 문제이고, 총기 사용 문화가 문제다. ‘병든 사회’와 ‘건강한 사회’의 차이다. 그러기에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것, 교육과 문화를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국 사회는 판카지 미슈라의 책 제목인 『분노의 시대 : 현재의 역사』처럼 ‘분노의 시대’다. 분노해야 할 때와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를 구별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면 일상에 깊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극단으로서의 ‘배타성’, ‘광신’, ‘강요’, ‘혐오’는 더 깊고 강한 사회적 독약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김태형 선생이 쓴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분노의 시대를 고민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정보와 설명을 제공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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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하이데거)
2022년 8월 28일 18시 05분에 민주당 전당대회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재명은 77.77%라는 누적 지지율로 역대기록을 갱신하며 대표로 선출됐다. 그와 함께 일할 최고의원직에 원했던 정창래-박찬대-서영교-장경태가 모두 뽑혔다. 투표 룰 개정에 실패하여 개딸들은 이번에 투표권이 없음에도 활기차고 긍정적인 응원을 끝까지 완수했다. 나도 투표권이 없어 속상했는데 기적적으로 금요일 오후에 2차 국민여론 전화를 받았다.
팔월은 사회심리학에 푹 빠져 지내는 중이다. 이재명을 기점으로 한국 정치를 공부하면서 문학을 향한 마음은 소원해진 반면에 사회학과 심리학 쪽으로 관심이 기운다. 젊은 시절 문학보다 먼저 만났더라면 진로가 바뀌었을 것도 같다. 이 시기에 김태형의 말과 글은 내게 단비다(가을 신간 소식이 들린다). 그래도 한사람의 책을 몰아보는 게 맞나 싶을 때 살만 루슈디의 피격 사건이 터졌다. 모진 협박과 추방의 시절을 견딘 그의 끝이 테러는 아니었으면 한다.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앞서 읽었던 책들과 맥을 같이 하는 한편 현재 내가 가진 질문을 보다 정확하고 시원하게 긁어주었다. 글쓴이의 모든 논지 전개와 주장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전반적인 논거에 찬성한다. 해외 학문이나 이론을 수동적으로 흡수하는데 머물지 않고 한국적 특수성을 버무려 대안을 제시하는 방향성이 특히 좋다. 대선 직후부터 지금까지 여야 정치권을 살피며 품은 큰 물음은 다음과 같다. ‘어쩌다 우리는 저런 정부를 맞이했을까? 정말 국민 수준이 저것밖에 안되는가. 어떻게 저런 사람을 올렸을까, 나라를 말아먹어도 괜찮다는 건가 …’ 그리고 민주당 내 기득권의 닫힌 사고와 편협함에 치를 떨어야했다. ‘식물 대통령을 앞세워 의원내각제를 정말 해먹겠다는 건가?’ 알면 알수록 의심과 불안이 종잡을 수 없이 커진다. 저자 김태형은 위의 두 가지 물음에 냉철하게 답한다. 다시 한 번 한국은 미국식 정책에 영향 받는 반경 안 국가이면서 미국에서 발생하는 남북전쟁 식의 분열과 신냉전이 우리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믿었던 착각을 일깨운다. 간발의 차이로 윤석열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국민 통합과 민생에는 무심하며 엉뚱하게도 부인과 부하직원이라는 작자가 삼각대를 펼쳐 측근 비선 정치를 일삼는다. 먹통인 사고와 감정적 경직성에다가 악질 관종들이라 끔찍한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준석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이 온갖 못된 정치 사례를 악용해 짜깁기 기만-도둑정치를 버젓이 해댄다는 점이다. 들리는 말이 지난 보수 정권들의 나쁜 점을 패키지로 묶어 빠르게 해먹고 튈 거라는 전망이다. 윤석열이 보이는 ‘각자도생’과 ‘무정부’ 시장자유주의 마인드도 심히 염려되지만 무슨 왕국도 아니고 후계자로 나대는 한동훈 발 검찰공화국도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후퇴시키고 있다. 법문을 깨작거리며 자기 실속을 챙기는 법치는 본부장 리스크를 무마하며 후안무치를 시연중이다. 그들은 알고 있다. 자신을 뽑은 국민들이 자기들의 기획에 놀아나고 선동당할 광신도라는 사실을 말이다. 뼈아프게도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 속에 ‘수정자본주의’나 ‘사회민주주의’로 나가지 못하고 신자유주의 물결에 취해 박근혜,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돈의 힘’이 모든 영역을 장악하는 지배와 착취의 식민 노예 상태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깨어 있고 움직이는 시민들이 촛불 항쟁으로 민주 정권을 탈환했지만 코로나 감염병을 비롯한 여러 악재 속에 다시 보수 정권으로 돌아갔다. 말이 보수지 수구 적폐 세력으로의 귀환이다. 윤석열이 등판하자 박멸했다고 생각했던 바퀴벌레들이 핵관이라는 이름으로 재출현해 민주주의 시스템을 망가뜨려 더 비참하다. 슬프게도 그들은 법기술자 출신으로 수십억의 돈을 해쳐먹고도 무사할 뿐 아니라 국민을 멸시하고 하대하는 우월의식이 쩐다. 마치 이언 매큐언의 ‘바퀴벌레’ 속 정치인들처럼 한데 모여 나쁜 짓을 모의하고 이권을 챙겨 유유히 빠져나갈 모양새다.
기사로 접하고 공분했다시피 문 대통령의 사저를 둘러싼 극우 단체의 괴롭힘이 종결되지 않고 있다. 극우 정치세력은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며 선동하고 이용해먹는다. ‘대중 후견주의’라는 막을 쳐서 돈도 주고 법적 처벌도 받지 않게 보호하니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다. 윤석열의 행동거지와 정체된 사고가 끔찍한 가운데 가장 비열한 대목은 그의 “근친애적” 사랑관이다. 자기 패밀리와 패거리의 이익만 감싸고돌며, 기존의 언어를 ‘동물농장’ 급으로 오염시킨다. 국민, 자유, 상식, 공정, 법치가 ‘이중 잣대’의 갈라치기 속에 누더기가 되어간다. ‘저이는 한 나라의 수장인가, 아니면 아직도 대선후보로 특정 정당 소속인가’ 한심하다. 윤석열의 잘못된 정신세계도 문제지만 ‘권위주의’형 인간인 점도 걸림돌이다. 국민의 고통을 방임하고 ‘학대’하는 수준이다. 강자 앞에 굽신 거리고 굴종하며 약자 앞에 잔인하고 무자비하다. 두 번의 안팎의 경제 위기를 겪은 2010년 이후, 한국 사회는 ‘생존 불안’과 ‘존중 불안’을 극심하게 앓으며 “학대 세습 사회”(갑질 문화)로 내몰리고 있다. 연산군을 연상시키는 겁이 많은 폭군이, 타워에 올라 70여 년 수구 세력의 끝점을 찍고 있다. 일베와 극우 단체 소속 노인들은 알까. 자신들이 얼마나 요긴하게 이용당하고 있는지를. 폴란드계 영국 작가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에서는 중심부가 뚫린 사람에게 날아들어 박히는 맹신과 광신을 에둘러 경고한 바 있다. 심장이 텅빈 이들은 힘없음과 열등감을 폭력과 혐오를 양산하는 세력에 빌붙어 자신감을 얻고 쾌감을 느낀다. 한마디로 말해 뒤틀린 변태이자 이상 행위자들인 것이다. 억울함과 분노로 점철된 채 원초적인 감정적인 반응만 보인다. 저자 김태형은 이 지점에 개탄한다. 우리가 인간 본성인 것처럼 상정하는 ‘이기심과 탐욕’은 자본주의가 잉태한 제거해야 할 암덩어리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G7에 들어가고 선진국의 성숙한 민주국가라기보다는 70여 년의 극우 세력과 분할 통치와 차별 정책과 ‘돈독’ 오른 사이비 종교 집단이 판을 치는 흑마술에 걸린 병적 사회이다. 안타깝게도 이런 진단이 2019년에 집필된 책에서 이미 예고되었지만 대중은 눈감아 버렸던 것이다.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환상을 여전히 간직한 내게 그것은 허울뿐인 ‘형식적인 민주주의’라고 일침을 가하고 그것이 키운 어용 학문 심리학도 다시 살피도록 이끈다. 행동주의 심리학을 시작으로, 이후 인지-심리학이 어떤 방식으로 과학적이고 민중적인 지식 형태로 점검 없이 포고되었는지를 조명한다. 최근 인기를 끈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처럼 학문이 ‘친자본주의’와 ‘친제국주의’와 결탁해 왜곡되고 조작되는 면을 들춘다.
무엇보다 국가 바로 세우기(‘재건’)보다는 개인의 책임론과 하부조직의 처벌과 보복으로 입막음을 해왔음을 밝힌다. 민중의 개혁바람을 막는 “조작적 정의”(operational definition이라는 용어 자체도 위선적인 언어 교란에 해당하지 않나. manipulation 이라면 모를까)가 내려지고 평등한 움직임을 차단하는 “신중한 이행”(cautious shift는 역풍 운운하며 반개혁적인 엄중론을 연상시킨다)을 명분삼아 왔다. 기득권의 현상 유지를 위해 혁신과 소통은 ‘외집단’out group 취급하며 극성 팬덤 집단으로 프레임을 덧씌운다. 저자가 화두로 삼는 “집단 극단주의”group polarization 이론이 위험한 이유이자 악용되는 경우이다. 지난 반년 개딸의 등장과 함께 민주당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개혁에 나설 지도자뿐 아니라 변화를 부르짖는 지지층을 ‘악마화’하며 모욕 주는 연속적인 행태에 기겁을 했다. 소위 민주당 의원들이 당원과 당심을 배척하고 무시하며 자기들끼리의 꼼수와 술수를 부릴 뿐 아니라 그에 맞춘 워딩을 대대적으로 가스라이팅할 때 높은 벽에 부딪혔다. 그런데 그게 다 그들의 꿍꿍이이자 음흉한 시나리오다. 목소리를 크게 내어 관행에 도전하는 알 수 없는(새로운) 조짐이 두려운 그들은, 제국주의자들 마냥 타자화하고 희생양을 만들어 이간질하고 갈등을 조장해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멸칭 워터멜론과 이스트 플라이들은 22% 정도의 소수지만 민주당을 고구마 불통 밭으로 만들어 종국에는 지지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멀어지기를 바란다. 흥미로운 점이 반개혁적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할수록 기존의 성향으로 되돌아간다는 분석이다. 논리와 정보를 기반으로 접촉한다고 해서 서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득에는 감정이 더 크게 작용하는 까닭이다.
미국식 민주주의에 여전히 예속된 한국은 이제 그로부터 독립하고 자유로워질 때이다. 에리히 프롬이 그랬던가. Free from은 to도 함께 담아야 한다고. 저자의 날카로운 해석대로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심리학과 손을 맞잡고 인간을 자극에 반응하고 질질 끌려 다니는 수동적 동물로 가두려든다. 이것은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또다른 식민지 점령과 지배를 이어가도록 할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혐오를 조장해 결속과 연대를 끊는 가위질을 한다. 쪼개지고 갈라지고 분열된 개체들은 고립되어 멀리, 혹은 위를 직시하지 못하고 자멸하거나 가까운 범위 내에 폭력을 분출한다. 저자의 주장 중 좀 더 사유해볼 사안은 ‘악의 평범성’에 대한 재고에 있다. 악의 평범성은 우리 안에도 파시즘이 있다고 경고한다. 극심한 사회적 압력을 받으면 고문이나 밀고나 악행을 누구나 저지른다는 실험 결과를 수용하게 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반론을 제기한다. 작은 몇몇 실험에서 도출된 인간 본성에 대한 일반화 혹은 ‘환원주의’(축소)는 경계하는 게 맞다. 일부는 그럴 수 있으나 전체의 속성이자 팩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확률은 언제나 예외와 이변과 변측을 끼고 있을 수밖에 없다.
서두에 말했듯이 민주당의 새 지도부가 꾸려졌다. 당대표와 최고위원들이 개혁과 소통하는 민주당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이재명이 외치는 진일보하는 새 정치를 내딛도록 국민이 집단지성으로 뭉쳐 더욱 지지하고 응원해주어야 한다. 대선 이후 이재명을 공부하고 탐구하면서, 흔히 민주당과 레거시 미디어의 스피커에서 ‘반향실’처럼 틀어대는 말들이, 조지 오웰의 ‘1984’ 이상으로 편향된 왜곡이자 세뇌로 정신세계의 구속과 억압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으로, 예고된 적 없던 형태의 전체주의가 우리를 덮칠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어떻게든 깨어 연대하는 풀뿌리 민주주의 정신과 목소리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나는 한국의 시민사회의 능력을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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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열린 태도는 내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광신은 흔히 완전주의 혹은 절대주의, 즉 자신의 무오류성 이것은 병(리학)적 믿음이다 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부족함을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의 완전무결함을 절대적으로 미친 듯이 붙들고 있어야만 비로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35-36)
극단주의는 ‘광신’에 사로잡혀 세상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자신의 믿음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41)
폭력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으로 정의하면서 광신이나 광신자는 ‘정치적 합리성’이라는 틀 바깥에 위치해 있다고 강조했다. (61)
반면에(개방적인 정조와 달리)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일신의 향락만을 중시했던 자신감 없는 왕인 연산군은 당연히 백성의 배신을 두려워했고 그 결과 공포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76)
합리적인 의심이나 비판이 없는 믿음은 곧 맹신이고 광신이다. 따라서 그것이 종교든 아니든 간에 의심이나 비판이 배제된 믿음은 극단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종교도 다른 모든 지식들처럼 시대에 맞게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야 한다. (78-79)
따라서 집단 토론을 통해 극단화되는 것은 모험적인 성향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존 성향 혹은 초기 성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94)
소집단 안에서 나이, 교육, 인종, 종교, 민족 등 같은 인구학적 특징끼리 뭉쳐서 스스로를 격리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99)
범위가 매우 협소한 (병적) 사랑을 의미하는 근친애적 사랑 미국 심리학의 용어로 설명하면 내집단만 사랑하고 외집단을 배척하는 사랑 이란 간단히 말해서 자기 가족이나 집단만 사랑하고 나머지는 배척하는 미성숙한 사랑, 원시적인 사랑, 병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100)
미국에는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을 대변하는 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 양당 체제, 나아가 양당이 참여하는 위원회는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진 자들 사이의 동질성이나 획일성을 증폭시키는 장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란 단지 형식적인 민주주의 제도일 뿐 내용적으로나 본질적으로는 99퍼센트를 배제한 1퍼센트들끼리의 잔치party다. 따라서 집단 극단화 이론에 의하면 미국식 민주주의야말로 정치권의 다양성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미국의 정치권을 극단화시키는 주범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123)
인긴 심리의 3대 구성 요소인 동기, 감정이 지식을 좌우하는 것이 더 본질적이고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중요한 주제 혹은 삶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들이란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동기, 감정 등이 강하게 얽혀 있는 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138; 140)
사람은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공동의 역사적 경험 그리고 각자의 고유한 개인사를 통해서 형성된 복잡한 동기와 감정, 지식에 기초해 주어지는 정보를 능동적, 비판적으로 처리하는 존재다 (142)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과 반대되는 의견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들이 있어도 무시해 버린다. 중대한 문제일수록 기존에 갖고 있는 애착, 두려움, 판단, 선호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과 배치되는 정보가 아무리 많아도 기존 입장에 대한 확신은 그대로 유지된다. (144-145)
다시 말해 지배층은 자극, 보상과 처벌, 정보를 활용해 민중을 조종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1퍼센트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는 부정의한 자기들만의 왕국이 영원토록 유지될 수 있다. (149)
고전적 행동주의에서 자극을 통해 민중을 조종하는 자는 지배층과 왓슨이고 민중은 조종당하는 자다. 신행동주의에서 보상과 처벌을 통해 민중을 조종하는 자는 지배층과 스키너고 민중은 조종당하는 자다. 인지-행동주의에서 정보를 통해 민중을 조종하는 자는 지배층과 선스타인이고 민중은 조종당하는 자다. (150)
그들이 정의로운 민중 항쟁에 참여했던 민중과 테러리즘 집단들을 극단주의라는 범주로 한꺼번에 묶는 의도는 명확하다. 그것은 민중 항쟁을 혐오하고 반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고취함으로써 민중의 저항 의지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다. 즉 서구의 지배층과 어용 지식인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극단주의의 근절이 아니라 극단주의를 이용해서 민중을 영구 지배하는 것이다. (170)
개개인은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을 수 있으나 그들이 군중이나 민중과 같은 집단에 소속되면 미쳐 버려 광신도가 된다는 전형적인 민중 혐오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개인들이 집단에 소속되지 않고 홀로 고립되어 살면 살수록 이익을 보는 집단은 민중 항쟁을 두려워하는 지배층뿐이다. (190)
인간은 환경 요인에 무기력하게 끌려 다니는 존재가 아니다. (194)
정부가 편향적인 정보를 제공하거나 역사교육을 하면 민중은 그대로 세뇌당하는 멍청이라는 민중 혐오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다. (200)
미국 심리학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객관적인 자료에 기초하는 중립적인 연구를 하는 것처럼 선전하고 있지만, 그들이야말로 자본가 계급과 제국주의의 편에 확고히 서 있는 당파성의 화신이다. (204)
열등감은 흔히 우월의 욕망을 낳는다. (216)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지배층이 아니라 자기보다 덜 억울한 이웃이나 집단을 향해 분출한다. 이것은 절대강자인 지배층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두려워서이기도 하고, 사회의식이 낮아서이기도 하다. (236)
한국 사회의 경우 극단주의를 묵인하거나 부추기는 사회적 조건이 거의 성숙(포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분노가 위쪽에 있는 강자를 향하는 것은 위험하므로 그것은 대체로 아래쪽에 있는 약자를 향하기 마련이다. (243) |
‘넌 왜 이렇게 극단적이니?’ ‘저들은 너무 극단적이야’ 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극단적’이라는 단어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랐다. 단어에서 풍기는 느낌적인 느낌으로만 알고 있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극과 극인 생각들을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분야가 정치다. 언론을 통해 뉴스를 접하다 보면, 정말 되묻고 싶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극단적이냐고’. 어쩔 수 없이 보수와 진보, 중도가 있다지만 너무 지나친 보수 성향을 보고 있자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진보나 중도 또한 평소엔 잘 모르지만, 어떨 땐 지나치다고 느낄 때도 있다. 그래서 제목을 봤을 때 나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을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책을 덮은 지금, 어느 정도 궁금증은 해소 되었지만, 답답함은 여전하다.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아서.
읽으면 읽을수록 머리가 무거워진다. 이해가 되다가도 잘 이해가 되지 않기도 했기 때문이다. 심리학도 낯선데 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보기는 더 낯설고 어렵다. 그래도 다행인건, 국내 저자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외국 저자가 쓴 내용이라면 저자가 자주 접했을 외국 사례들에 집중되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려운 내용의 이해가 더 난해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저자는 심리학과 관련된 대중서를 많이 집필했던 전공자였고, 적절한 예시를 보여줌으로써 흔들리는 나의 멘탈을 잡아주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예시는 71쪽에 나왔던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부분이었다. 뜻밖에 이슬람과 우리의 역사에 공통 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럴 듯했다. 비슷한 이유로 유사한 감정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갖고 있던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갖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이 다소 흐려짐을 느꼈다.
내내 불편하게 했던 감정은 답답함과 분노이다. 미국과 서구 강대국들에 의해 만들어진 극단주의라는 현상이 전세계에 퍼질 수밖에 없었던 종교적, 심리적, 정치적 등의 다양한 이유들을 보자니 분노가 끓었다. 나쁘고 위험할 수 있는 이런 현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심지어 심화되고 있음에 답답했다. 우리나라만 봐도,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지만 멀리서 보면 그렇지도 않다. 말만 보수, 진보, 중도라고 할뿐 그들이 하고 있는 행태는 그저 극단주의적인 말과 행동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그내들의 집단에서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사람들과의 교류만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른 쪽을 보는 척만 할뿐 사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10년 넘게 극우적인 정치세력이 집권을 하다가 이제 겨우 민주적인 정치를 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원하는 만큼의 결과는 보기 힘들 것 같다. 극단주의에 흠뻑 젖어 있는 그들이 정치를 하는 한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생각조차 너무 극단적인걸까?
특히, 나에게 공감을 줬던 부분을 발췌해 본다. ▼▼▼
《공감구절》
배타성의 예시로 '이슬람 그리고 서구의 비무슬림'에 대해 보여 준다. 9.11테러 사건 이후에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선포했던 말이다.
그의 말은 “중간 지대는 없다. 당신은 우리 편이거나 아니면 적이다”라는 식의 전형적인 흑백 논리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극단주의 특징을 '배타성, 광신, 강요, 그리고 혐오'라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얘기하기도 한다.
합리적인 의심이나 비판이 없는 믿음은 곧 맹신이고 광신이다. 따라서 그것이 종교든 아니든 간에 의심이나 비판이 배제된 믿음은 극단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종교, 특히 일신교는 의심이나 비판을 달가워하지 않거나 허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특별히 높다는 저에서 다른 것들보다 광신, 나아가 극단주의로 연결될 위험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집단에 남는 서로를 가장 잘 맞는 사람이나 친한 친구 또는 가족 못지않게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는 것. 현실이 아닌 온라인 SNS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다. '잘 맞는'사람들하고만. 맞지 않으면 손쉽게 끊을 수도 있고, 새로운 사람과도 쉽게 이어질 수 있다. 어떤 관계든 한 쪽으로만 치우침은 위험하다.
극단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지 못한 역사적인 장면에서도 극단주의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놀랐다. 아래 내용은 놀라움과 동시에 무서움을 느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극단주의를 나타내는 것 같아서.
요즘 벌어지고 있는 사건 사고들의 경향이 이러하다. 대상이 있는 것도 무섭지만, 특정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향한다는 사실이 더 놀랍고 소름 끼친다.
이 책에는 다양한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있었던 주요 장면들과 외국의 비슷한 사례들을 함께 보여 주니 비교가 쉽다. 또하나, 역사는 일정한 주기로 반복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소름끼칠정도로. 하지만 이제는 나쁜 역사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극단주의의 특징을 설명해 주고, 이제 극단주의의 원인을 알려 준다. 안전에 대한 위협, 권위주의적 성격, 혐오와 분노, 부추기는 지배층. 극단주의의 특징과 이어지는 부분이 많다. 원인으로 인해 나타나는 특징일테니까.
이 단어가 소름끼치게 했다. '학대 위계 사회' .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SKY캐슬'을 봐도 우리 현실을 잘 알 수 있다. 소위 엘리트라는 부모들이 자식들을 자신들보다 성공시키기 위해 모인 집단. 서로의 속내는 숨긴채 자기 자식들이 1등이 되게 하기 위해 애쓰는 부모들의 모습과 그 속에서 자신의 생각 따윈 존중받지 못한 체 살아가는 학생들이 있다. 100의 힘을 가진 사람은 90의 힘을 가진 사람을 학대하는, 동급인 사람들은 동급인 사람들끼리 학대하는 이런 사회라니. 알면 알수록 끔찍하다. 한편 지금과 같은 시절에 학생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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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어느 휴일. 나는 광화문에 간 적이 있다. 한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광화문에는 웬일인지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신기했다. 그리고 어쩐지 시위대에서 나오는 외침들은 이전까지 내가 집회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상당한 고음의 목소리들이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나는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집회는 내가 이전까지 봐왔던 집회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앞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여러 명의 여성들이 서 있었다. 모두 올레드 입을 입고 말이다. 내가 근처에 다가가자 나의 머리카락과 내 가슴을 훑더니 그냥 못본채를 했다. 집회가 벌어지는 곳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가도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붉은 옷은 여성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는 최신 유행하는(?) 남성 혐오에 관한 구호들이 마구마구 나왔고, “문재인은 재기해!”와 같은 구호 또한 나왔다.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회화혁 시위가 광화문으로 옮겨온 것 이었다. 솔직히 놀랐다. 같은 여자로서 나는 그들에게 동조할 수 없었다. 그들이 집회에서 내뱉는 구호들 또한 그랬다. 나 또한 남성중심주의 사회에 살아가고 차별은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런 극단적인 혐오와 발언들은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국정농단 사태 당시 광화문 집회에서 시위 관계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몇몇 노인들이 단상에서 “박근혜 미친년”이라는 말 한마디조차 제한했던 기억이 내 머릿속에는 선하다. 하지만 이 시위에는 그러한 것들이 없었다. 남성들이라면 오로지 나쁜 존재들이었고, 그들은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그들이 하는 일들은 모두 거짓말처럼 선동을 하고 있었다. 극단주의 여성단체들의 시위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나를 놀라케 한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보통 이러한 현상을 보면 사회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싶고 호기심 때문에 저들의 이야기와 생각들을 더 이해하고 싶은 것이 나였지만, 나는 그 집회에서 순간 “내가 누군가를 알아가는데 해야 하는 노력을 멈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했던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방향은 다르지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널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남성성을 이해하는데 노력을 멈추고 그저 도발적이고 극단적인 발언만 하는 존재들이었고, 나는 반대로 그들이 왜 이 뙤양볕이서 목소리를 내는지 이해를 멈추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집회장을 나오고 나는 다시 돌아왔다. 다시 그들에 대해서 이해해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 여성들이 왜 이렇게 극단화 됐는지,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 일어나는 반동 또한 왜 이렇게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파편적인 신문기사들. 사건의 본질이 아닌 여성들이 광화문에서 시위를 했고 극단적인 발언이 나왔다는 기사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사건의 본질을 다루는 기사들은 거의 없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을 중심으로 극단주의 현상을 봐야 하는지 알지 못해 상당한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우연히 나는 얼마 전 을유문화사에서 얻은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라는 책을 받았다. 이 책은 어쩌면 우리 사회에 넘쳐나고 있는 혹은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극단주의의 원인에 대해서 알려주는 좋은 개론서가 아닐까 싶다.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이 책은 현재 유행하고 있는 극단주의를 이해하는데 다양하면서도 정확한 심리학적 도구를 주는 책이다. 사회과학 책을 익으면서 그런 책들을 종종 읽은 적이 있다. 가령 못을 막아야 하는데 도구로 뻰찌를 주는 것처럼 부적절한 도구라 사회 현상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극단주의 문제를 해석하고 접근하는 데에 있어 설득력을 만들어내는 어의없는 도구를 주는 것이 아닌, 충분히 설득력 있는 도구를 주고 있다. 솔직히 첫 장을 읽을 때부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 저자의 말이 확실히 맞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회심리학이라는 학문의 장점은 한 사회 문제에 대하여 시민들 대부분이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감정 상태를 알려 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너무 강조되고 확장되어 남용되면,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경우 또한 있다.) 책에서는 극단주의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에너지를 두려움 혹은 공포로 보았다.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봤을 때에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고 난민 공포를 조장하는 (제주도 난민이 입국했을 대 이를 보도 했던 뉴스 매체들이나 가짜뉴스들 또한 있었지만) 유럽의 극우 정당들도 비슷한 전략을 취했다. 시민들의 상식! 안전과 관련된 상식이 최대한 보수적으로 작동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책에서도 문제를 제기했던 부분에 대한 예시들을 통해 자세히 이야기 하고 있다. 9장을 한번 보라!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예시들이 하나하나 제시되어 있다. 물론, 나는 저자가 극단주의의 근본에 공포화 두려움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100% 동의 하지는 않는다. 다른 무언가들도 있다. 가령, 지난 독일 대선에서 극우 정달들이 압승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난민들이 독일 사람들이 낸 세금으로 무전취식을 한다는 선전을 해서 성공한 바 있다. 이른마 무임승자 프레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무임승차 프레임은 일베를 통해 강화되고 구체화되며 확산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성대립은 일베를 중심으로 남성들이 여성들에 대한 혐오에 무임승차 프레임을 제기하고 있고, 반대로 워마드를 중심으로 한 여성들은 남성들에 대해서 공포 프레임을 제시하고 있다. 둘 다 현재까지는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책은 대안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도 나름 구체적이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나는 하게 됐다. 책의 마지막 장. 즉 ‘10장: 극단주의, 어떻게 예방하고 없앨 것인가’에 대하여 사회내에 공동적 목표가 필요하며,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혐오의 원인이 되는 감정들만 부추긴다고 이야기 했다. 이 말에 100% 동의 하지만, 솔직히 이 방안이 가능할까 싶다. 무슨 수로 현재와 같은 파편화된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문제를 끌어낸다는 말인가. 과연 여성만을 강력하게 사랑하는 남성 이성애자가 코 앞에 있는 어떤 게이와 연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가능한 것일까. 전쟁 혹은 스포츠와 같은 강한 감정을 동반해야 하는 일. 즉 서로간의 차이를 잊을 수밖에 없는 일이 과연 현재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식으로 강력하게 대중 동원이 되는 것이 좋은 일일까. 이 점은 이 책이 풀지 못했고, 앞으로 극단주의 문제와 관련하여 내가 계속해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다. |